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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8장 17-24절'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7.11.25 갈멜산의 예배 (왕상 18:17-24)

갈멜산의 예배 (왕상 18:17-24)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까지 다 마친 후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한 자리에 모아 들이고 말씀합니다. 

이제 가나안 땅의 주인은 너희다. 그런데 그 땅에 들어가서 그 땅 사람들과는 혼인도 하지 말고 왕래도 하지 말라. 그렇게 되면 그들이 너희의 올무가 되어 너희를 준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멸망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른바 그 유명한 세겜언약을 선포합니다. 


(수 24: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수 24:16)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그런데 이것을 듣는 여호수아의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맹세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그 심정이 여호수아 24장 19절부터 나옵니다. 


(수 24:19)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수 24: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수 24:21)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수 24:22)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수 24:23)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수 24:24)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그런데 23절에 보니까 가나안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미 이방 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애굽에서 가져나온 신인지,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새로 얻은 신인지 불분명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백성이 이미 우상들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여호수아가 끝나고 사사기 시대가 열리게 되자 이 세겜 언약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가나안땅에 들어간 가나안 제 1세대들이 죽자 

(삿 2:10)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면서 반복되는 구절이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더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삼아 순종하며 그 분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인생의 왕이 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긴장이 풀어졌을 때에 첫 번째 드는 생각은 이제 말씀을 따라가 아니라 "자기 뜻, 자기 소견"이 앞서는 것입니다. 

신앙이 오래되는 사람이 드는 착각도 이것입니다. 

말씀도 오래 읽었고, 기도도 오래 한 사람이 이젠 나도 하나님의 뜻을 좀 안다 하면서 자기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인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내가 과거에 얼마나 기도를 하고 과거에 얼마나 성경을 읽고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과 얼마나 교제하고 있는가? 지금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가? 신앙의 기준은 항상 현재입니다. 

자기 뜻을 주장하는 사람이 끝까지 자기 뜻대로 고집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사사기서나 그 이후 열왕기, 역대서를 보면 처음에 자기가 왕이 되어 살던 사람은, 이제 사무엘 상 와서 왕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기는 싫고 자기 자신이 왕되어  살아보았자 감당이 안되니까 이제 왕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왕이 우상을 섬기면 따라 섬기고 왕이 하나님을 섬기면 따라  섬깁니다. 책임지지 않고 따라 가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단독적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 믿는다고 떠난 사람이 결국 무당을 찾고, 절에 들어가고, 도박에 빠지거나 알콜 중독에 빠집니다. 무언가 기대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데 하나님을 피하고 택하는 것은 우상숭배 아니면 쾌락, 중독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우상이 바로 바알과 앗세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점차 하나님과 바알과 앗세라를 겸하여 섬기다가 이제 아합때가 되면서 아얘 하나님을 부인하고 바알과 앗세라를 섬깁니다. 앗세라 선지자가 여왕의 자리에 오르고,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가 예루살렘 성전을 차지하며 하나님을 믿는 제사장들을 모조리 죽여 없앱니다. 이렇게 될 때까지 하나님은 잠잠히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부귀 영화는 이때까지도 이어지고 오히려 아합왕때 절정에 이르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하나님을 잊고 바알과 앗세라가 주는 쾌락과 물질의 노예가 됩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라는 여호수아 24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복을 내리신 이후에 그들의 배신을 보시고 잠잠히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망하기를, 멸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할, 하나님과 함께 할 모세와 같은, 여호수아와 같은 동역자, 일꾼을 키우십니다. 

우리가 나누고 있는 엘리야입니다. 


그는 신앙의 뜨거움은 있지만 열정은 있지만 훈련되지 아니한 사람이었습니다. 

아합왕한테 달려나가 이제 당신들의 영화는 이제 끝날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선포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적인 신념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마음을 보시고 그를 가다듬기 시작합니다. 

그를 훈련시키시기 시작합니다. 

열정만 가득했던 엘리야를 그릿시냇가로 보내어서 그의 열정을 잠시 식히고 홀로됨 가운데 말씀과 기도의 수업을 시작하십니다.

열정있는 자가 홀로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리고 말로만 전했던 하나님의 손길을 까마귀를 통해서 있을 수 없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먹이시는 분이심을 확실하게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세벨여왕의 고향인 사르밧으로 가서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한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거기서 우선순위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자기 소견대로 아합왕에게 나갔던 엘리야에게 반드시 말씀이 임한 후에 행동하게 하고, 사르밧 과부에게는 하나님을 위해 먼저, 나를 위해서는 그 다음이라는 말씀 먼저, 하나님 먼저의 훈련을 3년 동안 철저히 시키십니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간절한 기도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기도의 능력을 알게 하십니다. 


신앙생활 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신다. 나를 먹이신다. 하나님의 것을 먼저, 기도가 곧 능력이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듣습니다. 다 아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것이 훈련되지 않으면 전혀 능력이 없습니다

정말 없는 중에 하나님이 나를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훈련되지 않으면 자꾸만 기웃기웃 하게 됩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 같고, 저것도 하나님이 인도하심 같고 하면서 자꾸 주위를 살피게 되고, 눈치 보게 되고 비굴해집니다. 

그런데 광야 가운데 나를 책임지시는 것을 경험하고 훈련하면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눈치보며 기웃기웃 하지 않습니다. 

더 하나님을 바라보며 고난의 때를 이겨나갑니다. 


말씀 먼저, 하나님 먼저....는 우리가 가장 실패하는 훈련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나를 먼저 생각합니다. 내 것 먼저 챙깁니다. 

신앙 생활은 남는 시간, 남는 힘, 남는 물질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먼저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먼저 기도하고, 힘있을 때 먼저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을 때 먼저 드리고 심는 것입니다. 

이것이 훈련된 사람은 입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푸른 신앙생활을 유지 합니다. 

그것이 훈련 안되면 문제신앙인이 됩니다. 문제 터지면 후다닥, 문제 꺼지면 잠잠한 신자가 됩니다. 

그러면 그런 신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언제나 문제 안에서 살게 합니다. 문제가 떠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 기도만 하면 되냐?하는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아픕니다. 

기도하면 기도만 하게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무엇할지를 가르켜 줍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행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내뜻만 주구장창 부르짖다가 기도 다했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아뢰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자의 능력이요, 호흡이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마친 엘리야가 다시 아합왕께 나옵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보며 하는 첫 마디가 얼마나 기가 막힌 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지금 엘리야 때문에 고난이 왔다는 것입니다. 너만 없으면 우리가 걱정거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합입니까? 엘리야입니까? 

이스라엘의 고통이 아합으로부터입니까? 엘리야로부터입니까? 

아합때문입니다. 아합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고 쾌락에 젖어 있으며 영적으로, 지금은 땅이, 온 나라가 기근에 휩싸인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시험 들면 기도가 죽습니다. 예배가 소흘해집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문제인지, 그냥 인생 자체가 문제인지 논쟁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 때 그 때 다르기도 하고 두가지 이유가 다 맞기도 합니다 .

그런데 자기 믿음이 식어서 문제가 생기면 자기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탓을 하고 목사 탓을 하고 교회 탓을 합니다. 

내가 교회만 안 다녔어도 이런 꼴을 안다니는데 하면서 마치 교회가 자신에게 고통을 준 것처럼 말합니다. 

아합의 입술입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다녀서 고난이 온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처소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고난 받으면 갈 곳이 없습니다. 탕자가 집나가서 고난을 당하니 길거리 신세가 됩니다. 돼지 먹이를 먹고 끼니를 해결합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 하는 사람은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잠시 방황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집이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 아닙니까?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 앗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에 모아 누가 참 신인지 가리자고 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웃기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뭡니까? 그들도 정답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도 누가 복을 주는지 누가 참 하나님인지 지금 헤메이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오늘날 섬길 자를 섬기라 물었을 때에는 모든 백성이 한 목소리로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묵묵부답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제사장으로 가득차 있었던 성전이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이 꽉 찰때까지 그 백성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는 850명의 우상주의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다 없어지고 세상이 주는 풍요와 쾌락에 아 이것이 하나님이구나 하면서 점점 죽어가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가나안 그 두려웠던 민족들을 하나 하나 정복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그들에게 절하고 섬기면서 그들의 노예로 다시금 빠져가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수 23:10)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그런데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훈련 받은 자 한 사람만 있으면 그들 우상 주의자 1000명이 와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하나를 잘 훈련시켜서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멸하시는 것입니다. 


1000명의 두 마음을 가진 성도들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온전히 헌신된 한 명의 엘리야와 같은 성도가 됩시다.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이 그들의 신께 예배 합니다. 

26절: 뛰놀더라. 

28절: 피가 흐리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리라. 

29절: 미친 듯이 떠들며 


막 5:1-5 - 거라사 귀신 들린 자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소리지르며.....


엘리야: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 신령과 진정으로, 성령의 예배를 드려라. 


번제물과 나무 위에 물을 붇고 그 위에 불이 붙기를 기도하는 것? (번제물- 온전한 헌신, 완전히 받쳐진 마음, 나무- 엘림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불은 성령을 통해 부어지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사마리아 예배: 산당예배, 바알과 앗세라를 섬기는 데서 영향 받은 예배. 

그들이 볼 때에 이스라엘의 예배는 열정이 없고, 죽은 것처럼 여겨지는 예배. 


예배는 드리는 자에 촛점을 맞춘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예배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예배이다. 

우리의 감정이나 열정이 바탕이 되어서는 안된다. 


(왕상 18:37)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얼마나 간절했을까?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다시 고백하기를 소망했을까? 

그리고 39절에 

(왕상 18:39)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하는 고백을 듣고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저는 생각만 해도 막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납니다. 

물을 부은 제단과 번제물에 불이 붙은 것이 기적이 아니라 가장 큰 기적은 하나님을 떠났던 자들이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천상 천하에 유일하신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믿는 하나님 여호와 이십니다. 

그는 만복의 근원이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오늘 살아갈 땅과 양식과 비도 내리시는 분입니다. 

땅의 법칙이 우리를 복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법칙이 내세 뿐만 아니라 하루 하루의 일상에서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바알과 앗세라의 영향력, 풍요와 쾌락을 통해 우리에게 달콤하게 다가오지만 결국 그들은 우리를 그들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중독되어 파괴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노예삼지 않습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벗 삼으시는 분입니다. 

항상 우리에게 선택을 물으시고 옳은 것을 선택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무너져 버린 신앙, 다시 한번 하나님께 돌아와서 깊은 안식, 기쁜 평강을 누리시는 우리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