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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6:15-30절'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5.01.09 금으로 싼 조각목 (출애굽기 26장 15-30절)

금으로 싼 조각목 (출애굽기 26장 15-30절)


‘조각목’이란 나무는 성막과 관련해서 출애굽기에만 26번이 나오고, 신명기에도 한 번 나옵니다.  

성막중에서도 아주 귀한 기구들인 법궤(출25:10), 떡상(25:23), 분향단(출30:1) 등 성전 안에 있는 기구들과 성전 밖에 있던 번제단(27:1)과 그들을 운반할 때 쓰는 채들을 모두 조각목으로 만들었습니다.또한 성전의 벽을 이루는 널판(26:15)과 띠(26:26), 사방의 기둥들(26:32), 휘장문의 기둥들(26:37)도 역시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박을 입히도록 하셨으니, 성막을 지을 때 사용된 모든 목재가 조각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전시대에 와서 레바논의 산 꼭대기에서 생산되는 그 시대 가장 좋은 나무였던  ‘백향목’도 귀히 쓰임 받았지만, 그 때에도 성전의 내용물이 되는 기구들은 역시 조각목이었다는 점에서, 백향목도 조각목을 능가하지는 못합니다. 광야에서는 나무가 없어 조각목을 썼다고 해도 솔로몬의 시대에 백향목을 놔두고 조각목을 썼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가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조각목은 나무로서 별 쓸데가 없는 볼품없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자라는 이 나무는 키도 작습니다. 가지가 밑둥부터 여러 갈래 갈라져 있어서 우리가 이곳에서 보는 레드우드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사용하기 힘든 나무입니다. 더군다나 잔가지와 가시가 많아 다루기 도 매우 어렵습니다. 잎사귀도 작아 사료로 쓰기도 별로 좋지 않고 구지 쓴데봐야 땔감으로밖에는 사용할 수 없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전을 조각목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곧 죄로 인해 속이 꼬이고, 험한 인생 중에 가시만 가득한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 만지시고 다듬으사 하나님 나라의 재목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조각목을 영어 성경에서는 아카시아 나무로, 개역성경에서는 싯딤나무로 번역하는데 조각목이라는 한자어는 검을 조(皂)에 뿔 각(角 )을 씁니다. 검은 뿔이라는 것입니다. 

시커먼 뿔난 나무를 하나님께서 다듬으셔서 성전의 언약궤로, 날마다 양식을 준비하는 떡상으로, 향을 피우는 분향단으로, 성전 벽과 기둥으로 세워가신 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그런데 하나님께서 조각목 같은 우리 인생을 택하사 성전의 기둥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삼지만 그 모습 그대로 받으시지만 그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사용하시지는 않습니다. 

꼬일때로 꼬인 나무를 가지고는 바른 건축물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잘라내야 쓰임받습니다. 잘라내는 것은 곧 순종입니다. 


조각목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쓰임새에 맞도록 잘 잘라야 합니다. 조각목을 성전 기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여섯 자로 잘라야 하는데 나무가 ?나는 일곱 자니까 일곱 자 그대로 있겠소?라고 자기주장을 한다면 그 나무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쓰시자고 할 때 자기의 모습을 꺾고 순종할 때에 비로서 올바르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지식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하나님의 수준에 맞도록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내 믿음을 끌고 가면 망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믿음을 끌고 가는 기준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적당히 내 지식에 맞게, 환경 수준에 맞게 신앙생활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는 조각목의 자세가 아닙니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라고 하면 ?저는 부족해서 못 해요?라고 합니다.         사양하는 것을 겸손으로 잘못 알고 너무 자신을 잘라내서 쓰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주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만 하면 하라고 명령하신 주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목사인 저도 기도하다가 본문을 받고 설교를 준비하면 언제나 두려움이 앞섭니다. 이 말씀을 하다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면 어떡하나? 그러다가 이 말씀 빼고 저 말씀 빼면 하나님의 의도를 잘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쓰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내가 왜 이렇게 걱정하나?’ 설교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 그분만 배경 삼고 담대하게 나가면 내가 했던 모든 두려움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가를 볼 수 있게 하십니다. 못 한다는 생각 그 자체가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온 발상입니다. 


2. 껍질을 벗겨내야 합니다. 

조각목을 성전 짓는 재목(材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용도에 맞게 잘 자른 후에 껍질을 다 벗겨 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나’라는 껍질을 벗겨 내야 합니다. 

죄가 들어오고 인류에게 주어진 특성이 가리는 것입니다. 옷으로 가리고 화장해서 가리고 요즘은 성형해서 가리기도 합니다. 외식과 위선입니다. 

누군가와 다툼이 일어나면 난 그 사람을 미워하진 않는데 그냥 가까이 하기 싫다고 합니다. 가까이 하기 싫은 것이 곧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냥 솔직히 "그 사람이 밉습니다" 하면 편합니다. 그러면 더 조심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사람 욕하는 것이 아니라...하면서 결국은 험담을 합니다. 이것이 그 사람 험담하는 구나 하고 먼저 인정하면 스스로 조심합니다. 그런데 그 인정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언제나 말로, 표정으로 우리를 감춥니다. 

외식과 위선, 주제를 모르고 잘난 척하는 것, 되지 못하고 된 체하는 것,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것, 가지지 못했으면서 가진 체하는 것 등 모든 껍질을 다 벗겨 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자신을 부족하고 연약하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성령의 지식과 지혜와 성령의 권능으로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이 발가벗은 자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 주제에 마치 대단한 것이라도 가진 것처럼 껍질로 싸고 위선을 떨고 있으니 그 껍질을 속히 벗겨 내야 합니다. 


3. 금으로 싸야 합니다. 

껍질을 벗긴 조각목은 재빨리 금으로 싸야 합니다. 그냥 놔두면 비가 오면 썩고 뙤약볕이 내리쬐면 비틀어져 갈라지고, 무엇에 부딪히면 금세 부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믿음도 껍질을 벗긴 조각목처럼 연약하기만 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조그마한 일을 당해도 금세 교회에 안 간다고 버팁니다. 목회를 하다가 제가 욕을 먹으면 아프지만 참을 수 있습니다. 헌금이 안나와도 두려움이 오기도 하지만 결국은 부르신 이도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던지 성도가 안나오면 죽을 만큼 속상합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야할 지 모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인간의 사랑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죽을 인생입니다. 예배에 나오셔서 그 관계의 끈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이 죽습니다. 인간과의 관계는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껍질 벗긴 조각목처럼 금세 부서지기 쉽습니다. 근심과 염려가 오면 쉽게 썩어버립니다. 그리고 외부 환경에 의해 비틀어지고 갈라집니다. 이런 나약한 근성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근성 그대로 놔두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싸라는 것입니다. 조각목을 금으로 싼 것처럼 우리도 금 같은 믿음으로 우리의 조각목 같은 심령을 싸서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입니다. 여전히 내 안에서 나만 보인다면 내 안에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육신의 생각에 머무르는 나만 보이면 썩은 냄새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늘 비틀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 안에 쏙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 되시는 주님만 밖으로 나타나시면 달라집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 때문에 누구를 만나도 그를 부드럽게 만들고, 기쁘게 만들고, 만족하게 만들고, 다시 보고 싶게 만듭니다. 금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뿐더러 언제 어디서나 제값을 지닙니다. 


조각목의 변형을 막고 성전 기둥으로 값지게 사용하기 위해서 금으로 싸는 것처럼, 나를 보호하고 나를 통해 예수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나의 근성과 나의 자아가 드러나거든 '내가 예수 안에 들어가지 못했구나. 주님과 떨어져 나 홀로 있구나’라고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깨닫고, 부러지기 전에, 비틀어지기 전에, 썩기 전에, 쓸모 없는 나무가 되기 전에 빨리 주님 안에 들어가서 금으로 조각목을 둘러싸는 것처럼 예수로 나를 둘러싸야 합니다. 


예수의 피 속에는 예수의 특성이 있습니다. 예수의 피를 받아 마시라는 것은 예수의 특성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지 않았을 때는 별의별 특성을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특성이 있기 때문에 능력도 나타나고 이적도 나타나고 악한 영도 몰아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도 합니다.


우리는 조각목이 금으로 싸여 쓰임 받는 것처럼 예수의 특성만 나타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노라 하는 사람 중에도 자기가 가진 못난 근성과 기질을 끝내 버리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크리스천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안디옥 교회에서 제일 먼저 생긴 말인데, 안디옥 교인들은 그 당시 예수의 특성으로 가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성령이 충만해서 가는 곳마다 예수의 특성을 나타냈습니다. 예수에게 미친 사람, 예수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사람이라는 뜻의 ‘예수쟁이’라는 말로 불린 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원래 의미입니다.


조각목은 정금으로 싸일 때 비로소 성전, 법궤, 기둥, 제단 등을 만드는 재료로 훌륭히 사용됐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날마다 예수의 피 공로로 씻음받고 예수의 특성을 나타낼 때 주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지체인 모든 성도도 똑같이 주님의 특성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인 ‘나’를 조금이라도 나타내려하면 주님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굉장한 능력과 이적을 나타내다가 10년, 20년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 능력이 싹 사라져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이 하신 일을 전부 자기가 가로채서 자기가 했다고 자랑하고 영광 받으니까 주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교회 일도, 전도도 자기가 했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난 순종만 한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만 앞세우고 나는 주님 뒤에 가려서 주님만 보이게 하는 자는 죽을 때까지 능력을 나타내며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존중하고, 높여 드리고, 이해해 드리고, 그분이 일하시도록 모든 것을 맡겨야 하나님이 제한 없이 역사하십니다. 예수의 특성으로 가득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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