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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대화법'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1.11.27 예수님의 대화법 (요한복음 4장 19-26절)

예수님의 대화법 (요한복음 4장 19-26절)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말씀 - 요한복음 3장 16-17절 -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 예수님과 바리새인이자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와의 대화 

오늘 나눌 말씀 - 4장의 사마리아 여인, 현대 성서학자, 특히 요한복음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보다 훨씬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며 많은 논문이 발표되고 있는 본문. 그 안에 들어가있는 주제들- 이스라엘의 역사, 구원의 역사, 제자도, 예배, 신앙고백, 전도 등등 그 본문이 담고 있는 주제도 다양하고 깊습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가장 많이 다룬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다룰 때마다 또 새로운 것이 발견되는 본문이입니다.  

 

3장 니고데모의 장면과 대조하면서 보면 그 의미가 더욱 새롭습니다. 

먼저 3장의 니고데모를 보면 그는 바리새인이며 동시에 율법학자이자 선생이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던 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였습니다. 이에 반해 4장에 등장하는 여인은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는 무명의 여인이요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비난당하는 사마리아인이요, 그 중에서도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사막에서 가장 더운 시간에 우물로 물을 길으러 오는 가장 척박한 땅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니고데모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밤에" 남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주님을 찾아왔으나, 여인에게는 유대인들이 전혀 다니지 않는 사마리아 땅에, 그것도 6절에 보니 제 육시, 우리시간으로 정오- 낮에 그것도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찾아 가십니다. 

 

1. [요 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성경은 had to동사를 쓰면서까지 반드시 그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이 사건이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사마리아라는 지역이 그렇습니다. 북쪽 갈릴리와 남쪽 유다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이 지역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지역으로  역사적으로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부터 '왕따'를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갈라섰을 때에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했는데, 앗수르는 역사상 가장 무자비한 침략제국으로서 강제로 혼인정책을 써서 앗수르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적으로 "피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피를 더럽혔다는 것은 생명이 더럽혀진 인간이라 여겨. 이후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우상숭배하고 이방인들과 혼인을 한, 날 때부터 부정한 여인"이라고 취급하면서 그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성전을 재 건축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온 힘을 모아 성전을 건축하였고 사마리아 인들도 이 성전 재건축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부정한 민족이라 거부하였습니다. 

성전건축에 배척을 당하자 사마리아인들은 거꾸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자, 이번에는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에다가 자기들끼리 소위 ‘사마리아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주전 322년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성전이 두 개가 세워지게 된 것이지요. 이 두 성전의 갈등이 그로부터 2백 년 동안 계속되다가, 주전 129년에 유대인 지도자였던 요한 힐카누스라는 사람이 그리심 산에 세워진 사마리아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때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이후 사마리안인과 유대인들은 서로를 적대하며 원수지간처럼 지냈습니다. 우리나라의 남과 북의 갈등보다 훨씬 더한 갈등 

우리는 북한의 체제는 인정하지 않지만 북한 주민들에 대한 감정은 없고 그들을 한 민족으로 불쌍히 여깁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 자체를 결명하고 상종하지 않습니다. 

"박사과정 공부를 할 때에 종합시험을 보는데 한 교수가 정통 유대인, 제가 요한복음 4장, 바로 이 본문을 가지고 소논문을 쓰고 시험을 보는데, 이것 저것 질문하고 저보구는 잠시 나가있으라 하면서 교수 3명이서 합격여부를 판단. 

그런데 방 밖에 잠시 나가있는데 교수 3명이서 언성을 높이고 막 소리치는 장면 - 나중에 제 지도교수에게 들으니 평소에 저에게 잘해주시고 칭찬을 해 주시던 유대인 교수가 사마라아를 다루었다는 것 때문에 자기는 사마리아 여인과 유대인이 이렇게 얘기를 주고 받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하면서 언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어서 "아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었던 사건...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지나간다는 것은 상식에 벗어난 일일 뿐만 아니라 남들이 알면 굉장히 부정하고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우연히,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통과해서 가야만 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입니다. 이 여인을 만난 사건 이외에 다른 일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전에 일면식도 없고 그녀가 자기를 찾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교적으로 열심이 있는 여인도 아닌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릎쓰고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2. 7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사막의 더운 한 낮에 우물가에서 물을 달라 하시는 모습- 스쳐지나갈 수 있는 모습. 

그런데 예수께서 지금 그 여인을 만나신 목적 

10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기 위해서

13-14절)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러 오신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대한 첫 마디 

"내게 물을 좀 달라" 

 

오늘의 설교 제목- 예수님의 대화법... 

 

니고데모가 찾아와서 이루어진 대화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 자신의 생각도 아닌 "우리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단도직입적이다. 선생이었던 니고데모의 말을 끊고 네가 아무리 선생이어도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다. 그가 거듭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하면서 면박을 주기도 하신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먼길을 가서 그녀를 찾아가서 그 첫 일성이 "내게 물 좀 달라"한다. 

니고데모에게 무언가 달라했으면 단 번에, 기분좋게 주었을 것이다. 왜 그는 주는데 익숙한자요, 베푸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남에게 받아본 일도, 나아가 주어본 일도 별로 없는 고달픈 삶을 사는 여인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가장 더운 시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우물물을 길으러 온 그녀에게 그것도 자기 민족과는 상종도 않는 유대남자가,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 그녀에게 와서 내 뱉는 첫 마다. - 물을 좀 달라. 

 

깨어진 그녀의 자존감을 채우신다. 상처입은 그녀의 마음을 달래신다. "나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존재고 도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신다. "상한 마음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배빈한 베드로를 찾아가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번씩 물으시며 그의 상처입은 마음을 치료하시는 예수님은 이름 없는 사마리아 지역의 한 여인을 찾아가 "나에게 물을 좀 달라"하신다. 

 

예수님의 그 따뜻함. 그 배려, 그 섬세함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경험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 한마디에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이 열립니다. 성종할 수 없었던 관계가 대화할 수 있는 관계가 됩니다. 오랜 역사를 걸쳐 막혔던 관계가 소통하는 관계, 대화하는 관계, 그리고 나아가 구원받는 관계가 됩니다.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여인이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하는 지를 보면 그 대화의 중요성을 볼 수 있습니다. 

(9절)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 첫 대답 (약간의 적대감)

(15절)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 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주여) 

 

16-18절)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구절은 해석의 주의가 필요한 어려운 부분. 

 - 전통적, 일반적: 남편을 다섯 둔 부정한 여인. 사마리아 지역에서도 가장 부정한 여인의 대명사 

 - 문자적으로 다섯 남편을 두고 지금도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여인인가? 당시의 이혼- 여인에게 권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혼의 권리는 오직 남성에게...문자적으로 해석하더라도 부정한 여인이라기 보다는 다섯번이나 남편에게 버림받은 가련한, 기구한 여인...

 - 상징적, 비유적 해석 : 남편 - 사마리아 사람들이 의지하고 있는 신들. 앗수르에 의해 강요된 우상들. 

 - 근거 - 이 대화 뒤에 이어지는 여인의 고백과 질문 

 

 이것이 실제 남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녀가 섬기고 있던 우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주석마다 해석이 여러가지지만 어느 것이 바른 해석이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 

그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가 세상에서 취해왔던 그녀의 땅의 의지처들을, 이제 쓸모없으니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보니 살만하냐?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뒤로하고 물고기 잡으로 나간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물으시는 예수님. 

 

다섯 명의 남편과 살아봤지만, 그것이 육적인 남편이던 영적인 우상이건, 한번도 만족함이 없이 버림을 당하고 지금 살고 있는 여섯 번째 사람도 진짜 남편이 아닌, 이제 완전한 수 7번째의 남편, 이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오묘하고 배려심 깊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여인은 점점 영적인 체험 속에서 예수를 유대인(9절)에서, 주(11, 15, 19)로, 주에서 선지자로 (19절),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25, 29절)로서 고백하며 온전한 주님의 제자,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말을 전혀 못알아듣고 있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영적인 눈이 뜨이고 주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마친 후에 예배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바뀌게 됩니다. 

그녀의 갈증, 갈망, 세상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그렇지만 여전히 수고하고 뙤약볕에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 다섯 남편을 통해서도 한 번도 안식이 없었던 여인에게 이제 내가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리라 하니까 이제 그녀의 육신적인 의지가 다 사라지고 예배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으로 돌아온 것이지요.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 나에게 깨닫게 하시는 분을 인정하게 될 때에 비로서 영적인 것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영적인 의문을 달아서 질문합니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2절 말씀을 먼저 보면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인의 예배: 이방예식이 혼합된 예배, 성경은 모세의 5경만을 따르고... 정열적이고, 열광적이고, 흥분되어 있고, 충성된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예배: 구약성경을 모두 받아드리며 구원에 대해서 가르침을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령함이 없었다. 그들은 예배의식을 모두 가추고 예배를 드렸으나 예배에 그들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았다.  *(요나- 말씀도 알았고, 체험도 있었고, 순종도 하였지만....그가 없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처럼 예루살렘에는 진리는 있었으나 신령이 없었고 사마리아에는 신령은 있었으나 진리가 없었다. 이는 예배의 두 극단이다. 그리심산에는 열광적인 이단이 자리하고, 예루살렘에는 황폐하고 생기없는 정통이 자리했다. 유대인들은 예배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모두 갖고 있었으나 뜨거운 마음이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뜨거운 마음은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참된 예배는 신령과 진정이 모두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중에 하나라도 결핍하게 되면 참된 예배가 아니다.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정열적인 예배는 휼륭한 예배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진리에 기초하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예배를 드려야한다.

 

그러니까 21절에 

(요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내 말을 믿으라...-> 잘못된 표현 -> Believe me. 내 말을 믿으라...가 아니라 나를 믿으라. 

그러면서 사마리아의 예배도 아니고 예루살렘의 예배도 아니고 너희 아버지께 예배 드려라. (예배는 '어떻게'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의 문제이다. ) 

 

29절에 예수님께서 말한 내가 그로다 하는 말은 요한복음의 예수의 자기 선언 중 첫 번째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참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만난 여인은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을 개의치 않고, 담대히 동네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와서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썼던 말이죠. 복음서 최초의 여성 제자가 유대 땅 아닌 사마리아 땅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에 의해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39절)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 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여인이 주님을 유대인에서 주님, 주에서 선지자로, 선지자에서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그녀의 믿음이 자라듯 그녀 역시 예수님을 고백하며, 이름없고 소외된 여인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신앙인으로, 그 예수를 증거하는 전도자로, 제자로 그녀의 신분 역시 달라집니다. 

 

사마리안 여인의 이야기는 죄인을 구하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 우리가 주님을 찾지도 못했을 때에 그가 내가 살고 있는 내 삶의 영역에 들어와 나를 기다리시고 만나주시고, 나를 만져주시고, 내 자존심을 세워주시고, 내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세상이 두려웠던 여인은 주님과 만난 뒤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며 온 동네를 다니며 주님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연결하는 다리가 됩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와서 점점 더 제자가 되어 가는 것도 놀라운 기적이지만 이 여인의 만남과 변화는 예수를 만나 변화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는 예수님을 알아가는 그녀의 고백을 변화시키지만 그 고백의 변화는 그녀의 신분 또한 변화시킵니다. 

 

신앙생활도, 기도도, 말씀을 읽고 듣는 것도, 결국은 예수님과 대화함을 통하여 믿음이 자라가 삶이 자라고, 우리의 신분이 자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 대화함으로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여러분의 고백도, 여러분의 영적인 신분도 날마다 자라며 변화하는 주님의 제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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