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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에서 말씀으로 (왕상 17:1-6절) 


지난 금요일부터 엘리야에 대한 말씀을 증거합니다. 주보의 목회컬럼에도 엘리야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면서란 제목으로 글을 실었습니다. 

내년도 표어와 주제의 말씀도 엘리야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계획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 시대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은 아합왕이었습니다. 

북왕국에는 19명의 왕들이 집권을 하게 되는데 이 왕들은 모두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왕들을 소개할 때에는 항상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라고 설명합니다. 

여로보암은 북왕국의 백성들이 유다왕국의 예루살렘에서 예배하지 못하도록 벧엘과 단에 따로 예배 처소를 만들어 예배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것도 큰 죄악인데 그들은 산당에 황금송아지를 가져다 놓고 하나님이라 부르며 예배를 드렸고, 레위인이 아닌 제사장을 세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왕국 이스라엘 왕들을 소개하면서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린 것이 아니라 황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전이 아닌 그들 마음대로의 장소에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지정한 레위인이 아니라 그들이 세운 제사장을 통해 예배 드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라고 말했고 사도 바울도 그런 신앙인들을 가리켜 "그들의 신은 배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정작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이 실재로는 그들의 배를 부르게 물질을 믿는 것이요, 우상을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황금송아지는 지금으로 말하면 맘몬신, 돈신, 물질신입니다. 


[왕상 16:30-31]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그런데 아합왕은 형식적으로나마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예배드리던 이전의 왕들보다 더욱 악하여 아예 바알 숭배자요, 앗세라신을 섬기는 제사장이었던 여사제 이세벨과 결혼하여 성전의 제사장들을 다 죽이거나 몰아내고 바알제사장과 앗세라 사제들로 대치하고 아얘 국교를 바알과 앗세라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젠 공식적인 물질 숭배 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 부르는 엘리야 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대를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심판하시고 회복시키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엘리야는 부모 이름도 소개 되어 있지 않고, 어떤 가문인지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저 길르앗의 우거하면서 디셉사람이라 소개합니다. 

길르앗은 요단 동편의 도시입니다. 요단 강 동편, 가축이 많은 연고로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지 않은 르우벤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가 머문 곳입니다. 

신앙 보다는 물질을 택한 지파의 땅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자 했던 자가 엘리야 입니다. 


(왕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그가 어떤 연고로 아합왕 앞에 나갔는지 소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등장은 다른 선지자의 등장과 다른 특색이 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고 그리고 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전하는 자에게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는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먼저 선포하고,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2절에 임합니다. 

1절에서 아합에게 선포되는 내용도 다른 선지자의 어조와는 다릅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만 그의 말은 하나님의 말이 아니라 "내 말"입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 하셨는데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자기의 말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전에도, 나라에도, 곳곳에 바알과 앗세라의 기복신앙, 쾌락 신앙, 세속 신앙이 가득하던 때

풍요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인생의 즐거움이 예배를 대신하던 때

엘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이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노했습니다. 

이런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이것은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분노하며 아합왕에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제 내 말이 있으면",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내 말이 떨어지면 

"너희의 복이 끝날 것이다. 이제 복에 겨워 오만방자하게 예배하는 자,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너희들이 복이 끊어질 것이다"고 우렁차게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믿음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자신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라기 보다는 신념입니다.  

신념은 때로 강한 용기로 나타나지만 능력이 없고 보장이 없습니다.  


그 말을 하자 여호와의 말씀이 비로서 임합니다. 타락한 세대에 분노하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비로서 엘리야에게 임한 것입니다.  


"숨어라. 내가 널 먹이겠다." (왕상 17:3-4절) 


무슨 말씀입니까? 이젠 내가 널 훈련시키겠다. 양육하겠다. 널 진짜 선지자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널 훈련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열성가득한 모세처럼, 호기 충만한 모세가 애굽 군사 하나를 죽이고 광야로 도망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듯이

감히 아합왕 앞에 나가 호기 어리게 선포하던 엘리야를 하나님은 숨기시고 그 때부터 훈련시켜 나가십니다. 


  • 그릿이라는 말은 '고립시키다, 잘라내다'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야를 철저히 아합으로부터도, 세상으로부터도 고립시키면서 장차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자로 가다듬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릿시냇가에서 세상과 다른 우상, 잘못된 가치관과 삶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잘라내어 하나님 앞에서 홀로되는 훈련, 기다리는 훈련, 그리고 낮아지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은혜로 살아가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까마귀가 아침과 저녁에 날라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며 그릿 시냇가의 물을 마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는 것처럼 먹을 수 없는 환경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삽니다.


그것이 얼마동안이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7절에 보면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즉 그 시내가 마를 때까지 그릿 시냇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릿 시내가 마를 때까지 시냇가에 머물면서 까마귀가 날라주는 것을 먹는 삶. 


어떤 목사님들은 다른 사람들은 가뭄으로 고난 받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가뭄 중에서도 떡과 고기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은혜라고 말씀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몇날인지 모를 날들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숨어 있는 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쉽게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광야 가운데서 만나를 먹으면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아합왕이 나타내는 세상은 하나님과 관계 없이 자기를 위하여 쌓아두고 모아두어 항상 풍족함을 누리는 삶일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삶, 풍족하여서 걱정할 필요가 없고 언제나 든든함을 느낄 수 있는 삶을 바라고 꿈을 꿉니다. 그런데 그런 삶의 바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바알과 앗세라를 믿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자기만 위하는 자기 중심적인 삶, 쾌락적인 삶을 따릅니다. 그리고 여리고성을 건축함으로 맏아들과 막내아들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다시 쌓는 자들에게는 맏아들과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엇입니까? 그들의 풍요로움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흥한 것 같지만 그 풍요로움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냥 방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 생활이나 오늘 엘리야의 그릿 시냇가의 삶은 하나님이 지정한 장소에서 그분이 주시는 대로, 그 분이 공급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목마름이 없지만 넘치지도 않습니다. 아니 하루 하루 아침과 저녁 한 시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들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안달이 나고 조급해지며, 하루도 마음 놓을 수 없고 그야말로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댄 삶입니다. 


왜 이런 시간들이 필요합니까? 역시 인간의 연약함과 죄악 때문입니다. 

왜 우리 인생에 광야와 같은 그릿 시내와 같은 인내의 시간, 고독의 시간, 훈련의 시간이 필요합니까? 그런 시간이 없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를 비판하고 교회와 성직자와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합니다. 이래서는 안됀다고 너도 나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 뿐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본인들도 그러한 시대의 일부분이 되어 갑니다. 시대가 변했으니 어쩔수 없다고 타협하고 변명하고 굴복합니다. 

죄를 미워하지만 죄를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격리시켜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홀로 만드십니다. 하나님 외에는 만날 사람도 의지할 사람도 없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분을 의지하지만 늘 부족한 것 같고 모자란 것 같은 시간에 두실 때가 있습니다. 

그 홀로된 시간을 통해 우리는 고독하지만 비로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의지하고 믿게 됩니다. 비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게 하기 전 40년 동안을 홀로 미디안 광야에 머물게 하십니다. 요셉이 애굽을 다스리기전 홀로 감옥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합니다. 

함께 하기 위해 홀로 있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함께 있음과 홀로 있음이 가장 조화있게 사신 삶의 모델을 보여 줍니다. 

홀로 있음을 통해 내가 살아왔던 잘못된 습관,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광야 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유익은 거룩함입니다. 성결입니다. 

때로 풍요로움이 우리를 게으르고 방탕하게 한다면 고독은 우리를 근면하고 성실하며 성결하게 합니다. 

그릿 시냇가의 삶은 하루 하루 사는 삶입니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뜨겁게 기도한 다음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만나시길 원합니다. 

날마다 만나지 않으면 또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그릿시냇가는 아름답지만은 않은 장소입니다. 

까마귀가 날라준 음식은 진수성찬이 아닙니다. 까마귀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이스라엘 에서도 죽은 음식만 먹은 꺼름직한 새였습니다. 그 새가 날라준 것을 날마다 먹는 다는 것은 유쾌하지만은 않은 것입니다. 

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로 왔습니까? 

자신의 기도 때문이고 자신의 선택때문입니다. 


(약 5:17)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그는 하나님이 없이 풍족함을 누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안타까이 분노하며 하나님께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를 위해 자기 자신도 물이 마르게 되는 고통을 감수했습니다. 

축복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불편함을 통해서라도 간절히 회개를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풍요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잊어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풍요로움을 포기하고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자신의 기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육신이 의지하고 있는 시내가 말라가는 것을 바라보는 엘리야의 심정은 어땠을까? 

말라가는 시내를 보면서 자신의 객기어린 선포를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를 숨기시고 훈련시키시며 연단하셔서 그의 기도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하십니다. 

아합왕을, 아합왕이 꿈꾸는 세상을, 아합왕을 움직여서 바알과 아세라의 세상을 이룩하려는 이세벨의 세계를 무너뜨리게 하십니다. 


때로 우리 인생의 부족함, 모자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할 때가 많습니다. 아니 오히려 모자랄 때에 하나님이 손길을 더욱 경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생활 동안 항상 모자람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맛보앗습니다. 그들이 굶지 않았고 신발과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다고 증거합니다. 


왜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풍성함으로 인도하지 않으시는가? 왜 가나안 전에 광야생활을, 갈멜산 전투 이전에 그릿 시냇가에 머물게 하실까? 

그 시간과 그 장소를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왕상 17:24)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이름 없던 촌 사람 디셉사람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와 다음 시간에 나눌 사렙다에서의 삶을 통해 디셉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명칭이 바뀝니다. 

단지 열정있는 호기 어린 신앙인에서 그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진실한 신앙인으로 변합니다. 


작년도 표어를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런 말씀을 교회 표어로 삼은 교회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2017년도를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하게, 저와 우리 성도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정말 그릿 시냇가의 삶처럼, 때로 고독하게, 고립시키고, 외로움에 내려두고, 하늘의 도움밖에 의지할 것이 없게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 동안 다른 어느 때보다 말씀을 가까이 하게 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첫 학기는 바울서신을 비롯한 신약성경을, 이번 학기에는 모세 오경을 비롯한 구약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게 하시고, 성도들과는 매일 같이 큐티 훈련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신념의 신앙에서 말씀의 신앙으로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이제 내년의 표어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그릿 시냇가의 삶을 잘 이겨오게 하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지식의 신앙, 자기 신념의 신앙에서 이젠 말씀 중심의 신앙, 순종의 신앙, 훈련의 신앙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남은 엘리야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시면서 내년 한 해, 엘리야가 경험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소원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둘째날 저녁

 

로뎀나무에서 (왕상 19:1-8절)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하면 “엘리야”라고 하는 데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상에서 두 명을 만나 대화하는데 하나는 모세이고 하나는 엘리야였습니다. 사람들도, 예수님도 엘리야를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꼽았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로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으로 여겨지는 아합 왕 때에 부정한 정권에 맞서 싸우는 개혁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아합왕은 하나님만 예배했던 성전은 바알과 앗세라의 선지자로 가득한 성전으로 바뀌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내 이세벨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1000번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의 지혜를 받았던 솔로몬이 1000명의 아내와 첩을 두고 그들을 위하여 산당을 지어주어 이스라엘을 분열시켰던 것 처럼 누구를 아내로, 파트너로, 사랑하며, 의지하며 사는가? 누구를 기대어 사는가가 어떤 삶을 사는가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아합의 아내 여왕 이세벨은 이방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이었는데 엣바알은 이름의 뜻이 “바알과 함께”의 뜻으로 바알의 신부, 숭배자였고 여신 아세라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아버지, 혹은 자기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이세벨의 원 의미는 ‘순결, 순수’를 뜻하는데 이것은 사탄의 속임수다. 겉으로는 가장 순결하고 순수하게 보였지만 그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그들이 섬겼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는 가나안 민족이 섬겼던 우상 중에 가장 대표적인 우상인데 그들이 이 신들을 숭배한 이유는 "땅의 풍성한 수확"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신적인 힘이 땅 속에 내재하고 있으며, 그 힘이 땅을 비옥하게 하고 곡식을 자라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농부들은 이러한 힘이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의 성적 결합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전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성적으로 자극하기 위해서 성적 흥분을 자극하는 일을 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흥분시키기 위해서 신전에서 음란한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신전 안에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성 관계를 맺는 소위 거룩한 창녀들이 있었습니다.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성 관계를 맺음으로 바알과 아세라가 성적으로 흥분하도록 자극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바알과 아세라가 성적으로 결합을 하게 되면 비가 내려 땅을 적시게 되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땅을 위한 신앙, 땅에서의 삶을 위한 예배는 결국 바알과 앗세라를 위한 신앙입니다. 자기 만족, 감정에 충만한 예배는 결국 바알과 앗세라를 위한 예배일 수 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 한 후에 당시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아세라의 신전과 제단을 지었고 음란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을 데리고 와서 보살피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믿고 누구의 영향 안에서 사는냐가 그의 온 인격과 삶과 그리고 평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호와 만이 나의 하나님이다. 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다는 믿음으로 살았던 엘리야와 바알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면서 이스라엘 선지자를 죽였던 아합왕과 그 배후 이세벨의 대결은 그렇기 때문에 이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이 정말 의미 있고 승리하는 삶인가를 보여주는 영적 전쟁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릿시냇가에서, 그리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은 엘리야가 아합왕을 만납니다. 

첫번째 만날 때는 훈련받지 않고 자기 신념, 자기의 말을 의지해서 만났습니다. 

자기 믿음으로 만났습니다. 

두번째 만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만났습니다. "큰 비를 내릴 것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아합을 만납니다. 그러나 큰 비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를 모두 멸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누가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고 우리를 살게 하는 신인지 그동안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이른바 갈멜산 전투를 벌여 하나님이 불을 내려 심판하게 하여 그들을 모조리 죽게 만들고 급기야 비를 내리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18장까지의 내용입니다.  

3년동안 하나님의 충실한 대변인, 이스라엘 민족의 훌륭한 리더. 온갖 기적이 일어났고 이방 신에 빠져 있던 그의 민족에게 영적 각성이 일어나게 되지요.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승리가 왔습니다. 모든 기도가 응답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세력이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엘리야를 좋아하지 않는 한 세력- 아합왕과 이세벨이 다시금 엘리야를 옥 죄어 옵니다. 

"내일 이맘 때까지 너를 죽이고 말겠다. 네가 그 예언자들을 죽였듯이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신들이 나에게 무서운 벌을 내릴 것이다. (19:2) 

80인의 이방 선지자와 싸워 이겼던 영적 선지자 엘리야가 여인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광야로 도망쳐서 로뎀나무 아래 않아 '이제 죽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합니다. 그 수많은 위협과 위기 속에서도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하나님이다고 외쳤던 믿음의 선지자가, 850명의 이방 선지자를 모조리 죽였던 회개의 선지자, 능력의 선지자가 지금 이세벨, 한 명의 위협에 도망하였을 뿐 아니라 죽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이지만 이것이 인생이고, 인간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도 삶의 작은 어려움이 오면 또 다시 무너지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 지금 엘리야의 모습을 야고보서 기자는 그도 우리와 성정, 마음이 똑 같은 사람이었다고 표현합니다. 


말씀을 통해 본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은 무엇입니까? 

1. 형편을 보고 

믿음 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엘리야에게 갑자기 자기 형편, 자기 꼬락서니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 그의 형편이 좋았을 때가 있었던가? 아합왕을 처음 만나던 시절부터 그는 그릿 시냇가로, 시돈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애 딸린 과부와 함께...그리고 지금도...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 그는 형편에 갇히게 되었는가? 


2.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합왕에게 맞섰던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모조리 죽였던 엘리야가 이세벨이 두려워 도망한다. 피하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 주저 앉고 싶다. 이것은 이세벨이 강해서가 아니다. 엘리야가 약해진 것이다. 갑자기 자기 연민에 빠졌다. 이젠 나를 위해 좀 살고 싶다. 나 이러다가 죽을 것 같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하고 싶다. 


3.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혼자 있고 싶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자기 속 동굴로 들어간다. 자기를 돕는 사환마저도 귀찮고 싫다. 자기의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4. 죽기를 원하여

죽고 싶다. 사는 것이 낙이 없다. 허락만 된다면 자살이라도 하고 싶다. 모든 의욕이 살아졌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것까지 사라져버렸다. 


5.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갑자기 자존감이 확 떨어진다. 비교의식, 열등의식에 빠진다. 남은 행복해 보이고 난 불행해 보인다. 무력감은 열등의식을 이끌어온다. 모든 자신감이 사라진다.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 뒤에 숨겨진 원인

1. 응답, 열매, 승리 뒤의 공허감. 

연극이 끝나고 빈 좌석을 보면서 맛보는 허전함. 주일 예배 뒤의 월요일 공포증. 


2. 잘못된 기대

이것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갈멜산에서만 승리하면 아합왕이 무릎꿇고 이세벨은 떠나가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큰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엘리야의 기대이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다. 


3. 육체적 탈진

갈멜산의 예배와 기도

850명을 직접 죽임. 

또 비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

그리고 아합왕을 향해 달려감. 하루 이틀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했다. 

그리고 그 때 공격받았다. 이세벨의 말 한마디를 들었다. 

그 때의 비난과 공격 한 마디가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영적 산후 우울증이다. 

애를 낳기 위해 정성을 쏟고, 자기 몸을 조심하고, 죄악을 삼간다. 

모든 관심을 애를 향해 맞춘다. 그런데 정작 애가 나오면 자기 인생이 불쌍해 진다. 

막상 애를 낳으면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도 많다. 

밤에 잠도 못자고 애를 떠날 수가 없고 애를 위해 자기를 보살펴주던 식구들은 자기보다는 애만 바라본다. 자존감이 상한다. 

이런 피곤함이 평생 갈 것만 같다. 쉴 틈이 없다. 

이런 우울증은 영적인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 하나님의 다루심 

1. 책망하지 않고 비판하거나 충고하지 않고 그냥 받아주신다. 공감해 주신다. 

응답받은 사람이 시험에 들면 먼저 나오는 것이 판단이고 비판이다. 좋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염치도 없다. 

한별이 임신했을 때. 일하다가 크게 하혈....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난 더 힘들었다. 넌 너무 유난떤다. 유별나다. 

그런데 그 때 그 한 마디가 더욱 사람을 구렁떵이로 빠뜨린다. 


2. 어루만지심. 쉬어라. 천사를 보내어 돌보심. 

기다릴 뿐만 아니라 돌봐 주신다. 필요를 채워주신다. 쉬도록 시간을 주고, 외롭지 않도록 사람을 보내어 만지시고, 배고프지 않도록 먹이신다. 

예수님, 배반해서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 세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와서 밥먹자! (요 21:12) 

무조건 적인 사랑이다. 


3. 로뎀에서 호렙산으로 인도... 

그의 보살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다. 

침체가 오면 먼저 일어나는 현상. 

기도 할 수 없고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하고 말씀 읽는 사람은 곧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우울증이 오면 말씀과 기도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호렙산. 

모세를 부르신 산, 성령을 받은 곳, 말씀과 기도로 충만할 수 있는 곳. 

피하기 위해 떠났던 로뎀나무가 이젠 호렙산 꼭대기가 된다. 


기도하자. 

Posted by 소리벼리
 

갈멜산의 영적 전투 (왕상 18:17-24) 


지금 새벽예배시간에 여호수아서를 나가고 있는데 거의 끝자락이라 마지막 두장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까지 다 마친 후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한 자리에 모아 들이고 말씀합니다. 

이제 가나안 땅의 주인은 너희다. 그런데 그 땅에 들어가서 그 땅 사람들과는 혼인도 하지 말고 왕래도 하지 말라. 그렇게 되면 그들이 너희의 올무가 되어 너희를 준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멸망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른바 그 유명한 세겜언약을 선포합니다. 


(수 24: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수 24:16)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그런데 이것을 듣는 여호수아의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맹세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그 심정이 여호수아 24장 19절부터 나옵니다. 


(수 24:19)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수 24: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수 24:21)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수 24:22)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수 24:23)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수 24:24)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질투하시는 하나님 하니까 '뭐 하나님이 질투를 하시고 그러는가?'그러는데 질투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바깥에서 바람을 피고 다니는데, 난 당신을 사랑하니까 다 용서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관계의 친밀성이고, 상대방에 대한 순전함인데 이것이 깨어지면 사랑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우상숭배를 허용치 않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제 1 계명,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어다" 입니다.


그런데 23절에 보니까 가나안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미 이방 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애굽에서 가져나온 신인지,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새로 얻은 신인지 불분명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백성이 이미 우상들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여호수아가 끝나고 사사기 시대가 열리게 되자 이 세겜 언약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가나안땅에 들어간 가나안 제 1세대들이 죽자 

(삿 2:10)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면서 반복되는 구절이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더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삼아 순종하며 그 분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인생의 왕이 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긴장이 풀어졌을 때에 첫 번째 드는 생각은 이제 말씀을 따라가 아니라 "자기 뜻, 자기 소견"이 앞서는 것입니다. 

신앙이 오래되는 사람이 드는 착각도 이것입니다. 

말씀도 오래 읽었고, 기도도 오래 한 사람이 이젠 나도 하나님의 뜻을 좀 안다 하면서 자기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인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내가 과거에 얼마나 기도를 하고 과거에 얼마나 성경을 읽고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과 얼마나 교제하고 있는가? 지금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가? 신앙의 기준은 항상 현재입니다. 

자기 뜻을 주장하는 사람이 끝까지 자기 뜻대로 고집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사사기서나 그 이후 열왕기, 역대서를 보면 처음에 자기가 왕이 되어 살던 사람은, 이제 사무엘 상 와서 왕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기는 싫고 자기 자신이 왕되어  살아보았자 감당이 안되니까 이제 왕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왕이 우상을 섬기면 따라 섬기고 왕이 하나님을 섬기면 따라  섬깁니다. 책임지지 않고 따라 가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단독적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 믿는다고 떠난 사람이 결국 무당을 찾고, 절에 들어가고, 도박에 빠지거나 알콜 중독에 빠집니다. 무언가 기대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데 하나님을 피하고 택하는 것은 우상숭배 아니면 쾌락, 중독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우상이 바로 바알과 앗세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점차 하나님과 바알과 앗세라를 겸하여 섬기다가 이제 아합때가 되면서 아얘 하나님을 부인하고 바알과 앗세라를 섬깁니다. 앗세라 선지자가 여왕의 자리에 오르고,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가 예루살렘 성전을 차지하며 하나님을 믿는 제사장들을 모조리 죽여 없앱니다. 이렇게 될 때까지 하나님은 잠잠히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부귀 영화는 이때까지도 이어지고 오히려 아합왕때 절정에 이르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하나님을 잊고 바알과 앗세라가 주는 쾌락과 물질의 노예가 됩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라는 여호수아 24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복을 내리신 이후에 그들의 배신을 보시고 잠잠히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망하기를, 멸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할, 하나님과 함께 할 모세와 같은, 여호수아와 같은 동역자, 일꾼을 키우십니다. 

우리가 나누고 있는 엘리야입니다. 


그는 신앙의 뜨거움은 있지만 열정은 있지만 훈련되지 아니한 사람이었습니다. 

아합왕한테 달려나가 이제 당신들의 영화는 이제 끝날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선포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적인 신념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마음을 보시고 그를 가다듬기 시작합니다. 

그를 훈련시키시기 시작합니다. 

열정만 가득했던 엘리야를 그릿시냇가로 보내어서 그의 열정을 잠시 식히고 홀로됨 가운데 말씀과 기도의 수업을 시작하십니다.

열정있는 자가 홀로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리고 말로만 전했던 하나님의 손길을 까마귀를 통해서 있을 수 없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먹이시는 분이심을 확실하게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세벨여왕의 고향인 사르밧으로 가서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한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거기서 우선순위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자기 소견대로 아합왕에게 나갔던 엘리야에게 반드시 말씀이 임한 후에 행동하게 하고, 사르밧 과부에게는 하나님을 위해 먼저, 나를 위해서는 그 다음이라는 말씀 먼저, 하나님 먼저의 훈련을 3년 동안 철저히 시키십니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간절한 기도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기도의 능력을 알게 하십니다. 


신앙생활 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신다. 나를 먹이신다. 하나님의 것을 먼저, 기도가 곧 능력이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듣습니다. 다 아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것이 훈련되지 않으면 전혀 능력이 없습니다. 

정말 없는 중에 하나님이 나를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훈련되지 않으면 자꾸만 기웃기웃 하게 됩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 같고, 저것도 하나님이 인도하심 같고 하면서 자꾸 주위를 살피게 되고, 눈치 보게 되고 비굴해집니다. 

그런데 광야 가운데 나를 책임지시는 것을 경험하고 훈련하면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눈치보며 기웃기웃 하지 않습니다. 

더 하나님을 바라보며 고난의 때를 이겨나갑니다. 


말씀 먼저, 하나님 먼저....는 우리가 가장 실패하는 훈련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나를 먼저 생각합니다. 내 것 먼저 챙깁니다. 

신앙 생활은 남는 시간, 남는 힘, 남는 물질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먼저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먼저 기도하고, 힘있을 때 먼저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을 때 먼저 드리고 심는 것입니다. 

이것이 훈련된 사람은 입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푸른 신앙생활을 유지 합니다. 

그것이 훈련 안되면 문제신앙인이 됩니다. 문제 터지면 후다닥, 문제 꺼지면 잠잠한 신자가 됩니다. 

그러면 그런 신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언제나 문제 안에서 살게 합니다. 문제가 떠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 기도만 하면 되냐?하는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아픕니다. 

기도하면 기도만 하게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무엇할지를 가르켜 줍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행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내뜻만 주구장창 부르짖다가 기도 다했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아뢰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자의 능력이요, 호흡이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마친 엘리야가 다시 아합왕께 나옵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보며 하는 첫 마디가 얼마나 기가 막힌 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지금 엘리야 때문에 고난이 왔다는 것입니다. 너만 없으면 우리가 걱정거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합입니까? 엘리야입니까? 

이스라엘의 고통이 아합으로부터입니까? 엘리야로부터입니까? 

아합때문입니다. 아합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고 쾌락에 젖어 있으며 영적으로, 지금은 땅이, 온 나라가 기근에 휩싸인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시험 들면 기도가 죽습니다. 예배가 소흘해집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문제인지, 그냥 인생 자체가 문제인지 논쟁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 때 그 때 다르기도 하고 두가지 이유가 다 맞기도 합니다 .

그런데 자기 믿음이 식어서 문제가 생기면 자기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탓을 하고 목사 탓을 하고 교회 탓을 합니다. 

내가 교회만 안 다녔어도 이런 꼴을 안다니는데 하면서 마치 교회가 자신에게 고통을 준 것처럼 말합니다. 

아합의 입술입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다녀서 고난이 온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처소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고난 받으면 갈 곳이 없습니다. 탕자가 집나가서 고난을 당하니 길거리 신세가 됩니다. 돼지 먹이를 먹고 끼니를 해결합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 하는 사람은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잠시 방황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집이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 아닙니까?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 앗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에 모아 누가 참 신인지 가리자고 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웃기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뭡니까? 그들도 정답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도 누가 복을 주는지 누가 참 하나님인지 지금 헤메이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오늘날 섬길 자를 섬기라 물었을 때에는 모든 백성이 한 목소리로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묵묵부답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제사장으로 가득차 있었던 성전이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이 꽉 찰때까지 그 백성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저는 성경말씀이 과거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오늘 나에게 주는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말씀이 곧 오늘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오늘 강대상에 올라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에게 주신 말씀이 여기계신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전합니다. 

그런데 한 분이라도 이렇게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그냥 흘려 들으면서, 옛날 얘기 듣는 식으로, 남의 얘기 하는 식으로 듣는 분들이 계시면 속이 상하고, 다급해지면서, 어쩔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는 850명의 우상주의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다 없어지고 세상이 주는 풍요와 쾌락에 아 이것이 하나님이구나 하면서 점점 죽어가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가나안 그 두려웠던 민족들을 하나 하나 정복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그들에게 절하고 섬기면서 그들의 노예로 다시금 빠져가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수 23:10)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그런데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훈련 받은 자 한 사람만 있으면 그들 우상 주의자 1000명이 와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하나를 잘 훈련시켜서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멸하시는 것입니다. 


신학교 1학년때 처음 교수님이 내어 주신 숙제. 

어떤 목회를 할 것인가? 어떤 목사가 될 것인가? 

목회 비전문을 써와라. 

다들 모델이 되는 목사님들과 교회들을 선정해서 거창하게 숙제들을 하는데 나는 마땅히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 나는 목회하려고 신학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상담공부하러, 유학 준비하러 신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데 그 숙제를 하기 위해 난 어떤 목사가 될까? 어떤 교회를 세워갈까? 일생 처음으로 기도하는데...

예수님께서 하신 목회, 열두명을 세워서 제자 삼아 그들을 파송하는 목회.... 

그래서 그리게 된 목회... 열두 명의 제자를 세우는 교회.... 


아직도 성도들이나 주위 목사님들의 말을 들으면서 교회의 크기, 교인들의 숫자로 인해 내 마음이 흔들릴 때 마다 생각나는 숙제. 난 예수님 목회를 할 것이다. 

한 영혼이 1000명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세우는 교회. 


전 지금 이 인원도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지 모릅니다. 하루도 기도가 소흘하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고, 조마조마한 일들이 가득찬 성도님들의 가정, 건강 문제들을 놓고 기도할 때 마다 늘 긴장합니다. 

그런데 그런 여러분들이 신앙 안에서 확고해져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뿐만 아니라 삶으로 신뢰하며, 힘든 중에서도 예배에, 기도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에 얼마나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 

1000명의 두 마음을 가진 성도들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온전히 헌신된 한 명의 엘리야와 같은 성도가 됩시다.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이 그들의 신께 예배 합니다. 

26절: 뛰놀더라. 

28절: 피가 흐리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리라. 

29절: 미친 듯이 떠들며 


막 5:1-5 - 거라사 귀신 들린 자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소리지르며.....


엘리야: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 신령과 진정으로, 성령의 예배를 드려라. 

번제물과 나무 위에 물을 붇고 그 위에 불이 붙기를 기도하는 것? 

불은 성령을 통해 부어지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사마리아 예배: 산당예배, 바알과 앗세라를 섬기는 데서 영향 받은 예배. 

그들이 볼 때에 이스라엘의 예배는 열정이 없고, 죽은 것처럼 여겨지는 예배. 


예배는 드리는 자에 촛점을 맞춘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예배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예배이다. 

우리의 감정이나 열정이 바탕이 되어서는 안된다. 


(왕상 18:37)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얼마나 간절했을까?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다시 고백하기를 소망했을까? 

그리고 39절에 

(왕상 18:39)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하는 고백을 듣고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저는 생각만 해도 막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납니다. 

물을 부은 제단과 번제물에 불이 붙은 것이 기적이 아니라 가장 큰 기적은 하나님을 떠났던 자들이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천상 천하에 유일하신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믿는 하나님 여호와 이십니다. 

그는 만복의 근원이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오늘 살아갈 땅과 양식과 비도 내리시는 분입니다. 

땅의 법칙이 우리를 복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법칙이 내세 뿐만 아니라 하루 하루의 일상에서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바알과 앗세라의 영향력, 풍요와 쾌락을 통해 우리에게 달콤하게 다가오지만 결국 그들은 우리를 그들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중독되어 파괴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노예삼지 않습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벗 삼으시는 분입니다. 

항상 우리에게 선택을 물으시고 옳은 것을 선택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무너져 버린 신앙, 다시 한번 하나님께 돌아와서 깊은 안식, 기쁜 평강을 누리시는 우리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본문 : 열왕기상 19 1-18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하면 엘리야라고 하는 데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로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암흑 시대인 아합 왕 때에 부정한 정권에 맞서 싸우는 개혁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당시의 왕 아합은 반대로 이스라엘 역사상 우상숭배와 탐욕스런 모습을 가장 많이 보여준 악한 왕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아내 이세벨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아합의 아내 여왕 아세라는 이방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이었는데 엣바알은 이름의 뜻이바알과 함께의 뜻으로 바알의 신부, 숭배자였고 여신 아세라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아버지, 혹은 자기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이세벨의 원 의미는순결, 순수를 뜻하는데 이것은 사탄의 속임수다. 그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그들이 섬겼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는 가나안 민족이 섬겼던 우상 중에 가장 대표적인 우상인데 그들이 이 신들을 숭배한 이유는 "땅의 풍성한 수확"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신적인 힘이 땅 속에 내재하고 있으며, 그 힘이 땅을 비옥하게 하고 곡식을 자라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농부들은 이러한 힘이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의 성적 결합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전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성적으로 자극하기 위해서 성적 흥분을 자극하는 일을 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흥분시키기 위해서 신전에서 음란한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신전 안에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성 관계를 맺는 소위 거룩한 창녀들이 있었습니다.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성 관계를 맺음으로 바알과 아세라가 성적으로 흥분하도록 자극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바알과 아세라가 성적으로 결합을 하게 되면 비가 내려 땅을 적시게 되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 한 후에 당시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아세라의 신전과 제단을 지었고 음란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을 데리고 와서 보살피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믿고 누구의 영향 안에서 사는냐가 그의 온 인격과 삶과 그리고 평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호와 만이 나의 하나님이다. 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다는 믿음으로 살았던 엘리야와 바알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면서 이스라엘 선지자를 죽였던 아합왕과 그 배후 이세벨의 대결은 그렇기 때문에 이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이 정말 의미 있고 승리하는 삶인가를 보여주는 영적 전쟁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이 이세벨과 함께 바알 신전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고 있을 때에, 엘리야는 왕 앞에 나타나 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거슬린 형벌로 수년 동안 우로가 없을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아합왕은 분노했겠지요, 이 분노를 피해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몸을 숨겼으며, 여호와께서는 매일 그에게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 등 먹을 것을 공급하게 하셨다. 그의 예언대로 땅에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강물도 얼마 후에 말라 버렸지요. 이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으로 보내어 보내어 우리가 잘 아는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떡을 지어 먹게 합니다. 마지막 남은 그것을 주의 종에게 공궤하자 비가 올 때까지 그 집의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되고 이어 아들이 병에 걸렸는 데도 죽지 않는 역사가 나타나죠. 시돈 땅이 어디지요? 바로 이세벨의 아버지 엣바알이 통치하던 나라입니다. 그 곳에서 이름없는 과부를 통해 하나님이 엘리야를 먹이시고 또 그 때문에 그 과부에게 축복하시는 거죠.

3년 후, 계속 비가 오지 않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누가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고 우리를 살게 하는 신인지 그동안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이른바 갈멜산 전투를 벌여 하나님이 불을 내려 심판하게 하여 그들을 모조리 죽게 만들고 급기야 비를 내리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18장까지의 내용입니다. 

3년동안 하나님의 충실한 대변인, 이스라엘 민족의 훌륭한 리더. 온갖 기적이 일어났고 이방 신에 빠져 있던 그의 민족에게 영적 각성이 일어나게 되지요.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승리했다고 여기는데 사탄의 세력이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엘리야를 좋아하지 않는 한 세력- 아합왕과 이세벨이 다시금 엘리야를 옥 죄어 옵니다.

"내일 이맘 때까지 너를 죽이고 말겠다. 네가 그 예언자들을 죽였듯이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신들이 나에게 무서운 벌을 내릴 것이다. (19:2)

80인의 이방 선지자와 싸워 이겼던 영적 선지자 엘리야가 여인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광야로 도망쳐서 로뎀나무 아래 않아 죽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합니다. 그 수많은 위협과 위기 속에서도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하나님이다고 외쳤던 믿음의 선지자가 지금 이세벨의 위협에 도망한 것입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이지만 이것이 인생이고, 인간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도 삶의 작은 어려움이 오면 또 다시 무너지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 지금 엘리야의 모습을 야고보서 기자는 그도 우리와 성정, 마음이 똑 같은 사람이었다고 표현합니다.

엘리야- 슬럼프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입니다. 육체적으로 지치고, 감정적으로 고갈됨. 그리고 누군가 그의 목숨을 위협. 이 때 일어나는 감정: 두려움, 적개심, 죄책감, 분노, 외로움, 걱정-> 감정적으로 완전히 무능한 상태. 우리와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지금 슬럼프에 빠져 있다. 의기소침해 있었다.

슬럼프는 자신의 문제에 갇혀 부정적으로 생각 할 때 온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생각으로부터 온다. 사람의 감정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자신이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낙심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은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엘리야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가 지금 낙망하고 있습니까?

[왕상 19:3-왕상 19:4]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1. 사실들보다 감정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를 위협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자신을 실패자로 규정해버리고 맙니다.  

           -> 감정은 항상 현실을 과장하고, 극대화하고 종종 거짓말을 합니다. 한 영역에서 실패하면 인생 전체에서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감정이 아닌 진실에 귀 기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2. 남들과 비교하지 말라.

슬럼프의 두 번째 원인- 자신을 남들과 비교함으로 나쁜 감정으로 치달게 합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고후 10:12)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 비교하는 것은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일한 존재로 만드셨고 누구를 흉내내어 살지 않도록 인도합니다. 누구나가 나만의 삶의 목적이 있고, 계획이 있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맞게 훈련하신다.

           3. 잘못된 비난을 하지 말라.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 저는 열심히 일했지만 그들은 아직도 주님과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자책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우리의 기대와 현실, 혹은 하나님의 응답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엘리야의 목숨을 노리는 것은 이세벨입니다. 사탄이 그를 위협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엘리야는 지금 이스라엘 자손 모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연약함이 현실 모두를 자기의 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저희가 내 생명을 취하려 하나이다."

           -> 모든 사람이 나를 대적합니다. -> 단 한 사람만이 그를 위협하고 있다. 그것도 단지 말로 대적하고 있다.

           이세벨-사자를 보내 협박, 정말 죽이려면 자객을 보내어 죽였을 것이다. 그녀는 백성들의 지도자를 죽일 수도 없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18절에보면 아직 이방 종교에 굴복하지 않은 수천 명의 선지자들이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치료방법

           1. 육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라.

           [왕상 19:5-6]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았다.

           하나님은 그를 질책하지 않으시고 쉬게 하시고 육체적인 필요를 채워 주신다. 영혼을 회복시키기 이전에 육체를 회복케 하신다.

           2. 속 마음을 하나님께 털어놓으라.

           [왕상 19:8-왕상 19:9]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원기가 회복된 다음 동굴로 들어가 하룻밤을 보냄. 동굴- 골방

           -> 엘리야야,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 엘리야는 자기 속내를 모두 토해냈다. 하나님은 그가 울분을 통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억눌렸던 감정들을 분출하게 하셨다.

           엘리야는 많은 것들을 속으로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감정만도 두려움, 적개심, 죄책감, 분노

           "저는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전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열심히 일했는데 결과가 없자 허무하고 화가났다. 외로워서 절망했다.

           여기서 무엇하느냐?->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낙심하느냐?  무엇이 너를 집어 삼켰는냐?

           3. 하나님을 새롭게 깨달으라.

           [왕상 19:11-1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바람, 지진, 불의 모습->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했던 모습, 지금까지의 엘리야의 인생. 전쟁과도 같은 영적인 전쟁. 사역의 연장. 지금으로부터 말하면 큰 부흥회만 다니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또한 수 많은 영적인 우상들과 전쟁하던 삶->

하나님의 응답- 불과 지진과 바람도 나의 능력이지만 난 너와 은밀히 교제하기를 원한다. 은밀한 교제를회복하자하고  나지막한 소리. 부드러운 음성을 들려주심-> 갈멜산에서의 영적 전투가 아닌 하나님과의 은밀한 속삭임. -> 새로운 일을 주심. 그리고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 일하게 하심.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1) 첫째는 하사엘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을 삼는 것이었고, 2) 두 번째는 예후라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북이스라엘의 왕을 삼는 것이었고, 3) 세 번째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신의 뒤를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고 아합에게 예언했다 (왕상 21:23). 이 예언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 이세벨이 예후의 말에 따라 내시에게 창문으로 던져져 죽은 다음 장사할 때는 두개골과 수족 외에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개들이 그 시체를 뜯어먹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삼는 예후에 의해서 이세벨 여왕은 창문으로 던지워저 죽임을 당하고 개들의 먹이가 됨.        

지금도 우리는 영적인 전쟁터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복 받으려면 세상의 법을 따라야 한다. 때로는 타협할 수도 있어야하고 부정한 것도 눈감아 줄 수 있어야 하고, 때론 술자리도, 음란한 자리도 낄 줄 알아야 한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죄이다. 죄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모든 것이다. 때로 그런 영적인 전쟁에서 우리는 지치고 상하고, 넘어진다. 끝없는 사탄의 괴롭힘에 지긋지긋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전쟁은 오래가지 않는다. 반드시 끝나는 전쟁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넘어져도 결코 우리에게 실망하지 않고 또한 우리를 실망시키지도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연민에 자기 비하에 빠지는 것도 원치 않으시고 일어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새로운 목적과 방향을 주신다. 우리를 도와 주신다. 그런데 사실 이런 침체에 빠지면 다시 회복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로뎀나무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가져다 주는 음식을 먹고 기력이 회복한 다음 사십일을 가서 호렙에 간다. 사십일 길을 가서 호렙에 간다? 낯선 단어들 아닌가? 바로 모세가 바로의 궁을 빠져 나와 사십년 동안 광야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I am Nothing의 시간,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지는 시간이다. 자존감이 무너질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들어가야 하는 시간이다. 영적으로 보면 축복의 시간이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또한 힘든 시간이다. 그것을 연단을 다 거친 엘리야, 갈멜산에서 이방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서 승리를 맛보았던 엘리야가 다시 그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믿음에 한 번 선 자들은 될 수 있으면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 침체가 이르기 전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예화: 선교사 한 분이 아프리카로 선교를 갔습니다.  원주민들과 함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원주민이 큰 돌을 선교사 가슴에 안겨주었습니다.  자신들은 큰 돌을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안고 강을 건넜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 이유를 강 중간쯤 왔을 때 알았습니다.  강 중간쯤에 급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만약 무거운 돌이 없었다면 급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무거운 짐이 자신들을 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볍고 편한 것만이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침체의 강을 건너게 하시는데 그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