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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10.12 그들이 가려던 땅 (요한복음 6장 16-26절)
  2. 2014.12.01 마가복음 4:35-41절 (폭풍우) (1)

그들이 가려던 땅 (요한복음 6장 16-26절)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의 가장 큰 표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루고 있다.

이 표적은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표적 중에 가장 중요한 기적, 혹은 표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예수님은 이 사건의 의미를 6장 전체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가나 혼인 잔치를 통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그 분의 보혈의 은혜로 잃어버린 즐거움을 회복시키시는 사건이라면 오병이어의 사건은,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로 말미암아 굶주려버린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늘의 만나로서 영원한 생명으로 공급하시는 생명의 떡 되신 주님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오병이어 사건과 그것에 대한 설명 사이에서 또 다른 표적의 사건으로 기록된 것이 바로 오늘 다룰 오병이어의 현장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폭풍우를 뚫고 가는 제자들에게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에 대한 사건이다. 그래서 이 표적은 오병이어 표적 안의 또 다른 표적, 오병이어의 의미를 완성케 하는 표적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병이어에 대한 설교는 몇번에 걸쳐 했기 때문에 오늘은 오병이어의 표적 안의 표적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어보고자 한다.

 

  • 오병이어 사건 이후 백성들의 반응

[요 6:14-15]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그 선지자 -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 그리고 그 분을 왕으로 세우려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그 이유를 26절을 통해 밝히고 있다.

 

26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걸으실 십자와 부활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 분이 행하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을 위해서 표적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사람들이 찾는 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는 상관없이 그저 나를 배부르게 해 줄 왕이다. 그리고 나를 배부르게 해 줄 왕이라는 것은 그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리고 초대교회 공동체에 와서까지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잘못된 신앙으로 빠져드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잘못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무리들과 백성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 제자들을 바다 건너 가버나움으로 보내시고 (마, 막 -> 즉시, 제촉하사) -> 무리들에게서 이들을 떼어 놓으심
  • 무리들을 보내신 다음
  • 자신은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러 산에 올라 가심

 

그들이 스스로 원해서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마도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백성들이 예수를 왕 삼고자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한 껏 의기양양하고 들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순간 주님께서 급히 그들을 바다 건너 땅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배를 탔고 바다를 건넜다.

 

떡을 먹고 배부른 그 땅에 좀 더 머물면서 그 날의 은혜를 나눌 수도 있는데 주님은 급히 제자들을 바다 건너 땅으로 보내신다.

문제는 주님의 이 명령 이후에 나타난다.

 

말씀따라 바다를 건너는데 폭풍우를 만난다.

 

주님의 길을 가는데 왜 어려움을 만나는가?

말씀따라 순종하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않는다" (17절)고 성경은 전한다.

어두웠다는 것은 영적 어두움이 임했다는 것이다. 영혼의 깊은 밤이 임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영혼은 밤을 맞고, 예수는 보이질 않고, 바다에는 풍랑이 인다.

내 맘대로 가다가 맞게 되는 풍랑이라면 불순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 가라해서 가는데 풍랑이 일고, 주님은 보이질 않고, 영혼은 침체된다.

단 한 번만의 사건이 아니라 성경에서 반복되는 패턴이다. 말씀따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르렀는데 기근을 만나고, 말씀따라 홍해를 건넜는데 광야를 만난다.

 

이 풍랑을 만난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도 항상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연속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 풍랑을 만나는 사건은 누가 당하는 사건인가?

제자들만 만나는 사건이다.

 

  • 배에 타지 아니한 다른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요 6: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 바다 건너 편에 서 있던 무리- 오병이어의 현장에 있었던 무리들
    • 그들이 목격한 것 - 가버나움으로 가는 배는 단 한 척 - 예수는 타지 아니한 것을 보았음
    • 아침이 되자마자 그들은 다시 오병이어 현장으로 달려간다. 왜 그리로 갔을까? 또 다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기 위해, 다시 말해 또 다시 떡을 먹고 배부르기 위해 그 현장을 갔을 것이다.
    • 그런데 그 현장에 가 보니 예수도 없고 제자도 없다. 예수를 찾아 무리가 배를 타고 다시 가버나움으로 간다. 그 곳에 가니 제자들도 있고 분명이 같이 떠나지 않았었는데 예수도 그 자리에 있다.

 

-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25절) 아니 어떻게 언제? 분명 제자들과 함께 가지 아니하였는데 어떻게 여기 계십니까?

- 그렇게 예수 찾으러 온 무리들을 보시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러면서 이른바 하늘로부터 오신 생명의 떡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60절) 하면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더라"(66절)고 성경은 증언한다. 그들에게 생명의 떡이니 영생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과 상관없는 말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금, 당장, 내 배를 채워줄 신이다. 그게 예수이건, 아니면 다른 신이건 그들은 당장 그들을 배부르게 해 줄 신만 있으면 언제든 옮겨다닌다.

 

  • 다시 배에 탄 제자들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

[마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 역풍을 만남 - 어떻게 하면 역풍을 피할 수 있을까? 배의 방향을 돌리면...

그런데 돌리지 않는다. 왜? 주님이 건너가라 말씀하셨으므로...

그런데 그렇게 건너려니까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한다.

배부른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려니 고난이 이만 저만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걸어가야 할 길이 바로 바람을 거스르며 가는 것이다.

  • 세상을 거스르는 삶: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요일 2:15-16]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 죄된 본성을 거스르는 삶

[마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왜 말씀따라 순종하는데 고난을 당하는가?

그 길은 세상에 거스르고, 내 본성에 거스르고, 악한 모든 죄에 대하여 거스르는 삶이기 때문이다.

대충 사람들 하는데로 따라가면 되는데 말씀은 그렇지 말라하고

남들 하는 것 다 해 보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성경은 그거 해 봤자 별거 아니라고 하고....

그래서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또 나 자신의 죄성과 항상 부딪치며, 거스르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내 힘으로는 절대 갈 수 없다. 그런데 그 길을 우선 떠나야 한다.

작정하고 내가 주님 믿는 사람으로서 말씀대로, 똑바로 살려고 길을 나서야 한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듯이, 모세가 미디안을 떠나 바로에게 가고, 바로에게서 광야로 가듯이, 말씀에 의지해서 떠나는 자에게 은혜가 임한다.

 

처음에는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분명치가 않다.

대충 죄 짓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도 자기는 예수 믿는 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평생 말씀 한 번 읽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 눈에 날마다 말씀읽으면서 마치 말씀에 얽메여서 사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고 저렇게 믿어야 주님이 받으실까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처음에는 주님이 무리에게도, 배를 타고 건너는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말씀따라 순종하며 파도를 만나면서 건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물 위로 걸어오시면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하고 말씀하신다.

내니 (ego eimi) -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누구냐고 물었을 때에 대답하셨던 바로 그 대답

I am (ego eimi) - 너희에게 온 내가 바로 그 하나님이다.

- 내가 너희와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라

는 것이다.

 

  • 그 길은 주님만 바라보며 가면 건널 수 있는데 자꾸 주위를 기웃 거리면 또다시 무너진다.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항상 주변의 상황과 비교이다. 주님만 바라보면 무너지지 않는데 비교하면 주위를 보면 이 길에 대한 회의가 인다.

 

  •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내 힘으로 갈 수 없고 내가 주님을 붙잡을 수 없다. 주님이 내 손을 붙잡고 가는 길, 그 길이 구원이다.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그들은 가나 혼인 잔치를 보았고,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 주님을 보았다.

그 분이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았다.

그런 주님의 말씀 따라 바다를 건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파도 중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배를 탄 제자들이 고백이 무엇인가?

[마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다시 요한복음

[요 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떡을 먹고 배부른 욕망의 신앙이 아니라 말씀 따라 주님 말씀하신 길을 걸어가는 신앙으로.,..

그들이 가려던 땅 - 주님이 약속하신 땅, 주님과 함께 가는 땅

 

여러분이 가고자 하는 땅은 어디인가?

그 땅은 주님이 말씀하신 땅인가? 아니면 죄악된 내가 가고자 하는 욕망의 땅, 죄악의 땅인가?

 

여러분이 삶을 다 한 후에 주님을 만나게 될 때에 여러분이 머물고 있는 땅은 어느 땅이고 싶은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처럼 주님이 찾아야만 하는 전혀 상관없는 땅에 가 있지는 않을까?

아니며 주님 부르실 때에 바로 "나 여기 있어요! "하며 달려 갈 수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서 있고 싶지 않은가?

 

물 위를 걷는 자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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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35-41절 (폭풍우)


  • 그 날 저물 때에...(35절)

그날은 어떤 날인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모여든 큰 무리들에게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 자라나는 씨, 겨자씨 등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여러 씨앗의 비밀을 통해 말씀하시던 그 날입니다. 

다른 어떤 날보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하늘의 비밀을 깨닫고, 믿음의 비밀을 깨닫고, 소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열매들이 자라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날입니다 .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동안 무리들을 돌보고 또한 예수님이 말씀을 듣고 이해하느라 수고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영혼은 어느 때보다도 은혜로, 믿음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도 저물어 밤이 오고 있습니다.  

이제 밤이 왔고 조금있으면 풍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루 종일 수고한 결과가 혼란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밤이 왔는데도 쉬질 않고 예수님께서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35절)하고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에 순종해서 예수님을 배에 태운 채로 건너편을 향하여 건너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무리에서 벗어나 또 다른 배를 타고 따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무리로 왔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 자기도 은혜를 받아서 예수님을 따라 배에 올라 예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금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말씀을 나누었던 선지생도의 아내의 이야기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겠다고 열심내던 남편이 갑자기 빚만 남기며 죽게 되는 상황이 올 때도 있습니다.  

노상 우상숭배하며 살아가던 아브라함이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신앙의 길로 들어섰는데 갑자기 기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자연은 자연의 법칙을 통해서 움직입니다. 자연의 법칙은 간단히 말하면 인과응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세계는 반드시 인과응보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당하는 욥을 보고 세친구들은 네가 무언가 잘못했으니 그렇다 하며 자연의 법칙을 가지고 그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욥의 고난은 인과응보의 섭리를 벗어나 있었습니다. 친구들의 말이 틀린 것이지요. 지혜자라 하는 솔로몬도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인간 군상들의 일을 보며 능히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전 8:14)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8:17)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신앙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야, 당신이 잘못 믿어서 그래...라고 하면서 마치 욥의 친구들 처럼 사람들의 모든 일 하나하나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적어도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 원인을 알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신앙의 밤이 왔을 때에, 풍랑이 왔을 때에, "왜? 하나님이 왜? 내가 왜?"에만 초점을 맞추면 계속해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인생의, 밤은, 풍랑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 풍랑을 맞고 어떻게 풍랑을 이기는가입니다. 어떻게 헤쳐 나갈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차게 되었더라 (37절) 

큰 광풍(Furious squall) - 어디에서인가 모르는 고난, 폭풍...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다스릴 수 없는 것, 우리의 통치 밖의 일이다. 

문제는 큰 광풍 자체에 있지 않다. 

광풍이 만들어 내는 파도가 우리에게 부딪히면, 곧 그 파도가 우리를 때리고, 평안을 잃게 하고, 우리의 심령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우리를 압도해버리는 것이다. 

파도가 배에 부딪치며 배를 물로 가득 채운다. 

마음을 채우고 심령을 채워서 우리 안의 모든 생각이 그것으로 가득차게 한다. 이것이 우리 마음을 낙망케 하고, 좌절케 하고, 절망케 하는 것이다. 

광풍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파도가 내 마음을 때릴 때 그것이 무서운 것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그리하면...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7b) 

염려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근심걱정 없는 사람 누군가? 

그런데 그것을 풀 수 있는 자는 누군가? 오직 예수이다. 

풀수 없는 자에게 가서 아무리 넉두리 하고 푸념하고 해봤자 아무런 유익이 없다. 

그런데 근심 걱정 있을 때에 대부분은 혼자 끙끙 앓던가, 아니면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자에게 가서 푸념을 한다. 그래서 점점 더 물 가운데로 가득차게 된다. 


제자들은 어부였다. 그것도 갈릴리 출신 어부였다. 

바다와 배에 관한 일이라면 전문가들이었다. 

광풍이 불자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 때까지 그들은 예수님을 찾지 않았다. 

파도가 일어 배에 부딪칠 때도 그들은 예수님을 찾지 않았다. 

그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익숙하고도 전문적인 일들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 예수님을 찾았는가? 

배에 물이 가득차서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에서야 비로서 예수님을 깨웠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깨울 때까지 침묵하셨다. 제자들이 볼 때에 잠자고 계셨다. 


  •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38절) 

자기가 할 수 없을 때에야 비로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아 깨운다. 

그런데 제자들의 깨우는 말이 재미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왜 알아서 미리 미리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우리가 아는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대로 이것저것 다 하고 있는데 왜 거들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고 외침이 아닐까? 

두려운 일이 생길 때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에, 빌립보서기자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먈한다. 

그런데 우리는 염려하며, 근심하며,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아니면 힘에 부치는 그런 일들도 우리가 할 수 없어서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도 하나님께 아뢰거나 기도하지 않고 나중에 와서 하나님이 왜 이 지경까지 우리를 내버려 주시는가라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것은 원망의 소리다. 

우리가 주를 배에 싣고 이렇게 잘 모시고 다니는 데 왜 우리가 죽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우리도 주님을 그저 잘 모시고 다니면서 우리의 의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가? 내가 가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주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주님은 잠자코 계세요. 내가  다 알어서 할께요하지는 않는가? 


고물은 배 후미 선장이 배를 지휘하는 곳입니다. 

마치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인것처럼 예수님도 배의 선장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게를 베고 주무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스스로 배를 움직이며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물이 배에 가득차서 죽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서 예수님께 원망섞인 목소리로 주님을 깨우자, 비로서 주님이 깨십니다. 

다 늦은 것 같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늦은 것이 없지요. 

그리고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하십니다. 

광풍의 근원, 파도의 근원, 우리의 모든 염려의 근원에 대해 바로 진단하시면서 명령하시면서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바람에게, 바다에게 잠잠하고 고요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전문가, 배의 전문가였던 제자들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그들의 고통을 단지 말씀으로 잠잠케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비록 바람과 바다를 향했지만 제자들의 심령 속에는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잠잠하고 고요하라." 

"내가 옆에 있는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우냐? "

너는 가만히 서서 내가 너에게 행하는 것들을 바라보라. 


  •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는가?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40절) 

제자들이 지금 무서워하는 것은 파도였다. 폭풍이었다. 고난이었고, 고통이었고, 시험이었다.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갑자기 닥치는 파탄, 실직, 이혼, 암, 병.....

이런 것들은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인생의 광풍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그 광풍이 파도를 만들어 우리의 심령을 치고, 깨고 부스면 우리는 그런 것에 압도되어 믿음을 잃어버린다. 

예수님을 잃어버린다.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잃어버린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광풍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믿음이 있다는 것은 광풍에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다. 

광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잠잠할 수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십자가의 화형을 앞에 두고도, 사자들이 자기들을 삼켜버리려고 기다리고 있는 순교의 현장에서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고요하고 잠잠했다. 

 그것은 그들이 곧 자신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믿었기 때문이다. 

 

  •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41절) 

광풍을 무서워하던 제자들이 이제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예수님을 두려워한다. 

광풍을 무서워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 감히 "지금 뭐하고 있느냐?"고 불평하며 원망했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광풍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두려워한다.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 무서운 줄 알고 사는 사람은 결코 오만하지 않다. 교만하여 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 있는 자는 결국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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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2.08 01:06

    은혜로운 주석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