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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만찬 시간에 (마 26:17-35) 

 

1. 종려주일 :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제자들과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함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환호성을 쳤던 이른바 왕으로서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왕의 입성을 기념하는 영광과 기쁨의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로 이어지는 슬픔의 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고난주간의 시작이 바로 이 종려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온 예루살렘이 들썩일 정도로 환호하고 기뻐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를 몰아내고 성전의 부패하고 썩은 종교 지도자들을 몰아내고 왕이 되실 줄로만 알았던 예수께서 오히려 그들에게 잡혀 심문받으시며 열세에 몰리자 하루 아침에 환호하는 군중에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를 외치는 사나운 군중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는 의미와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정결하게 한 주간을 시작하는 기쁨과 슬픔, 축제와 동시에 근신하고 절제하여야 하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 날입니다. 

 

마지막 고난의 일주일 - 가장 드라마틱한 일주일 

왕의 입성- 논쟁- 침묵 - 만찬- 체포- 고난- 죽음 - 부활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실패와 승리가 너무나 극적으로 반전에 반전을 이루는 시간...

 

우리는 내일부터 고난주간 묵상집을 통해 예수님의 종려주일 후 마지막 일주일의 여정을 살펴 볼 것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은 성금요일로 십자가상의 가상칠언을 묵상하며 함께 예배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주일날 - 우리는 3개월여간의 우리 케이티 집사님 댁에서의 개척예배와 개척하는 데에 있어서의 모든 준비과정을 걸쳐 본예배당으로 입성하게 되고, 4월 마지막 주에 창립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입성을 알리는 종려주일은 비록 빌린 예배당이지만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가 공식적인 예배당에 입성을 앞둔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뜻깊은 주일인 것 같습니다. 

 

2. 목요일 -  최후의 만찬 

내일부터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자세히 살펴보며 함께 묵상할 터이지만 오늘 본문은 그 일주일 중에서 목요일날 이루어지는 이른바 최후의 만찬의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루 전  수요일 - 침묵의 날 (그 분주한 여정 속에서 수요일날에는 아무런 행적을 남기시지 않는다. - 침묵의 날) 

하루 후 금요일 - 십자가의 고난, 죽음 

 

내일 있을 일을 미리 아시는 주님 - 마지막 시간을 누구와 보낼까? 가장 의미있는, 가장 사랑하는...제자들과 목요일 마지막 밤을 보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육신적 가족보다 제자들이 그분의 형제였던 것이고, 그들에게 최후까지도 남겨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3. 만찬을 맞이하는 제자들과 예수님 

  • 제자들 - 한 껏 들떠 있었습니다. 종려주일날 받았던 백성들의 환호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고 맞이할 유월절.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들뜸은 곧 평화와 안식이 아니라 주님이 왕이 되면 그 다음 자리는,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까 하는 경쟁과 시기와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맞이하는 만찬은 서로 주님께 인정받으려는 그런 자리인줄도 모르겠습니다. 
  • 예수님 -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맞이하는 마지막 식사자리가 평안할 리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고난보다 더 답답한 것은 자신이 앞으로 될 일을 제자들에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생각에 꽉 막혀 예수의 하는 일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고난을 당할 때에 제자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떠나갈 것이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마음과는 달리 한껏 들떠있으면서도 동시에 서로 갈등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만찬 자리에서 행하신 세 가지 것 

(1)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21절) 

한껏 들떠 있는 제자들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한 마디, 만찬 시간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너희 중에 하나는 가룟유다를 지칭할 것입니다.

왜 그가 예수님을 팝니까? 앞에 15-16절을 보면 단지 은 삼십냥을 위해 예수를 팝니다. 은삼삽은 노예 한 명의 몸값입니다. 

스승인 예수, 아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노예값에 팔아 넘기는 것입니다. 

 

언제나 마찬 가지 입니다. 대단한 목적을 위해서 신앙을 파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기 앞에 닥친 잠깐의 만족을 위해 신앙을 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앞에 놓인 잠깐의 쾌락을 위해, 혹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예수님과의 신뢰를 깨 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면서 구원코자 하는데 우리는 당장의 작은 어떤 것을 위해 예수님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왜 이 자리에서 하셨을까? 가룟유다가 배반할 것을 미리 예언하셨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가룟 유다를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였을까요? 만약 유다를 회개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모든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보다는 따로 불러서 "네 마음에 죄악을 다스려라"하는 방법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룟 유다에게만 한 말씀이 아닙니다. 뒷부분에도 나왔지만 가룟유다만 예수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지요. 

56절에 보니까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왜 그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도망합니까?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그토록 말씀하셨던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왜 유다에게만 나를 팔려는 마음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말아라. 너 그렇다가 큰일 난다.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설사 누가 그런 마음을 품었더라도 그렇하지 못하도록 서로 권면하고 잘못을 막아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뭡니까?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왜 그들이 몹시 근심하였을까? 자기들 안에서 언제든 주님이 자신이 생각한 메시야가 아니라면 떠날 마음을 해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 안 품었다면 근심할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한 명도 빠짐없이 근심하여 열 두명이 각각 "나는 아니지요?"하고 주님께 묻습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은 곧 교회 생활 입니다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태어난 것입니다. 

공동체 중 하나에 구멍이 뚫리면 결국 모두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이 위험하고 시험에 들었을 때에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곧 교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 앞에서 너희 중 하나가 날 팔리라 하고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이 자리에서 왜 예수님은 그토록 서로 사랑할 것을 말씀하십니까? 

신앙은 서로에게 관심 갖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지극히 작은 것을 소중히 하고 섬기고 보호하는 것이 구원받는 사람의 모습이고 양의 모습인 것입니다. 

 

(2) 내 살과 피를 먹으라 - 성찬과 세족식 

서로 주님을 바라보며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주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이제 은 삼십냥을 가지고 자기에게 입을 맞추며 로마 병정들에게 넘겨줄 유다

죽어도 배반하지 않는다고 했음에도 자기 살겠다고 부인하고 저주하는 베드로. 

로마 병정들의 위협 앞에서 다 뿔뿔히 도망칠 나머지 제자들....

한시간도 기도하지 못하고 피곤해하며 졸기만 하는 그런 제자들. 

 

제가 만일 예수라면 한 한시간동안은 혼을 내며 잔소리를 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말을 해서라도 그들이 예수님의 말을 잊어버리지 말고, 또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가르쳐주고 하지 말라고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아얘 포기하고 홀로 시간을 보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 편이 훨씬 편할는지 모릅니다. 

그들을 바라보면 바라 볼 수록 앞으로 그들이 행할 일들이 더욱 괴씸하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아리랑: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우리 민족의 한이 담긴 노래 

 

그런데 예수님 

(요한복음 13장 1절) 유월절 전날,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떄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내 살과 피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내 살과 피로 너희를 구원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그들의 발을 씼겼습니다. 

 

우리는 세족식을 경험했거나 들어봐서 알지만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긴 다는 것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는 것. 

이건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기가 막힌 일입니다. 전대미문이 사건입니다. 

그 어떤 역사적인 기록에서도 스승이 제자를,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의 발을 씻긴 예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런 일을 행하셨을까? 

어떻게 그 만찬, 최후의 만찬 시간에 그들의 발을 씻길 마음을 가지셨을까? 

 

첫째, 발을 씻기시는 예수의 마음은 격려, 수고했다.

미우나 고우나 3년간을 함께 했던 제자들을 손수 씻겨 주신 것입니다. 

발을 씻는 것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하는 것. 

공생애의 일과를 함꼐 했던 제자들의 수고와 피곤함을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발을 씻기시는 예수의 마음은 용서였을 것입니다. 

나같으면 쳐다보고만 있어도 화가 났을 그 순간에 주님은 용서함으로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과거의 모든 어리석음 뿐만 아니라 이제 다가올, 그들 마져도 너무나도 후회할 그런 모든 배반과 저주의 일들을 예수는 미리 용서 하신 것입니다. 

 

셋째, 발을 씻기시는 주님의 마음은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발을 씻기시면서 "내가 선생되어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라"(요 13:14) 라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잘하고 기특한 자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 곧 떠나가고 도망칠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 결국 끝까지 그들에게 예수의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방탕한 아들, 맨날 사고만 치는 그런 자녀를 끝까지 용서하고 믿어 줄 수 있는가? 

우리는 혼내고 잔소리하고, 꾸짖는데 익숙하지만 가장 엄한 회초리는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난 정말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도 얼마나 실수투성이인줄 모릅니다.  

은 삼십에 예수를 판 유다처럼 나도 시시 때때로 너무도 하찮은 일에 주님과의 약속을 깨고 내 맘대로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실패한 마음, 죄책감이 가득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려고 하면 염치가 없어서 기도조차 안나올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억지로 마음을 정하고 기도하면 제가 어떤 잘못을 해도 주님은 용서해 주십니다. 한 번도 용서하지 않으신 것이 없습니다. 

아니 용서라기 보다는 그냥 제 마음을 받아주시고 "승구야 난 너를 믿는다"하십니다. 

 

여러분, 난 회개기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안 받아 주셨다하시는 분 있으십니까? 

회개하는데 막 화내셨다 하는 분 있습니까? 

다 용서하셨지요? 

다 받아주셨지요? 

그리고 여전히 실수하고 넘어지는 우리지만 끝까지 믿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더러도 이렇게 격려하고, 용서하고, 믿어주며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심보가 참 못되서 혼을 내다 보면 잘못한 줄 알아도 인정하지 못하고 성질 부릴 때가 많습니다. 

잘못한 줄 몰라서 안고치는 것이 아니라 심보가 못나서 성질내고 않고치는 것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어다." 

호되게도 아니게 하나님의 가인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한낱 가인이 하나님이 따끔한 지적에 회개하지 않고 살인을 합니다.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가인에게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유다의 마음 속에 있는 죄를 지적하십니다. 

유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두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곧 넘어질 그들을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셨음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일 잘하고 인정받는 제자들을 위해서 살과 피를 내어주신 것이 아니라, 곧 넘어지고 배반하고, 떠나갈 자들을 위해 살과 피를 내어 주셨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신앙인 

"내가 이런 이런 일을 해서 주님이 나를 구원해주셨어..."

자기의 어리석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구원 받을 자격 있는 자가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면 주님이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자격 있는 사람만 구원하면 됩니다. 

그 한 사람이 없기에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격없는 우리앞에 주님이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의 가장 더러운 발을 씻겨 주십니다. 

발을 씻김으로 죄인인 우리에게 수고했다고 격려하시고,  주 앞에서 잘못한 것들을 용서하시고, 그리고 실수 투성이인 우리임에도 끝까지 믿음을 주셔서, 우리 또한 그렇게 살라고, 부족한 자들의 발을 씼겨주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수건을 두르시고 천지를 지으신 그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씼겨 주시면서 내가 너의 발을 씼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씼겨 주어라 하십니다. 

 

지난 3개월동안 함께 했던 가정 예배 

코로나로 모일 수 없는 중에도 우리는 모였고 예배드렸고, 또 조심스러웠지만 교제했다. 

기쁨도 있었지만 사로의 부족한 모습도, 어쩌면 실망스런 모습도 보았을 수 있다. 

이제 더 큰 예배당에 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지금까지 우리생각보다 항상 더 빠르게 더 많은 것들을 역사하신 하나님꼐서 어떤 일들을 예비하고 계실 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처럼 기쁨과 슬픔, 죽음과 부활, 실패와 승리가 롤러코스터처럼 왔다갔다 할 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 모였던 이 장소, 이곳에서 누렸던 기쁨, 그리고 사랑을 잊지 말자. 

그리고 부족하더라도 제자들을 끝까지 믿고 그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내 제자인 줄 알리라"하셨던 예수님의 새 언약처럼 처음 시작했던 우리 멤버들을 서로 아끼며 사랑하고 격려하며 서로의 발을 씼겨 줄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자. 

우리가 행복하면 앞으로 맞이하게 될 미래의 우리 교인들도 행복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서로 "나는 아니지요?"하는 마음으로 자신만을 챙긴다면 모두가 무너지는 둑이 될 것이다. 

예수의 살과 피의 능력으로 서로의 발을 씼기는 예수 공동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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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눈물 (눅 19:37-44절)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제자들과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함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환호성을 쳤던 이른바 왕으로서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

공생애 기간 동안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제자들에게만 알리시고 비밀에 붙이셨던 예수께서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으로 예수께서 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이 종려주일을 기념하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로 들어올 적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입장하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종려나무 - 히브리어로 (Tamar) - 다말

창 38장 - 야곱의 삼남이었던 유다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고 살았는데 첫 째 아들의 아내, 유다의 맏며느리가 바로 다말. 그런데 첫째가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여 죽고, 둘째가 당시의 법으로 형수를 취하여 자녀를 낳아야 했지만 대를 잇는 일에 불성실하여 역시 죽고 셋째에게 다시 보내졌으나 그 때 유다의 가나안 여인 아내마저 죽자자 집안의 우환의 원인이라 하여 다말마저 친정으로 보내짐,.

그런데 열매없고 불행의 상징이었던 그 다말이 유다에 의해서 다시금 자식을 낳아 유다지파, 다윗의 조상,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의 대를 잇게 됨.

 

마라의 쓴 물과 엘림사건 - ( 출 15장)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쓴물이 변하여 단 물이 되고 안식과 평안이 임한 상징 - 12, 70- 교회를 통해 펼쳐지는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외친 "호산나"라는 말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시 118편 25절)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구약의 후기와 예수님 당시에 이 호산나 라는 말은 메시야를 갈구하는 백성들의 소망과 결부되어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메시야를 고대하는 기도로서 여겨졌습니다.

 

  1.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2.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 열매없는 다말이 자녀를 낳아 다윗의 조상이 되듯, 마라처럼 쓴 물 인생을 살아가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듯 호산나를 외치며 주님을 영접하는 그들은 다름아닌 다말과 마라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의 부르짖음이었다.

 

37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1.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 왜 바리새인들은 예수에게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했는가? 버젓이 헤롯왕이 다스리고 있는데 백성들이 왕의 오신것 처럼 떠들썩 하니 걱정스러웠던 게다. 헤롯에 기대어 사는 자들은 불편했던 게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외침이 정당하다고 한다. 그들이 외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 한다. 그 분은 단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오신 분이다.

 

  •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1절)

그런데 그렇게 왕으로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께서 그 성을 보고 우신다. 여기서 우신다는 말은 단지 슬퍼했다가 아니라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격할 정도로 슬퍼했다는 것이다.

 

왕은 왜 눈물을 흘리셨는가?

 

자신이 다스릴 나라가 병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하실 교회가 썪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할 백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우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누구를 바라보면서 우는 것입니까?

 

성전 밖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전 안에서도 참평화를 알지 못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고, 성전에 종사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입니다.

 

왜 그들을 위해 웁니까?

예배드리지만 그 안에서 참 평화를 잃어버리고 믿음을 통해서 장사하고, 예배를 통해서 세상을 얻고자 하는 자들을 위해서 우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자기의 꿈을 실현 시켜 줄 왕을 찾아 헤맵니다.

 

자기의 한을 풀어 줄 왕, 자기 인생을 역전시켜 줄 왕,

자기가 말만 하면 다 들어줄. 자기가 필요한 전지전능한 왕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예수를 팔아넘기기도 하고
  • 군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롱하며 침뱉기도 하며
  • 제사장들이 그랬던 것 처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저주하기도 하고
  • 로마 군사들이 그랬던 것 처럼 실재로 못박기도 하고
  • 빌라도가 그랬던 것 처럼 난 상관없다고 얼굴을 돌려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신앙엔 참평화가 없습니다. 참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 성전 안에 갇혀 있는, 그런 신앙 안에 갇혀 있는 자들을 향해 우시면서 그들이 기대하는 그런 신앙은 돌하나도 남김이 없이 사라지리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의 울음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 영생이 아닌 자기 만족
  • 십자가가 아닌 자기 배부름
  • 죄에서부터 구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려 또 다른 죄를 짓는 그런 헛된 왕을 바라는 자들을 향한 통곡

그들을 향한 부르짖음

 

"내가 찔림은 그런 너희들의 허물 때문이고

 

내가 상함은 그런 헛된 꿈을 꾸는 너희들의 죄악 때문이다"(이사야 53:5)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분명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왕이 아니라

 

빛나는 왕관 대신에 로마 군사들에 의한 가시면류관

높은 왕의 보좌 대신에 십자가에 달이셔야 했던

화려한 왕의 가운 대신에 거의 벌거 벗겨져야 했던

 

왕의 장대한 행차 대신에 침뱉음과 조롱을 당하며 십자가를 지고 성난 군중으로 가득 찬 거리를 지나야 했던 그런 왕.

 

예수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너무나도 다른, 아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한 왕이었습니다.

 

왜, 예수는 그런 왕이 되셔야 했습니까?

 

그가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악떄문입니다.

 

누가복음 19장

여리고로 들어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전 마지막 사역, 삭개오만나는 사건으로 시작 .

 

삭개오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죄인의 대명사"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나무 위로 올라간 삭개오를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라고 하시면서 그의 집에 머물면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있어야만 했던 장소는 나무 위 입니다.

나무 위를 죄인이 달려야 할 십자가 위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는 십자가 위에서야 비로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죄인이었습니다.

 

삭개오는 마땅히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려야 할 죄인이었지만 주님은 그를 내려오게 하시면서 그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에게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말씀하십니다. 자기 가족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내려 온 나무 위, 그 외롭고 험한 십자가에 예수가 올라가시면서 그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그가 감당해야 할 수치와 고통 대신 죄없으신 그가 멸시와 고난 당하시면서 삭개오를, 예루살렘 사람들을, 그리고 우리 들을 위해 묵묵히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가끔 내 기도가 잘못 될 때마다

내 마음이 소망이 참된 왕이신 주님이 아닌 헛된 세상의 왕을 기대할 때마다

이 울음이 들리는 듯합니다.

제자들은 참 왕이신 주님을 곁에 두고선 자기들의 헛된 욕망으로 인해 주님을 외면했고 떠났고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모습 그대로, 주님과 함께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한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주님이 이룩하신 그 나라

서로 발을 닦아 주고 용서해주고 평화를 주는 그 나라를 주님과 함꼐 세워 가게 하십니다.

참왕, 참 나라, 참 믿음을 소망하시는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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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4.22 03:37

    amen 감사합니다.^^

 

예루살렘 입성 (누가복음 19장 37-44절)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종료했다는 끝의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제자들과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함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환호성을 쳤던 이른바 왕으로서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

 

공생애 기간 동안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제자들에게만 알리시고 비밀에 붙이셨던 예수께서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으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이 종려주일을 기념하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로 들어올 적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입장하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종려주일은 왕의 입성을 기념하는 영광과 기쁨의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로 이어지는 슬픔의 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고난주간의 시작이 바로 이 종려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온 예루살렘이 들썩일 정도로 환호하고 기뻐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를 몰아내고 성전의 부패하고 썩은 종교 지도자들을 몰아내고 왕이 되실 줄로만 알았던 예수께서 오히려 그들에게 잡혀 심문받으시며 열세에 몰리자 하루 아침에 환호하는 군중에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를 외치는 사나운 군중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는 의미와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정결하게 한 주간을 시작하는 기쁨과 슬픔, 축제와 동시에 근신하고 절제하여야 하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 날입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외친 "호산나"라는 말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시 118편 25절)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구약의 후기와 예수님 당시에 이 호산나 라는 말은 메시야를 갈구하는 백성들의 소망과 결부되어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메시야를 고대하는 기도로서 여겨졌습니다. 

 


 

유월절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건너 출애굽 시킨 날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종려주일은 메시야를 통해 이루실 완전한 구원을 소망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 참왕으로 오신 예수의 이날, 종려주일의 행적을 살펴보며 "그는 어떤 왕이셨는가? 그가 이루는 구원은 어떤 구원이었는가?" 누가복음 19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맹인과 삭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이) 

 

19장으로 들어가기 전 18장 끝부분에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전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눅 18:31-눅 18:34]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왜 깨닫지 못하였을까? 그들은 부활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입성을 마치 혁명의 기점으로 막연한 위험을 경고하는 말로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다음 맹인을 만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 맹인이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른 말로 하면 종려주일날 백성들이 외친 소리와 마찬가지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며 주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여리고로 들어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전 마지막 사역, 삭개오를 만나십니다

 

삭개오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죄인의 대명사"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나무 위로 올라간 삭개오를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라고 하시면서 그의 집에 머물면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있어야만 했던 장소는 나무 위 입니다. 

 

나무 위를 죄인이 달려야 할 십자가 위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삭개오는 마땅히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려야 할 죄인이었지만 주님은 그를 내려오게 하시면서 그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에게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말씀하십니다. 자기 가족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맹인을 통해, 다윗의 자손으로, 삭개오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의 정체성,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를 알리시는 것입니다. 

 

죄인을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고 이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친히 그 나무 위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2.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다. 

 

갈릴리 지방의 예수가 이젠 메시야의 예언을 이루시며 당당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의 입성을 반기는 제자의 온 무리는 

 


 

38절)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면서 지나가시는 곳에 자기들의 겉옷을 펴서 지나가시게 합니다. 완전한 왕으로서 그의 입성을 환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는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떠들썩임에 무리 중의 바리새인이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하셨지만 예수께서는 오히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이들의 찬양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분명 왕으로 입성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분의 행차가 좀 기이합니다. 

 

왕이면 풍채도 당당하고 큰 권세가 있어야 하는데 그는 지금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합니다. 

 

30이 넘은 장년이 한 번도 사람이 타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장면은 왕의 입성으로 보기에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릅니다. 그 입성을 바라보며 환호하는 무리들의 모습도 좀 기이해보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이 예수께 나아와 무리 좀 말리라 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 다음 장면에 가면 더 이해하지 못할 장면을 보게 됩니다. 

 

가까이 오사....이제 예루살렘 성으로 더 가까이 오시더니 갑자기 성을 바라보며 우시기 시작합니다. 모두가 왕의 귀환을 기대하며 기쁨과 흥분에 가득 차 있을 때 갑작스레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시는 장면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누구를 바라보면서 우는 것입니까? 

 

성전 밖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전 안에서도 참평화를 알지 못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고, 성전에 종사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입니다. 

 


 

예배드리지만 그 안에서 참 평화를 잃어버리고 믿음을 통해서 장사하고, 예배를 통해서 세상을 얻고자 하는 자들을 위해서 우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자기의 꿈을 실현 시켜 줄 왕을 찾아 헤맵니다. 

 

자기의 한을 풀어 줄 왕, 자기 인생을 역전시켜 줄 왕,

 

자기가 말만 하면 다 들어줄. 자기가 필요한 전지전능한 왕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예수를 팔아넘기기도 하고

 

군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롱하며 침뱉기도 하며 

 

제사장들이 그랬던 것 처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저주하기도 하고 

 

로마 군사들이 그랬던 것 처럼 실재로 못박기도 하고

 

빌라도가 그랬던 것 처럼 난 상관없다고 얼굴을 돌려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신앙엔 참평화가 없습니다. 참 만족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울음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영생이 아닌 자기 만족

 

십자가가 아닌 자기 배부름

 

죄에서부터 구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려 또 다른 죄를 짓는 그런 헛된 왕을 바라는 자들을 향한 통곡

 

그들을 향한 부르짖음

 

"내가 찔림은 그런 너희들의 허물 때문이고 

 

내가 상함은 그런 헛된 꿈을 꾸는 너희들의 죄악 때문이다"(이사야 53:5)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분명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왕이 아니라 

 

빛나는 왕관 대신에 로마 군사들에 의한 가시면류관

 

높은 왕의 보좌 대신에 십자가에 달이셔야 했던

 

화려한 왕의 가운 대신에 거의 벌거 벗겨져야 했던 

 

왕의 장대한 행차 대신에 침뱉음과 조롱을 당하며 십자가를 지고 성난 군중으로 가득 찬 거리를 지나야 했던 그런 왕.

 

예수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너무나도 다른, 아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한 왕이었습니다. 

 


 

왜, 예수는 그런 왕이 되셔야 했습니까? 

 

그가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이 죄악떄문입니다. 이 시대의 삭개오가 달려야 할 나무에 대신 달려 구원을 완성하신 사랑의 왕이었습니다. 

 


 

[롬 5:6-롬 5:8]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그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셨던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또한 그 울음으로 죄인을 온전케 하시는 완전하신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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