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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장 1-14절'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6.05.12 네가 낫고자 원하느냐? (요한복음 5장 1-14절)

 

네가 낫고자 원하느냐? (요한복음 5장 1-14절)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요한복음만의 특별한 기사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2장의 가나 혼인잔치, 3장의 니고데모와의 대화, 4장의 혼인 잔치, 그리고 오늘 함께 나눌 38년된 병자의 이야기도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사건들입니다.


이 사건들에는 예수의 공생애의 목적과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핵심에는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 즉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는 새 언약, 새 계명으로의 연합된 관계입니다. 


2장의 가나 혼인 잔치- 예수의 오신 목적은 잔치를 여시기 위함입니다. 그 분은 심판이 아니라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잔치를 열어 주십니다.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그 잔치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에서 출발함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 분을 영접한다는 것은 단지 수학 공식 외우듯이 "그 분이 우리 죄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심을 내가 믿습니다"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을 내 영혼의 신랑으로, 연합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헬라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고- 헬라적 사고는 지식으로 알면 이해, 히브리적 사고는 경험을 해야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가 내 주인임을, 신랑임을 계속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영접이 아니라 실재적인 삶의 경험으로서의 고백인 것입니다.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이 관계를 더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녀는 냠편을 다섯이나 둔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에게서 남편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피난처요, 자신의 삶의 공급처요, 나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고 함께 하는 동반자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지만 지금 홀로 우물에 나와 물을 길러야만 하는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그 어느 남편도 자신의 보호자가, 공급자가, 동반자가 되어 주지 못합니다. 갈급함은 부족함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해야 하는데 그는 다섯명의 남편을 두고도 늘 부족합니다. 갈급합니다. 세상을 남편 삼은 자들의 삶입니다. 

신령과 진정한 예배는 주님을 실재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38년된 병자에게서 사랑이 없는 신앙생활, 결코 연합됨이 없이 신앙생활 하는 자의 고통을 보게 됩니다. 


(요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장소를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 바로 성전이 있는 유대인들의 신앙의 중심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공간입니다. 

양문 - 이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여러 문들 중에서 특별히 제물로 쓸 양들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제물은 곧 희생입니다. 피의 값, 죄의 값입니다. 

베데스다-라는 의미는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38년된 환자가 거하고 있는 곳은 예루살렘 양문 곁의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희생의 제물이 있고, 은혜가 충만한 곳입니다. 아니 은혜가 충만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러한 곳에 은혜가 없습니다. 만족이 없고, 즐거움이 없고,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 이 환자는 자그만치 38년 동안이나 매일 같이 나와서 언제 물이 동하나? 자기에게 은혜가 임하나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38년된 병자의 모습을 은혜를 갈구하고 있지만 여전히 은혜의 궁핍함에 거하는 율법주의자들, 전형적인 유대교 주의자들로 해석을 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어떤 자들이 은혜를 입습니까? 가끔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가 병이 낫게 됩니다. 

은혜 자체도 풍성한 것이 아니라 가끔, 언젠지도 모르게 아주 막연한 때에 나타납니다. 

그나마 은혜가 임할 때에 그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은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입니다. 무능한 사람은 절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에 얽매인 자들의 구원관이 이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그것도 흠없고 거룩한 율법의 완수자들이 성막이나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어린 양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릴 때에만 선택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은혜라는 말을 쓰기 민망할 정도로 시험보고 면접 보아서 뽑힌 영적인 엘리트들만 받을 수 있는 것이 그들이 아주 가끔 받을 수 있는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얼마나 큰 착각인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못에는 성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다 불구자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은 언제 물이 동할는지 보지 못합니다. 

절뚝박이는 절뚝이기 때문에 먼저 들어갈 수 없는 자입니다. 

혈기 마른 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혈기 마른 자는 요새 말로 하면 중풍병자 입니다. 절뚝박이와 마찬가지로 몸을 자유스럽게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런 자들이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면서 서로 제가 가장 먼저 들어가기를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은혜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렇습니다. 율법의 목적인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율법을 따른다고 하면서 서로 자기가 잘낫다고 으시댑니다. 남을 비난하고 자신을 치켜세웁니다. 


마치 소경과 절뚝박이와 혈기 마른 자들이 서로 자기가 가장 먼저 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삼십팔년 된 병자가 누워 있습니다. 

그는 그나마 전혀 은혜를 기대할 수 없는 자입니다. 

누워서 일어날 수 없는 자가 기껏할 수 있는 것은 물이 동할 때에 남들이 못에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요 5:7)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자의 심경을 좀 헤아려 봅시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남들이 병고침 받는 것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절대로 못에 제일 먼저 들어갈 기대나 확률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곳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그가 살아가는 목적은 확률없는 기대에 의지해서 헛된 소망을 품고 매일 같이 이 곳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38년이나 지나면서 그의 기대는 절망으로 바뀌고, 은혜는 메말라가고 목마름은 더해갑니다. 


우리는 삼십 팔년이라는 그 환자의 병력에서 구약에 나와 있는 어떤 영적인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신 2: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가데스 바네아가 어느 땅입니까? 바로 여호수아가 열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낸 땅입니다. 그들의 보고가 무엇입니까? 우리 힘으로는 그 땅에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그들은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힘만을 생각하다가 가나안 땅 앞에서 38년동이나 방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 곳에 들어가리라 하며 38년을 기다리고 있는 병자의 모습과 광야 가운데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우리 힘으로 절대로 그 곳에 들어갈 수 없어 하면서 방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자기 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다가가고자 하는 비참한 신앙인들의 모습을 똑같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들 모두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이 거한 곳은 모두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에 정작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은 한없이 무력하고 무능하고 연약합니다. 

야훼 하나님은 분명 존재하시는데 그 하나님이 내 여호와가 되지 못합니다. 

남들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는 너무 무정하고 엄격한 분이십니다. 


그런 38년된 병자를 주님이 어느 날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누운 것을 보시고: 지금 그는 누워 있습니다. 뛰질 못하고 서있지도 못하고 이젠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환자와 같습니다.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그 무력하고 무능하고 자신이 이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할 적에 찾아오신 분,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젠 99세가 되어 자신의 육체적인 기대가 다 끝났다고 할 적에 그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서 이젠 내 인생의 끝을 생각할 때에 바로 왕은 그를 찾습니다. 

모세가 연약하여 져서 미디안 광야에서 무기력하게 살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십니다. 


내가 가장 연약할 때에 나를 찾아오시는 분, 

찾아 오실 뿐 아니라 그런 우리 연약하고 경건치 못한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분, 그분이 우리 신랑, 우리 그리스도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정말 낫고자 하느냐? 


이것이 38년된 병자에게는 얼마나 울화통 터지는 질문입니까? 

아니 그가 여기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낫기 위해서입니다. 

낫기를 포기하면 여기 나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 물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가운데 나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앞에 두고 그들은 자기들은 힘이 없어 못들어간다고 포기하고 있습니다. 

38년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가에 나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는 어느덧 낫기를 포기하고 그저 익숙한 공간에서 남들이 은혜받는 것을 바라보는데에 만족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왜 교회 나오십니까? 왜 신앙생활 하십니까? 

우리 영혼이 낫기를 원해서 아닙니까? 

세상으로부터 상처입고, 사람들로 부터 상처 받고, 나 자신으로부터도 상처받은 영혼 낫기를 기대해서 나온 것 아닙니까? 

아니면 아무 기대도 없이 이 자리에 와서 앉아 계십니까? 

그저 익숙해서 이렇게 하다보면 하나님이 나에게도 기회를 주시겠지 하고 앉아 계십니까? 


은혜는 내가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오시는 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내가 노력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주의 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그 분이 오셨을 때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기 땅에 오신 예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남들의 이목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리를 재치고 앞에 나와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질문은 도발적인 질문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질문입니다. 

아니 병낫고자 베데스다 연못에 나와 있는 환자에게 네가 정말 낫고자 하느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왜 이 질문을 하십니까? 

정작 은혜받으러 온 사람들이 은혜 받는 통로를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익숙해져 버린 방법에 의지하다가 그저 구경만 하는 구경꾼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두리뭉실하게 신앙생활 하면서 그저 난 할 도리 다한다고 자기 위안 삼으면서 자기 한계 안에서 신앙생활 하기 때문입니다.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건 자기 변명입니다. 하느라고 했어요.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요...그러는 것입니다. 

저도 나름대고 소심해서 설교 단상 위에서 외에는 잘 권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사람 위해 중보기도하다가 참다 참다 기도하러 나오세요. 예배 나오세요...하고 권면하면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아세요? 

저 집에서 나름대로 기도해요...

제가 요즘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그럽니다. 


힘드니까 더 나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나와야 승리하는 것입니다. 거기 머물고 있으면 더 어려워 지니까 나오라는 것입니다. 


병자의 말을 보십시오. 누구를 탓합니까? 다 남의 탓 입니다. 

남들이 나를 안 도와 줘서 그렇습니다. 

남들이 나보다 먼저 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입니까? 


남 탓 해서 하나라도 나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입니까? 


(요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변화는 변명이 아닌 순종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주신 여자가....

당신이 만드신 뱀이....

다윗 때문에...


핑계는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 입니다. 


능력은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순종할 때에 일어납니다. 


예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지금까지 그는 자리에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그 자리는 38년동안 그가 의지하던 그의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에 의지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똑같이 38년동안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날 변화시키지 못하고 내 영혼을 치유하지 못하고, 내 삶에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방법을 버리고 내 말을 좀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의지하던 방법을 버리고 내 말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 아닌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예수 신앙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38년된 신자는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우리 안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타성에 젖어 버리고, 자기 변명하기에 급급한 신앙입니다. 

어떻게든 다가가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우리 신앙의 어두운 과거입니다. 


은혜는 내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오심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 분의 지시하신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제 이번 주부터 4주간의 집회가 있습니다. 

낫고자 하는 자들은 빠짐없이 참여하시기를 당부합니다. 

제자들은 3년간이나 예수와 함께 했지만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마지막 말씀, "위로 부터 능력이 임할 때까지 이 전에 머물라"라는 말씀에 의지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비로서 참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일상의 영성은 중요합니다. 

특별한 때에만 열심내는 자는 일상에 실패합니다. 

그런데 일상에 충실하다가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는 자들도 똑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결은 곧 성령의 세례입니다. 

성령 세례는 마가 다락방에서 전혀 기도에 힘쓸 그 순간에 임했습니다. 

3년간의 공생애의 결실이 오순절 다락방에서 열매 맺었습니다. 


지신 뿐만 아니라 타교인도 괜찮습니다. 

금요일날 예배 없는 교회의 성도들은 누구나 초청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전파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