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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국정지지도'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9.07.28 하나님의 국정 지지도 (욘 4:1-11) (1)

하나님의 국정 지지도 ( 4:1-11)

 

정치 뉴스나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매주 실시 되는 여론 조사 중에서 빼놓지 않고 하는 것이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등 가까운 나라들의 국정 지지도를 여론 조사에서 매주 실시하는 것을 보게 된다.

 

대부분 대통령 당선이 되면 70-80퍼센트의 국정지지도를 받게 되면서 지지했던 사람이던지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조차도 초기의 국정 운영에 기대 반 희망 반을 섞어 지지를 보내게 된다.

 

미국이나 일본과는 다르게 우리나라 대통령의 임기중의 국정 지지도의 특징은 2년차가 되면서부터 급격히 줄어들다가 3년치가 되면 대부분 절반에도 못미치고 최악의 경우 20-30%를 유지하는 경우가 반복되어 왔다는 것이다.

 

대통령 임기 5년 중에 집권 3년차에 50퍼센트를 넘긴 대통령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추락하는 지지도의 이유는 대부분 부정부패와 관련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경제적인 이유, , 자기 들의 삶이 좋아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부정부패야 합당한 이유라 할지라도 경제적인 무능에 대해서 한 정치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현재 경제 상황에 대해서 호황이라거나 먹고 살만하다는 기사는 본적이 없다.

때로 미국이나 일본의 경제지를 보면 통계적인 수치를 예로 들어 경제가 나아졌다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기사를 쓰기도 하지만 유독 우리나라 신문은 수치가 좋아져도 서민들의 체감 온도는 나아지지 않았다. 실물 경제는 나아지지 않았다고 객관적인 지표마져도 부정하며 박한 평가를 준다.

미국에서도 레이건이나 오바마 같은 대통령들은 임기가 마칠 때까지 지지도가 낮아지지 않았고, 지금 우리나라에게 그렇게 비합리적인 경제보복을 행하는 아베수상 마져도 일본인들은 절반 넘는 지지를 보내는데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역대 어느 누구도 집권 3년차 이후로 50퍼센트 이상의 지지도를 유지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지도자의 평가에 대해서 우리는 박하다. 만족하지 못한다.

 

성경에 보니 성경의 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도 물이 없거나, 고기가 먹고 싶다거나, 매일 매일의 삶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백성들로부터 끊임없는 불평과 원망을 들어야 했다.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평가되는 다윗 역시 자기 아들로부터도 배신당하고, 가장 친한 친구요 전략가였던 아헤도벨로부터도 배신당하고 시므온과 같은 백성들로부터 조롱을 받게 됩니다. 예레미야같은 선지자들은 왕과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아 옥에 갇히거나 매를 맞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 참 어려운 일이다.

 

난 오늘 설교의 제목을 "하나님의 국정 지지도"라고 잡았다.

정치 기사를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할까 하는 궁금함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의 지지를 보내는가?

지지하는가? 아니면 못마땅한가? 하나님의 치리 방법에 대해 불평한 적은 없는가?

 

오늘 나눈 말씀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극단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한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님께 불만이 가득했다고 해서 가인이나 가룟유다같은 악인을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요나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리던 여로보암 2세 때 나라를 대표하는 선지자였고 (왕하 14:25), 그 이름의 뜻이 "비둘기, 평화"를 뜻하면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선지자였다.

 

이스라엘의 번영과 회복을 위해 전심전력하는 요나에게 어느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 명하신다. 니느웨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앗수르의 수도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며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나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유하게 된다. 그 곳에서 다시 하나님께 회개하여 돌이켜 다시 니느웨로 가서 앞으로 40일이 지나면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 전하게 된다.

 

그런데 요나의 이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니느웨 전체가 회개한다. 왕부터 모든 백성, 심지어 가축 때까지 회개를 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보며 다시금 분개하는 것이 요나서 4장의 내용이다.

 

1. 요나의 기도

[4:2-3]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2장에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을 회개했던 요나는 다시 회개의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자기가 했던 행동이 옳았었다고 말합니다.

요나의 한계는 무엇인가? 회개하여 다시 내가 살만하게 되자 가 살아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한 때는 주님을 찾으면서 주를 찬양했지만 한순간 주인이 하나님에게서 나로 바뀌어버렸다.

 

2장의 기도의 내용을 봅시다. 22절부터 9절까지는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서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입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3)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6)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7)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주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9)

 

2장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요 회복의 기도였다. 주가 행하신 것과 자기를 건지심에 대한 찬양이 나온다.

그런데 4장의 기도는 회개했던 내용까지 돌이킨다.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으며…”

다시스는 어떤 도시인가? 니느웨 못지 않은 죄악과 쾌락의 도시, 환락의 도시이다. 선지자도 하나님을 떠나니까 한순간 세상의 죄악의 길로 빠져 버리게 된다.

 

2절이 기도에서는 자신이 다시스로 간 행동과 그로 말미암아 경험케 되는 추락을 철저히 하나님 앞에 고하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회개한다. 그런데 다시 요나의 마음 속에 라는 자아가 등장하고 죄악의 생각이 지배하게 되자 자신이 다시스로 간 행동을, 이미 회개한 자신의 행동을 다시금 합리화하고 토를 달고 변명하기 시작한다.

 

·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B)

-> 이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 아니다. 좀 비꼬는 뉘앙스이다. 진심의 고백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시지요. 내가 그럴 줄 알았어요.”

->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사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다.

 

왜 비꼬느냐? 하나님이 심판 한다고 했는데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셨다. 자기는 심판을 선포했는데 니느웨는 심판당하지 않고 회복했다. 하나님, 당신은 자신의 말을 어겼고, 당신 떄문에 자신의 예언까지 틀렸다는 것이다.

첫째는 니느웨가 용서받은 것에 대한 분개이지만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스스로 어겼고, 당신 때문에 내 말도 거짓이 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 선악과

-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 사탄 : 네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아담과 하와 안죽네요? 먹어도 안죽네요?

선악과를 먹자마자 하나님이 하신 반응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심.

하나님의 마음: 너 나에게서 멀어져가면 고통이 온다. 고난 당한다.

인간의 마음 : 그래도 안죽어요. 혼자 살래요.

탕자: 내 분깃을 주세요. (폐륜) -> 아들을 보내놓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다 써버리고 나서야 돌아오는 아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 돌이켜라. 회개해라.

요나의 반응: 왜 심판 안하세요? 왜 용서하세요?

 

·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4:3)”

자신의 한계의 극치이다. 내 뜻을 죽어도 굴복하지 못하겠다. 죽어도 저 사람이 복받는거 못보겠다. 죽어도 하나님의 일에 동의할 수 없다.

얼마나 자아로 꽉 차있는 사람인가?

신앙 안에서 나를 죽여달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표현이다. 차라리 이런 저런 꼴 안보고 죽겠다는 표현이다. 감정이 한 번 이렇게 폭발하면 이성적인 모든 사고도 중지된다. 이것은 다분히 한국적인 표현이다.

죽겠네..차라리 죽여라...죽어도 안해..” 자신의 고집의 극한 표현이다.

 

· (4: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요나는 성내시지만 하나님은 얘기하기 원하신다. 돌아보기를 원하신다

 

너는 구별된 선지자로서 내 대변자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대변인은 글을 써준대로 읽는 사람이 아니다. 그 마음을 잘 알고 그 마음을 사람들에게 잘 납득시킬 수 있는 자가 대변인이다. 한마디로 마음이 통하는 자가 대변자이다.

선지자 - “나비” - 대변자

 

이러한 질문에 요나는 대답이 없다.

6. (4:5)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침묵하고 응답하지 않는다. 죄를 짓자 아담처럼 숨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죄를 지면 더 이상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으려 한다. 한계가 꺾여지지 않으면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5절 앞에 그러나만 붙이면 13절의 말씀과 똑같은 의미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응답 하면서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성에서 나가서 초막을 짓는다. 초막은 또다른 다시스의 공간이다.

 

초막은 무엇인가?

이것은 철저히 자기만을 위한 공간이다. 선지자가 일어나 외치지 않으니까 이제 내 안일과 평안과 안위를 위해서 일하게 된다.

3절에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불손하지만 담대하게 대항했던 요나는 하나님께서 행동을 돌아보도록 질문하시자 침묵하고 죽지도 않고 이젠 자신을 위해서만 산다.

 

· (4:6)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대한 요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물론 더운데 박넝쿨이 생겼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는 한마디도 감사하지 않고 그저 그 박넝쿨로 인해서만 기뻐합니다. 박넝쿨을 주신 하나님때문이 아니라 오직 박넝쿨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1장에도 4장에도 차라리 내가 죽겠습니다. 했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갇히니까 회개하고 차라리 죽고 말지 했던 요나가 박넝쿨로 인해 기뻐하는 모습. 또 그 박넝쿨을 거두어가시니까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

 

7절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벌레를 준비하십니다. 벌레는 미천하고 작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하고 찬양하며 우리를 낮출 때에는 벌레만도 못한 나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요나가 기대고 있던 복인 박넝쿨을 그런 미천한 벌레가 취해갑니다. 그럼 요나가 기대고 있는 복인 박넝쿨은 무엇입니까? 미천한 벌레가 취해 갈 수 있는 벌레보다 못한 허무한 것입니다. 있다가도 하루아침에 없어질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기대하고 의지하고 있는 복의 실체입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가 의지하고 붙잡는 모든 것이 마치 이 박넝쿨 과 같다. 하루 아침에 없어질 허무한 것이 세상의 복이다.

박넝쿨이 사라지자 뜨거운 동풍이 불어오는데 뜨거운 동풍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벌하시기 위해 준비했다기 보다는 중동지역에서 자연스럽게 불어오는 현상이다. 그늘이 없으면 당연히 생기는 중동의 뜨거운 바람이다.

 

박넝쿨이 있을 때에는 햇볕도 가리고 뜨거운 바람도 가리지만 은혜를 깨닫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보호하심 없는 자연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없는 자연상태는 무엇인가? 사탄이 지배하는 자연상태가 바로 지옥 아닌가? 1장과 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대로 내어버려두사 라고 말씀하신다. 그대로 내어버려 두시는 결과는 괴로움이고 눈물이고 죽음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우리가 심판 당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연 상태 그대로가 우리에게는 고통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는 한 시도 살 수 없다.

은혜 밖의 세계는 벌레가 있는 세계이고 동풍이 불어오는 세계이다.

 

내가 만족스런 신앙생활이 아닐찌라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살아가는 이유는, 내가 흔들려도 넘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핵심을 찌르는 마음이다.

11

너랑 상관없는 박넝쿨도 아끼거늘 니느웨 사람도 내 자녀들이란다. ”

 

사람의 좁은 마음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열방을 향한 넓은 마음이 드러난다.

그들이 죄를 많이 지었어도, 날 떠나고 우상을 숭배했어도 내가 원하는 것은 그들이 지금이라도 돌아와 내 안에 거하여 복을 받는 것이다. 재산을 다 가지고 나간 아들이라도 아버지의 마음은 한결같이 어서 들어와서 아버지의 품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요나서는 결론 맺지 않고 끝난다. 아마도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순종치 않았을까?

왜 요나서는 결론 맺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만을 남기고 끝이 나는가?

그 끝멪음은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 하나하나가 다 요나다. 우리는 다 요나같이 불순종하며 요나같이 성내고 요나같이 좁은 마음을 가지며 하나님과 수평을 달리는 과정을 지났거나 혹은 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안 사람들이 회개한 요나가 되어서 복음을 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들고 전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하고 계신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 극단의 길을 달려갈 때가 많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물어오시길 바라신다. 해답을 구하기를 원하신다. 왜 묻지 못하고 극단의 길을 가는가?

절대로 감정적으로 이끌리지 말라. 감정은 항상 내 중심적이고 욕망에 이끌린다. 나는 잘하니까 문제를 다른데서 찾으라고 한다.

 

훈련을 통해서 문제에 감정을 싣지 않고 항상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자.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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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8.06 01:37

    샬롬^^
    감사합니다. 장문의 은혜로운 말씀 잘 숙고하고
    갑니다.
    요나와같은 저의 마음을 항상 은혜로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더운날씨에 건강 잘 챙기소서.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