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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5.08.28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33-38)
  2. 2012.08.28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8월 26일) (2)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33-38)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16장으로 이루어진 마가복음의 정확한 중간지점으로서 마가복음 신학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터닝포인트가 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전까지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특별히 예수님의 관심의 초점이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사역이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을 말씀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유대인의 땅에서 5천명을, 이방인의 지역에서 4천명을 먹이십니다. 폭풍우를 잠잠케 하십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끌고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을 지나가십니다. 이 구절은 여러번 설교를 통해 말씀 드린 장면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로마 황제인 카이샤르에 헤롯 대왕의 아들 빌립이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명명한 도시입니다.  

황제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황제의 이름에 걸맞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원형경기장이 있어야 하고, 신전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크고 대리석로 치장한 화려한 신전이 있는 곳에서 주님은 초라한 옷을 입고 제자들에게두가지를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세상의 가장 강력한 권력이 있는 곳. 세상 사람들이 가장 소망하는 모든 것이 있는 그 한복판에서 주님은 네가 믿는 주님이 세상 그 어떤 권력과 화려함보다 더 큰 분이심을, 하나님이 세상의 왕과 어떻게 다른 분이심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는 그리스도라는 말. 마태복음의 말씀을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입니다"하는 이 고백은 이후 교회의 사명과 고백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신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다릅니다.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짖누르고 다스리는 나라, 부정과 부패를 일삼아도 돈만 있으면, 권력만 있으면 적당히 넘어가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동기든 다 허용되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고, 우리 안에 선한 양심을 일어나게 하시고,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의 주인인 분이 바로 예수라는 것을 고백하는 곳. 그곳이 교회의 정체성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고백한 것입니다. 

세상의 왕, 세상의 왕의 신전 앞에서 "예수가 나의 왕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자기의 가야 할 길을 처음으로 공개하십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십자가와 부활의 길" 입니다.  

왜 예수가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가야 합니까? 바로 십자가와 부활, 고난과 죽음의 길, 수치과 모욕의 길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만이 사단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죄를 씻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바로 조금전에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똑같은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 16장 22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 마옵소서: 십자가의 길로 가지 마세요. 왜 메시야가 십자가를 지려 합니까? 구약시대 하나님처럼 대적들을 무찌르고, 기적으로 놀라게 하고, 꼼짝못하도록 항복하게 하세요.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님 십자가 못지게 막을 것입니다. 

붙들고 항변했다. 주님을 꽊 움켜 쥐고 항변했다.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요? 

자신이 메시야라고 불렀던 예수를 움켜 쥐고, 꾸짖기까지 하는 이 마음.  

십자가와 부활을 가로막는 이 마음. 

도저히 평소의 제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 마음. 


십자가를 피하고 고난을 피하고 좁은 문을 피하고 넓은 길, 편한 길, 높임 받는 길, 칭찬받고 대우 받기만을 바라는 마음. 

결국 가이사랴 빌립보, 또 다른 왕국, 제국, 세상의 왕과 똑같은 것을 추구하는 마음. 세상과 별 다를 바 없는 그런 마음. 


33절: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어디에서 돌이키신 것인가? 베드로와 마주보고 있다가, 지금 갑자기 뒤를 돌아 다른 제자들을 보시고 그리고 제자들을 꾸짖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베드로를 꾸짖는 말이기도 하지만 정작 듣기를 원하시는 대상은 제자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33b)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일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지고 부활하는 일입니다. 자기 목숨을 바쳐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남들 다 가는 넓은 길로 가고 싶은 마음 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힘으로, 지식으로, 능력으로 뽐내고 자랑하고 높아지고 대우 받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34절 이제는 그 분을 따르는 무리와 제자,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자에게 예수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그 길로 가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예외없이, 나를 따르는 자 모두...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자기 이익, 자기 이기심, 자기 욕망)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 짐, 부담, 모욕, 수치) 

나를 따르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무슨 소리입니까? 자기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자기 목숨처럼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존심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외식이고 겉치례입니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 백부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구원얻는 믿음, 은혜 받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구원 얻기 위해서 자존심 버리고 구원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하는 주님의 매정한 말씀에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맞아요 주님, 제가 참 개처럼 여김을 당해도 마땅하지만 개들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 말씀하십니까? "가라 네 믿음이 크도다" 합격! 


자기 십자가 할 때 마다 떠오르는 사람, 구레네 시몬 

(막 15:21)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이 십자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자원하는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

우리는 자원하는 십자가에 익숙합니다. 힘들지만 내가 원해서, 어렵지만 내가 선택해서... 

그런데 시몬이 진 십자가는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 떠밀려서 나에게 온 십자가, 그렇지만 피할 수 없어서 마지 못해 지는 십자가...


2. 대가나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십자가

시몬은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저 길 지나다가 로마 병사에 의해 십자가를 졌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질 때에 이런 생각 얼마나 하는지 모릅니다. 이거 힘들지만 잘 지면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시몬은 전혀 그런 기대함 없이 그 십자가를 지어야만 했습니다. 

대가를 바라고 지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라 Business입니다. 왜 회사에 나가서 피곤해도, 아파도, 하기 싫어도 일합니까? 

돈을 벌기 위해, 대가가 있기 때문에.... 그건 비지니스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잘못 교육하고 있는 것이 이거 하면 복준다. 이거하면 이렇게 된다. 

십자가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비지니스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도 손해볼 일 전혀 안하려고 합니다. 


3. 주님이 당한 수치와 모욕을 똑같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 모여있던 군중들: 제자들은 도망가있거나 숨어있고 오직 예수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군중. 어쩌면 시몬도 예수를 욕하면서 서있다가 병사들에게 끌려왔을 지도 모른다. 
  • 십자가를 들면서 욕을 하는 입장에서 욕을 듣는 입장으로 
  • 아무런 위로나 대가 없이 당하는 그런 수치감. 모욕


그니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억지로, 아무런 위로 없이, 수치를 당하면서 지어야 하는 십자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다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6절) 

신앙생활 하면서 십자가 안지고 칭찬과 명예와 성공과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을 다 가져도 정작 구원이 없으면 무엇이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예수가 지신, 그리고 우리에게 맡기워진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


지난 주에 박사 논문을 통과하신 목사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논문도 교수들의 격찬을 받으면서 미국과 한국에서 출판이야기도 교수가 먼저 제안하고 할 정도로 실력있고 학식이 뛰어나신 분.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한국 교회를 위해 어떻게 하고....그런 거창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집 안의 가장 역할을 제대로 할 수만 있다면..."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가끔 목사라는 직분을 담당하면서 제가 지고 있는 십자가를 부끄럽게 느낀 적이 있습니다. 언제? 

세상적인 기준 앞에 설 때에... 

연봉으로 직업을 평가하고 교인수로 목회를 평가할 때. 

위축당하고 소심해질 때가 있어요. 

연봉이 그 사람의 인격이고 교인수가 목회의 전부인양 자꾸 그런데서 자유하려고 해도 그런 말을 듣고 대우를 받을 때마다 제 자신이 부끄럽게도 영향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가이사랴 빌립보 황제의 신전 앞에 서 있는 제자들처럼 성공을 자랑하는 세상의 위용 앞에서 자신이 초라해 지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어머니, 장인어른 은퇴하시고 여기 저기 아프시고 할 때에 자식된 도리도 다 하지 못하는 자녀

자녀의 아픈 곳을 마음껏 치료해주지 못하는 부모. 

아내의 생일날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남편,

성도님들을 만나고 심방할 때마다 대접하지 못하는 목사... 


내가 가는 길이 맞나... 제대로 된 길을 가는 것일까?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한 교회에서 식당봉사에 대한 갈등을 토로하며 한국에서 여행오신 권사님께 고출을 토로하니까 "우리 교회는 서로 식당봉사 안한다고 해서 아얘 사설업체에게 맡겼어요." 

희생없는 신앙생활, 헌신 없는 예배 

예배는 가장 기본적이고 최소한의 희생. 

왜?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위로받고, 힘을 얻으니까...

참 예배는 주일 날 드리는 한 시간의 예배가 아니라 우리 삶을 통해서 우리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 

그리고 주일 날 예배를 통해서 감사하고 회복하고 충만하여져서 돌아가는 것이다. 

예배 드린다고 표현 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공급받는다. 

그런데 얘기 하다보면 마치 예배가 자신이 드리는 최선의 희생이고 헌신인양....


새벽예배 시간이 끝나면 간단히 아침식사 하고 교회 청소.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토요일 날 새벽예배 드리는 성도님 수가 확 줄었습니다. 

이수연 집사님 화장실 청소, 이귀자 권사님 강대상 청소, 제가 청소기 돌리고 바닥 닦고....

그것을 보기가 넘 딱하다. 

그래서 언젠가 부턴가 토요일날 청소를 안하고 간다. 

나중에 아무도 없을 때에 혼자 청소한다. 

성도들 누구를 보아도 딱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부담 안주고 내가 하려고 한다. 

그것이 목자의 심정이다. 

힘들게 일주일 일하고 토요일 하루 푹 자는 사람들에게 억지로라도 끌어서 나오라는 말 차마 못하겠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목숨을 위해 천하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작 구원에서 멀어지면 어떡하는가? 

자기가 손해보고 힘들어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구원을 이룬다. 그래야 구원을 이룬다.

이제 무더운 여름도 지나고 아이들은 새 학기가 시작된다. 

우리 교회도 9월부터는 새로운 그룹으로 성경 공부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한글학교가 시작된다. 

새롭게 시작되는 일이 개인들에게 어떤 부담이나 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자원하는 심령이 있을수도 있지만 자원하지 않고 억지로 맡기워진 십자가가 주어질 수도 있다. 

기억하자.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자존심 내려놓고, 자기 이기심 내려놓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때로는 억지로 맡기워진, 달가와하지 않는, 피하고 싶은 일들이 주어져도 

나를 따르라. 

주님이 하셨듯이 나도 주님따라 순종하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우리 로고스 성도들이 되자.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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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죄인을 위해 죽는 자

본문: 5:6-8; 15:13

[ 5:6- 5: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목회를 하면서 목사님들로부터, 그리고 영혼 구원을 위해 애쓰는 성도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소리- 사람은 정말 안 변한다. -> 그렇게 기대를 하고, 관심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정성을 들여도 참 변하기 어려운 존재가 인간. 그래서 실망하면서 기도를 중단하고, 인간 관계를 끊고, 그저 혼자 성경보고, 기도하는 신앙 생활에 만족. 안 변하는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이 목회고, 신앙생활이고, 기독교인의 삶이다. 그래서 목회도, 신앙생활에도 갈등이 많고, 슬럼프도 많고, 시험도 많다.

·         저의 은사 중에 이정효 교수- 기독교 교육

목회자로 부름 받고 나서, 설교자로 부름 받고 나서, 꾸었던 가장 무서운 꿈. 

-> 내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아무도 듣지 않을 때, 나는 열심히 전하고 있는데 자기들끼리 떠들며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 하고 있을 때….

->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드는 더 무서운 생각… 안 변할 줄 알고 기대 없이 말씀을 준비하고, 아무 기대 없이 말씀을 전할 때… 앞의 경우는 그래도 말씀을 전하고, 준비하는 본인이라도 신앙의 순수는 있는데, 뒤의 경우에는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똑같이 하나님과 멀어져 있을 때…

·         그래서 그런 열정 없는 목사가 되지 않기 위해, 여기 있는 성도님들 중 한 분이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체험하게 하기 위해 주일 예배 준비할 때는 정말 각별히 신경 쓰고 정성을 들여서 준비한다. 미국 학교에서 기말에 쓰는 페이퍼는 레터지로 20-30장… 페이퍼 하나 쓰기 위해서 최소 10권에서 20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 지적 받지 않기 위해 엄청 긴장하고 쓴다. 그런데 설교는 내 자존심이 아니라 영혼에 관련된 준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다. 그래서 더 긴장하고 더 예민하게 준비한다. -> 대부분의 목사가 주일 설교만큼은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한다. 어떻게 이 말씀이 성도들의 심령을 움직일지그런데 반응이 없고, 변화가 없고, 말씀을 잘못 반응하는 것을 보면 설교자는 점점 무력감에 빠져든다. 절망감이 엄습한다. 어떤 목사라도 겪게 되는 경험이다. 

·         -> 그럴 때 꼭 기억하라고 이정효 교수님이 주신 말씀. 5:6-8

 

짐 엘리엇 선교사

우리가 본 영상은

1956년 미국 전역을 큰 충격으로 몰아 넣었던 짐 엘리엇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창 끝"의 내용을 짧게 편집한 내용이다.

짐 엘리엇-JIM ELLIOT(1927-1956) 1927년 여기서 멀지 않은 오리건 포틀랜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학창시절에 글을 잘 썼고, 연설로도 유명했고 또한 레슬링 선수로 우승까지 차지했고 공부도 수석으로 졸업한 한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많은 친구들이나 주변의 사람들은 그가 탁월한 리더십과 영적인 능력으로 미국 교회의 유망한 일꾼이 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엘리엇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오직 하나님께 그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다. 그런 간절한 기도 중 그는 에콰도르에서 사역을 했던 선교사로부터

 

 "왜 어떤 사람은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두 번씩 들어야 합니까?"

라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한 번도 전해지지 않았던 남아메리카의 식인부족 아우카 부족에 대해 듣고 그의 갈 길을 정했습니다.

아우카 부족- 어떤 인디언도 어울리지 않는 독립되고 분리되어 있는 부족. 외부인은 무조건 죽이고 자기 부족인들도 많은 수가 서로 죽이고 있던 부족.

 

똑같이 선교사로 부름을 받은 아내 엘리자베스와 엘리엇은 우선 에콰도르에서 인디언 사역을 하며 미래에 사역을 할 아우카족의 말과 문화를 배워 나갑니다.

 

드디어 1955년 가을 비행선교사 네이트 세인트와 다른 세 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엘리엇은 아우카족의 사람들과 친구가 될 목적으로 몇 달 간 비행기에서 선물을 떨어뜨리면서 그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마침내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젊은이들이 간단한 짐만을 챙긴 채 잔인하고 독하기로 이름난 아우카 족속들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조그만 소비행기를 타고 해변에 내린 이들이 해변가에 텐트를 치고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간 지 닷새 째 될 즈음, 선교 본부에서는 이들에게서 소식이 없자 혹시 하는 생각에 비행기를 보내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 해변에서 다섯 명의 청년들이 무참하게 살해된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1956 1 8일 다섯 명 모두 아우카족 전사들에게 창과 도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해변가에 그들의 시체가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머니에는 권총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변보호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뽑지 않고 그대로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그를 죽이는 데 가담되어 있던 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짐 엘리엇의 죽음에서의 마지막 말은 나는 당신의 친구입니다.”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아빠가 아우카족에게 간다고 하니까 헤어지면서 아들이 아빠에게 하는 말을 기억하고 한 말이었습니다.

만약 위험한 순간이 닥치면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약속해 주세요.. 와다니 말을 알려주며..

그 뜻은 " 나는 당신의 친구입니다" "당신의 진실한 친구"

 

라이프 지와 타임 지는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릅니다.  당시 라이프 지에서는 이 사건을 10페이지에 달하는 기사로 다루면서 오랫동안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했던 선교사들의 삶을 이야기하며 결국은 죽음을 당한 그들의 삶을 가리켜 "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What a unnecessary waste!)라고 애석해하면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결국은 세상적으로 개죽음을 당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한탄한 것이지요.

 

한 기자는 급기야 짐 엘리엇의 아내인 엘리자베스에게 찾아가 인터뷰를 하면서 또 다시 이런 말을 했습니다.

 

"What a Waste!" 그러자 그 당시 20대 초반밖에 안 되었던 그의 아내가 그 기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낭비라니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의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내 남편은 이제야 그 꿈을 이룬 것 뿐입니다. 이후로 다시는 내 남편의 죽음을 낭비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엘리엇이 시카고에 있는 휘튼대학교 기숙사에 있을 시절부터 적었던 글이 공개 되었는데 그 글 중에는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가 19살 때 썼던 글인데

"하나님, 제가 감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부족한 나의 나무토막 같은 인생에 주여! 불을 붙여 주소서. 제가 주를 위해 탈 수 있도록. 나의 삶을 주께서 소멸시키십시오. 이 몸은 주의 것입니다. 나는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완전하고 풍성한 삶을 원합니다. 바로 주님과 같이...."

 

그는 일기장의 한 쪽 구석에 영상에서 소개된 이런 글도 적어놓았습니다.

 "제게 다시는 영원히 썩어지지 않을 것에 바치는 나의 희생을 어리석다고 말하지 말아요"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젊은이들의 아내 다섯 명은 한 두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아이들을 부둥켜 안고 남편이 순교한 그 나라를 찾아갑니다.

'우리 남편들이 못다한 일들을 우리들이 마저 해야 한다’ 그들은 복음을 들고 그 잔인하기 짝이 없는 아우카족을 다시 찾아 나선 것입니다.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일년간 간호사 훈련을 받고 아우카족에게로 갔는데  아우카족은 다행히 여자를 해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하여 부인을 해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인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목숨을 걸고 그곳에 갔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아우카족을 위해 여러 해 동안 헌신하였습니다.

 

부인이 어느 날 고국으로 돌아갈 일이 있어 가려고 하자 아우카족의 추장이 부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이고 우리를 위해 이렇게 애써서 수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5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그 남자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부인의 말을 들은 아우카족은 감동을 받고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아우카족의 추장이었던 사람이 빌리 그레함이 주도하는 한 예배에서 간증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그분들에게서 복음을 받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들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처럼 그분들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5명의 선교사 살해에 가담한 사람들 중의 세 사람은 현재 그 부족 교회의 담임목사와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짐 엘리엇과 동료들이 살해당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 그들이 죽은 마을에서 수백 개의 교회가 생겨났으며,

엘리엇이 죽고 나서 태어난 아들이 그 교회 중 마을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미의 열대 우림 속에서 죽은 지 40년 후인 1995, 엘리엇이 졸업한 휘튼대학에서는 강력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         이런 분들의 삶 앞에서 우리의 삶의 고민이나 염려, 시험들이 어떻게 보여 집니까? 아니면 뭐 나랑 상관없는 그런 이야기로 들려집니까?

 

제가 영성을 공부하게 된 계기

·         신학교 다니면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하며 굉장히 영적으로 힘들었을 때, 수업시간의 일환으로 봉쇄 수도원 방문.

-> 23년간 한 번도 밖에 출입하지 않고, 그 곳에서 매일 같이 똑같은 일상, 하루 세번의 기도와 예배, 노동과 독서… 죽을 때까지…

-> 그 분께서 하신 말: 난 등대의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일반 교회가 일반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배라면, 그 배가 풍랑을 만나 길을 잃어버렸을 때에 등대를 보고 다시 길을 찾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살다가 힘들었을 때에 우리 같은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고민을 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신앙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 인생도 의미가 있을 꺼다."

그 앞에서 한 순간에 내가 가졌던 모든 고민, 우울함, 방황이 끝나버렸다. 정말 쪽팔리고 나 자신이 초라하고 너무 작아 보였다.

 

우리가 생명을 던지면 변화시킬 수 있다. 사람은 변하기 힘들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변화될 수 있다. 내가 죽어 사랑하는 것이다. 불 같은 사랑을 하는 것이다. 그 사랑 앞에 내 자존심?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무시당하는 것?

예수님이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했던 그 고난, 더러운 죄인들이 그 앞에 침 뱉었다. 돌을 던졌다. 하나님이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런 모욕을 참았으면 내가 당하는 모욕과 무너지는 자존심이 뭐 그리 대단한가?

내가 이뻐서, 잘해서 구원받았는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식물인간처럼 아무런 삶의 의욕이 없는 영적으로 죽어있던 내가..

경건하지 않는 나- 부도덕하고, 배은망덕하고, 정말 더러운 나를 위해, 죄인인 나를 위해 그가 죽었다.

나를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고귀한 삶을 삶게 하기 위해서…

 

이 사랑을 한 마디로 하면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를 짊어진 삶의 특징.

자존심을 버리고 낮아 지는 것

 

우리가 하는 고민, 기도 제목의 대부분은 뭔가?

오직 내 가족, 내 자녀 잘 되는 것, 가난하지 않게 하는 것, 복 받는 것… 오직 그런 욕심으로만 가득 차 있고 매일 매일의 삶에 허덕이며 살고 있지 않은가?

누굴 위해 죽겠다는 기도를 해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한 몸 바치리라는 결단을 해 본적이 언제였는가? 그런 기도를 내가 얼마나 기억하고 지키려고 애써 보았는가?

 

 

 

특송 훈련: 자존심 땜에 안 했던 나. -> 시키는 대로….

 

낮아지는데에 고상하게 낮아질 수 있나?

아름답게 낮아질 수 있나? 낮아지는 것은 그야말로 비참함을 견디는 것이다.

어머니의 예….()

 

 

남을 세워주기 위해서 내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을 참아보자.

 

 

교회를 세우자. 정말 멋있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정말 상처입은 자들이 와서 치료받고 회복되어 다시 세상에 나가 전파할 수 있는 그런 교회…. 그렇기 위해선 내가 죽어야 한다. 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어도 죽고, 또 죽고, 이 성전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넘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받치는 것.

누가 친구인가? 첫 번은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날 친구로 부르셨으므로.

믿는 자?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으므로 동일한 형제와 친구

연약한 자, 경건치 못한 자, 죄인-> 나 또한 그런 자였으므로…

 

한 번 뿐인 인생 정말 값어치 있고 고귀하게 살아보자.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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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수연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8.29 10:24

    무슨 말을 해야할지....
    한없이 먹먹해 지기만합니다
    나에게 이런 말씀을 주신 주님에 마음에 울고, 나에 마음을 드려다보며 또 울게됍니다
    "하나님에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내가 깨달았나이다"

  2. 문미경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8.30 22:17

    끊임 없이 투덜대고, 내 잘못된 언행을 합리화시키기위해 이것저것 갖다 부쳐
    변명만 늘어놓던 저에게.....정말 고집스럽게 지랄같은 나를 버리지 못해 변하지
    못하는 저에게....하지만 정말로 변하고 싶었던 저에게... 주신 말씀....감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