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야 나오라 (요한복음 11:38-44) 

  • 요한복음 11장 전체를 커버하는 사건 - 나사로의 죽음 
  • 요한복음 - 기적이란 말 대신 표적 (Sign) -> 표지판 :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의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상징하는 기적들, 일곱가지 표적의 기록 -> 그 마지막 표적 -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 
  • 그 결과 

(요 11: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이하더라 

 

1. 배경이 되는 지명, 인명 

  • 베다니- 예루살렘 남쪽의 인근 마을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면 늘 들리던 마을, 베다니라는 의미는 "가난한 이의 집"이라는 의미로 가난한 자와 나병환자들의 거주촌, 서울로 치면 달동네,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 살던 마을. 
  • 나사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자, 베다니에서 아내도 없이 두 누이와 함께 살던 가장. 
  • 성경은 특별히 나사로를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 ", 또 예수님은 나사로를 가리켜 "친구"라고 불렀던 사람. 
  • 또 두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가난한 형편에도 예수님과 제자들을 잘 대접했던 가정, 특히 마리아는 전에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방되고 구원을 얻은 여인,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여인. 마리아와 마르다- 동적인 신앙, 정적인 신앙을 나타네는 두 사람

 

2. 그런데 그가 병들었다. 그것도 아주 위급한 병, 죽을 병에 걸렸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 본래: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 이 때 "사랑하시더니"는 히브리어로 신적 사랑, 최고의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병들었습니다. 

-> 주님이 우리를 최고로 사랑해도 우리는 병드는 존재, 병들수 밖에 없는 존재,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안에 있는 존재....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도 병들수 있다. 죽을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다. 들으면 당연하게 여기는데 막상 그러한 일을 당하면 부정한다. 이것이 우리의 어리석음... 

 

3. 누이들이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알립니다. 당연히 빨리 오셔서 고쳐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요, 또 주님만 오시면 나으리라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 (6절) 

 

이틀 동안에 무엇을 했는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달리 다른 일을 했더라면 기록되었을텐데 주님은 의도적으로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왜 이틀을 유하셨는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힌트가 되는 구절이 4절과 15절입니다.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오해하기 쉬운 해석- 병을 고치는 것 보다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죽은지 오래된 자를 살리시는 분임을 믿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기 된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멀쩡한 사람을 병나게 하고 죽게 하고 살려냄으로써 자기를 증명했다. 혹은 빨리 고칠 수 있었는데 예수님의 능력을 보이려고 이틀 동안 기다리셨다. 그 생각 때문에 오해가 생깁니다.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사로의 죽음까지 기다리심? 사랑의 존재가 아닌 이기적 하나님. 인간의 고통을 이용하시는 하나님-> No! 

 

이 구절에서 가장 깊이 묵상해야 할 단어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을 오해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무렇게나 희생당하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살리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생명의 하나님이요, 평강의 하나님입니다. 

 

4. 이틀을 유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시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느 고로 실족하느니라" (9-10절) 

그러면서 곧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이제 깨우러 가자!" 합니다. 

 

  • 두 가지 종류의 무덤 속에 묻혀 있는 자들 

1) 주 밖에서 죽은 사람들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첫째 사망은 몸이 죽는 것이요 둘째 사망은 불과 유황으로 받는 영원한 영혼의 저주- 지옥에서의 영원한 형벌: 둘째 사망이라 표현합니다. 

 

2) 주 안에서 죽은 자들 -> 잔다라고 표현 

-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 잔다. 

(마 9: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 스데반이 죽었을 때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바울은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을 가리켜 잔다고 표현 

(살전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 

사데교회: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예수의 생명이 없는 이들은 모두 죽은 자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 

거급났으나 죽은 자들 - 자서는 안될 잠 

신랑을 기다리던 신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잠자던 자 

깨어서 기도하라 했는데 잠을 자던 제자들 -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경험 한 것 - 배 밑창에서 잠을 잠 

삼손이 향락에 취해서 타락할 때마다 행한 것 - 들릴라의 허벅지를 베고 잠든 것 

 

다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시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9-10절) 

그러면서 곧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이제 깨우러 가자!" 합니다. 

 

나사로가 잠들어있다. 왜? 빛이 없이 다녔기 때문에, 믿는 자가, 예수의 사랑하는 자가, 예수를 사랑하던 자가 예수 없이, 성령 없이, 믿음 없이, 어둠에 다녔기 때문에 그는 잠들었다. 죽었다. 주님은 요나가 배밑에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리신 것처럼, 나사로가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왜? 그것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실상, 내 민낯, 내 더러운 죄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마리아와 마르다. 

두 가지 유형의 성도- 행동하는 신앙, 사색하는 신앙

영성가들은 이 둘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요 신앙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함께 가야하는,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신앙의 두 모습이라 여겼다. 즉 이 둘이 함께 할 때에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 행동하는 믿음, 이해하는 믿음이 아닌 살아가는 믿음이 된다는 것이다. 

 

나사로의 집- 주인은 나사로이지만 신기하게도 성경에는 나사로와 대화하는 장면이 하나도 없다. 반면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대화하는 장면은 여러군데서 나온다. 나사로를 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죽은 자는 나사로인데 그것을 전하는 것도,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도, 그리고 돌문을 치우는 것도, 꽁꽁 싸여진 베를 풀어 놓는 것도 누이들을 통해서이다. 즉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두 누이에 대한 믿음의 단련이다. 

영성가들은 나사로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교회요,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 교회의 하나 하나 지체된 성도로서의 교회, 행동하는 자와 사색하는 자를 포함한 개개인의 성도라고 해석합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두 누이다. 부모도 없이 살았는데 이제 가장 역할을 하던 오라버니마저 없다. 간절히 기다리던 예수님도 오지 않고, 이제 장례식마저 다 치루었다. 오라버니는 이미 장례를 치루고 무덤 속에 안치했다. 그 며칠 간의 시간은 두 자매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자 마르다가 예수를 맞이합니다. 마르다는 행동이 먼저인 사람입니다.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서두르고, 서성대고, 먼저 행동합니다. 남자로 치면 베드로같은 신앙인입니다.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에는 예수님에 대한 섭섭함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자 먼저 달려나가 예수님 앞에 섭섭함을 표현합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섭섭함을 표현합니까? 아얘 나오지 않음으로 그의 서운함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이 두 자매와 대화하시면서 그들이 주님과 대면하게 합니다. 

어둠에서 잠자던 자들이 이제 빛된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신앙은 해결되지 않은 내 삶의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서 대화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빛이 비추이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주님 앞에 나온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 나리라" (23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제가 이것을 믿느냐?"  

하면서 잠자던 영혼을 깨웁니다. 

어둠 가운데, 절망에 빠져 있던 마르다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 줄 내가 믿나이다." 베드로의 고백, 반석의 고백, 교회의 고백을 하게 합니다. 

 

마리아를 만나는 장면은 더욱 인상적입니다. 

무작정 달려가서 위로하지 않습니다. 

(요 11: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마르다가 고백했더 바로 그 장소, 야곱이 거꾸러지고, 다윗이 회개하고, 베드로가 고백하고, 마르다가 고백했던 바로 그 장면처럼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 나아와서 비로서 마르다처럼 똑같이 "주님, 내가 섭섭합니다. 왜 일찍 안오셨습니까?" 하면서 그 발 앞에 무릎꿇은 마리아를 보고 함께 우십니다. 

 

자, 이제 여기까지의 말씀을 정리해봅시다. 

지금 마리아와 마르다가 내 오라버니가 병들었습니다. 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 

성경에서 병은 죄악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자들도 때때로 죄악의 열매를 맺을 때가 있습니다. 다시 옛 습관, 옛 자아, 옛 모습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영혼의 어두운 때, 파도가 일 때가 있습니다. 그 땐 몹시 힘이 듭니다. 영혼의 병이 들 때, 그것은 우리가 아직 죄의 습관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의 행동을 일삼을 때에 일어납니다. 

은혜 받은 자가 그러한 것을 경험하게 될 떄, 그리스도인이 그런 죄의 모습을 대면하게 될 때, 그것은 어찌 보면 죄인된 나의 자아를 대면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고 십자가 앞에서 죽어야 되는 시간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기뻐한다"는 말은 나의 죄된 모습을 대면하게 되는 시간은 누구도 대시해 줄 수 없는 철저하게 홀로 내 어두운 모습을 대면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아픔의 순간이고 죽음의 순간입니다. 

내 모습을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고통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지나야 부활이 옵니다. 

 

이지선양의 간증 

"두 달만에 자기의 얼굴을 대면하게 되는 그 순간...." 

그는 육신의 자신의 모습을 보았지만 그것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성도의 부활은 세례입니다. 옛 자아를 바라보며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죽고 다시 새 모습으로 살아나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름이 바뀌는 시간이며 우리가 온전히 변화되는, 새롭게 살아가는 시간입니다. 

 

5. 돌을 옮겨 놓으라! 

  • 마리아의 원망의 소리를 듣고 우신 주님은 무덤으로 갑니다. 무덤은 무엇입니까? 죄악된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를 삼키는 고통, 염려, 두려움, 부정적인 생각,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는 내 약점....
  • 지금 예수님이 그 곳에서 들어오셔서 우리를 성령으로 바꾸어 놓으셔야 하는데 무덤 앞에 무엇이 있습니까? 큰 돌이 가로 막고 있습니다.?
  • (요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행동파인 마르다가 정작 행동해야 하는 것에는 머뭇거리고 피하고 외면한다. 왜? 자기를 대면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우니까... 외적인 다른 일은 다 하는데 정작 자신의 마음 속 깊은 무덤 속은 열지 못하는 것이다. 
  • 내 아픈 속마음, 내가 여전히 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연약한 모습, 부정하고 싶은, 내가 홀로 만나고 싶지 않은, 하나님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내 굳는 마음, 타락한 마음, 몸에 배여 있는 죄악의 습관들....
  • 예수님은 내 마음 밖에 오셔서 이제 네 마음의 돌을 치워라하십니다. 하나님, 냄새가 나서 열 수가 없어요....썪은 냄새가 진동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주님과 대면하는 시간, 내 이름이 변하는 시간, 온전히 내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거룩함이 날 살리는 시간입니다.?

 

죽어도 살겠고-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돌을 치우고, 예수님께 내 연약함을 모두 내어 드리고 주님 내 마음의 굴로 들어오세요. 내가 죽어있는 공간, 죽이고 싶은 나의 모습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살려 주세요... 그러면 사는 것입니다. 부활이 임하고 생명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산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육신이나 영혼의 병이 들었을 때- 우리는 왜 빨리, 지금, 고쳐주지 않느냐고 소리치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런데 병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 우리 안의 무덤을 대면하여 보게 하고, 그것을 열어 그곳에 주의 빛이 비추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다름아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 굴려지고, 그 안에 빛이 비추이게 하는 것, 우리의 손과 발을 꽁꽁 묶고 있는 옛자아, 옛습관,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새롭게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 나사로의 집, 교회 안에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 안에도 부활과 생명이 들어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목사이건 성도이건간에 흔히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 참 안변한다는 소리입니다. 

은혜를 받아도, 때로는 기적을 보아도 사람의 본성은 참 잘 안변한다. 중보기도를 하고, 작정하고 누군가를 전도하기 위해서 기도해도 그 사람 참 안변한다하고 탄식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신앙생활 하면서 바뀌셨습니까? 안바뀌셨습니까? 

 

대부분, 사람들 간증할 때나 심방을 통해, 상담을 통해 직접적으로 물으면 예수 믿고 변화되었다고 말합니다. 

생각이 변하고, 말이 변하고, 행동이 변화했다고 말입니다. 신앙생활 했다고 하면서 하나도 안변했다고 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그런 말은 난 예수 잘 안믿었습니다 하는 말과 거의 같은 소리이기 때문에 거진 다 물어보면 신앙생활 해서 참 많이 변했습니다 하곤 합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을 보면 잘 안변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난 참 변했는데 남은 참 안변했다고 합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난 은혜 받아서 많이 변했는데 저 사람은 은혜 받아도 하나도 안변했다 이렇게 우리의 모습이 부정적이고 옹졸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연약한 자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네 이름을 이제 아브람이라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라 하라" "네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시몬이라 하지 말고 베드로라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 그것은 내 이름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 본질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우리는 "이제 나를 만남으로 네 본질이 바뀌었다"라는 선포 앞에 "하나님, 우리는, 사람은, 사람의 본질은 잘 안바뀝니다." 하고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자, 정말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에...제자들은 그 무덤에 가지 않습니다. 누구도 예수의 시체 곁으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기대했던 전능하신 예수가 죽자 무력한, 무능력한 예수에게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여인들만이 예수가 계신 동굴로 새벽부터 일어나 갑니다. 

그녀들에게 있는 한 가지 걱정은 무엇입니까? 누가 무덤을 가로 막은 돌을 치워줄까? 

예수와 우리를 가로막은 돌을 치워줄까? 

다른 제자들은 그 돌을 치우려고도 하지 않고 그 곳에 오려고도 하지 않는데 여인들은 어떻게 돌을 치울까 염려하면서도 아무런 대책이나 도움이 없이 그냥 예수 앞에 나옵니다. 무조건적으로 예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에 오니까 어떻습니까? 이미 돌이 치워져 있습니다. 

예수와 우리 앞에 놓였던 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무작정 나오니까 어느 덧 돌이 굴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됩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돌을 치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능으로 우리 모습 그대로 주님앞에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 다 아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께서 그 돌을 치워주십니다. 

주님 앞에 가로막혀 있는 돌문을 주님께서 제거해 주십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그렇습니다. 

 

(예화) 중 2 때 성령받고 회개할 때, 부흥회 오신 목사님의 다리를 붙잡고 내가 아직 안 깨끗한 것 같아요. 나를 안수해 주세요.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제자들은 후에 돌문이 굴러져 있는 예수의 무덤을 보고 나사로의 무덤 가에서 돌을 옮겨놓으라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시는 부활의 주님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성도의 변화. 

무덤의 돌을 옮겨놓아야 한다. 그래야 무덤에서 나온다. 

돌을 옮기는 것은 내 마음의 100%를 하나님 앞에 공개하는 것이다. 냄새나서 악취가 나는 내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나, 내 마음의 깊은 곳을 내가 대면하고 그것을 주님께 열어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죄인이다. 그런데 용서받아야 되고 용서받는 것이 약속되어있는 죄인이다. 변화되는 죄인이다. 언제 변화가 나타나는가? 우리 마음의 돌을 옮겨 놓을 때에 우리의 심령은 더 이상 무덤이 아니라 빛이 되고 능력이 되고 부활이 되는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여러분 안의 무덤을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무덤을 꼭 막고 있는 거짓의 돌, 위선의 돌, 절망의 돌을 열어 주님의 빛으로 채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가 많아지고...하나님은 교회성장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된 성도인 내가, 내 안의 모든 무덤을 열고 주님을 만나 생명이 되는 것, 부활이 되는 것, 그러한 살아있는 교회가 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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