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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4장 1-5절'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6.11.04 주의 마음, 종의 마음(요나서 4장 1-5절)

주의 마음, 종의 마음

<본문> 4 : 1 - 5

 

요나서의 내용은 차라리 3장에서 끝났으면 요나에게 있어서 더 좋았을 내용입니다. 그러면 회개한 요나가 다시금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아 순종함으로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회개한 내용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4장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같이 기뻐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하며 성내면서 4장이 이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어려워도 인내하며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기뻐하며 끝날 수 있을 일들을 자기를 주장하고 고집하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서 넘어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봉사하고 헌신이었으면 거기까지는 좋은데 좋은 일 하다가 불평하고 판단하다가 넘어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 요나의 기도 비교

요나서에는 요나의 기도가 2번 나오는데 하나는 물고기 뱃 속에서 기도한 내용이고 하나는 오늘 우리가 읽은 니느웨성에서 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요나의 신앙의 모습을 뚜렷이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요나서에서 기도는 요나의 신앙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단서입니다.

 

2장의 기도의 내용을 봅시다. 22절부터 9절까지는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서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입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3)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6)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7)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주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9)

 

부흥의 기도는 항상 주가 강조되는 기도이다.

그러나 4장의 기도는 어떠한가?

[4:2-3]

(4:2)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4:3)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넘어진 자의 기도는 항상 가 강조된 기도이다.

 

기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려는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은 항상 나의 심령을 하나님의 심령으로 이끌어가신다.

 

요나의 한계는 무엇인가? 회개하여 다시 내가 살만하게 되자 가 살아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한 때는 주님을 찾으면서 주를 찬양했지만 한순간 주인이 하나님에게서 나로 바뀌어버렸다. 우리들의 기도는 어떠한가? 내가 더 많이 나오는 기도를 드리는가? 주가 더 많이 높여지는 기도를 드리는가?

 

다윗은 항상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나와서 주께 기도했지만 그가 마음을 열고 주님께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령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심령으로 바꾸어 놓으신다. 이것이 기도이다. (나에게서 시작되었지만 항상 하나님으로 끝나는 기도)

 


2. 다시스와 초막

내가 주인된 행동의 대표적인 행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스였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기 시작하자 요나는 다시스를 찾아서 길을 떠난다. 다시스는 어떤 도시인가? 니느웨 못지 않은 죄악과 쾌락의 도시, 환락의 도시이다. 선지자도 하나님을 떠나니까 한순간 세상의 죄악의 길로 빠져 버리게 된다.

 

2절이 기도에서는 자신이 다시스로 간 행동과 그로 말미암아 경험케 되는 추락을 철저히 하나님 앞에 고하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회개한다. 그런데 다시 요나의 마음 속에 라는 자아가 등장하고 죄악의 생각이 지배하게 되자 자신이 다시스로 간 행동을, 이미 회개한 자신의 행동을 다시금 합리화하고 토를 달고 변명하기 시작한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2A)

 

3.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B)

-> 이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 아니다. 좀 비꼬는 뉘앙스이다. 진심의 고백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시지요. 내가 그럴 줄 알았어요.”

->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사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다.

 

이 놈 저 놈 다 사랑하신다면 선민이라는 구별이 뭔가요..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의 선택함이 무엇입니까?” 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저 이방 민족을 용서하고 복을 내리십니까?

 

->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선민의식, 자신의 기득권 때문에 하나님께 대응하는 것이다.

 

15탕자의 형, 큰아들의 모습이 이러했다. 그는 더 큰 탕자, 아버지의 은혜를 인정하지 못하는 더욱 더 은혜없고 율법적이고 바리새인적인 신앙인이다. 자신이 더 일했으니 동생이라 할지라도 필요없고 싫다는 것이다. 자기 재산이 아까와서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다.

 

난 메어달려 기도해도 안 이루어지는데 초신자나 다른 신자가 한 번 기도하니까 응답받아서 간증하는 것을 보며 큰 형의 마음, 요나의 마음을 가지고 살지는 않는가? 그 때 나를 더욱 점검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마음이 무엇인가를 분별해야 하지 않겠는가? 요한이 바나바가 존경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갈렙이 존경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똑같이 일하고 오히려 먼저 일하고 인정받았지만 베드로가 일하도록 앞을 내어주고 여호수아가 일하도록 뒤에서 받쳐주고 바울이 일하도록 내어주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망해여야 하겠다는 믿음을 보여준 자들이 이들이 아닌가?

 

신앙의 연륜이 깊고 쌓일수록 더욱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없다면 노하고 비꼬고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의 문제덩어리가 된다.

 

나의 기득권이 포기되도록 요구되어질 때 온전한 은혜가 채워지고 성령의 충만함이 드러난다.

 

4.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4:3)”

자신의 한계의 극치이다. 내 뜻을 죽어도 굴복하지 못하겠다. 죽어도 저 사람이 복받는거 못보겠다. 죽어도 하나님의 일에 동의할 수 없다.

얼마나 자아로 꽉 차있는 사람인가?

신앙 안에서 나를 죽여달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표현이다. 차라리 이런 저런 꼴 안보고 죽겠다는 표현이다. 감정이 한 번 이렇게 폭발하면 이성적인 모든 사고도 중지된다. 이것은 다분히 한국적인 표현이다.

죽겠네..차라리 죽여라...죽어도 안해..” 자신의 고집의 극한 표현이다.

 

2, 3절은 엄밀히 말해서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쌍방통행인데 이것은 그저 요나의 독백일 따름이다. 요나의 한계는 곧 나의 한계가 아닌가? 신앙생활 하다가 힘들일 있을 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 나도 요나처럼

차라리 떠난다고, 죽겠다고, 안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선지자도 그랬는데 나도 그럴수 밖에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의 교훈은 우리에게 똑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요나는 선지자이고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였지만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고 죄인의 자아로 하나님께 대들고 있다.

 

5. (4: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요나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는 말씀이었다. 감정에 복받친 요나에게 똑같이 감정으로 대응치 않으시고 화내지 않으시고 여전히 품으신다. 단지 요나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도록 질문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요나의 불손한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인가?

네 생각이 과연 맞냐? 네 신앙과 행동이 신앙의 논리와 원칙에 맞냐? 똥고집 부리는 것이 아니냐? 하고 요나에게 말씀하신다.

 

똥고집은 알면서도 끝까지 버티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오셔서 잘못을 지적하시기 전에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보게 하신다. 하나님의 지혜는 놀라우시기 때문이다.

 

너는 구별된 선지자로서 내 대변자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대변인은 글을 써준대로 읽는 사람이 아니다. 그 마음을 잘 알고 그 마음을 사람들에게 잘 납득시킬 수 있는 자가 대변인이다. 한마디로 마음이 통하는 자가 대변자이다.

선지자 - “나비” - 대변자

 

이러한 질문에 요나는 대답이 없다.

6. (4:5)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침묵하고 응답하지 않는다. 죄를 짓자 아담처럼 숨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죄를 지면 더 이상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으려 한다.

한계가 꺾여지지 않으면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5절 앞에 그러나만 붙이면 13절의 말씀과 똑같은 의미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응답 하면서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성에서 나가서 초막을 짓는다. 초막은 또다른 다시스의 공간이다.

 

선지자의 일은 은혜의 공간에 들어와서 서서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성에서 나가서 성 동편에 앉는다. 앉는다는 것은 사명을 포기하는 행동이다. (일어나라의 반대)

앉아있는 선지자는 더 이상 선지자가 아니다.

요나의 행동은 하나님이 끝까지 어떠게 행하시는지 보다가 자신의 생각과 틀리면 하나님을 떠나겠다는 행동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는가? 불신자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초신자도 하나님을 잘 떠나지 않는다.

많이 아는 자, 그래서 이젠 하나님의 뜻을 좀 안다고 하는 자들이 교회 안의 떠나는 자들이다.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역사가 다르게 나타나면 떠난다.

 

초막은 무엇인가?

이것은 철저히 자기만을 위한 공간이다. 선지자가 일어나 외치지 않으니까 이제 내 안일과 평안과 안위를 위해서 일하게 된다. 그래서 대궐이라도 지었으면 인간적으로나마 부러움을 살텐데 선지자가 하나님을 떠나서 짓게 되는 것은 고작 초막이다.

3절에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불손하지만 담대하게 대항했던 요나는 하나님께서 행동을 돌아보도록 질문하시자 침묵하고 죽지도 않고 이젠 자신을 위해서만 산다.

 

하나님이 조금만 나에게 섭섭하게 대하시면 사명, 직분도 포기하고 내 초막에 앉아버리는 모습이 요나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또한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혼자 토라져서 앉을 수 있는 곳이 초막일지 모르지만 그 곳에서는 적어도 나 한 몸쯤 편히 쉴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127:1)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라고 성경은 말한다. 초막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헛된 노력이 되는 것이다.

 

혹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나의 사명과 업적을 버리고 초막을 짓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은 성 안에서 같이 은혜를 맛보며 하나님의 일을 기뻐하자고 말하는데에 나는 혼자서 나가서 나를 위한 삶을 예비하고 혼자 동떨어져 있지는 않은가?

 

성경은 그 모든 행동이 헛되다고 말한다. 성경의 교훈은 그러지 말라고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알면서도 고집 피우지 말고 은혜 안으로 들어와라.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 들어와서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을 감당하며 사명을 이루고 하나님이 마음을 품어서 탕자가 돌아올 때 분노하지 말고 기뻐하며 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복을 받아도 더욱 나를 인내하며 대변자로서 하나님이 뜻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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