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02019  이전 다음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화평케 하는자'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3.01.16 1월 13일 주일예배 설교 그리스도인의 복 4

주일예배 설교

그리스도인의 복 4 –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마태복음 5 1-12

어렸을 때에 부모님은 혹이나 제가 나쁜 친구들을 사귀어 타락하지는 않을까 걱정하시면서 키웠습니다. 특히나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남학생들에게 타락의 길은 얼마나 많이 열려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혹시 나쁜 영향을 받을까 봐 친구를 사귀는 것도 힘들었고, 학교 끝나면 도서관과 집, 주일에는 교회만 오가는 단순한 삶을 살곤 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끼리 말을 하다 보면 말하는 것의 절반이 욕이 섞인 말을 합니다. 학급의 절반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친구들입니다. 저는 그 절반의 친구들 사이에 끼지 않기 위해서 항상 친구를 사귀는 데에 조심했습니다.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곧 나를 깨끗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중고등학교 6년동안 고 3때를 제외한 5년동안을 반장을 했는데 반장하는 기간 중에 절반의 친구들과는 이야기도 잘 하지 않는 반쪽짜리 반장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고 2 겨울 방학 때 인천에 교회를 개척하자 어느 날 갑자기 가정이라는 보호처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학교 끝나면 도서관 갔다가 곧장 피해 있어야 할 가정이 없어지니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반에서 소위 논다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욕이 귀에 거슬리지 않게 되었고 그들이 하는 행동, 문화들도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같이 어울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두려워하던 노는 애들이 가까이서 보니까, 함께 어울려 보니까 별게 아닙니다. 물론 정말 주먹 잘 쓰고 험악한 아이들도 가끔 있지만 대개는, 공부 잘하고, 나쁜 짓 않하고, 부모에게 보호받는 아이들과 똑같이 착하고, 나름대로 마음 씀씀이가 있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아는 그런 애들이었습니다. 단지 부모로부터, 선생님들로부터 언제 부턴가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하고, 오해 받고, 외면당했던 아이들이라 상처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 때의 경험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 바꾸어 놓았습니다. 반장으로서 일한 5년보다 노는 아이들과 지냈던 1년간의 기억이 훨씬 더 많고 또한 값집니다.

대학에 와서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프로이드란 사람을 깊이 공부했습니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교육이나 종교로서 가면을 쓰고 살지만 행동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많이 배운 사람이든 아니든, 사회적 지위가 높던 아니든 결국 인간은 본능과 욕망에 지배받아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과 행동으로 포장할 뿐이지 결국 사람들은 본능적이고 욕망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사회를 살펴보니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본능적인 삶을 피하라고 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죄의 근본이고, 이 세상의 풍조라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정욕적인 삶, 본능적인 삶, 육신적인 삶을 피할 수가 있습니까?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열심이 대단했던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특히 613개에 달하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청결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루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율법과 전통에 의하면 씻지 않은 손은 부정하다 하여 손을 씻지 않고서는 절대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따졌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7:15-16)

마태복음에는 그들에게 더 심한 말씀도 하십니다.

[ 23:27-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하얗게 회칠한 무덤은 겉에서 보기에는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나 무덤이 어떤 것입니까? 아무리 밖을 깨끗하게 칠하고 단장해도 무덤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것 같았지만, 그 마음에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눈 먼 바리새인들이라 부르시면서 안을 깨끗이 하라고 하십니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 23:26)

ex) 소경 바디메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께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주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바디메오는 눈이 열려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가 눈이 열려 예수님을 보게 되자 행한 것은 바로 길에서 예수를 좇게 되는 장면입니다. 그가 만일 육신의 눈만 열리기 원했다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디메오가 본적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니까 온전히 예수님을 좇습니다. 예수님을 봄으로 천지의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신령한 눈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전 삶을 바쳐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삽니다. 영적인 눈이 열렸기에 삶의 변화가 왔음... 마음도 몸도 물질도 예수님을 따름...

“나를 따르라.” 주님의 말씀...우리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게 되면 이때부터 나의 마음, 나의 생각,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을 따르게 됨.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세상을 좇아갑니다. 세상을 보고 탄식합니다. 그의 눈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열려서 예수를 본 사람은 예수 안에서 자기를 보고 세상을 봅니다. 불평이 없고 원망이 없고 탄식이 없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6:5절의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은자신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막 12:30절의 말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도 하나님께 집중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청결하다는 말은 키질하고 채로 쳐서 모든 겨를 제거한 곡식에 사용된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지고, 하나님의 의를 사모함으로 말씀으로 나를 가다듬고, 닦아서 마음 속의 불순물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마음이 청결한 것의 반대로서 쓰인 표현은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가장 해로운 것이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결혼한 남편이 바람을 피다가 아내에게 걸렸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한다는 말이 당신도 사랑하고 그 여자도 사랑해.”하면서 어느 쪽 하나 포기하지 못하면 그 삶은 망가져 버립니다. 모든 사람을 다 불행하게 만듭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상을 겸하여 섬긴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두 마음을 품는 자에 대해 얼마나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지 모릅니다.

야고보서 1:8절을 보면두 마음을 품은 자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 호세아 10:2절은 두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하나님은 두 마음을 품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벌을 받을 것이다며 분명한 어조로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두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라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다가 결국 실패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복을 받아야, 내 자식이 잘 되어야, 내 남편이 출세해야 하나님도 영광이요, 나도 영광이요라는 식의 기도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내가 잘된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스스로 영광으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높으나 낮으나 변함없이 그 분은 영광으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한 마음을 품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에 주시는 복이 너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항상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 ‘마음을 하나님께만 집중한 채 무슨 일을 하든 순수한 동기로 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마음뿐 아니라 평소 행동과 삶도 순수한 동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마음이 청결한 자에 대해 시편 24:3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 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마음이 청결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출애굽기 19:3절을 보면 모세가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모세를 연단하신 후에 세상적인 모든 정욕과 기대를 버리게 한 후에 그를 산에 오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세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친밀한 교제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항상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늘 말씀드리며 강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벽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려는,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음을 받을 것입이요. ( 5: 9)

평화의 복은 팔복 중 일곱 번 째의 복입니다. 일곱은 유대인에게 완전한 숫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일곱 번 째 복인 평화의 복은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를 온전한 자로 보셨습니다. 인간이 사는 동안 모든 일을 완전케 하는 복이 바로 평화의 복입니다. 이 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는 복 다음으로 받는 복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갈라진 마음, 두 마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했다.

일곱 번째의 복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케 하는 것이 바로 평화임을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먼저 자기 마음 속에 화평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 평화를 복 중의 가장 최고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날 때마다 서로 샬롬하면서 인사했는데 샬롬은 바로 평화라는 히브리어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평화, 평강, 평안, 화평 이라는 단어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말로는 조금씩 다르지만, 히브리어로는 모두다샬롬으로 같습니다. 즉 샬롬이 화평이 평화이고, 평안이고 평강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화평하게 하는 자 Peacemaker,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화평케 하는 사람,  샬롬의 사람, Peacemaker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의 것들이 왜 참 복이 되지 못하는가? 물질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명예가, 권력이 아무리 높아도 평화를 간직할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복들은 성공하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평화를 잃어버리고 깨뜨리고 사라지게 합니다.

또한 이 복이 왜 최고의 복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되는 것은 최고의 복입니다. 아들이 되면 천국, 위로, 만족, 긍휼, 기업, 하나님과 살 수 있는 모든 복을 다 누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은 완전한 복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복의 모델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화평케 하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나실 때부터 평화의 왕으로 나셨다. 베들레헴에 나실 때 허다한 천군이 천사와 함께 찬송하여 가로되 “(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친히 제자들에게 “(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2:14)

하나님의 평화는 둘로 하나를 만드는 평화입니다. 나뉘었던 것이 하나가 되는 평화입니다. 서로 달랐던 것들이 담이 허물어지면서 같은 하나가 되는 평화입니다.

예수는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부활하심으로 평화의 복음을 완성하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그의 일생은 화평케하는 자의 온전한 일생이었다.

우리가 화평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세계 평화를 외치는 평화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또 평화를 외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Peacemaker,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생각으로만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내 손과 발을 통해 화평하게 만들어가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8:7)

 

평화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을 받은 후에 평화의 사도가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에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다.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이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한다. 내 속에 있는 분쟁을 없애지 않고는 평화를 창조할 수가 없다.

 

인류의 모든 문제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미움과 증오와 원수 맺는 타락한 본성 때문이다.  이것은 교육으로 될 수 없다. 사상으로도 안된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다. 성령은 평화의 왕이다. 평화의 왕이 임할 때에 우리가 평화의 사람이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어 평화의 사도로 임명했지만 그들은 평화의 사도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의 심령 속에 평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3년 동안 배웠지만 그들은 원수를 사랑할 수가 없었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없었다. 그들 안에 평화의 복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뒤를 따르면서도 그 마음 속에는 평화가 없었다. 제자들은 서로 시기하며 다투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십자가의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데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자냐고 자리다툼을 하고 분을 내고 있었다. 그들의 심령 속에 평화의 복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도 언제나 마음 속으로는 칼을 품고 있었다. 자기를 압제하는 로마를 정복하는 꿈... 자기 실현 자기 목적, 오직 성령이 임할 때에 평화를 누릴 수가 있다.

 

형제들과 화평을 이룰 하나님의 아들이 ...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까지 용서하시고 평화를 이루심...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에 미움받고도 사랑하고, 욕을 먹고도 축복하고, 핍박을 받고도 핍박하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죽지 않고는 다른 사람과 평화를 누릴 수가 없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를 누려야 한다. 평화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을 계속 해야 한다.

 

ex) 아브라함...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양보하고 포기...

우애하고 화목하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한다. 자기 욕심을 다 채우고는 결코 화목하기가 힘들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자신을 부정하는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형제들과 화목하고 평화로운 사람은 행복하다. 서로 원수 맺고 싸우고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인류의 가슴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자기를 죽여 평화의 사도가 되었다. 지금도 이 민족 역사에 평화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죽이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내가 죽지 않고는 가정이나, 교회, 이 사회 어느 곳에도 평화를 이룰 수가 없다.

순교는 평화의 사도가 되는 신앙행위이다. 순교는 원수의 손에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으로 원수와 평화를 이루는 행위이다.

원수의 칼에 죽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자기 죽음을 자원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만약 원수의 손에 죽으면서 마음 속에 미움을 품고 죽어간다면 이것은 순교가 아니다. 자기를 적대하는 사람에게 평화를 이루고 자신이 먼저 죽어서 원수의 마음 속에 평화를 심어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화해의 재물로 바치셨다. 그는 죽으면서도 원수의 밥이 되어 돌아가셨다. 자기를 죽이는 그 악한 무리들을 위하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알지 못하여 그러하나이다.”라고 기도드리며 그들을 용서했다.

예수님은 죽기 전에 자기 할 일을 알고 계셨다. 그것은 원수에게도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자기를 죽여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은 평화의 산 증인이다. 순교의 제물은 어디나 있어야 한다. 자기를 죽이고 가정에 들어가면 가족들의 마음에 평화가 임한다. 직장에 순교자로 들어가면 동료 직장인의 마음을 평화롭게 할 수 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