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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리스도인의 복 2

본문 : 마태복음 5 1-12

구약시대 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구절 신명기 28

è  땅의 복, 자녀의 복, 물질의 복, 번영의 복

그 복의 시작은 아브라함을 부름에서 시작/ 아브라함: 우상을 섬기던 자, 하나님을 모르던 자.

è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리라.

è  떠나서, 나의 땅으로 가라. 너를 하나님이 예비한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복을 얻게 하고 그 복의 기원으로 삼겠다.

l  구약의 역사: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의 우상에서부터 떠나서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것. 우상을 왜 믿느냐? 땅의 복을 달라고그런데 그 땅의 복도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누구냐? 애굽이냐, 가나안이냐? 바알이냐 하나님이냐의 싸움.

신약시대 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구절 마태복음 5장 팔복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얻은 것 - 영생, 천국

천국이 주어진 우리에게 장수하고, 배부르게 살고, 땅의 소산이 많고, 그러한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마태복음 5-7장의 산상 수훈은 무엇인가? 천국의 복음.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예수의 가르침.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인 팔복-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8가지 통로, . 하늘 나라의 통로,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8가지 단계의 통로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오는 수많은 무리들 중에서 산에 오르는 자, 예수와 함께 산에 오르는 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바로 산상수훈이고 그 중의 핵심이 팔복의 말씀이다.

: 노아가 사람들의 온갖 조롱을 받으며 온 평생 힘을 모아 방주를 만든 곳. 모세가 자기 자신이 완전히 낮아져서 자신의 모든 욕심, ,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교제 했던 호렙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시내산. 그곳으로 무리들을 이끌고 가신다. 그 곳은 어떤 곳? 땅의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만 있는 곳.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무리, 여러 목적을 가지고 다가오는 수많은 무리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때 무리들 중 일부가 예수님을 따라 그 가파르고 험난한 산을 함께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자기 이익이나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쫓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편안한 들판에도 미련이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허물과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혀 무가치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의 능력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설 수 없는 불쌍하고도 불쌍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던 그들은 예수님을 쫓아 예수님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제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향해심령이 가난한 너희들이 복이 있다. 천국이 너희들의 것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다시 입을 열어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우리말 “애통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펜테오”는, 가슴이 찢어지도록 처절하게 우는 것입니다. 통곡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슬퍼서 가슴을 치며 소리내에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온 자들 중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따로 있고, 또 애통하는 무리들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곧 애통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그들, 전혀 무가치한 그들, 심령이 텅 비어버린 그들이 바로 애통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애통은 누구를 위한 애통이겠습니까? 바로 나를 위한 애통입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며 우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도 불쌍해서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때문에 슬피 우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과 거짓과 이기심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배신과 불신을 통회하며 우는 것입니다. 질병과 실패와 좌절로 인해 그저 가슴이 찢어지도록 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애통하는 자입니다. 내 안에게는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절망 밖에 없어서, 그저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자가 애통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 애통은, 회개의 애통이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애통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는 자, 그들이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위로는 우리의 상상과 이성과 지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하늘의 위로, 천상의 위로, 온 우주만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것입니다.

ex) 요셉의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요셉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형들은 그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원수같은 존재였습니다. 형들에게 버림을 받은지 20년이 지난 어느날,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은 극심한 흉년으로 곡식을 꾸러 온 형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렸던 그 원수와도 같은 형들은 마침내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 형들을 보고서 한 일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창세기 45:1-2의 증언입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은 형들이 찾아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가운데 곡식을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형제의 정을 억제하기 못하고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얼마나 크게 울었던지 애굽 사람에게도 들렸고 바로의 궁중에도 들릴 정도로 방성대곡을 했습니다. 자기를 버렸던 형들을 보고,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은 방성대곡하는 것 애통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요셉의 애통은, 먼저는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형들에게는 동생이면서도 교만했었고, 아버지의 편애를 자랑하면서 형들의 시기심을 유발했던 자신의 이기적인 옛 모습에 대한 애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수와도 같았던 형들을 용서하는 사랑의 애통이었습니다.

용서는 내가 아파야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내가 아픔의 눈물, 애통의 눈물을 흘려야지만 진정으로 남을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못이 박히시는 고통, 보혈을 흘리시는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내가 아파야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형들을 만난 요셉은 회개와 용서의 애통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è  초대교회 교인들의 기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먼저 용서하는 연습.. 용서는 아프지만 그 용서를 통해서 나의 죄가 사해진다. -> 그런데 왜 용서하지 못하는가?

우리도 울어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울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릴 눈물이 너무도 메말라버렸습니다. 영혼은 갈급해 하면서도 울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애통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날마나 불행하다고만 여깁니다. 사는 게 힘들다고 한숨만 내쉽니다. 힘들어 죽겠다고 탄식만 합니다. 병들어 아프다고 걱정과 염려만 쌓아갑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신앙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허물과 욕망이 내 안에 가득한데도 도무지 반성할 줄도 모르고 회개할 줄도 모르고, 뻔뻔하기만 해서 하나님 앞에서 왜 울어야 되는지 그 이유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혼이 병들었습니까? 인생이 답답하십니까? 질병 때문에 고통 당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깊이 통회하고 우십시오. 절망과 좌절 속에서 탄식만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 하십시오. 여러분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그렇게 울어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 눈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하늘의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체 온유한 자가 누구이기에 복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온유한 사람을 온순하고 부드러운 천성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매사에 화를 내지 않고 큰 소리 치지 않고 공격적이지도 않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받아들이는 사람을 향해 온유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리키는 온유한 사람은 천성이 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말온유한으로 번역된 헬라어프라우스길 들여진 온유함, 가르침을 통해 변화된 온유함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천성적으로 부드러운 성품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은 후에 성령으로 길들여진 성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된 성품, 믿음으로 성숙해진 온유한 성품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온유함은 하나님에게 속한 온유함이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온유함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온유함입니다.

마치 거친 야생마가 주인에게 길들여진 후에 철저하게 주인에게 속하여 주인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거친 야생마와도 같았습니다.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성이 조용하든 시끄럽든, 또 우리의 성향이 부드럽든 거칠든, 우리의 행동이 온순하든 난폭하든 그것에 상관없이,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 속에 있을 때에는 주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거친 야생마였습니다. 오직 천성의 성품을 가지고 있을 뿐 성령으로 변화된 성품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온유함에 관한 말씀은 수십 번 나오지만, 온유하다고 불린 사람은 딱 두 사람 뿐입니다. 바로 모세와 예수님, 둘 뿐입니다. 예수님이야 성자 하나님이시기에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성경에 나오는 사람 중에 온유하다고 불린 사람은 모세가 유일합니다. 민수기 12:3의 말씀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하나님은 모세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온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천성은 결코 온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로의 궁에서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에, 자기 동족이 애굽의 군사에게 핍박을 당하자,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군사를 쳐 죽였던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인을 저지르고는 비겁하게 도망을 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이나 숨어지냈습니다. 그리고 80세가 된 어느날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5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신을 벗는다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에 종은 신발을 신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인이나 신발을 신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종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더 이상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없는 거친 야생마처럼 제 마음대로 날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자신의 거친 천성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변화된 성품으로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온유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29에서 스스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은 내가 온유하니, 내게서 온유함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 베 푸신 성품들은 한결같이 온유하셨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 사회적으로 소외된 세리와 병든 자들, 죄인 취급을 받던 창기와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한없이 부드러우셨고 풍성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실 정도로 친절하셨고, 사회적으로 약자에 대해서는 놀라우실만큼 부드러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언제나 부드럽고 유순하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2:13-15의 증언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모세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단순히 성품이 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나 화를 내거나 분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자존심이 상했다고 해서, 경쟁에서 뒤졌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분노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이 무시당할 때, 하나님의 뜻이 손상될 때, 하나님의 집이 더렵혀질 때 분노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거룩한 분노라고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거룩한 분노를 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상처를 입었을 때, 하나님의 뜻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성령으로 길들여진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친절한 사랑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룩한 분노를 토해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 때부터 교회는 참 복음을 쫓는 사람과 상인들, 신앙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과의 전쟁이 늘 있어왔습니다.

 

중세의 신학자 중에 에크하르트 하는 사람은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1 12절에 대한 설교에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던 이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모두 상인들(businessmen)입니다. 심각한 죄를 짓지 않으려 주의하고, 좋은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선한 일들을 합니다. 곧 금식과 철야와 기도, 그리고 다른 무슨 선한 일들이 있으면 그것들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 보답으로 뭔가를 되돌려 주시도록 그렇게 합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쁘게 하시려고 뭔가를 해 주시기를 바래서 그 일들을 합니다. 이것은 순수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것에 대한 답례로 무언가를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주님과 상업적인 거래를 하기를 원합니다.

그에 따르면 성전 안의 장사꾼들은 악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좋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들이란 적당한 수준의 종교적,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면서 살지만 온전히 주님만을 사랑하는 헌신된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이들은 심각하게 악한 죄를 짓지 않는 주의력이 있으며, 선한 행동들을 할 줄 아는 양식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좋은 삶'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자기 사랑의 표현이다. 주님으로부터 무언가를 대가로 얻기를 바라서 드리는 일종의 ‘뇌물’이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이들은 예배자가 아니라 주님과 “상업적인 거래”를 하려고 드는 “상인”이라고 말한다.

유진 피터슨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영성 저술가는 미국교회가 회중을 소비자 집단으로 만들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교회에서 화려한 무대나 연출된 예배를 통해서 성도를 소비자로 생각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파는 거래의 장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성의 문제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간 자기 희생과 부인의 길의 정반대로 걸어가게 합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없으면 언제든지 옮기는 소비자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7-80년대의 한국 교회의 급속한 성장에는 강단에서 대량 생산해 낸 ‘축복’이라는 상품이 인기리에 판매된 데에 한 원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소비주의 영성에서 교회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일어나는 장소가 아니라 시장과 같이 흥정을 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연합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기도자의 만족을 목표로 하는 ‘굿 딜’을 위한 거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신앙을 이제는 벗어던지고 정말 복음을 따르는 건전하고 온전한 신앙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한번 둘러봅시다. 우리는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고분고분하고 있습니까? 나의 욕망과 이기심에는 아무런 저항 없이 한없이 고분고분하고, 세상과 하나님께 양다리를 걸치고 우유부단하게 살아가고, 교회가 상처입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질 때도 그저 조용히 바라만 볼 뿐 침묵하지는 않았습니까?

반대로, 내 작은 자존심에 생채기가 좀 났다고 해서 벌컥 화를 내고, 내가 손해 좀 봤다고 해서 내 의견과 다르다고 해서 분노하고,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무례히 행했던 적은 없습니까? 이같은 모습은 결코 온유한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온유한 사람이 되십시다. 약한 자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분노할 수 있는 온유한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천성대로 제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길들여지고, 성령의 성품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약한 자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겸손한 친절을 베풀고 사랑하고 위로하고 끌어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욕망이나 자존심 때문에 성내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거룩한 분노를 발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제목: 그리스도인의 복

본문: 마태복음 5 1-10

 

한 주 뒤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 그 분의 오신 의미를 되새기는 날. 사실 그 분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성경이나 어느 역사책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313년 기독교가 로마 국교로 정해진 이후 그들의 가장 큰 축제날인 12 25일날을 예수님의 생일로 바꾸어 지키기 시작한 것이 크리스마스의 유래이다. 그래서 엄격한 보수주의자들은 성탄절을 지키는 것을 꺼리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 분의 나심을 통해 그리스도의 나심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심은 세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역사라는 말이 다름 아닌 예수의 이야기 his story를 기반으로 펼쳐지게 되었고 예수를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모두 똑같이 예수의 나심을 기준으로 달력을 만들고 날짜를 계산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만 여겨졌던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를 통해서 온 인류를 하나님으로 믿어지게 되었고 징벌의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이라고만 여겨지던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성품을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의 하나님임을 명확히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또 하나 주어진 가장 탁월하고 특별한 차이는 오늘 우리가 나누게 될 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였습니다.

구약시대의 복

[ 28:1-1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è  땅의 복, 자녀의 복, 물질의 복, 번영의 복

그 복의 시작은 아브라함을 부름에서 시작/ 아브라함: 우상을 섬기던 자, 하나님을 모르던 자.

è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리라.

è  떠나서, 나의 땅으로 가라. 너를 하나님이 예비한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복을 얻게 하고 그 복의 기원으로 삼겠다.

l  구약의 역사: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의 우상에서부터 떠나서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것. 우상을 왜 믿느냐? 땅의 복을 달라고그런데 그 땅의 복도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누구냐? 애굽이냐, 가나안이냐? 바알이냐 하나님이냐의 싸움.

l  구약의 복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 땅의 것은 하늘의 모형.

그런데 우리가 읽은 신약의 복,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에는 구약에서 명시한 복이 하나도 나와있지 않다. 이 곳 말씀에서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어느 인물도 그러한 복, 땅을 얻고, 자식을 많이 낳고, 물질 축복을 많이 받았다는 사람을 잘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예수님도, 제자들도, 바울도, 디모데도 이런 구약의 복의 기준으로 보면 정말 불행하게 산 사람들이고, 복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대신에, 부자 되려고 하지 말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천국은 가난한 자의 것이라서, 가난한 자가 복되다고 하신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 오래 살 생각 말고, 주를 위해 언제든지 생명 바칠 각오 하라! 왜 그럴까?

세상에서 환난, 핍박당해도 그것이 복이니까 기뻐하라.... 어떻게 된 영문인지, 구약의 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도대체 왜 이렇게 다를까?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위대한 신학자 칼빈. 칼빈은 세계를 바꾼 십대 인물에 속할 정도로 탁월한 인물이었다.

더욱이 가톨릭의 탄압에 목숨을 걸고 헌신했던 인물이라면 하나님의 입장이라면 복을 듬뿍 부어주셔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의 전기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31세에 결혼했는데, 조건으로 오직믿음 좋은 여자만 찾다보니 자식을 7명이나 둔 과부와 결혼했다. (결혼 복도 없었다)

그녀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몇 년 못 살고 죽었다.(자식 복도) 부인도 결혼 후 9년 만에 자식 7을 남긴 채, 먼저 소천했다. 그 후 그는 15년 동안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두통, 천식, 소화불량, 열병, 담석증 등 여러 질병에 시달렸다. 약 십 년 동안 그는 위가 안 좋아서 하루 한 끼만 먹고 살았다. (건강 복도 못 받았다)

그러다가 54세로 소천했는데, 생전에 그는 온 전력을 다하여 수 백 명 사람들이 수 백 년 동안 못 했던 일을 혼자서 해냈다. 수백권의 저서, 기독교 강요는 성경의 백과사전.

죽는 순간까지 그는 참 신앙인의 유언을 남겼다. “내 무덤에는 묘비를 세우지 말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으니까!”

è  그가 복이 없는 사람인가?

복을 보는 기준이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한 마디로 답하면하나님의 나라 때문이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팔레스틴에 지상천국을 이루고 온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세상적 왕국은 꿈꾸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 없었다. 다시 말해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먼저 가르치신 것은 회개하라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다. 그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복음서에하나님의 나라 110회 이상 반복되어 나온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얻은 것 - 영생, 천국

천국이 주어진 우리에게 장수하고, 배부르게 살고, 땅의 소산이 많고, 그러한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마태복음 5-7장의 산상 수훈은 무엇인가? 천국의 복음.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예수의 가르침.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인 팔복-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8가지 통로, . 하늘 나라의 통로

 

5병이어의 기적: 배고픈 자들을 먹이심- 똑같이 땅의 복을 내려주심, 병든 자, 약한 자, 부정한 자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치료하심- 그 결과:

6:14)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구약의 하나님의 복을 가져다 주는 자 

è  예수님의 반응: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è  6:26-2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우리가 하나님 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 있을 때에 얻는 복: 땅의 복과 하늘의 복

에덴 동산: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생육하고 다스리고 정복하라. 땅의 주인으로 우리를 부르셨다. 그런데 그 권능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을 때에만 얻을 수 있는 복.

그런데 사탄의 꾀임에 너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벗어나면,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떠나가면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 그 결과 땅의 모든 복을 잃어버리고 땅도 저주를 받고 엉겅퀴와 가시나무를 내고 힘껏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들게 되었다. 만물을 다스리는 정복자에서 만물의 지배를 받고 만물의 도움을 받아야 만 사는 자로 전락해 버림. 그 다음부터 우리의 관심사는 오직 땅의 복. 그런데 하님께서 회복하고자 하는 것은 관계의 회복.

신명기 28장의 말씀-> 네가 내 말을 잘 지켜 행하면-> 다시 선악과 안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면….주시는 축복. 다시 회복시키리라. 1-14절이 축복의 말씀이면 20-68절까지는 지키지 않았을 때에 나타나는 저주의 말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관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땅의 복이 팽팽히….

탕자의 비유: 아버지 나에게 유산 주세요. 내가 나가서 살래요. 난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재산이 필요해요. ->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그가 모든 재산을 다 잃고 갈데도 없고 먹을 데도 없어서 그냥 종살이라도 하려고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어떤가? 맨발로 달려나와서 아들을 반기고 잔치를 배품-> 다 잃어도 관계가 회복되어서 좋은 거다.

( 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갈리리: 가나안 북단입니다. 데가볼리: 요단강 동편에 있는 헬라의 도시 (거라사, 힙포, 가다라, 빌라델비아, 다메섹…)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중심 중에 중심 유대: 가나안 남단에 있습니다. 요단 강 건너편은 가나안을 넘어오기 전 이방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렇듯 사방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들 중에 예수님을 순순하게 믿고 따르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저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보러 온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을 해꼬지 하고 예수님께 흠집을 내기 위해 기회를 엿본 사람들도 상당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리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5 1절 그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5:1)

 아까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도 백성들이 예수님이 떡을 주니까 왕으로 삼으려 하자 올라갔던 곳. .

: 노아가 사람들의 온갖 조롱을 받으며 온 평생 힘을 모아 방주를 만든 곳. 모세가 자기 자신이 완전히 낮아져서 자신의 모든 욕심, ,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교제 했던 호렙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시내산.

그곳으로 무리들을 이끌고 가신다. 그 곳은 어떤 곳? 땅의 복이 없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만 있는 곳.

내가 가벼워야만 올라갈 수 있는 곳. 짐을 가지고선 올라갈 수 없는 곳. 그리고 고된 훈련을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곳. 그곳에 올라온 사람을 그래서 무엇이라 부르는가? -> 제자. 그곳에서 하신 말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여덟 가지 통로. 팔복의 말씀.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는 것. 그렇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팔복의 말씀.

 

우리의 삶: 여전히 땅의 복만을 바라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망하는 내가 팽팽히 부딪치는 곳.

거기에 주시는 첫 번째 말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마음이 비워진 자 < - > 마음이 가득 찬 자

마음이 가득 찬 자: 우리 자신의 모습. 따지고 보면 우리 사이에 많은 다툼과 시기와 질투는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일어나는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을 했으면서도 부부싸움을 하는 까닭도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상대방을 이해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신앙 생활,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은혜가 안되고 변화가 없는 것. 내 마음이 너무 가득차서…. 내가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내가 아는 것, 내가 가진 것이 은혜를 가로막고 있는 것.

 

성도들에게 많이 듣는 소리: 내가 은혜 받았을 때처럼 해 주세요. 그 때 불렀던 찬양 해 주고, 그 때 했던 기도대로 해주고그 때 갔던 기도원처럼 해주고그런데 그 때 부흥했던 교회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멈춰 버리고, 욕먹고, 비난받는 교회가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물론 과거의 교회를 다 부정해서도 안되고 우리의 좋은 전통, 기도의 전통, 말씀의 전통, 우리 나라 만의 새벽기도, 술 담배 안 하는 전통, 좋은 전통으로 지키고 계승해야 하지만 2012년도, 13년도에 그 교회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 교회들을 뛰어 넘는 신앙관, 믿음과, 성경관이 있어야 한다. 부르짖었더니 축복하셨더라에서 넘어가서 내가 얼마나 제자가 되었는가? 내 인격과 삶과 말과 행동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고 하나님의 자녀 답게 살아가는지 삶의 신앙, 영적인 신앙으로 올라가야 한다. 땅의 신앙에서 영의 신앙으로 옮겨가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신앙.

 

그렇다면 대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구인가?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기는 사람.

è  예수 만난 이후에 자기의 이전 자랑: 가문, 시민권, 교육-> 다 배설물로 여긴다.

 

왜 그렇겠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들만이, 주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만이,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텅 비어버린 심령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만이, 생기가 사라져 버린 심령에 성령의 새 바람을 불어넣으시는 분이 오직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은혜는 항상 나를 비우고 새 은혜를 갈망할 때에 찾아오는 것이다.  

누가 복음 18장에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저 바리새인이 기도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18:11-12의 기록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기도만 놓고 본다면, 바리새인은 남의 것을 빼앗는 토색도 하지 않고, 불의와 간음도 행하지 않고, 일주일에 이틀이나 온전히 금식을 하고 소득의 십일조도 헌금으로 드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나무랄 데 없는 신앙과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내 세울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한 마디로 바리새인은 심령이 가난하지가 못했습니다.

한편 세리는 이렇게 기도했다.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하나님 앞에 내 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눈을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가슴만 치면서, 하나님,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의 그의 기도의 전부였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세리는 정말 심령이 가난한 자였던 것입니다.

이같은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토색도 하지 않고 불의도 행치 않고 금식하고 십일조 하는 바리새인이 의로운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세리가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에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하나님의 자비만을 의지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어서, 하나님의 자비만을 의지하는 자, 그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너무도 부족해서 하나님 앞에서 눈을 들지도 못하고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자, 그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험한 이 세상에서 피할 곳이 하나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어서 그저 가슴만 치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의지하고 싶어도 의지할 데라고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 그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초대 교회는 심령이 부자였던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가난하고 무식했던 갈릴리의 어부들, 인간 사회에서 거절 당하던 세리와 창기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던 제자들을 통해, 초대 교회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가 그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복이 있는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심령은 비록 가난했지만, 그들은 천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제 땅의 복만을 바라보면서 쫓는 탕자같은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영의 복, 생명의 복,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아들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구약의 복을 넘어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자녀의 삶으로 인도하는 팔복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