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2022  이전 다음

  •  
  •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  
  •  

시므온, 기다림의 끝에서 만난 메시야 

 

[눅 2:25-3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 대강절, 즉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과거의 역사로는 그리스도의 탄생(성육신)으로 오셨음을,미래의 사실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오실 것을,현재의 사실로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계속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을 다 포괄하는 것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 이 그리스도의 오심의 3중적인 사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은 바로 기다림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다림이라는 말을 삶으로 가장 잘 보여준 사람으로 등장한 인물 - 시므온 

 

  • 그는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그리스도를 보리라"는 말씀을 듣고 간절히 예수님을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에 보면 "그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가 바른 사람입니다. 경건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며 기도 생활하는 사람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도 매일 같이 말씀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고 깨달아도 그것대로 살지 않는 형식적인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의로움의 완성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며, 반대로 말씀은 의로움, 바로 관계를 통해서 온전해 짐을 보여줍니다. 
  • 자기 편의대로, 자기를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으로 말씀을 보는 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스시"라는 말인데 이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도와주는" "위로하는" "대신 요청하는" 더 나아가 "구원하는"의 뜻이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위로해 줍니다. 그리고 말씀의 사람도 어떤 상황에서도 남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기다리던 시므온은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 성전을 찾은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축복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는 자지 결코 축복을 빌어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메시야를 축복한 인물, 야곱이 바로를 축복한 것보다 비교 할 수 없는 것 만큼 큰 사건 - 바로 시므온의 축복 사건입니다. 

 

메시야를 축복한 후에 시므온은 천지의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올립니다.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자기의 사명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눅 2: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그는 성령으로 부터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Vision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전은 그가 죽기 전에 성취하고 나서야 온전한 믿음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말은 묶였던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해졌다는 것입니다. 

해결되지 않았던 모든 신앙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신앙의 모든 숙제를 풀었다는 것입니다. 

 

---------------

인내만으로는 기다리지 못한다. 희망을 지닌 사람만이 기다릴 수 있다. 기다림의 목표는 희망이며 기다림의 과정이 인내인 것이다.

 

1. 창조 신학, 창세기의 시작 

  • 바벨론 시대의 사정으로 돌아가 그 당시 이들의 충격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벨론 유배는 한마디로 야훼 불패의 신앙의 패배였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송두리째 뒤엎는 사건이었다. 절망한 이들은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예루살렘은 도대체 뭐고, 이전에 주었던 땅, 이 땅은 무슨 의미였나? 이스라엘 왕국이 무너진 이 마당에 신앙이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 백성이란 우리 꼴이 도대체 뭔가?" 모두들 이런 회의에 빠져 허우적대는 데서 피어난 큰 획이 있었으니 이른바 "창조신학"의 대두였다. 
  • 이제 이들의 역사는 끝이 났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이 역사를 끄짚어내기 위해서는, 이 역사보다 더 큰 분, 역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분이 필요했다. 누구인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은 이제 성전 중심에서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바뀌게 된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 분을 조명한다. 역사 보다 큰 분은 하나님이시고 역사보다 큰 개념이 창조다.  창조는 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있는 것도 다 없애는 것(노아)도 창조이다. 
  • 제사장들은 창조기사들을 종합하여 지금의 "창세기"를 편찬한다. 이 효과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회복이다. 창세기는 바벨론에서 우상 숭배에 빠지고, 절망에 빠졌던 이스라엘인들에게 우상보다 더 큰 분이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하였다. 역사의 알파요, 오메가가 하나님이시므로 그 분을 붙들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 두 번째는 예언자 그룹이다. 이들을 대표하는 것이 이사야이다. 이사야서는 전체가 66장으로 되어 있는데 1-39장까지는 주로 "망한다, 망한다"는 얘기를 하고 40장부터는 "위로하라, 위로하라,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회복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 제 2 이사야가 쓴 글의 내용을 보면 창조에 대한 기사가 굉장히 많다. 

(사 48:12-13)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 이 말씀은 땅도 일어서고 하늘도 일어서는 판인데 내가 너희를 원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은 어떠하랴는 소리이다. 

(사 43: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이 말씀은 "내가 아직 너를 버리지 않았다. 두려워 마라"는 희망의 메시지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내가 창조주다. 역사는 내가 만든다. 걱정하지 마라." 이 말이다.

(사 45:7-8)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 결국 이 말씀은 천지개벽을 이야기한다. 

 

  • (사 55:8-9)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 우리가 고통 속에, 시련 속에, 실패 속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왜 이런걸 저에게 주셨습니까?" 그 때 주시는 답변이 바로 이 말씀이다. 하나님의 섭리, 경륜은 우리의 생각과 방법과 다르다. 그러나 참이고 바라고 선하다. 

 

Posted by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목: 설레는 기다림

본문 : 누가복음 2:25-35절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적인 인사말은 샬롬(평안)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사말은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즉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예수,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신 주가 다시 오시리라는 소망 가운데서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기도 전에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나누게 될 시므온 입니다. 

26절에 보면 “?it had been revealed to him by the Holy Spirit that he would not die before he had seen the Lord Christ.”? 직역하면 예수님을 보기 전에는 그가 죽지 않을 것임을 성령을 통해서 계시 받았다는 것인데, 한 번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그가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는 성령님의 계시를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었는가? 25절에 보면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라고 말합니다. 

의롭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웃, 나 자신과의 관계가 바르다는 소리이지요. 모든 관계의 시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 사람이 이웃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한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도 잘못 되어 있다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바른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경건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며 기도 생활하는 사람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헌신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의롭고 경건하게 신앙 생활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복과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라 말합니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위로 

  1. 이스라엘 민족의 위로
  •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년 동안이나 선지자 없이 로마의 속국으로 소망을 잃어버린 민족을 일으키기 위해. 마치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1. 교회의 위로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 신약시대의 이스라엘은 곧 교회. 따라서 교회의 회복을 꿈꾸는 사람. 

  1. 성령을 기다리는 사람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스시"라는 말인데 이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도와주는" "위로하는" "대신 요청하는" 더 나아가 "구원하는"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시면서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는 데 성령이 바로 파라클레시스, 곧 위로하는 자, 도와주는 자의 의미 입니다. 즉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찬 사람입니다. 

즉, 그는 날마다 성령의 위로, 성령의 감동,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음으로 보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소망, 약속의 말씀인 동시에 사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그냥 가만히 앉아 그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깨어서 기다린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 졸지 않고, 알아볼 수 있도록 늘 기름을 준비하고, 다시 말해 성령과 함께 하며 깨어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 

그는 이 약속을 경험하기 위해서 날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서 성령의 도우심을 기다렸던, 그래서 성령으로부터 지속적, 반복적으로 “?네가 죽기 전에 예수님을 볼 것이다”?는 거듭된 계시를 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성령과 동행하면서 그리스도가 오시길 깨어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동행했던 시므온은 어느 날, 그날도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성전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께서 그를 바로 그날, 율법에 따라 태어난 지 40일이 지나 예배를 드리러 온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평생을 그리스도를 만날 날을 꿈꾸며 기다려온 시므온, 그것을 위해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며 기도하며 성령과 동행했던 시므온,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아기에게 다가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장면이 바로 29절부터 시작되는 시므온의 기도, 혹은 시므온의 찬양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 말씀의 의미를 다시 직역하면 

“?하나님, 이제 종을 편히 쉴 수 있게 해 주세요.”? “?이제 내 사명을 다 했으니, 날 평안히 하늘나라에 올라가게 해 주십시오.”? 

지금 예수님은 태어나서 막 세상으로 나왔는데, 그 예수님을 평생 기다려왔던 시므온은 이제 예수를 바라보며 이제 날 평안히 올라가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 그 약속의 성취를 보았습니다. 구원은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계시하신 약속이 성취되는 것, 기도의 응답,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날마다 겪게 되는 구원의 의미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30-32) 

시므온의 이 기도 “?주여,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주십시오.”?하는 이 기도, 이 찬양은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임종의 자리에서 드렸던 임종의 기도였습니다. 이런 믿음의 기도, 평생의 사명을 완수하며 믿음과 평화의 기도를 드렸던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 분을 만난 기쁨에 감격한 사람들이 평생의 소원을 이루며 드렸던 기도입니다. 이제 죽음의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나의 일생의 사명을 이루고, 내 평생의 숙제를 다했다, 이젠 나의 구원과, 내 민족, 내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을, 그 약속의 성취를 내가 받았고, 경험했다는 믿음의 고백 끝에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마지막 순간 잊지 않고 “?주님, 이제 나를 평안히 잠들게 하소서.”?하며 평화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도는 또한 교회 역사에서 임종의 순간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하루의 삶을 마감하고 잠에 드는 잠자리에서 했던 기도입니다. 말하자면 이 기도가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성도의 매일 매일의 잠자리에서였습니다. 잠들기 전에 매일 같이 “?주여 나를 평안히 잠들게 하옵소서, 이제 나를 평화로이 쉬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기도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경건하고 의로운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영성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했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하루를 마감하고 잠들 때 마다 자신의 죽음을 기억했습니다. 나이가 젊으나 늙으나 경건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잠들기 전 이런 마음가짐으로 잠을 청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 이렇게 하루를 마쳐 잠자리에 들듯, 내 인생도 언젠가 마칠 때가 오겠지요. 이렇게 하루의 노고를 마치고, 오늘 하루의 믿음의 경주를 마치고 주님 앞에 평화롭게 날 쉬게 해 달라고 기도하듯, 내 인생 마지막까지 내 인생의 노고를 쉬지 않게 하시고,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 감당하게 하시고, 내가 잠들 때, 아무 걱정 없이 평안히 날 쉬게 해 주세요.”?라고 날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경건한 크리스찬들은 기도해왔던 것입니다. 

성탄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이 태어난 날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마다 성탄을 지키는 이유는 바로 이 “?기다림”?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는 400여년 동안 선지자가 활동하지 않았던 때다. 선지자가 활동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씀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400년이란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한 기간을 연상시킨다. 말씀이 희귀하다는 표현은 사무엘이 태어날 때를 묘사할 때 표현된 말이다. 

그 때에도 사람들은 새 날을 기다렸다. 하나님이 애굽에서부터 해방시키실 그 날, 사무엘을 통해 기도의 때가 시작되고 다윗의 새 나라가 건설되는 그 날…?기다림은 하나님의 역사로 응답되었다. 



예수님이 오실 때도 마찬가지 였다. 이 때의 성경의 기사를 보면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와 오히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막으려 했던 자, 그리고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 

희한하게도 예수님 나실 때 미리 그 분을 쫓아 기다린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동방박사 였다. 이스라엘 어느 누구도 말씀에서 계시된 메시야의 탄생 소식에 반응하지 않았다. 

동방박사는 구약의 멜기세덱 처럼 이스라엘 역사 밖의 사람이다. 

그 소식을 듣고 헤롯 대왕은 메시야의 나심을 막으려 그들을 회유하고 아이들을 죽이라 명한다. 그는 예수님의 나심을 막으려 한 자다. 왜 그랬을까? 바로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다. 예수님이 오시면 자신이 왕된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왕 되어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주님을 기다리지 않는다. 

더 충격적이게도 헤롯왕과 함께 거했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당했던 자였고, 구약의 예언도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쪽에 서지 않고 헤롯의 편에 서서 어린 아이들을 죽이는 공범자가 된다. 왜? 겉으로는 말씀을 지키는 자였지만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말씀이 아니라, 메시야가 아니라 헤롯과 똑같은 자기의 안위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대로가 좋은 사람들이다. 변화가 싫은 사람들이다. 기다릴 대상이 사라진 사람들이다. 그들의 기도는 그냥 이대로, 매일 똑같이, 그럭저럭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금 이대로를 위해 예배하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시므온과 이후 나오는 안나는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믿은 것은 죽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이었고 약속된 계시였다. 

그들은 말씀이 희귀한 시기에도 불구하고 말씀안에 거하였고 약속을 기다렸다. 

말씀을 살아가는 자들은 환경이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시대가 어떻고 상관없이 살아있는 생령으로서 산다. 

그들이 기다렸던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위로였다. 

이스라엘에 말씀이 살아나도록, 메시야가 오시도록, 새 날이 열리도록,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간절히 기다리는 시므온과 안나에게 하나님은 예수의 탄생에 함께 하도록 그들의 기다림을 채워주셨다. 

성탄이다. 이미 오셔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또 기리는 것은 단지 기념의 의미가 아니다. 

성탄은 기다림이다. 설레는 기다림이다. 

세계의 외신들은 한국의 촛불집회를 보도하며 폭력없이 저항하는 그들의 모습에 경탄을 보낸다. 

세계 어느 선진국도 그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평화적으로 집회한 적을 본 적도 없다. 간디라는 개인이 비폭력 저항 운동을 벌인 것도 역사적인 사건으로 남겨진 일인데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폭력없이, 충돌없이 저항하는 것을 바라보며 정치는 후진국이지만 시민은 선진국이라는 표현을 앞다투어 쓰고 있다.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촛불의 의미도 기다림이다. 새날이 올 것을 기다리는 기다림이다. 그런데 아마도 각자가 바라는, 기다리는 기다림은 제각각이기에 그들의 촛불은 시간이 지나도 또 다른 제목을 가지고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기다림은 끝이 있는 기다림이다. 안식이 있는 기다림이다. 응답하시는 기다림이다.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이스라엘의 위로를 위한 기다림이다. 

스타벅스와 같은 단체들을 통해 세상은 Christmas, 예수의 경축일을 Happy Holiday, 사람을 위한 축제일로 바꾸고자 시도한다. 예수가 주인 된 날이 아닌 자기의 안위, 즐거움을 위한 날로 바꾸고자 한다. 설레는 기다림이 아닌 자기를 위해 즐거워하는 여러 휴일 중의 하나가 되게 한다. 

성탄의 기다림의 대상은 인류에게 주신 단 하나의 가장 위대한 선물, 바로 예수를 위한 설레는 기다림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은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2.10 02:22

    주님의말씀 다시읽게되어 감사합니다 .....^o^

  2. 소리벼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2.10 12:53 신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의 말씀이 말씀을 전하는 저에게도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 2:25- 2:3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

대강절: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 신앙생활은 곧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적인 인사말은 샬롬(평안)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사말은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즉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시므온은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을 기다렸습니까? 바로 이스라엘의 위로였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구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구원을 기다림. 민족의 위로, 온 세계 만민의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회복.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스시"라는 말인데 이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도와주는" "위로하는" "대신 요청하는" 더 나아가 "구원하는"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시면서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는 데 성령이 바로 파라클레시스, 곧 위로하는 자, 도와주는 자의 의미 입니다. 즉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찬 사람입니다.

 

시므온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1.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다-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사람은 인생을 무가치하게 살지 않습니다.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립니다. "의롭다"는 의미는 관계가 올바르다는 의미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올바른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경건하다의 "율라베스"는 꼭 잡다, 붙잡다의 의미입니다. 무엇을 붙잡습니까?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꽉 붙잡고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에 순종하며,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기다리고 순종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갑니다.

2.     시므온은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5,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서. 의롭고 경건한 사람- 하나님, 이웃, 자신과의 관계가 바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사람- 성령이 함께 하고, 늘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 예수님 부활 이후 보혜사 성령이 본격적인 활동 시작. 그러나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이 바로 시므온. 의와 경건으로 인해.

인생의 황혼기에도 불구하고 경건할 수 있고, 의로울 수 있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3.     영안이 열린 사람- 모든 사람이 성탄을 맞지만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자기식, 자기 방법, 자기 목적대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이 태어나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죽이려 할 수 있고 외면할 수 있다. 오직 의롭고 경건한 자에게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성전에 온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 시므온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곧 안고 축복하며 29절로부터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라고 고백. 그곳엔 예배하는 자도 있었을 것이고, 기도하는 자도 있었을 것이고 제사장들도 있었을 것인데 오직 시므온만 예수님을 안는 영광을 취함. 예수님을 안은 것은 곧 온 우주의 창조자를 안은 것.

 

Posted by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