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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보다 더 큰 고통  (마 27:46) 


(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보면 사람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동물들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빚어 만드셨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를 지닌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다고 증거합니다. 물론 그 형상이라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동물들과 다른 점으로 이성적인 존재임을 들고 있지만 이것으로 설명이 되지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되면서 인간과 비슷하거나 때로 높은 지능을 가진 동물들도 연구가 됩니다. (돌고래 - 80, 침팬지 120, 까마귀 40..) 


성경에서는 영이 없는 모든 생명체를 가리킬 때 짐승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사람도 영적인 활동을 전혀 못하면 성경은 짐승이라 표현합니다. 

불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개념이 있는데 흔히들 윤회라고 할 때에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 아수라- 인간도- 천신도의 서열이 있어서 전생의 업에 따라 다시 태어나는데 동물과 인간 사이의 세계, 즉 동물같은 인간들이 사는 세계를 "아수라"라고 표현합니다. 

흔히들 세상에서 개 만도 못한 인간...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 죽었다. 짐승이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떨어지니 서로 탓하고, 변명하고, 미워하고, 거짓말하고, 살인하는 짐승같은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잠 12:1)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영의 양식은 말씀이요, 영의 호흡은 기도다! 기도와 말씀이 없는 사람은 짐승과 같다, 인간이지만 짐승이다. 그리고 그 짐승과 같은 자들이 받는 표가 666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짐승들과 같은 인간에게도, 아니 정말 짐승들에게도 하나님의 흔적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궃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동물들도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마음 만큼은 특별한 동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하나님을 모르는 부모라 하더라도 자식만큼은 끔찍이 사랑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물론 안그런 예들도 간혹 있지만 그런 사건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정말 이건 짐승보다 못하다고 충격을 받는 일들 입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열심히 농사짓던 땅을 팔고 집을 팔아 대학 보내는 집들이 많았습니다. 

간혹 자녀가 공부에 대한 욕심이 더 있어서 유학을 간다고 하면 가진 것 다 팔아도 모잘라 부모는 빚덩이에 않습니다. 

그래도 자녀를 위해서면 그것이 고통인줄 모르고 감당했습니다. 사람의 이기적인 마음도 자녀를 위해서는 희생하는 마음으로 신기하게도 바뀌었습니다. 


옛날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그렇게 집팔고 땅팔아서 아들을 유학보내어 뒷바라지를 합니다. 뒷바라지 하느라 부모의 가세는 더욱 기울고 몸은 늙어 병들기도 합니다. 

아들은 그런 부모의 희생으로 오랜 공부를 마치고 귀국을 해서 부잣집에 사위로 들어갑니다. 

부잣집 딸은 가난하고 늙고 병든 시부모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급기야 아들도 부모와 점점 멀어져 갑니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 사람들은 분노하고 아들을 욕하기도 하고,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저게 사람이냐고 한 마디씩 하면서도 그런 일들이 주위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들이라 부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막상 부모된 마음에서 보면 비록 그런 자녀를 위해 평생 일해 모은 집도 땅도 다 주고 나서도 자식에게 버림받는 인생이지만, 자신을 홀대하는 자녀가 서운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지들 잘살면 되지 하면서 누가 자식이라도 욕할까봐 우리끼리 사는게 편해...그러면서 살아오셨습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예수 안믿어도 부모이기에 품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타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짐승에게라도 남아있는 사랑의 흔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 마음은 부모의 마음보다 큽니다. 부모의 사랑보다 큰 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것 입니다. 

하나님 명령 지키기 위해서 금욕하고, 스스로 불행한 것을 선택하는 그런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고 하나님 주신 것을 누리면서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자녀를 희생하고 다 주면 늙고 병들게 됩니다. 그 인생은 시들하게 됩니다. 

그에 반해 자녀는 점점 강하고 유능해지며 힘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부모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자녀를 보며 흐뭇해하며 내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요,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는 늙지도 쇠하지도 않는 창조주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스스로 살고자 하는 것- 성경은 그것이 죄요, 불행이요, 저주요, 결국 사망이라고 합니다. 

왜? 이 땅은 이미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고, 그 사탄이 인간을 종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맡는 현실을 실존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장성하면 부모를 떠나고 싶어합니다. 아니 정성하지 않아도 부모를 떠나고 살고 싶은 것처럼 인간의 자유의지 속에는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마음, 그러한 가능성이 곁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떠나고자 하는 자를 하나님은 억지로 붙잡지 않습니다. 

내 분깃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떠나 살고자 하는 자를 붙잡지 않습니다. 

아담, 가인, 이스마엘- 하나님의 주권의 입장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바로가 악행을 행하고, 사울이 범죄하여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적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아담을 추방했다. 가인을 내어 쫓았다. 이스라엘을 내 보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에게 넘기셨다고 기록하지만 삶의 현실에서 언제나 나가는 것은 인간입니다. 

추방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집을,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인간을 향해서도, 이스라엘 나라를 향해서도 하나님은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은신처를 제공하시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신다고 약속합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거두지 않습니다. 그들이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탕자가 원한 것- 하나님이 가진 능력, 힘, 물질... 

그런데 하나님을 벗어나서 그것을 소유하면 더 행복할 줄 아는데 그 결과는 "허랑방탕" 

인간에게는 그것을 소유할 능력도, 그것을 누릴 능력도 없기 때문에....

자유가 선한 것이 되러면 나에게 계속적으로 유익해야 하는데 인간의 절제력이 없고, 무분별하고, 탐닉하고, 중독되는 존재, 종된 존재.. 


하나님을 떠난 인간- 결국 돼지의 식량을 먹으며 돼지와 함께 생활하는 짐승이 되어 버리는 것

탕자의 은혜- 깨달았다는 것, 아버지의 집을 기억했다는 것, 그리고 돌아왔다는 것, 자격이 없지만, 염치가 없지만,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돌아왔다는 것 - 돌아오는 자를 하나님은 이유없이 맞아 주신다. 회복시키신다. 잔치를 배푸신다. 


그런데 대부분 인간의 더 큰 문제, 깨닫지도 못하고, 돌아오지도 못한다. 자기들이 짐승처럼 산다는 것 조차 모른다. 그저 잘 먹고, 집있고, 차 있고, 돈 있으면 행복한 것 처럼 산다. 

영은 병들고, 관계는 깨어지고, 주위는 자신으로 인해 고통 받는데 자기 자신에만 갇혀 있어서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사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롬 3:10-12]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예수의 성육신- 기다리던 아버지가 이젠 기다림을 벗어나 찾아오신 것... 

찾아와서 문등병자 (자기가 죄의 병에 들었지만 병을 느끼지도 못하는 자), 중풍병자 (말씀을 들어도 움직이지 못하는 자) 장님 (참 현실을 보지 못하는 자), 귀머거리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는 자) 찾아다니시면서 고치시는 것 


매인 자로부터 풀어주신 것, 우리를 붙잡고 있는 공중권세 잡은 자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것. 


우리를 풀어주기 위해서 감당하신 것 - 십자가의 고통 

십자가 형벌 - 인류의 역사상 가장 가혹하고 고통스런 형벌 


십자가 형은 죄수의 복숭아뼈 부분에 못을 박거나 또는 밧줄로 묶어서 고정시키고, 다시 두 팔을 벌리게 한 다음 두 손목을 묶고 거기에 못을 박아서 고정시킵니다. 이런 상태로 십자가를 세우면 죄수의 몸은 아래로 쳐집니다. 이때 두 팔이 벌려진 자세이기 때문에 횡격막을 압박하여 숨을 쉴 수 없게 됩니다. 죄수는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자신의 몸을 위로 올려야 합니다. 즉, 복숭아뼈에 박힌 못에 의지해서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겁니다. 살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 몸에 고통을 가하는, 잔인한 형벌입니다.

이 과정이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게다가 그런 자세로 상체를 지탱하는 것은 고통과 함께 극심한 체력 소모로 이어집니다. 결국 죄수의 몸은 다시 아래로 쳐지고, 죽음의 고통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죄수는 남은 힘을 끌어모아 억지로 몸을 위로 끌어당기고, 그 과정은 극심한 고통을 낳고... 십자가 형벌은 이런 프로세스의 연속입니다. 숨을 쉬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스스로의 몸에 고통을 가하면서 몸을 일으키고, 힘이 빠지면 아래로 쳐졌다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것이죠.

죄수의 숨을 대번에 끊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고통을 2-3일간 겪으면서 서서히 죽어가며 심지어 어떤 죄수는 십자가에 매달린 채 일주일 가량을 살아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십자가 처형을 받는 죄수에게는 그의 목숨을 빨리 끊어주는 것이 매우 자비로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목숨을 빨리 끊어주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 죄수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다리를 부러뜨리면 죄수는 더 이상 복숭아뼈에 박힌 못에 몸무게를 지탱해 자세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냥 몸이 아래로 축 쳐지면서 횡격막의 압박으로 질식해 죽는 겁니다.


예수- 십자가 이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 심한 채찍질... 

      -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비아돌로로사- 거리를 걸으시고 

      - 십자가에 달리심.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왜?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것 - 

탕자는 깨닫고 돌아오기라도 하는데 깨닫지도 못하는 인간- 그렇기에 돌아오지 못하는 인간...

그런 인간에게 가장 쉬운 방법, 그저 그 이름을 통해, 예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그 고통의 중심에서 뱉으신 한 마디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때 언제나 아버지라 불렀다. 

가상 칠언에 있어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모세, 다윗, 선지자...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야훼, 여호와...나와 관계 맺으신, 나를 사랑하시는....


그런데 이 구절에서 만큼은 아버지나 여호와가 아닌 하나님! 

왜? 

'하나님'은 공적이고 법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용어이다. 지금 예수께서 부르짖고 있는 탄식의 상대인 하나님은, 더 이상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계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법정과 같은 공적인 자리에 계신 분이시다. 이것은 예수와 하나님 사이가 개인적 감정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이고 법적인 엄정한 관계가 우선하는 분위기임을 의미한다. 인간의 모든 죄악의 심판관으로서의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내용. 


 '버렸다'로 번역되는 아람어 '사박크'는 히브리어로 '아자브'이다. '아자브'는 '내어버리다'는 뜻인데, 단순한 내어버림이 아니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유기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께 완전히 등을 돌리셨고, 예수께서는 영적 소외감과 고독감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은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주시고자 했던 것 -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화목, 그 거룩한 지성소에 쳐져 있던 휘장을 몸으로 찢으신 것. 

왜?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 앞으로, 그들을 데려오시기 위해...


그런데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님께 일어난 것 - 늘 교통하던, 대화하던, 지켜보시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져 버렸다. 

우리는 그 고통을 모른다. 

왜 우리는 늘 끊어져 있었고, 가끔 연결될 뿐이고, 또 끊어지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은 늘 붙어 있었다. 

그분이 기도하시면 아버지는 늘 들어주셨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기다리다 못해 이 땅에 오셨다. 


그런데 십자가 상에서 인간의 모든 죄악을 감당해야 했던 예수는 인간의 죄악의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관계가 끊어지는 고통을 경험하셔야 했다. 

영적인 존재가 오로지 육적인 존재가 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영이 없는 짐승이 되셨다. 


언제 깨어날 지 모르는 그 시간,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우리는 그 고통의 시간을 기도하면서 이기는데 

예수는 기도의 대상을 잃어버렸다. 끊어져 버렸다. 


[요 19:31-요 19:35]

(요 19:31)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요 19:32)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요 19: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요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 19: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왜 다리를 꺾으려 하는가? 십자가의 형틀에 있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려고?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일찍 치우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치워버리려고 행한 것 - 다리를  꺾은 것 - 그러나 예수는 이미 죽어 있었다. 

확인- 옆구리를 찌름 -물과 피


전 의학적인 지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 구절이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또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이 구절을 설명하고 있는 의학적 설명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방금 죽은 시체의 옆구리를 찌르면 피와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의학의 권위자들에 따르면 정상적인 심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드문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의학적으로 본문에서 피와 물이 나올 수 잇는 것은 심장이 파열되었을 때뿐이라고 합니다.  

그릇에 피를 담아두면 위아래 두 층으로 나눠지는데, 그것은 핏덩어리와 그 위의 액체인 혈청입니다. 곧 피와 물입니다. 

 

이 일에 대한 의학적으로 적절한 설명은 이것입니다. 주님의 심장은 병사가 옆구리를 찌르기 이전에 이미 파열되어 있었다는 것, 기르고 그 피가 심실이나 그 너머까지 넘쳐서 고여 있다가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핏덩어리와 혈청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직접적인 죽음의 원인은 심장의 파열이라는 것입니다. 


왜 주님의 심장은 파열되었을까?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기도조차 할 수 없었던 육신의 가장 마지막 상태에서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 집중하셨던 것- 바로 사랑이라는 것 

심장이 파열될 정도로 십자가 상에서 주님을 죽음으로 인도했던 가장 결정적인 원인- 

바로 나를 위한 사랑. 심장이 말 그대로 터져버린 사랑. 

십자가의 형틀의 고통보다 더 컸던, 어떤 고통보다 더 컸던 것은 바로 나를 위한 사랑.  

내가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그 사랑. 

 

Posted by 소리벼리

 

예수, 죽은 자를 살리다 (요한복음 11장 35-44절) 


예수의 삶에 있어서 변곡점, Turning Point가 되는 몇 사건들 

  • 세례를 받음- 공생애의 시작 
  •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힘으로 예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마 4:14, 17) 세례 요한이 죽음으로 예수의 사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오병이어 사건..) 
  •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베드로의 고백 사건-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시작한 사건.
  •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에 기록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 이 때부터 예루살렘이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하기 시작, 요한복음의 이른바 일곱가지 기적 (Seven Sign) 중 가장 마지막 사건 


  • 베다니- 예루살렘 남쪽의 인근 마을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면 늘 들리던 마을, 베다니라는 의미는 "가난한 이의 집"이라는 의미로 가난한 자와 나병환자들의 거주촌, 서울로 치면 달동네,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 살던 마을. 
  • 나사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자, 베다니에서 아내도 없이 두 누이와 함께 살던 가장. 
  • 성경은 특별히 나사로를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 또 예수님은 나사로를 가리켜 "친구"라고 불렀던 사람. 
  • 또 두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가난한 형편에도 예수님과 제자들을 잘 대접했던 가정, 특히 마리아는 전에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방되고 구원을 얻은 여인,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여인- 주님과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   


1. 그런데 그가 병들었다. 그것도 아주 위급한 병, 죽을 병에 걸렸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이 때 사랑하시더니는 히브리어로 신적 사랑, 최고의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병들었습니다. 

-> 주님이 우리를 최고로 사랑해도 우리는 병드는 존재, 병들수 밖에 없는 존재,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안에 있는 존재....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도 병들수 있다. 죽을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다. 들으면 당연하게 여기는데 막상 그러한 일을 당하면 부정한다. 이것이 우리의 어리석음... 

(행 14:22)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 누이들이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알립니다. 당연히 빨리 오셔서 고쳐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요, 또 주님만 오시면 나으리라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 (6절) 


이틀 동안에 무엇을 했는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달리 다른 일을 했더라면 기록되었을텐데 주님은 의도적으로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왜 이틀을 유하셨는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힌트가 되는 구절이 4절과 15절입니다.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오해하기 쉬운 해석- 병을 고치는 것 보다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죽은지 오래된 자를 살리시는 분임을 믿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기 된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멀쩡한 사람을 병나게 하고 죽게 하고 살려냄으로써 자기를 증명했다. 혹은 빨리 고칠 수 있었는데 예수님의 능력을 보이려고 이틀 동안 기다리셨다. 그 생각 때문에 오해가 생깁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백성을 희생시키는 자을 우리는 독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재자가 아니라 사랑이십니다. 그는 나사로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틀을 그냥 기다리신 것이라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거짓된 눈물이요, 가식일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깊이 묵상해야 할 단어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을 오해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무렇게나 희생당하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살리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생명의 하나님이요, 평강의 하나님입니다. 


3. 이틀을 유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시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느 고로 실족하느니라" (9-10절) 

그러면서 곧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이제 깨우러 가자!" 합니다. 


  • 두 가지 종류의 무덤 속에 묻혀 있는 자들 

1) 주 밖에서 죽은 사람들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첫째 사망은 몸이 죽는 것이요 둘째 사망은 불과 유황으로 받는 영원한 영혼의 저주- 지옥에서의 영원한 형벌: 둘째 사망이라 표현합니다. 


2) 주 안에서 죽은 자들 -> 잔다라고 표현 

-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 잔다. 

(마 9: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 스데반이 죽었을 때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바울은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을 가리켜 잔다고 표현 

(살전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 

사데교회: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예수의 생명이 없는 이들은 모두 죽은 자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 

거급났으나 죽은 자들 - 자서는 안될 잠 

신랑을 기다리던 신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잠자던 자 

깨어서 기도하라 했는데 잠을 자던 제자들 -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경험 한 것 - 배 밑창에서 잠을 잠 

삼손이 향락에 취해서 타락할 때마다 행한 것 - 들릴라의 허벅지를 베고 잠든 것 


다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시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느 고로 실족하느니라" (9-10절) 

그러면서 곧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이제 깨우러 가자!" 합니다. 


나사로가 잠들어있다. 왜? 빛이 없이 다녔기 때문에, 믿는 자가, 예수의 사랑하는 자가, 예수를 사랑하던 자가 예수 없이, 성령 없이, 믿음 없이, 어둠에 다녔기 때문에 그는 잠들었다. 죽었다. 주님은 요나가 배밑에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리신 것처럼, 나사로가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왜? 그것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실상, 내 민낯, 내 더러운 죄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둘기 처럼 순전한 선지자 요나가 잠을 통해 하나님가 평평히 맟서듯,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가장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 가정 안에 있는 죄의 민낯을 보게 하신다. 


4. 마리아와 마르다. 

두 가지 유형의 성도- 행동하는 신앙, 사색하는 신앙

영성가들은 이 둘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요 신앙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함께 가야하는,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신앙의 두 모습이라 여겼다. 즉 이 둘이 함께 할 때에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 행동하는 믿음, 이해하는 믿음이 아닌 살아가는 믿음이 된다는 것이다. 


나사로의 집- 주인은 나사로이지만 신기하게도 성경에는 나사로와 대화하는 장면이 하나도 없다. 반면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대화하는 장면은 여러군데서 나온다. 나사로를 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죽은 자는 나사로인데 그것을 전하는 것도,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도, 그리고 돌문을 치우는 것도, 꽁꽁 싸여진 베를 풀어 놓는 것도 누이들을 통해서이다. 즉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두 누이에 대한 믿음의 단련이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두 누이다. 부모도 없이 살았는데 이제 가장 역할을 하던 오라버니마저 없다. 간절히 기다리던 예수님도 오지 않고, 이제 장례식마저 다 치루었다. 오라버니는 이미 장례를 치루고 무덤 속에 안치했다. 그 며칠 간의 시간은 두 자매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자 마르다가 예수를 맞이합니다. 마르다는 행동이 먼저인 사람입니다.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서두르고, 서성대고, 먼저 행동합니다. 남자로 치면 베드로같은 신앙인입니다.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에는 예수님에 대한 섭섭함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자 먼저 달려나가 예수님 앞에 섭섭함을 표현합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섭섭함을 표현합니까? 아얘 나오지 않음으로 그의 서운함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이 두 자매와 대화하시면서 그들이 주님과 대면하게 합니다. 

어둠에서 잠자던 자들이 이제 빛된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신앙은 해결되지 않은 내 삶의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서 대화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빛이 비추이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주님 앞에 나온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 나리라" (23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제가 이것을 믿느냐?"  

하면서 잠자던 영혼을 깨웁니다. 

어둠 가운데, 절망에 빠져 있던 마르다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 줄 내가 믿나이다." 베드로의 고백, 반석의 고백, 교회의 고백을 하게 합니다. 


마리아를 만나는 장면은 더욱 인상적입니다. 

무작정 달려가서 위로하지 않습니다. 

(요 11: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마르다가 고백했더 바로 그 장소, 야곱이 거꾸러지고, 다윗이 회개하고, 베드로가 고백하고, 마르다가 고백했던 바로 그 장면처럼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 나아와서 비로서 마르다처럼 똑같이 "주님, 내가 섭섭합니다. 왜 일찍 안오셨습니까?" 하면서 그 발 앞에 무릎꿇은 마리아를 보고 함께 우십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 하다가 아무리 이해 안 가고, 납득할 수 없고, 때로는 성도에게, 목사에게, 주님꼐, 하나님께 서운한 것이 있을 때도 피하면 안됩니다. 그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주께서 위로하십니다. 주님께서 같이 눈물을 흘리십니다. 


5. 돌을 옮겨 놓으라! 

  • 마리아의 원망의 소리를 듣고 우신 주님은 무덤으로 갑니다. 무덤은 무엇입니까? 죄악된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를 삼키는 고통, 염려, 두려움, 부정적인 생각,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는 내 약점....
  • 지금 예수님이 그 곳에서 들어오셔서 우리를 성령으로 바꾸어 놓으셔야 하는데 무덤 앞에 무엇이 있습니까? 큰 돌이 가로 막고 있습니다.?
  • (요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행동파인 마르다가 정작 행동해야 하는 것에는 머뭇거리고 피하고 외면한다. 왜? 자기를 대면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우니까... 외적인 다른 일은 다 하는데 정작 자신의 마음 속 깊은 무덤 속은 열지 못하는 것이다. 
  • 내 아픈 속마음, 내가 여전히 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연약한 모습, 부정하고 싶은, 내가 홀로 만나고 싶지 않은, 하나님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내 굳는 마음, 타락한 마음, 몸에 배여 있는 죄악의 습관들....
  • 예수님은 내 마음 밖에 오셔서 이제 네 마음의 돌을 치워라하십니다. 하나님, 냄새가 나서 열 수가 없어요....썪은 냄새가 진동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주님과 대면하는 시간, 내 이름이 변하는 시간, 온전히 내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거룩함이 날 살리는 시간입니다.?


죽어도 살겠고-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돌을 치우고, 예수님께 내 연약함을 모두 내어 드리고 주님 내 마음의 굴로 들어오세요. 내가 죽어있는 공간, 죽이고 싶은 나의 모습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살려 주세요... 그러면 사는 것입니다. 부활이 임하고 생명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산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오직 여인들만이 예수가 계신 동굴로 새벽부터 일어나 갑니다.

그녀들에게 있는 한 가지 걱정은 무엇입니까? 누가 무덤을 가로 막은 돌을 치워줄까?

예수와 우리를 가로막은 돌을 치워줄까??

다른 제자들은 그 돌을 치우려고도 하지 않고 그 곳에 오려고도 하지 않는데 여인들은 어떻게 돌을 치울까 염려하면서도 아무런 대책이나 도움이 없이 그냥 예수 앞에 나옵니다. 무조건적으로 예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에 오니까 어떻습니까? 이미 돌이 치워져 있습니다. 예수와 우리 앞에 놓였던 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무작정 나오니까 어느 덧 돌이 굴려져 있는 것입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돌을 치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능으로 우리 모습 그대로 주님앞에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 다 아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께서 그 돌을 치워주십니다.

주님 앞에 가로막혀 있는 돌문을 주님께서 제거해 주십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그렇습니다.


6.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우리의 전부를 열면 주님께서 들어오십니다. 이것은 회개의 사건이요, 중생의 사건입니다. 중생은 한 번 일어나는 것이지만 회개는 우리가 주님을 잃어버릴 때마다, 잠에 빠질 때마다, 영적인 죽음에 빠질 때마다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영혼이 살아난 자는 이제 수족은 싸맨 수의를 벗어야 합니다. 수의는 죽은 자가 입는 옷입니다. 죄로 인한 옛 구습이요, 습관이요, 삶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옷을 갈아 입어야 합니다. 

(골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새 영을 받은 자는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한 구원입니다. 신앙은 깨달음이 아니라 삶입니다. 


결론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을 사랑했던 나사로도 병들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도 역시 병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했던 자들도 병들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도 끊임없이 병듭니다. 

병든 자는 서운함이 가득찹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교회가 원망스럽습니다. 만사가 귀찮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나오는 자는 빛이 비추입니다. 생명이 솟아납니다. 회복됩니다. 

예수께 나아오는 것- 놋뱀을 바라보는 것, 예수께 마음의 깊은 무덤을 여는 것

이것은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듯, 우리는 주님께 나아와서 내 잠을 좀 깨워 달라고, 내 맘 깊은 악취나는 곳에도 빛을 비추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오는 자는 살아납니다. "나사로야 나아오라" 외치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산 인생을 삽시다. 살았으나 죽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산 사람 처럼 삽시다. 새 옷을 입읍시다! 

 

Posted by 소리벼리

 

예수를 욕망하라 (요한복음 13:12-17) 


히브리어에서 사람은 "ish"로 표기합니다. 이 뜻은 불, 욕망의 의미입니다. 

성경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욕망적인 존재로서 묘사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것도 욕망과 관련이 있지요. 

선악과를 무엇이라 표현하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요한일서에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요 이것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절)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라는 표현도 눈여겨 볼만합니다. 그것을 먹으면 내가 지혜를 얻을 줄로 알고 그것을 desirable, 갖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맨 마지막은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니까 욕망이라는 것, desire, 번역하기에 따라서 욕망이라고 하면 좀 부정적인 의미를 띄지만 소망, 갈망하면 좀 성스런 느낌을 주기도 하지요. 이 욕망은 현대 철학이나 심리학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 특별히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면서 인간 행동의 가장 근원에는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id가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아무리 교육이나 물질로서 인간을 포장해도 인간은 욕망, 본능의 존재임을 드러냈습니다. 더 나아가 지라르나 라캉같은 학자들은 인간의 욕망을 철저히 해부하면서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인간 내부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타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비로서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우리가 욕망하는 모든 것은 내가 스스로 내 고유한 욕망이라기 보다는 결국 타인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 혹은 타인이 욕망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목적을 자기 욕망을 이루는 데에 두고 삽니다. 

자기가 갖고 싶었던 것, 하고 싶었던 것...그것이 사람들이 공부하고 일하는데에 동기가 되고 원동력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 결국 남의 것이라는 결론은 좀 씁쓸함을 줍니다. 

더군다나 성경에서는 남의 것을 탐하는 것- 그것을 죄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 욕망의 가장 끝에는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싶어하는 욕망, 하나님의 간섭이나 하나님의 계명없이 나 스스로, 나를 위해 살아가고 싶은 욕망..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바벨탑의 사건에서 인간 문명의 시작을 하나님처럼 되자는 욕망에서 시작됨을 보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스스로가 왕 된 삶을 살다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받을 영광을 자신이 취하고자 했던 타락한 천사 루시퍼는 결국 사탄이 되어 본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말로,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취하라는 말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데 정말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우리에게 하나님과 같은 힘이, 능력이 주어지게 된다면 과연 행복이 올까?

아니 그 분의 능력, 전능하심의 혹 부분이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요즘, 사회적으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것- ME TOO운동

미국에서 부터 시작된 여성들이 사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받고 있는 성처행, 성폭력, 성차별의 고발사건....

연예인, 정치인, 교수, 성직자....

그런 일들을 고발하는 내용들을 들어보면 

힘의 관계, 불평들의 관계, 권력의 관계, 금전의 관계로서 강자가 약자를 강압하는, 조금이라도 자기가 우위에 있으면 그 힘을 내세워서 그 힘으로 약한 자를 괴롭히는 행위....

급기야 지난 주에는 한 유명 배우이자 학교의 교수가 자기의 학생들의 연이은 성추행 고발에 의해서 교수직에서 물러나고, 소속사에서도 계약해지 되고, 출연하던 모든 드라마에서 하차하게 되면서 자살하는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자신에게 있던 힘이 사라지자 너무 연약한 한 인간이 되어 버린 인간의 나약함을 보게 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대통령이라는 권력이 최순실이라는 여인에게 주어졌을 때에 일어나게 되는 나라 전체가 소용돌이 치는 참담한 현실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의 능력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지는 일을 당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에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 오랫동안 신앙생활에서 이 인간의 욕망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의 근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훈련하고 금욕함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억눌렀습니다. 불교에서도 인간의 모든 고통의 원인을 이 욕망에서 기인한다고 정의하며 인간의 욕망을 벗어나기 위한 무아의 길, 해탈의 길을 제시코자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욕망을 버릴 수 있을까? 히브리어가 말하듯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욕망덩어리인데 그 욕망을 과연 제어할 수 있을까? 훈련해서, 금욕해서 이 욕망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떤 신앙인들은 "욕망을 누르거나" "참으라"고 말하는 대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하나님이 가지신 어떤 것이 아닌, 하나님 자체를 갈망하는, 그 분을 닮고자 하는, 그 분처럼 살고자 하는 거룩한 욕망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헨리나우엔 같은 영성가는 "흔히 사람들은 욕망을 물리쳐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존재하는 것은 곧 갈망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다른 모든 갈망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영성이란 욕망을 뿌리뽑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갈망으로 질서를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주 강한 열정, 열망을 영어로는 Passion이라고 씁니다. 욕망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욕망입니다. 삶을 전부 불태울 수 있는 열정과 욕망이 Passion입니다. 그런데 Passion의 또 다른 의미는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입니다. Passioin of Christ라는 영화는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번역됩니다. 

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리스도의 수난을 Passion이라는 말로 사용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른바 최후의 만찬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장면입니다. 

그 사건을 다룬 13장 1절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배반할 것과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갑작스레 겉옷을 벗고 수건으로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수건으로 그 발을 닦습니다. 


이것이 즐겁고 기쁜 순간에 한 사건이 아니라 그들이 배반할 것과 자신이 죽을 것을 아셨을 때에 행한 사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을 배반할 자들 앞에서 성육하신 하나님께서 인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체에서 가장 더럽고 추한 발을 씻기십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주라 칭하니 그 말이 맞다. 

네기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다. 바르다. 참되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난해한 해석이 요구되는 절은 16절입니다. 

(요 1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자 보다 크지 못하니


이말은 이 장면에서 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지난 시간 너희가 이제는 종이 아니요 내 친구라 말씀하신 주님을 나누었습니다. 다른 구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시간 친구가 되기 위한 조건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할 때에라고 나누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말을 듣는 자가 종이요 똑같이 평등한 것이 친구인데 신앙에서는 말을 듣지 않는 자가 종이요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가 모든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라고 나누었습니다. 

그러니까 종은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는 자들은 종이다.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해도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들보다 크시다. 

그런데 너희가 하나님을 본받으려 하면, 큰 자가 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 하나님의 참 능력은 사랑이다. 사랑을 갈망해라. 

그 사랑의 절정이 바로 가장 뜨거운 사랑, 인간의 모든 죄를 씻어주는, 가장 더러운 발을 씻겨주는 십자가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의미, 그리스도의 삶의 내용,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우리가 가장 욕망해야 할 대상 하나님의 정체,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마20:26)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는 곧 사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곧 소명자, 사도들입니다. 

말씀안에 사는 자는 크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섬기는 자요, 발을 닦는 자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갈망하는 자입니다.


사람은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훈련하고 금욕을 해도 우리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잠잠하던 욕망은 다시금 일어납니다. 

문제는 무엇을 욕망하면서 사는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것을 욕망하며 살아갑니다. 

제것이 줄 알지만 결국은 남의 것이고, 남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나도 갖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런 인생은 비참한 인생입니다. 왜? 우리는 결국 다 버리고 가야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 때문에 싸우고, 갈등하고, 병들고, 하나님과 대적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보여주신 하나님을 욕망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고통, 희생, 십자가야 말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가장 뜨겁고, 강하고, 용광로 같은 욕망이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남의 것은 빼앗으면 싸우게 되지만 섬김은, 희생은, 사랑은 우리가 가지면 가질수록 복이 됩니다. 나에게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살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고 말합니다.

예수를 갈망하십시요 십자가를 갈망하십시요! 그것이 바른 길이요 행복한 삶의 길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예수님의 리더십 (요한복음 15:10-16) 


저는 이른바 할아버지 때부터 비록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를 통해 이어졌지만 3대째 목사집안에서 태어났고 알다시피 3형제가 다 목사입니다. 저의 장인어른도 목사요 그리고 형수도, 제 아내도 모두 신학교를 나왔습니다. 

예전같으면 이것이 자랑이요 자부심이겠지만 현재의 사정을 보면 이것은 자랑이기 이전에 큰 책임감이요, 때론 짐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은 누가 모래도 한국 교회의 쇠퇴기이며 위기입니다. 그래서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목회자로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도 정직하고 바른 목회자가 되는 것이 소박하지만 절실한 저의 꿈이자 사명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훈- 정심 - 바른 마음. 어릴 적 할아버지께서 큰 붓으로 써서 식구들에게 나누어 준 말.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매년 새학기가 시작되면 이런 저런 것을 조사하면서 집안의 가훈이 무엇인가 물었던 기억이 나는데 제가 가르치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가훈이 있는 집이 한 둘을 제외하곤 거의 없었습니다. 


공동체의 정체성, 규율, 공통 가치관... -> 사라져 버렸다. 왜? 개인주의, 물질주의, 가족의 가훈도, 교회의 비전도 명확치가 않다. 

바른 목사, 바른 교회, 바른 목회....제가 목사가 되고 나서 늘 꿈꾸는 것입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었을 때에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서울신대 이정효 교수님이 하시는 목회자 성경학교에 들어가 1년정도 함께 성경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저희 어머니의 스승이기도 하시면서 성결교에서 어머니와 같이 가장 먼저 목사 안수를 받으신 분입니다. 고대 경제학과를 나와서 잘 나가던 여성학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신학을 해서 교수까지 되었는데 목사안수를 못받고 평생 전도사로 있다가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곧 은퇴를 하셨습니다. 은퇴하고 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목회자 성경공부를 시켰는데 평생 자신을 구박하던 남자 목사님들을 은퇴하고 돌아가실때까지 바로 세우는 것이 자기 사명이라 하셨습니다. 


그 분이 요한복음 10장11-14절, 목자와 삯꾼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요 10:11-14]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이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나는 여러분들이 선한 목자가 되었으면 하고 날마다 기도한다. 그런데 많은 목사님들을 보아 오면서 그것이 너무 큰 기대구나 하는 실망이 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여전히 기도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여러분들에게 그나마 바라보 싶은 것이 있다면 삯꾼이 되더라도 정직한 삯꾼이 되기를 바란다.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삯꾼이지만 그 삯을 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게으른 자는 그 삯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 사회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교회에서 성도들의 헌금으로 살아가는 목회자들이 그 받는 삯의 가치보다도 못하면서 목회를 한다면 그건 정말 나쁜 목사다. 삯꾼이 되려면 그 삯의 값이라도 제대로 하는 목사가되어라...


로고스교회 담임이 되고 나서 이 말을 다시 한번 새기면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과 대화하듯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정직한 목사가 되게 해주세요. 제가 받는 삯의 값이라도 제대로 일하는 목사가 되게 해 주세요.... 

물론 저는 그 삯이 교회에서 받는 페이를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너 지금 얼마받냐?" 

그 때 제가 받던 페이가 2000불이었습니다. 그래서 "2000불 받아요..." 

그런데 그렇게 대답했는데 하나님께서 "또?" 하고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또요? 가끔 성도님들이 선물도 주시고, 밥도 사 주시고....

그러는데 하나님께서 또?하고 묻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기도 중의 음성이 내가 죽어 너를 샀다...너의 삯은 내 피다...


그러면서 정직한 삯꾼이 되라는 말씀은 결국 예수의 피값에 걸맞는 가치를 지닌 목사가 되어라는 말로서 다가왔습니다. 


  •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목사이고 바른 목회인가? 지금까지도 늘 저를 기도하게 만드는 질문..


그러면서 2015년 교회의 표어를 위해 기도하는 중 오병이어 사건 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지신 한 말씀, "너희가 주어라"는 말씀을 통해 저는 구약의 리더들과는 다른 예수님의 리더십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리더들은 철저히 구별된 리더십이었습니다. 그들은 따로 기름부음을 통해 세워진 리더들이었고 백성들은 오직 그 리더에 의존했습니다. 리더가 바로 서면 그 공동체는 건강했고 리더가 타락하면 그 공동체 전체가 타락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러 왕들이 황금송아지에 절하며 자기 방법, 자기 만족을 위한 예배를 드리는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기 때문에 시작부터 멸망때가지 계속적인 타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공동체에서 리더의 영성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리더만 좋다고 그 공동체 모두가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리더십의 문제는 모세가, 엘리야가, 기드온이, 다윗이 아무리 훌륭한 영성과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했어도 그들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변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서 얼굴의 빛에 광체가 났어도 백성들은 여전히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모세에게만 하나님과 관계하라고 합니다 

제사장만 거룩하면 이스라엘은 오케이였습니다. 

단지 그 제사장이 이렇게 하라면 따랐지만 그렇다고 백성들의 삶이 모두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대다수의 교회의 모습이 여전히 그런 구약의 모델을 따르고 있습니다. 

담임목사의 영성이 교회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목사만 쳐다보고 신앙생활 합니다. 

목사가 기도많이 하면 성도의 삶에도 활력이 넘치고 말씀 잘 증거하면 은혜를 받기도 합니다. 

목사를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물론 지금은 엣날보다 못하지만 권사님들이나 많은 성도님들도 여전히 목사의 말을 하나님처럼 여겼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말씀을 전해주는 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듣는 것은 좋은 신앙의 유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그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운동경기에 비유하면 선수는 목회자입니다. 목회자만 교회라는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고 성도들은 관중이 되는, 그래서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보는 중에 목회자만 북 치고 장구치고 재주를 넘는 경기를 합니다. 관중들은 다만 선수가 잘하면 박수치고 못하면 얼굴을 찌푸립니다. 성도들은 그 경기에 참여조차 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전투, 기도의 훈련, 말씀의 훈련, 참여하라면 바쁘고, 무관심하고, 그건 목사가 잘 해서 우리를 보호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목자는 양을 훈련시키는 자입니다. 선수는 성도이지 목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구약의 기름부음을 받는 리더들과 달랐던 것은 예수님은 제자들을 뽑으시고 처음부터 그들로 하여금 짝지어 나가 복음을 전하게 하고, 귀신을 쫓게 하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 때는 장정만 오천 명 모인 그 무리를 바라보며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주어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빈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빈말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재로 그들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부활 후 베드로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것도 "내 양을 먹이라"입니다. 


구약의 리더들...구별된 자들, 세습된 자들, 레위인, 제사장... 다 세습되고 구별된 자들..사회의 엘리트들.... 

그런데 예수님 이후 초대교회- 어부들, 세리, 창기, 이방인... 갈릴리 어부들이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됨... 

무엇으로? 예수로, 성령으로... 


자, 교인 수가 많아지면서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기 위해서 일곱집사를 세워 행정을 담당하게 합니다. 이것이 원래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죽은 장면을 보면, 빌립이 에티오피아 사람을 전도하는 것을 보면 집사들은 행정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증거하고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합니다. 사도와 집사가 결국 같은 일을 합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정신과도 부합됩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만인 제사장입니다. 성도와 성직자의 구분이 없어졌다. 모든 직업이 하나님께로 받은 성직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 

어느 때 부턴가 가톨릭 못지 않은 성직자의 권위, 목사의 권위를 강조하기 시작. 

물론 목사는 영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영권은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대언하는가에서 나오는 것이다. 영권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부여 받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지 사람이 세워줄 수도 없고 억지로 세워서도 안된다. 많은 교회의 목사님들이 넘치는 권위에 치여서 망가지고 정신을 잃고 타락합니다. 그리고 믿었던 목사가 타락하는 것을 보는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떠납니다. 


  •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바로 "친구"라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예수 내 친구, 친구되기 원합니다. 찬양을 부르기도 합니다. 

구약의 시대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의 권위를 넘보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권위에 제동을 걸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문등병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내 친구라 명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친구라 부르십니다. 

물론 이 친구라는 표현은 존재론적 동등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 아닙니다.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을 친구로 부르신 것은 비밀이 없게 하리라. 비밀을 공유한다는 말입니다. 

종은 하나님의 생각을 모르지만 친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밀은 아무에게나 그냥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가 되기 위한 조건은 14절 -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우리는 이 말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명령대로 행하는 자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명령대로 행하는 자는 종이요, 부하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명령대로 행하는 자가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그 말씀을 지킬 때에, 살아갈 때에 비로서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서구- 앎: Understanding 

히브리 - Living, Experience.


그래서 예수님도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했다. 거했다는 것은 그의 사랑 가운데 살았다. 그의 사랑과 함께 했다,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너희도 내 사랑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내 계명을 지켜라....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고 그 사랑 안에 살아가는 것이고, 세상에 요동하지 않는 자유함을 얻는 것이고 주님의 친구인 것입니다. 

사탄은,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내 마음대로 살아서 하나님과 같아지라고 유혹하지만 주님은 그 말씀 안에 거하면서 주님의 친구가 되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친구되기 위해서 내가 너희를 위해 죽었다. 너희도 내 친구가 되면 복음을 위해, 친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가 된다. 사랑의 화신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로고스 교회의 목사로서 여러분들이 내게 주신 삯, 주님이 날 사신 피의 삯의 값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적, 삶의 모델이 되고자 노력할 것이고,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것이고, 바르고 정직한 목사가 되고자 할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주님의 친구가 되고자 힘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과 동시에 저는 여러분들이 주님의 친구가 되도록 돕는 좋은 코치가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배우고 경험하고 터득한 모든 신앙의, 신학적인 것들을 숨김없이 나누고, 가르치고, 토론할 것입니다. 제가 그것에 익숙해지기를 애쓰듯 여러분들도 저를통해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경험하고, 살아있는 말씀과 함께하는 그래서 예수의 사랑을 Understanding이 아닌 Living with Love, Experience Jesus every moment할 수 있는 주님의 친구가 되기를 기도하고 실천할 것입니다. 


요한- 구약의 인물 중에 다윗을 제일 좋아한다면 신약의 인물 중에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사도요한입니다. 

 - 베드로와 늘 경쟁 관계에 있던 수제자. 가장 어리지만 예수와 가장 가까웠던...부요하고, 

그런데 예수꼐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 내 어머니라... 아들이라.. 육신의 어머니를 맡기심.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큰 리더가 되고 선교하고, 순교하는데... 자신은 열두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가장 오래까지 살아남아 밧모섬에서 자연사한 제자... 

그러나 그가 요한 복음에서 자신을 가리켜 늘 지칭하는 말- 예수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 

가장 많은 비밀을 공유... 계시록.. 가장 깊은 신앙의 성숙- 요한서신...

가장 깊은 예수와의 관계- 요한 복음


저에게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제게 맡기신 마리아 같은 존재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의지하고 믿고, 이제 제 설교 지긋지긋하다 재심임 묻자 하기 전에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통해서 여러분과 함께 꿈꾸며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들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는 것입니다. 

어떤 누구보다 믿음의 비밀을 깨달아가며, 주님과 깊이 교제하며 서로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 그런 성도를 꿈꾸시며 날마다 주님과, 저와 성도들과 함께 거하시며 기쁨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