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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9장 1-8절'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5.08.07 둘째날 저녁 (로뎀나무에서: 열왕기상 19장 1-8절)

 둘째날 저녁

 

로뎀나무에서 (왕상 19:1-8절)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하면 “엘리야”라고 하는 데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상에서 두 명을 만나 대화하는데 하나는 모세이고 하나는 엘리야였습니다. 사람들도, 예수님도 엘리야를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꼽았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로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으로 여겨지는 아합 왕 때에 부정한 정권에 맞서 싸우는 개혁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아합왕은 하나님만 예배했던 성전은 바알과 앗세라의 선지자로 가득한 성전으로 바뀌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내 이세벨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1000번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의 지혜를 받았던 솔로몬이 1000명의 아내와 첩을 두고 그들을 위하여 산당을 지어주어 이스라엘을 분열시켰던 것 처럼 누구를 아내로, 파트너로, 사랑하며, 의지하며 사는가? 누구를 기대어 사는가가 어떤 삶을 사는가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아합의 아내 여왕 이세벨은 이방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이었는데 엣바알은 이름의 뜻이 “바알과 함께”의 뜻으로 바알의 신부, 숭배자였고 여신 아세라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아버지, 혹은 자기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이세벨의 원 의미는 ‘순결, 순수’를 뜻하는데 이것은 사탄의 속임수다. 겉으로는 가장 순결하고 순수하게 보였지만 그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그들이 섬겼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는 가나안 민족이 섬겼던 우상 중에 가장 대표적인 우상인데 그들이 이 신들을 숭배한 이유는 "땅의 풍성한 수확"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신적인 힘이 땅 속에 내재하고 있으며, 그 힘이 땅을 비옥하게 하고 곡식을 자라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농부들은 이러한 힘이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의 성적 결합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전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성적으로 자극하기 위해서 성적 흥분을 자극하는 일을 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흥분시키기 위해서 신전에서 음란한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신전 안에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성 관계를 맺는 소위 거룩한 창녀들이 있었습니다.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성 관계를 맺음으로 바알과 아세라가 성적으로 흥분하도록 자극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바알과 아세라가 성적으로 결합을 하게 되면 비가 내려 땅을 적시게 되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땅을 위한 신앙, 땅에서의 삶을 위한 예배는 결국 바알과 앗세라를 위한 신앙입니다. 자기 만족, 감정에 충만한 예배는 결국 바알과 앗세라를 위한 예배일 수 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 한 후에 당시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아세라의 신전과 제단을 지었고 음란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을 데리고 와서 보살피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믿고 누구의 영향 안에서 사는냐가 그의 온 인격과 삶과 그리고 평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호와 만이 나의 하나님이다. 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다는 믿음으로 살았던 엘리야와 바알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면서 이스라엘 선지자를 죽였던 아합왕과 그 배후 이세벨의 대결은 그렇기 때문에 이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이 정말 의미 있고 승리하는 삶인가를 보여주는 영적 전쟁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릿시냇가에서, 그리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은 엘리야가 아합왕을 만납니다. 

첫번째 만날 때는 훈련받지 않고 자기 신념, 자기의 말을 의지해서 만났습니다. 

자기 믿음으로 만났습니다. 

두번째 만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만났습니다. "큰 비를 내릴 것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아합을 만납니다. 그러나 큰 비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를 모두 멸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누가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고 우리를 살게 하는 신인지 그동안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이른바 갈멜산 전투를 벌여 하나님이 불을 내려 심판하게 하여 그들을 모조리 죽게 만들고 급기야 비를 내리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18장까지의 내용입니다.  

3년동안 하나님의 충실한 대변인, 이스라엘 민족의 훌륭한 리더. 온갖 기적이 일어났고 이방 신에 빠져 있던 그의 민족에게 영적 각성이 일어나게 되지요.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승리가 왔습니다. 모든 기도가 응답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세력이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엘리야를 좋아하지 않는 한 세력- 아합왕과 이세벨이 다시금 엘리야를 옥 죄어 옵니다. 

"내일 이맘 때까지 너를 죽이고 말겠다. 네가 그 예언자들을 죽였듯이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신들이 나에게 무서운 벌을 내릴 것이다. (19:2) 

80인의 이방 선지자와 싸워 이겼던 영적 선지자 엘리야가 여인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광야로 도망쳐서 로뎀나무 아래 않아 '이제 죽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합니다. 그 수많은 위협과 위기 속에서도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하나님이다고 외쳤던 믿음의 선지자가, 850명의 이방 선지자를 모조리 죽였던 회개의 선지자, 능력의 선지자가 지금 이세벨, 한 명의 위협에 도망하였을 뿐 아니라 죽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이지만 이것이 인생이고, 인간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도 삶의 작은 어려움이 오면 또 다시 무너지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 지금 엘리야의 모습을 야고보서 기자는 그도 우리와 성정, 마음이 똑 같은 사람이었다고 표현합니다. 


말씀을 통해 본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은 무엇입니까? 

1. 형편을 보고 

믿음 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엘리야에게 갑자기 자기 형편, 자기 꼬락서니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 그의 형편이 좋았을 때가 있었던가? 아합왕을 처음 만나던 시절부터 그는 그릿 시냇가로, 시돈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애 딸린 과부와 함께...그리고 지금도...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 그는 형편에 갇히게 되었는가? 


2.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합왕에게 맞섰던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모조리 죽였던 엘리야가 이세벨이 두려워 도망한다. 피하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 주저 앉고 싶다. 이것은 이세벨이 강해서가 아니다. 엘리야가 약해진 것이다. 갑자기 자기 연민에 빠졌다. 이젠 나를 위해 좀 살고 싶다. 나 이러다가 죽을 것 같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하고 싶다. 


3.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혼자 있고 싶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자기 속 동굴로 들어간다. 자기를 돕는 사환마저도 귀찮고 싫다. 자기의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4. 죽기를 원하여

죽고 싶다. 사는 것이 낙이 없다. 허락만 된다면 자살이라도 하고 싶다. 모든 의욕이 살아졌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것까지 사라져버렸다. 


5.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갑자기 자존감이 확 떨어진다. 비교의식, 열등의식에 빠진다. 남은 행복해 보이고 난 불행해 보인다. 무력감은 열등의식을 이끌어온다. 모든 자신감이 사라진다.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 뒤에 숨겨진 원인

1. 응답, 열매, 승리 뒤의 공허감. 

연극이 끝나고 빈 좌석을 보면서 맛보는 허전함. 주일 예배 뒤의 월요일 공포증. 


2. 잘못된 기대

이것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갈멜산에서만 승리하면 아합왕이 무릎꿇고 이세벨은 떠나가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큰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엘리야의 기대이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다. 


3. 육체적 탈진

갈멜산의 예배와 기도

850명을 직접 죽임. 

또 비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

그리고 아합왕을 향해 달려감. 하루 이틀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했다. 

그리고 그 때 공격받았다. 이세벨의 말 한마디를 들었다. 

그 때의 비난과 공격 한 마디가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영적 산후 우울증이다. 

애를 낳기 위해 정성을 쏟고, 자기 몸을 조심하고, 죄악을 삼간다. 

모든 관심을 애를 향해 맞춘다. 그런데 정작 애가 나오면 자기 인생이 불쌍해 진다. 

막상 애를 낳으면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도 많다. 

밤에 잠도 못자고 애를 떠날 수가 없고 애를 위해 자기를 보살펴주던 식구들은 자기보다는 애만 바라본다. 자존감이 상한다. 

이런 피곤함이 평생 갈 것만 같다. 쉴 틈이 없다. 

이런 우울증은 영적인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 하나님의 다루심 

1. 책망하지 않고 비판하거나 충고하지 않고 그냥 받아주신다. 공감해 주신다. 

응답받은 사람이 시험에 들면 먼저 나오는 것이 판단이고 비판이다. 좋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염치도 없다. 

한별이 임신했을 때. 일하다가 크게 하혈....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난 더 힘들었다. 넌 너무 유난떤다. 유별나다. 

그런데 그 때 그 한 마디가 더욱 사람을 구렁떵이로 빠뜨린다. 


2. 어루만지심. 쉬어라. 천사를 보내어 돌보심. 

기다릴 뿐만 아니라 돌봐 주신다. 필요를 채워주신다. 쉬도록 시간을 주고, 외롭지 않도록 사람을 보내어 만지시고, 배고프지 않도록 먹이신다. 

예수님, 배반해서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 세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와서 밥먹자! (요 21:12) 

무조건 적인 사랑이다. 


3. 로뎀에서 호렙산으로 인도... 

그의 보살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다. 

침체가 오면 먼저 일어나는 현상. 

기도 할 수 없고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하고 말씀 읽는 사람은 곧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우울증이 오면 말씀과 기도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호렙산. 

모세를 부르신 산, 성령을 받은 곳, 말씀과 기도로 충만할 수 있는 곳. 

피하기 위해 떠났던 로뎀나무가 이젠 호렙산 꼭대기가 된다. 


기도하자.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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