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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너머 부활로 (창세기 22장 1-12절)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사건 - 아브라함 신앙의 절정을 이루는 사건  

(창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사건을 두고서야 비로서 아브라함의 본심, 중심, 진실을 알았다! 


아브라함을 처음에 부르실 때에 하신 약속- 네가 복이 되리라. 

복의 내용 : 땅과 자손: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의 기본 전제- 자손, 자녀


그 다음부터의 믿음의 여정 -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아브라함의 시행착오와 하나님의 역사 

15장 - 엘리에셀 

1절) 나는 네 방패요 지극히 큰 너의 상급이니이다. (나는 보호자요 공급자이다) 

2절: 주 여호와여 내게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 다른 것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자식이 없습니다. 

3절: 주께서 나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4절: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 예수가 하나님의 상속자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거듭났기 때문이다. 


16장 - 하갈 

  • "네 몸에서 날 자" 를 이루기 위한 인간적인 꼼 수 
  •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 네 몸은 아브라함 하나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을 말한다. 
  • 결국 하갈로 말미암아 역사 상 가장 길고 깊은 갈등의 원인 제공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있는 사람: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 

악인: 자기 꾀로 살아가는 자 

아브라함 : 자기 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는 자. 


17장 - 할례를 행하며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며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남. 

21장 - 이삭의 출생,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함 

팔 일 - 중요한 의미를 지닌 상직적 표현. 안식 후 첫날 - 부활의 날.  새 역사의 시작의 날 


그런데 22장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약속대로 주셨던, 은혜로 주셨던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 구절에서 하나님에게 실망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드러내놓고 실망하던 내면적으로 갈등하면서 여러가지 이유를 찾는다. 아얘 주질 말지 주었다 빼았는 것이 어디있느냐 하는 생각을 갖는다. 


전통적 해석의 예 


1.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순수한 마음을 위한 테스트이다. 어떠한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는가? 

너무 가혹한 테스트가 아닌가? 그는 거짓으로 테스트하시는 분이 아니지 않는가? 


2. 하나님의 목적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과의 단절 

  • 당시의 모든 이방 종교의 의식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 인육 제사 

-> 자기 자식을 바치는 것을 신에 대한 가장 큰 헌신이요, 마음의 표시로서 생각

그래서 이삭을 바치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의 생각이라는 해석

하나님은 그러한 당시 종교적 그릇된 의식을 말씀으로 막으신 것이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 도벳에서 성행하던 인육 제사에 분노하시는 하나님!  아벨에서부터 시작되어 예수 그리스도에서 완성된 어린양의 제사를 아브라함을 통해 확립하는 것이다. 


3. 아브라함 동시대의 사람이라 여겨지던 욥을 통해 아브라함의 시험을 해석 

(욥 1:21)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99세때 아브라함의 모든 능력이 끊어진 후에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삭을 받았다. 은혜로 받았다는 것은 내 의가 하나도 없이 하나님이 주셨다. 그렇다면 다시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그것을 내 것이라고 말하면서 거절할 이유가 되는가? 

  • 우리의 신앙: 은혜로 받았다고 하면서 내 것인양 허세를 부린다. 다시 달라고 하시면 내것이니까 안된다고 하고, 이미 준 것을 왜 다시 가져가느냐고 한탄. 모든 만물, 자식도 포함...


  • 청지기: 인간에게 맡기신 것, 위임하신 것, 내 몸마져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내 것, 내 소유는 없다. 단지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은 나에게 맡기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게 잘 관리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달라하면 내 것이라 안 된다고 한다. 감정이 상한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곰곰이 생각하면 하나님이 옳지만 내 감정은 안 된다고 한다. 


여기에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과 복의 존재로서의 신앙인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이 의미를 알기 위해서 모리아산에서 이루어진 또 다른 사건들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 다윗 

다윗의 범죄: 하나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한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백성들의 수를 계수한 것... 


역대상 21장 :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의지함...

-> 백성의 계수는 오직 전쟁 때에, 하나님이 명하실 때에만 행함. 

다윗의 계수- 자신이 가진 것이 얼마나 되나를 계수 (자기 의와 자기 과시

평생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던 다윗이 노년에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기 시작. 

하나님께 의지하기 보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의지하게 됨. 다시 말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가지고 자신의 것으로 삼고 그것을 의지하게 됨. 

-> 하나님은 다윗과 그 나라에 온역을 내리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순간에 7만 명이 죽음을 맞이함.. 


실수도 하지만 돌이킬 수 있는 믿음...

(대상 21:18)여호와의 사자가 갓을 명하여 다윗에게 이르시기를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대상 21:22)다윗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이 타작하는 곳을 내게 붙이라 너는 상당한 값으로 붙이라 내가 여호와를 위하여 여기 한 단을 쌓으리니 그리하면 온역이 백성 중에서 그치리라

(대상 21:23)오르난이 다윗에게 고하되 왕은 취하소서 내 주 왕의 좋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소서 보소서 내가 이것들을 드리나이다 소들은 번제물로, 곡식 떠는 기계는 화목으로, 밀은 소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다 드리나이다

(대상 21:24)다윗 왕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결단코 상당한 값으로 사리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려고 네 물건을 취하지 아니하겠고 값 없이는 번제를 드리지도 아니하리라 하고

(대상 21:26)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하는 교만으로 인해 죄를 지었으나 죄로부터 회개하고 다시금 믿음을 고백한 장소가 바로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 피의 댓가를 지불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간 장소 


(대하 3:1)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그리고 이 곳에 세워진 것이 교회이다. 

교회는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온전히 이루는 곳이다. 

하나님 처럼 되고자 하는 죄,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이라 여기는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곳이 교회이다. 


3. 예수 그리스도 

최초의 성전이 솔로몬에 의해 모리아산 위에 건축되었다. 그 곳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예배의 장소가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고 헤롯성전이 다시 지어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을 찾아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러 찾아왔다. 


[요 2:15-16]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하나님께 와서 죄용서 받고 은혜를 체험하며 깊이 하나님을 예배하던 예배의 장소가 예수의 때에 은혜의 장소를 돈 바꾸는 사람들이 넘치는 장소로 되어 버렸다. 아버지의 집이 장사하는 집이 되어 버렸다. 


그렇면서 예수께서는 그 성전의 의미, 예배의 참 의미를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요 2:1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1)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하신 이 말씀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신다. 


왜 십자가와 부활이 필요했는가? 

성전이 장사하는 곳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장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deal 한다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믿을테니 복달라는 것이고, 헌금 낼 테니 병고쳐 달라는 것이다. 

거기엔 은혜도 없고, 하나님의 전능하심도 없다. 

자기의 행위로 인해 댓가를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장사하는 믿음이다. 


장사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내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받은 것은 이제 내 것이 된다. 더 이상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빼앗아 가는 것은 악한 왕이다. 하나님이라 할 지라도 용납할 수 없다. 

탕자는 마치 자기가 당당한 권리가 있는 것 처럼 "내게 분깃을 달라"고 요구한다. 

내가 그 동안 아버지를 위해 살았으니 내게 분깃을 달라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를 향해 하나는 왼편에 오른편에 자리를 달라고 요구한다.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 챙겨달라는 것이다. 

거기엔 은혜가 없고 오직 댓가만 있다. 

모두가 장사하는 신앙이다. 


다시 욥과 아브라함으로 돌아가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는 하나님은 절대로 불합리한 분이 아니다. 

그 분께는 이삭에 대한 당연한 권리가 있다. 이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복의 통로로 삼으시기 위해 맡기신 것이다. 이삭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 (창 22: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은 정말 하나님이 이삭 대신에 어린양을 준비할 것을 알았을까? 정말 알았다면 이삭을 죽이고자 한 것은 시늉이지 실재가 아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도 테스트를 위한 거짓말이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도 어린양이 있을 것을 알면서 행하는 거짓행세이다. 


그러면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는 이삭에게 매달리지 않았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것 자체가 복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삭이 복이 아니라 자신이 복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아식이 없어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한 그는 복이고 복되게 살 것이고 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이삭을 바쳐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또 다른 이삭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의 고백이다. 

어떻게 부모가 되가지고 그럴 수 있는가라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보다 더 완전한 아버지시다.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의 이끄심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너머 이스라엘 가운데 역사하시는 자신의 시간을 넘은 하나님의 계획을 들었고 그 하나님을 인정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곳으로, 가장 좋은 분께 맡기는 것이다. 


복 때문에 넘어지는 신앙인들...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인해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사람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

지혜를 얻은 솔로몬의 타락

로마의 공인을 받은 교회의 타락 

세계 유래없는 축복은 받은 한국 교회의 타락... 


자식의 대학 진학, 취업, 결혼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 

그런데 그 자식이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결혼하자 급격히 신앙이 무너져 버린....신앙의 목적을 잃고 방향도 잃고...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던 아내..그런데 남편이 구원받자 그 남편이 하나님이 되어 신앙의 자존감을 잃어버린 아내... 


(창 22:12)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제야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나타낸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 목적이 아니라 시작이 된다

이삭이 신앙의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오르난의 타작마당의 다윗의 신앙 여정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성전의 시작이 되고, 예수의 십자가는 부활의 시작이 된다. 


내가 복이 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로 받는 어떤 복도 내 신앙여정의 끝이 될 수 없다는 고백이다. 

내가 하나님께로 받는 어떤 복도 내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시작이요, 난 그 부활의 신앙을 위해 끊임없이 옛 복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 때문에 넘어지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복을 장사하고자 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통해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부활의 신앙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Posted by 소리벼리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애굽기 20장 12절) 


에덴 동산에서 주셨던 한가지 계명-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열가지 계명으로 이어집니다. 

계명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 삶에 다시금 하나님의 질서를 부여하시는 것이요, 삶의 목적과 방향을 주시는 사건입니다. 


  • 잘 알다시피 십계명은 크게 하나님께 대한 계명과 사람에 대한 계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 일부터 사계명 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계명이라면 오계명부터 십계명은 사람들 사이의 계명인데 사람들 사이의 계명 중 가장 첫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인간 관계에 있어서의 가장 첫 계명으로 삼았습니다. 


  • 레위기 19장은 이른바 거룩법이라고 일컬어지는 레위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본문입니다. 


(레 19:2)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 19: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그 거룩한 삶의 방법이 나오는 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즉 부모 공경이 곧 거룩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과는 달리 레위기 19장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되어 있다. '공경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킵베드'는 가볍게 여기지 않는 '존경'을 의미한다. 그에 비하여 '경외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레'는 '두려워하다'는 뜻으로서 주로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동사이다. 그런데 이 단어'야레'를 거의 유일하게 부모에게도 적용시켜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듯 부모를 두려워하듯 받들라는 것입니다. 


구약 뿐만 아닙니다. 

  • 바울은 에베소서 6장 2-3절에서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라고 까지 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모든 인간관계에서의 약속있는 첫 계명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앞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다루면서 피차 복종하며 사랑할 것 (평등의 관계) 을 말하는데 부모와 자식 간에 있어서는 먼저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다"하신 다음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다 (수직적 관계)라고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부모를 경외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연장선(또 다른 표현)이요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점인 동시에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요

땅의 모든 복의 약속있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는 이른바 목회서신입니다. 디모에게 선배 목회자로서 목회의 원칙과 철학을 전수하는 편지가 디모데서입니다. 

거기에서도 교회 안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 [딤전 5:1-4]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어른들에게는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어머니에게 하듯 하라... 편하게 막대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구약의 말씀에 연결하여 보면 공경하고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3-4절은 참과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는 이 과부들에 대한 처우로 인한 갈등이 많았습니다. 

물론 초대교회는 핍박으로 인해 남편이 순교당한 과부들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러한 과부들은 교회 외에는 맡아줄 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 과부는 단순히 도움을 받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과부가 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결혼을 하기 보다 하나님께 헌신하여 일생을 교회에 헌신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가부장제적인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리더십이나 역할이 훨씬 자유롭게 부과되었던 교회에서는 남편을 둔 아내보다 과부들에게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일들이 맡겨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전도사와 같은 기도하고 심방하는 일들이 과부들에게 맡겨지면서 초대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에서 과부들은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혹은 사회적인 배려와 관심의 중심이었던 동시에 교회 사역에 있어서는 활발한 리더들이요, 후원자들이요, 봉사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부들에 대한 환대와 리더십이 굳어 지면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과부들이 몰려 들어 더이상 교회가 과부들을 감당하는데에 무리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핍박은 심해져서 큰 교회가 작은 여러교회로 전파되기 시작되면서 그만큼 재정도 약화되었는데 과부들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진 것입니다. 


거기다가 새롭게 들어온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구제가 너무 히브리파, 즉 이스라엘 사람들 위주로 가고 있다고 불평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과부에 대한 구제와 그로 인한 불평 불만이 사도들의 복음전파에 방해가 될 정도였기 때문에 사도들은 일곱집사를 세워 이 일을 전담하게 합니다. 

이렇게 할 정도로 과부들의 문제는 초대 교회의 교회의 큰 중심문제 중의 하나였던 것이지요. 


디모데에게 전하는 목회서신에 있어서도 바울은 이 과부들에 대한 존대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적으로 존대하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존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는 3절에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고 말합니다. 

아니 과부면 다 과부지 참 과부가 있고 거짓 과부가 있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참 과부는 "who are really in need", 즉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과부들을 인정하고 존대해 주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정말로 도움이 필요로 하지 않는 과부가 있다는 것이지요. 도움이 필요로 하지 않는 과부가 누구이겠습니까? 

첫째는 육십이 넘은 자- 왜? 육십이 안된 자들은 스스로 일할 수 있는 나이였기 때문에... 

둘째는 자녀나 손녀가 버젓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에 와서 또 도움을 청하는 자

셋째, 행실이 바르지 못한 자

이들은 참 과부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과부는 의지할 남편을 잃은 자입니다. 이제 기댈 곳이 자녀 밖에 없습니다. 

무엇하나 자녀 외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자녀를 위해 다 희생하다가 가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자가 바로 과부입니다. 


그런자들을 존대하라. 효를 행하라. 이제 보답하라. 

그러면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무슨 소리입니까? 참 예배라는 것입니다. 


이제 나를 위해 희생하다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생각의 차이도, 지식의 차이도, 힘의 차이도 날 때에 

그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분들의 삶, 전통, 역사들을 들으면서 함께 나눌 때에 

그것이 참 예배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막 7: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에게 효를 행해야 하는 사람들이 효를 행하지는 않고 하나님 앞에서 ‘고르반’을 외치면서 자신의 불효를 합리화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러한 잘못된 경건을 외치는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 부모공경에 실패한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어릴적은 부모가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녀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효라는 것이 실제적으로 필요있지 못합니다. 

정작 효가 정작 필요한 때가 언제입니까? 

자녀가 나이가 들어서 부모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많이 강해 졌을 때에 정작 부모를 경외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행하실 때 열두 제자를 비롯한 수많은 무리가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는 이스라엘 전체가 떠들썩 할 정도로 온 무리가 진동을 했습니다. 

그들이 왜 주님을 따랐습니까? 

자기한테 주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면 한 자리 할 것 같고 성공할 것 같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얻을 것 같기에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주님이 무기력하게 달리시고 더 이상 그 분이 자기에게 필요없다고 느끼니까 제자들 모두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주님과 함께 했던 자들은 누구입니까? 

구레네 시몬 (맡겨진 책임을 다한 자, 억지로 지워진 무거운 짐을 진자), 아리마대 요셉 (세상적인 욕심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로 작심한 자), 그리고 여인들...(사랑하기에, 다른 이유 없이...) 

진짜 신앙은 어느 때 나타나는가? 

아무 힘 없는 과부를 공경하는 것처럼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볼 때에 참 믿음, 참 경건, 참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 신구약의 말씀을 통해서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에게 효를 행하게 하라는 말씀을 계명으로 주신 것은 이것이 저절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육해야 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효라는 것이 우러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식을 끝없이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이 부모로서의 가장 큰 책임이고 마땅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자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팽귄, 비둘기, 수많은 동물들.....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생의 모든 것을 바치는...) 

그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체의 특성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궂이 말하지 않아도 내 자녀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아니 내 몸이 깨어져도 자식에겐 더 좋은 것 주고 싶어합니다.  

물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은 정말 짐승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동물에게서 찾을 수 없는 것-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받고, 훈련받고, 의지적으로 노력하는 인간들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윗 세대, 우리 세대가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식에게 베풀 줄은 알았지만 공경하도록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저 부모보다 잘 나도록, 밖에 나가서도 당당할 수 있도록 부모가 희생할 줄은 알았어도 부모를 공경하게끔 가르치는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부모에게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남들보다 못해주면 비난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녀가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모가 교육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효를 행하게 하라고 구태여 강조해서 말한 것은 그렇지 않으면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큰 가정 입니다. 작은 가정 하나 하나가 세워지면서 교회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가정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제도는 가정과 교회입니다. 성경은 가정을 교회의 연장선으로 봅니다. 

그 가정의 질서가 곧 부모공경에서 시작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 사랑도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내하면 자기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자기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위기가 오면 교회에도 반드시 위기가 옵니다. 

그런데 교회의 위기는 다들 인식하는데 교회가, 성도가 가정의 위기가 곧 신앙의 위기, 교회의 위기라는 것을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왜 교회에서 아이들이 비어 갑니까? 왜 노인들은 많은데 자녀들은 사라집니까? 

자녀들을 사랑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해 주었는데 정작 부모가 힘이 없어지니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다 떠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가는 제자들처럼 평생 자녀들을 위해 희생했던 부모들을 교회에, 요양원에 맡기고 자녀들은 세상으로,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 부모의 책임입니다. 


유대인들은 역사상 가장 국가 없이 그 정체성을 유지했던 민족입니다. 다윗 이후로 거의 3000년 넘는 역사동안 이스라엘이 국가의 체계를 유지했던 기간은 500년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들이 신앙을 유지했던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애써 자녀들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이미 모든 생명체에게 주신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자녀들을 훈계하라. 가르쳐라. 책망하라. 효를 행하게 하라. 부모를 공경하라.

그것이 이 땅에서 잘되고 오래사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정말 자녀를 사랑하는 것- 부모를 공경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치는 것. 그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복된 자 (창세기 13장 8-18절) 


창세기 - 성경이 다 하나님의 계시이고 읽어도 읽어도 마르지 않는 지혜와 샘을 공급해 주지만 창세기는 우주 만물의 시작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의 가장 근본과 시작을 다루고 있다. 읽어도 읽어도 또 다른 은혜와 지혜를 준다. 

지난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닿기 전의 세상을 "혼돈과 공허, 흑암이 깊음"이라는 말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에 하나님의 손길이 말씀으로 임했을 때에 일어나게 되는 일이 혼돈하고 공허하여 흑암이 깊었던 삶이 "분리와 가름"을 통해 질서가 생기고 그 질서 안에 만물이 거함으로 안식하게 되었다고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내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엉망진창이어서 무질서 하고 혼탁하던 내 인생, 일을 해도 열매가 없고, 잠을 자도 쉴 수 없었던 인생에 질서가 생기고 목적이 생기고 방향이 주어지면서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되는 곳,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게 되는 것- 그것이 안식이고 평안이라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거꾸로 사탄이 하는 일은 그럼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다시 무너뜨려 혼돈과 공허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거짓과 유혹으로 거짓 평안과 안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흔히들 인류 평화를 이야기 할 때마다,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을 할 때마다 부르는 노래  비틀즈의 "Imagine" 

내가 학창시절 좋아했고 많이 불렀던 노래 

그 가사 

Imagine there's no heaven, no hell below us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Imagine there's no country, Nothing to kill or die for... (국가가 없다면 죽고 죽이는 것도 없을 텐데...) 

국가가 왜 생겼나. 사람들을 보호하기위해 만들어진 것 


그런데 그 다음 가사  And no religion too... (종교 때문에 죽고 죽이는 일이 빈번... ) 사실인 듯 사실 아닌듯 

'타겟은 반전 같지만 천국과 지옥을 말하는 종교를 없애자는 것 

그러면 형제애로 가득해서 모든 것을 Sharing 할 수 있는 미래가 올 것 이라는 것.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사탄과의 거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보시기에 좋았더라였다입니다.   

영어로는 "It was good" 입니다.  

처음 시작부터 세상은,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인간은 선한 존재, 다시 말하면 날 때 부터 복 받은 존재였습니다.  


성경에서 복을 대표하는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에덴"이라는 뜻은 행복과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들이 행복을 잃어버린 이유는 선악과 때문이었습니다. 


선악과는 지난 시간에 나누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에덴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되리라는 말로 하와를 유혹합니다. 

존레논이 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상상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먹을 너의 모습,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난 모습, 하나님 처럼 될 때의 모습.... 

그 유혹을 받자 에덴에 있는 모든 풍요로움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의 눈이, 마음이 선악과에 꽂이자 에덴의 모든 행복과 기쁨이 다 쓸모없어져 버렸다. 

선악과만 먹으면....하다가 결국 에덴에서 나오게 되었다. 

선악과를 사탄을 통해 보니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그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여겨졌다.  

원래 부터 복이었던 사람이 이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사는 정욕의 노예가 된 것이다. 

사울은 왕이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유능한 장군이었고 용사였고, 왕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다윗을 주목하게 된다. 사람들이 다윗을 좋아하는 모습을 참지 못하고 시기하다가 결국 분노하게 된다.  

"저 놈만 없다면..."

이후의 삶은 우리가 너무 잘 알듯이 모든 에너지를 다윗을 제거하는데 소모한다.  

한 사람을 시기하다가 결국 스스로 생명을 끊는다.  


사탄의 유혹은 무엇인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끊어놓은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복을 쫓아 살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더 이상 생명나무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통제를 떠나면 더 자유하고 재미있고 즐거울 것 같았는데 막상 떠나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복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신약에서는 이 사건을 탕자의 비유를 통해 다시 설명한다.  

아버지의 것 중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 살면 더 재미있고, 즐겁고, 자유한 삶을 살 것 같았는데 막상 떠니니 결국 궁핍이 찾아오고 짐승보다 못한 삶, 노예같은 삶에 빠져 버린 것이다.  


복을 잃어버린 인간의 삶은 그야말로 저주받은 삶이다. 

자기들끼리 죽이고, 다투고, 시기하고, 저주하고, 탐욕과 욕망, 음탕함과 절망이 가득차다. 그래서 이후의 인간의 삶은 그야말로 기복신앙이 되었다. 

잃어버린 복, 빼앗긴 복을 찾아 헤메이기 시작했다.  

복을 얻기 위해 안달이 난 삶을 살기 시작한다. 복을 얻기 위해서 더 벌고, 더 빼앗고, 더 배우고, 더 가지고.....

왜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가?  복을 달라고 섬기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울 복을 달라는 것이다. 


흔히들 한국교회의 특징을 이야기 할 때에 '기복신앙적이다'라는 말을 많이 쓴다.  

기복신앙이라는 것은 복을 기원한다는 것이다. 복을 소원한다는 것이다.  

왜 복을 소원하는가? 복이 없기 때문이다. 복이 없는 사람이 복을 찾아 다니며 간구하고 소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도 한국 교회는 기복신앙적이다라고 하니까 복을 이야기하면 반대로 사람들이 실망하고 거부한다. 

타락한 목사 취급한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복에 대한 말씀을 이야기한다. 우리를 복되다 말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신앙과 세상에서 말하는 기복 신앙을 구분해야 한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기에 신앙에 갈등이 생기고 기독교가 모순 투성이 같고 실망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은 이 기복신앙과 복의 신앙의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델이 된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창세기 12장의 말씀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복을 얻기 위해 우상을 만들었던 가정에서 자랐던 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75세가 될 때까지 땅도, 자식도, 자신이 생각한 아무 복도 얻지 못했던 한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창 12: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2: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1절: 떠나라, 보아라. 가라 -> 말씀을 주신 것이다. 계명을 주신 것이다. 말씀을 잃어버려 복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다시금 그의 인생에 하나님의 창조 역사, 질서가 임한 것이다. 


그 말씀의 내용은  먼저 떠나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떠나는가? 하나님을 떠난 자리, 내 자리가 아닌 자리, 혼돈과 공허로 가득찬 그 자리를 떠나라는 것이다. 본토, 친척, 아비집....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중에서 못떠난 것이 있다. 

고향인 갈데아 우르를 떠났고, 아비였던 데라가 죽음으로 데라를 떠났으나 동생의 아들이었던 조카 롯은 떠나지 못했다. 왜? 롯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란도 없고 할아버지 데라도 죽었으니 돌봐줄 사람이 없어 아브람을 따라갔던 것이다. 


4절을 보면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갔다. 아브람이 따라가고 있는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롯이 따라가는 대상은 아브람이다. 

롯이 아브람과 함께 있을 때는 아브람이 가진 복을 롯도 가질 수가 있었다. 아브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롯은 아브람을 통해 아브람이 가진 복을 나눈다. 

그런데 이 둘이 함께 거하는 것이 아브람에게도 롯에게도 자꾸만 불편을 가져다 준다. 

아브람에게는 롯과 함께 있는 것은 그가 따르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완전한 순종이다. 하나님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했는데 롯과 함께 함으로 친척을 떠나지 못했다. 

친척을 떠나지 못했다는 것은 과거의 습관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롯과 함께 거함으로 과거에 우상섬기는 습관과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아브람이 말씀을 따라가는 자라면 롯은 철저히 복을 추구하는 자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다. 

모든 민족에게 주시는 궁극적인 복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하시는 것이다. 구원이다. 영생이다. 

       

그런데 롯은 구원이고 영생이고 필요없다. 그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필요한 복만 있으면 된다. 

아브람에겐 복이 목적이 아니요 말씀이 목적인데 롯에겐 말씀은 복을 얻게 위한 수단이다.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복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복을 위해 신앙 생활 하는 사람과 말씀을 따라 신앙생활하는 자, 말씀은 곧 그리스도니까 그리스도를 쫓아 신앙생활 하는 자가 함께 있다. 

처음엔 복 받기 위해선 말씀에 순종하라 하니까 잘 티가 안난다. 

복받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자도, 정말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를 쫓아가는 자도 다 같이 말씀을 통해서 거하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둘은 점점 나뉘게 된다. 알곡과 쭉정이가 나뉘게 되듯이 복을 쫓는 자와 말씀을 쫓는 자가 교회 안에서도 나뉘게 된다

언제? 어느 정도의 복을 얻은 후에.... 

       

(창 13: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아브람은 소유가 많아질 수록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자 한다. 주면 줄수록 더욱 궁금한 것은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아브람의 관심은 점점 더 하나님께로 향한다.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를 본받아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말씀의 열매가 나타날수록 말씀을 사모한다. 

그의 관심은 오직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고 그 분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롯의 관심은 여전히 복이다. 가지면 가질 수록 눈에 보이는 복에만 관심이 있다. 자기는 변하지 않고 눈은 자꾸만 밖으로만 향한다. 

가지면 가질 수록 더욱 욕심 부리는 재벌들 전쟁처럼 롯은 더 화려한 것, 더 많은 것, 더 즐거운 것을 추구한다. 

말씀은 점점 더 부담스럽기만 하다. 

하나님의 복은 둘이 나누어 쓰기에 넉넉하지 못한가? 아니다.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은혜는 다함이 없다. 그런데 왜 넉넉하지 못하였다고 표현하는가? 그것은 복에 눈먼 자들의 탐욕때문이다. 가져도 가져도 만족이 없고 나누어 주기에는 더욱 아까운 것이기에 넘치는 복도 롯의 입장에서는 나누기에 너무 아까운 것이다. 

       

아브람이 먼저 제안한다. 다투지 말자. 네가 먼저 선택해라. 

말씀을 따르는 자는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 다투지 않는다. 자기 먼저를 내세우지 않는다

       

롯의 선택을 보자 

(창 13: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가 취하는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는 것은 비슷하지만 진짜가 아니다. 짝퉁 동산이다. 

보이기만 비슷한 것이다. 복인것 같지만 정말 참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14절부터 아브람에게 주신 땅을 보자. 

바라보라. 이르리라. 주리라. 다 미래에 대한 말씀이다.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그 안에는 약속이 있고 보장이 있고 인도하심이 있다. 언약으로 주신 땅이다. 

마치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씨앗으로, 약속으로 아브람에게 주신다. 

그런데 이 씨앗은 생명이 있다. 짝퉁이 아니다. 진짜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말씀 안에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떨어지지 않는 관계이다. 한번 주고 사라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까지 계속되는 on-going한 관계이다. 

보고 믿고 기도하고 기다리고 순종하면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동행이고 교제이고 끊어지지 않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이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아브람을 만들어 가신다. 그가 복이 되도록 인도하신다. 

복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 가는 것이다. 

      

12장 1절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은 어디였는가? 바로 가나안 땅이었다.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그런데 약속한 땅에 들어갔는데 기근이 들었다. 아니 하나님이 약속한 땅인데 왠 기근인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 그럼 애굽이 복의 땅인가, 가나안이 복의 땅인가? 

이것으로 보아 약속의 땅은 장소가 아니다. 지시 자체가 약속의 땅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 곧 약속의 땅이다.  어디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는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정말 특별히 복을 밝히는 민족이다.  

옛날 집안의 가구들을 보면 숟가락에도 복, 젓가락에도 복, 베개포에도 복, 이불과 요에도 복, 심지어 변누는 요강에도 복, 대문 손잡이에도 복, 현관에는 복조리개를 걸어놓기도 했다. 

곳곳마다 복을 써 놓고, 복을 기원했습니다. 새해만 되면 지금도 예수 믿던 믿지 않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세배하며 인사한다.  

왜 그런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복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복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 대한 민국에 처름 기독교가 들어갔을 때에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주었던 제일의 전도 표제는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였다. 


기복신앙은 복을 외부에서 찾는다. 선악과를 억어야, 다윗이 없어져야.... 가나안에 들어가야, 솔로몬 처럼 지혜를 가져야... 복을 내가 가져야 할, 혹은 빼앗아야 할... 어떤 것으로 여긴다. 


복의 신앙은 내가 복이 되어가는 것이다. 내가 복이 되어감을 아는 것이다. 

12장 1절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은 어디였는가? 바로 가나안 땅이었다.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그런데 약속한 땅에 들어갔는데 기근이 들었다. 아니 하나님이 약속한 땅인데 왠 기근인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 그럼 애굽이 복의 땅인가, 가나안이 복의 땅인가? 

이것으로 보아 약속의 땅은 장소가 아니다. 지시 자체가 약속의 땅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 곧 약속의 땅이다. 

어디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는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롯은 가장 복된 땅 소돔과 고모라를 택해서 아브람을 떠난다. 아브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떠난다. 하나님을 떠났더니 복된 줄 알았던 땅은 곧 타락과 죄악의 땅이 된다. 롯은 복이 되지 못한자가 결국 복의 땅을 얼마나 더럽히는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만 그들이 복이 되지 못함으로 그 땅을 저주받게 만든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복을 쫓아 산다. 좋은 학군을 위해 이사하고,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결혼하려 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사력을 다하고, 좋은 교회에 가서 은혜를 얻으려 한다.

복된 교회에 있다고 해서 성도가 복된 것이 아니다. 

교회를 떠나서도 복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성도에게 복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있으면서 복을 받았듯이 함께 있으면서 위안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고 축복의 통로가 되고 싶다. 

그런데 로고스교회의 담임으로서 목사로서의 내 사명은 여러분이 복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쫓으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냥 우리에게 "너희가 복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미 너희는 복이다. 복덩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복되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신다. 

복되게 살라는 것은 복답게 살라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 믿으면서 아직도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내가 복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주신 말씀 안에 거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복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내가 복되면 내가 있는 가정이 복된 가정인 것이고 나를 부모로 둔 자녀들이 복된 것이고 나를 자녀로 둔 부모가 복된 것이다. 

나를 성도로 둔 교회가 복된 것이고 나를 목사로 둔 교회도 복된 것이다. 나를 직원으로 둔 직장이 복된 곳이고 나를 남편으로 둔, 아내로 둔 사람이 복된 것이다. 

복은 내가 가지지 못해서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아직 복이 아니라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서 오늘을 복되게 사는 것- 나는 우리 성도들이 그렇게 복된 자가 되어서 여러분이 가는 곳 어디에서나 주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소리벼리

 

하나님의 만지심 (창 1:1-3, 3:21)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기초이자 첫 출발점이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다. 

그런데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그 코에 생기를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라고 말씀합니다. 

"생령이 된지라"는 말씀은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영과 영이 통하는 존재로, 하나님의 영과 교통, 교제하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생령이 아니라 죽은 영입니다. 영적인 존재임을 부정하는 존재는 짐승같은 존재입니다. 사탄이 마지막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 영적인 존재임을 부정하는 자, 영이 죽은 자에게 주는 것이 666, 곧 짐승의 표입니다. 


육은 육적인 것으로 만족하지만 영은 영적인 것, 영원한 것을 통해서만 생명이 유지되고 만족함을 느낍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이것을 모르기에 자신의 공허함과 갈증을 채우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영은 물질로서 채워지지 않습니다. 영은 오직 영을 통해 채우고 영원한 것으로 채웁니다. 

아무리 돈으로 이 영을 채우려고 해도 영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물질로서 이 영을 채우려고 해도 영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채우고 또 채워도 만족하지 못하고, 물건을 사도 사도 영은 기뻐하지 못하고, 늘 갈급한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창세기 1장 2절에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말씀이 닿기 전의 세계가 표현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창 1:2A) 


혼돈이라는 것은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kaos로, 어떤 성경에서는 formless로 번역했습니다. 

뒤엉켜 있다는 것입니다. 무질서 해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허하다는 것은 "empty" 하다, 즉 nothing,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혼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있긴 있는데, 아주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있어서 무질서 하다는 것이고, 공허라는 것은 아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창조 이전의 세계를 묘사하면서 혼돈하고 공허했다고 설명합니다. 왜 이렇게 말할까요? 

아무리 좋은 재료가 있어도 물질서 하고 뒤섞여 있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혼돈은 곧 공허함,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흑암의 깊음 입니다. 흑암이 깊다는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불안함이라는 것입니다. 

ex) 거식증, 안먹어도 늘 배불러 있는 것 같은 포만감. 폭식증, 먹어도 먹어도 늘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것은 무언가 뻥 뚫려 있다....알 수 없는 흑암이 중간에 가득 채워져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손을 대시기 전, 말씀 하시기 전 세상의 모습은 이같이 무질서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허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만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계의 모습이요, 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입니다. 

영적이지 못한 사람은 한마디로 말하면 무질서합니다. 

삶이 막 뒤죽박죽이고 따라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언가 일은 하는데 열매가 업습니다.  잠이 안 올 정도로 생각은 하는데 정리가 되질 않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믿음의 삶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영 다른 결과, 다른 열매만 나옵니다. 


이것이 열매가 없는 삶이요, 잉태치 못하는 삶이요, 기한 전에 열매가 떨어지는 삶이요, 무덤 가운데 거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변화가 나타납니다. 

달리 말하면 창조가 무엇이냐, 무질서 하던 것이 질서 있게 만들어 지고, 아무런 열매 없는, 의미 없는 삶이 의미를 발견하고 목적을 찾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이 사라지고 평안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기의 삶의 재료가 많아도, 물질이 많고, 학식이 많고, 건강이 있어도 무질서하고, 의미를 찾지 못하고, 불안한 것이고, 하나님의 손길 아래, 말씀 안에 거하는 자들은 삶이 정리가 되고, 질서가 잡히며, 의미있고 열매 있는 삶을 살고, 평안 중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기사를 읽으면 그래서 우리 삶의 질서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날: 빛과 어둠 

둘째 날: 수직적 구분 - 물과 물을 수직으로 나누어서 궁창위의 물(하늘) 과 궁창 아래의 물(바다)  

셋째 날: 수평적 구분 - 땅의 물을 나누어서 바다와 육지 


넷째날- 태양과 달과 별을 첫째날의 장소에

다섯째 날 - 하늘 위의 물에 새를 궁창 아래의 물에 물고기를 

여섯째 날 - 육지에 동물과 마지막으로 사람을.... 


처음엔 나뉘고 분리하게 하신 다음에 그 다음에는 각각 나뉘어진 공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의 열매인 창조물들고 채워나가는 것,그래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채워 나가는 것, 이것이 창조라는 것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하나님 주신 질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는 것, 그 결과 안식이 없고 다시금 흑암과 같은 불안함과 혼돈과 공허 가운데 빠지게 하는 것이 죄이고 사탄의 일입니다. 

아담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분을 없앰. (마땅이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게 함)  

가인 - 선악의 구분을 없앰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함) 

바벨탑 - 하늘과 땅의 경계를 없앰. (언어가 혼잡) -> 혼돈과 공허...


  •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혼돈과 공허한 삶, 흑암이 가득한 삶을 그냥 외면치 않으십니다. 


혼돈과 공허의 세상에 말씀으로 질서를 창조하시듯 다시금 죄에 빠진 인생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창세기 3:21절은 죄된 인간에게 다시금 창조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창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전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중 에덴 이라는 특수한 동산을 모델로 제공하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특별한 관계를 말씀해주시기 위한 장치입니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관계의 땅을 보여줍니다. 

 바른 관계의 땅에서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다윗의 고백이 울려퍼지는 곳입니다.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 중요한 것은 왜 선악과를 두셨는가? 선악과가 없었으면 아담이 지를 짓지 않았을까?하는 헛된 생각이 아니라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악과를 통해 있었다는 것이고,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질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한 세계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 질서와 안식이 임한 것처럼 에덴 동산에 하나님은 선악과라는 말씀을 통해 질서와 안식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질서의 파괴자, 영의 파괴자, 타락한 천사 뱀이 나타나 인간을 유혹합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외면하여 말씀 없이 살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면 네가 하나님이 될 것이다. 너 자신이 하나님처럼 살라고 말합니다. 


선악과를 먹음: 이젠 내 기준대로 살겠다. 내가 선악의 기준이 되겠다. 



자기가 자기 행동, 선악의 기준을 알고자 할 때에 자기의 기준이 되는 것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자기 선악의 기준. 자기 삶의 기준…

그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과 다르다는 것을 본질적으로 알게 된다. 하나님의 기준과 내 삶의 기준, 하나님의 본질과 내 본질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때에,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간에게 나타난 결과

  • 수치심. 수치심이 찾아오자,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불안한 감정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어디론가 숨어야만 된다는 감정들이 몰려왔다. 
  •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뒤에 이들이 가진 감정은 죄의식이 아니다.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다는 자책과 회개와 죄의식이 아니다. 단지 수치감이다. 죄의식과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감정이고 수치감은 내 안에 몰려오는 나에 대한 감정이다. 수치심은 내 맘대로 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것과는 다르고, 그 방법대로 사는 것보다 훨씬 무가치하게 스스로 여겨지기 때문에 스스로 드는 생각과 감정이다. 


바로 그 때,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수치감에 어쩔 줄을 모를 때에 평소와 같이 하나님이 오셔서 그를 부르셨다. 그들은 서둘러 무화가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이것이 최초의 종교의례이다. 이 사건 이후로 인간은 모든 종교를 망라하고 신의 부르심에 그대로 나아가지 못했고 반드시 의례를 통하여 나아갔다. 그가 부르실 때마다 무화가 나무를 만들어 입는다. 

하나님은 그냥 함께 거했지, 의례를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하나님은 함께 있거나, 함께 있기 위해 우리를 불렀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무화가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리고, 숨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았다. 부르셨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창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벗었고, 두려웠고, 숨었다. -> 이것이 죄로 말미암은 아담의 고백이다. 이 세 마디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인간의 죄의 증상과 상처가 모두 들어있는 것이다. 

“누가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누가 널 정죄하였느냐? 뱀이? 하나님이? 하와가? NO!


아담 자신이 지금 자신을 정죄하며 두려워하며 수치감을 느끼고 숨은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한꺼풀 무언가를 덮어 쓰고 가리고 나온다. 그리고 그런 의례를 해 놓은 다음에 마음으로 안심한다. 신에 대한 의무를 다했으니 자신의 마음도 가볍고 자신의 할 도리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뭐하면 복을 받고, 뭐하면 저주를 받고 등등의 자신의 행위를 기준을 여전히 판단한다. 이런 신앙행위 속에는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다. 사귐이 없다. 복종은 있으나 대화가 없다. 순종은 있으나 친밀함이 없다. 

하나님은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면 그냥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모습을 나아오길 바라시지만 사람은 절대 그냥 안 나간다. 무화가 나무를 엮는다. 엮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수고한다는 행위다.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화가 나무는 자기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화가 나뭇잎으로는 자기의 수치심을 절대로 가릴 수 없다. 사라지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또 숨고, 또 두려워하며, 또 무언가 자신의 행위를 만들어서 예배하는 것이다. 


(사 59: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어떤 목사님이 책에 “오늘 날의 많은 예배의 장소는 단지 앞치마를 만드는 공장일 뿐,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평가한다. 

단지 일주일에 한 번 예배하러 와서…? 내 할 도리 다했으니 이젠 내 마음대로 살겠습니다. 하러 나오는 곳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죄의 결과는 우리 스스로 수치감을 느끼고, 가리고, 숨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다시 내 육신의 욕심, 안목의 욕심, 이생의 자랑을 위해서 살다가 어느 순간 또 수치감을 느끼고, 가리고, 숨는 삶을 반복하는 것이다. 

얼마나 비참한 삶인가? 도저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없는, 교제를 위하여 만든 인간이 이젠 하나님이 오실 때마다 가리고, 숨고 어쩔 줄을 몰라 할 때에 느끼는 하나님의 감정… 

그러한 죄인들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는 것


하나님이 입히신 가죽옷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가죽옷은 자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서 입히신 가죽옷은 현실적으로는 거친 환경 속에서 살아갈 범죄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 서기를 참지 못하고 숨어버립니다. 인간에게만 있는 신앙양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가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큰 바위 뒤로 숨습니다. 나뭇잎 치마가 오죽했겠습니까? 금방 오그라들고 감추이던 것이 드러납니다. 잠시잠깐 지나면 또 다른 것을 만들어 입어야 합니다.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는 죄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수치가 가려지질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주신 옷은 어떤 환경에도 헤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가져 줍니다. 


둘째, 가죽옷은 피흘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서 입히신 가죽옷은 범죄한 인간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 됨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말은 무언가 가죽을 위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가리워주기 위해서 희생당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가죽을 제공한 동물은 물론 양일 것이라 결론을 짓습니다. 출애굽할 때에 사망의 재앙을 내리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자들만 그 재앙이 넘어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페인트를 잘 칠해서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무조건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는 가정만 하나님의 재앙을 피해갔습니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넘어가리라.”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가인과 아벨 사건 이전에 가죽옷의 사건은 인류 최초의 피흘림의 사건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지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른 무언가의 피로서 그들을 가리워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를 가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손수 양을 잡아 그것의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의 몸에 옷을 입히시는 사건…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구주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물론이고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갈3:27에서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주심으로 수치를 가려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옷을 입혀 주심으로 우리의 수치, 죄를 가려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겔 16:8에서는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너무 보고 싶고 교제하고 싶고 이야기 하고 싶은데,,, 인간이 마치 바람피다 걸린 사람처럼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숨고 피하고,,, 그러니까…날 피하지 마라. 더 이상 부끄러워 하지마라 하면서 어린양을 죽이면서까지 입히신 것이 가죽 옷. 

그런데도 그것으로 완전하지 못해/…. 왜? 겉은 가렸어도 그 마음에는 여전히 선악과가 있기 때문… 내 마음, 내 기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 밭을 바꾸진 못해…. 그 대신 하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교제할 끈은 열어둔다. 

구원의 긴 계획. 선악과의 마음/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 사탄이 가져다 준 마음 자체를 없애야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원 복음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너희 식대로 사는 것과, 나의 식대로 사는 것을 경험해보고 깨닫고 돌아와라. 

스스로 인정하고 돌아오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래서 무화가 나뭇잎으로는 안되는 구나. 가죽옷의 방법으로만 하나님과 만날 수 있구나… 

아담과 하와를 내보내시면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 같지만 결국은 3장 15절에 온 복음을 말씀하시며 하와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로 축복. 

가인과 아벨…. 너의 식대로 하는 제사. 나의 식대로 하는 제사. 엄격히 알려줘야 해. 깨달아야 하니까? 

그런데 화 내고 아벨을 죽임. 

[창 4:14-15]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살인까지 했는데… 그를 보호하시고 지키심…. 

탕자: 내 멋대로 살겠습니다. 마음은 아퍼.. 그런데 그 마음을 바꾸지 못해… 그래 너 스스로 깨닫고 와라. 

깨달은 자를 기다리며 문밖, 마을 어귀까지 와서 기다리시는 분,…. 


혼돈과 공허의 무질서에서 말씀의 진리로 

그런데 그 말씀을 떠나 또 다시 죄의 길, 혼돈과 공허 가운데로 빠진 자들에게 오신 주님. 

가죽옷을 통하여,  당신의 피흘림을 통하여  그 은혜를 통하여... 


당신의 삶은 어떠합니까? 

일을 해도 열매가 없고, 무언가를 해도 채워지지 않는, 무질서하고 혼돈과 공허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으로 오신 창조의 하나님, 질서의 하나님, 안식의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여전히 내 기준, 내 판단, 내 방식대로 살아가다가 또 다시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매주 주 앞에 나올 때마다 또 다른 무화과 나뭇잎 옷을 지어 이정도면 됐지, 자신의 죄를 스스로 가리고, 외식하며, 자신의 수치를 숨기려 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당신께서 피흘림으로 인해 우리에게 영원히 썩지 않는 옷을 입히셨습니다. 

그 은혜의 주님을 바라보며 숨기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다시금 주 앞으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 없는 내 기준대로의 삶과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은혜의 삶을 보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정하라고 하십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