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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함과 믿음 (삼상 13:5-14절)


40세에 왕이 된 사울은 이듬해 즉, 즉위 2년째에 이스라엘 군사를 모아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고자 이른바 믹마스 전투를 일으키게 됩니다. 맨날 소극적으로 방어만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고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강력한 왕을 통해 블레셋과 전쟁을 치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요나단으로 하여금 게바에 있는 블레셋의 수비대를 먼저 치게 한 후에 온 이스라엘에 고하여 전쟁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세운 목적에 부합되는, 사울왕에게 있어서는 가장 극적인 전쟁이었습니다. 


왕이 되고 몇번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던 사울은 지금 사기가 충천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용기를 낼 때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큰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제 그 힘을 의지해서 군사를 모아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에게서 완전히 구해내려 하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온 이스라엘이 사울이 블레셋의 수배대를 친 것과 이로 인해 이젠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미움을 받게 되었음을 알고 사울을 따랐다고 전합니다. 이젠 블레셋과 적당히 타협할 수가 없을 처지에 이르자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울을 따르게 됩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결단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이 공격해 옴을 듣고 군사를 모았는데 그 수가 병거가 삼만(마차가) 마병이 육천명이고 군사들의 수는 헤아릴 수 조차 없어 해변의 모래와 같았다고 전하는 것입니다. 싸우려고 모이기는 모였는데 현실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적을 보면 싸울 용기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동하기 시작합니다. "위급함을 보고"라고 표현된 구절은 상황이 어려움을 보고 군사들이 심한 압박을 받았다고 영어성경은 번역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었다고 전합니다. 어떤 군사들은 아얘 요단강을 건너 도망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직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전쟁은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이 명한 싸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8절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다" 


이 전쟁은 미리 사무엘과 약속된 전쟁이었습니다. 

약속된 때가 되면 사무엘이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여호수아가 그랬듯, 기드온이 그랬듯 하나님의 방법으로 전쟁을 치루고자 약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는데 사무엘이 오질 않습니다. 

백성은 두려워서 떨며 숨거나 도망하고, 블레셋 군사들은 곧 쳐들어올 것 같습니다. 


상황이 점점 조여오자 사울은 나름대로 결단을 내립니다. 

번제와 화목제물을 가져와서 본인이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사울이 번제를 드리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하여 그를 꾸짖습니다.

"네가 행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하는 소립니다. 


11-12절은 사울의 변명입니다.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부득이하여" 라는 말은 내가 어쩔수 없이, 그렇지 않을 수 없다는 소리지요. 

달리 말하면 상황이 이래서 어쩔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무엘의 답변은 차갑기 그지 없습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영어의 표현을 보면 "You acted foolishly" 바보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왕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만약 그리하였더라면...만약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지켰더라면...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그 다음절 말씀을 보면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를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실 것이라." 


이 구절을 통해서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전쟁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명령하신 전쟁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사울이 보기에 상황이 어려워지자 미리 약속된 명령을 벗어나 스스로 번제를 드리고 전쟁에 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 실수로 말미암아 사울은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 듭니다. 사울 대신 다윗을 선택하게 되지요. 

만약 사울이 이 전쟁에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했더라면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다."는 말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세워졌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면 그를 통해 예수가 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졌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만큼 이 전쟁은 중요했고 사울의 실수는 치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실수가 그토록 용서받지 못할 죄였을까? 

우리가 그의 상황이라면 과연 사울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까? 


일은 점점 다급해지고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는데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과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을까? 

주위 사람들은 흩어지거나 요동치는데 나는 과연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을까? 


  • 영적 분별- 중요한 것을 선택할 때에 마음이 분주하고, 잠잠하지 못할 때,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할 때-

그때는 어떠한 결정도 하지 말고 중심을 잡으라. 하나님께 집중하라....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재로 이러한 상황을 맞으면 가만히 있는 것이 어쩔 땐 가장 힘들 때가 있다. 


  • 사울의 변명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11절을 다시 보자.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블레셋 사람은 막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고 

그런데 그 사이에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정한 날은 며칠인가? 7일 

7일은 온전한 것. 완전한 기다림이다. 

사울은 7일 째가 되자마자 사무엘이 오지 않은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났다. 7일이 되었는데 사무엘이 오지 않자 아얘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이 7일이 지나서 왔는가? 아니다 7일째 왔다. 

언제? 사울이 번제를 마치자마자. 

결국 그가 정한 시한에 온 것이다.

기다림은 초조한 시간이다. 조바심이 나는 시간이다. 

그런데 무조건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분명하신 말씀을 갖고 기다리는 것은 다르다. 본문의 사울은 분명한 약속을 손에 쥐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자기가 기대한 순간이 지나자 그는 약속을 잃어버리고 조급함을 택한다. 


조급함을 택하니까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미리 염려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들이 아무리 많고 강대하다 할지라도 결코 사울을 해할 수 없다. 그런데 조급해지니까 모든 염려가 다 금새 닥칠 사건으로 다가온다.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번제를 드렸다.

내가 달라고 해서 주고 안달라고 해서 안주면 그것을 "은혜"라고 할 수 있을까? 


은혜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다. 내 행위때문에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삯이지 선물이 아니다. 

사울의 예배는 잘못된 예배이다. 

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예배가 아니라 전쟁에 승리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예배를 드렸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마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만 가져가면 전쟁에 이기겠지 하면서 마음대로 전쟁터에 언약궤를 가져갔다가 언약궤도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 것처럼 승리를 위한 형식적인 예배, 형식적인 기도를 드린 것이다. 


사울은 무엇때문에 실패했는가? 

눈에 보이는 상황이 그를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지게 했다. 

엄청한 수의 블레셋군들의 모습. 

그 모습을 보면서 흩어지고 도망치는 이스라엘 군사들의 모습. 


이 모습은 기드온의 전쟁과 극한 대립을 이룬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13만여명의 군사들을 무찔렀다. 

숫자는 하나님 앞에서 무용지물이다. 


하나님은 두려움에 떨거나 세상에 무릎꿇는 모든 군사들을 제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300명만을 남기시어 그들을 통해 승리를 이루게 하셨다. 

칼과 방패로 무장한 것이 아니라 빈항아리와 그 속의 횃불, 그리고 나팔을 통해 승리를 이루셨다. 

빈 마음과 성령,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조급함의 반대는 느긋함이 아니다. 느긋함은 때로 게으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신앙안에서 조급함의 반대는 간절한 기다림이다. 

시므온이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듯,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리듯,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기다리듯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그 분의 일하심을 기다리고, 그 기다림 가운데 깨어있는 것이다. 


간절한 기다림은 곧 믿음이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상황 때문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들을 지키는 것이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지 않고 그 분이 주신 감동, 그 분이 주신 확신, 그 분이 주신 약속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이다. 


로고스 교회는 부흥할 것이다. 왜? 하나님이 여러 성도들의 입술을 통해, 그리고 제 기도 가운데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어서 내려오라는 올해의 표어를 묵상하며 여전히 내려오지 못한 우리의 교만함과 세상욕망과 조급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를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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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9장 1-10절  (하나님께 구한 자) 


  • 지난 시간 우리는 사무엘의 실패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세우심을 받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다스렸던 사무엘이 이제 백성들로부터 왕을 세워달라는 요청에 시달립니다. 

사무엘의 신앙으로 보면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역할과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말을 다 듣도록 명하셨습니다. 

다 들으라는 것은 선입견을 버리고 끝까지, 충분히 들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Zero Base에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때때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사람의 말을 불신하고 듣지 않을 실수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듣는 데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를 자세히 들어보면 기도를 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보다 자기의 간구만 외치다가 끝내는 경우가 많음을 봅니다. 


기도는 말하는 것을 넘어 듣는 것입니다. 자기의 간구를 넘어 자신의 영을 두드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듣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잘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 되는 것이요, 듣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분별하는 것이 바로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종종 내가 가장 확실하다고 믿는 믿음을 넘어섭니다. 내 뜻, 내 확신 보다 넘어서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 앞에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사무엘은 하나님의 앞에 더욱 겸손해졌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주장하던 자에서 이제는 듣는 자가 됩니다. 그 과정 중에서 변치 않는 것은 그의 기도의 태도입니다. 

그는 상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했으며, 백성들의 거센 요구에 다시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불완전한 그를 온전케 만들었습니다. 


  • 사무엘상 10장은 이 사무엘이 백성들이 구하고 하나님이 뜻하신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백성들의 요구에는 분명 불신앙적인 모습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구함에 최선의 사람을 보내 주셨습니다. 사울의 이름의 의미는 "구하여 얻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울을 악한 왕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해할 수 있는 것은 백성이 악한 의도로 하나님께 왕을 구했기 때문에 사무엘이 백성에게 경고한 대로 악한 왕을 주어 그들에게 불신앙의 대가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하고 그의 시작부터 불신의 모습으로 그를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데 사무엘이 외모로 골랐다가 낭패본 사례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말씀을 살펴보면 사울은 변질된 자이지 시작부터 그릇된 왕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실패한 사람으로부터도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어디서부터 넘어졌는지 알면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 잘 하다가 넘어진 사람,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다가 지금은 변질된 종이라 하더라도 그 인생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하였나를 살펴보면 인간이 보편적으로 넘어지기 쉬운 실패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선택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실패를 위해 준비된 왕이 아니라 백성들을 잘 이끌어 줄 사람으로 선택된 자였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선택을 통해, 그리고 금요예배시간에 사사를 세우시는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시는 자들의 특성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쓰시는가 하나님의 선택기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베냐민 지파

베냐민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막내 지파입니다. 다윗도 막내아들이었지요. 

이 베냐민 지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사이의 땅을 분배 받습니다. 


(수 18:11) 베냐민 자손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제비 뽑은 땅의 경계는 유다 자손과 요셉 자손의 중간이라


지금으로 말하면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힘없는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거기다가 사사기서 18장에 나오는 레위인의 첩 윤간하여 죽게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지파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600명의 장정들밖에는 살아남지 못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원래 세력도 약한 데 거기다가 또 징계로서 떼죽음을 당했으니 가장 작은 자 중에 작은 자였습니다. 


(삼상 9:21)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이 고백은 단지 의례껏 하는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진정으로 말하는 자기 고백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한 사람이 또 한명 있습니다. 

(고전 15:9-10)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바로 또 한명 등장하는 사울, 사도 바울입니다. 12사도 밖에서 세워진 가장 마지막 세워진 사도, 어쩌면 사도 바울도 이런 고백을 할 때에 사울의 고백을 기억했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왕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수행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었을까? 

사사시대는 각 지파 중심으로 사사가 등장해 그 지파를 구원의 길로 인도했지만 이제 이스라엘 전체의 왕은 12지파를 통솔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각 지파 간의 결속과 단결을 공고히 해야 합니다.  

바로 그 일을 이스라엘의 막내 지파가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나머지 각 지파간의 불필요한 상호 견제, 시기, 경쟁 등을 극복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통령 후보들이 말하고 있는 것도 무엇입니까? 이제는 예전처럼 과반수 정당이 없으니까 협치해야 한다. 연합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베냐민 지파는 당시 12지파 중에 주도적이었던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사이에서 갈등과 주도권 싸움을 방지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2) 아버지의 잃은 나귀를 찾아 헤메이는 자 

사울의 소개를 하면서 함께 등장하는 것이 아버지의 잃은 나귀를 찾아 방방곡곡 헤메이는 충실한 아들의 모습입니다. 

사울은 아버지의 잃은 나귀를 찾으라는 명령에 산지와 땅을 두루 찾아 다닙니다. 하는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실히 수행합니다. 4절 한 절에만 "두루 찾아 다녔다"는 말이 세번이나 반복됩니다. 두루는 처음부터 줄곧 쭉, 샅샅히...그의 성실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모습은 다윗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자와 곰으로부터 양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 없이 돌팔매질을 연습하여 그들을 상대했고 잃은 양을 찾아 헤메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한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헤메는 목동의 심정, 주인의 심정을 말씀하십니다. 


독일의 총리후보자들이 TV토론에 나와서 발표를 하는데 진행자가 한 유력한 후보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조국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이 총리 후보자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사랑합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답변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난 내 가족을 사랑합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국가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개념입니다. 가정이 모이고 민족이 모여 이룬 공동체를 지칭하는 말이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국가의 리더자들은 국가를 위해서 희생을 강요해왔습니다. 실체가 아닌 개념을 위해서 개인의 희생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총리는 국가를 사랑하는 것은 곧 가장 작은 공동체 가정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개인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나라사랑이 시작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서 희생한다는 것은 가정이라는 개념을 위해서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녀, 아내, 남편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은 교회라는 건물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속한 한 사람, 한 영혼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리더자는 결국 한 영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잃은 한 마리의 나귀, 한 마리의 잃은 양, 연약한 한 지체를 보살피는 마음이 목자의 마음이요, 리더자의 마음입니다. 


  • 5절의 말씀은 그가 나귀를 찾다가 아버지가 걱정하실까 돌아가고자 하는 사울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작은 목적 때문에 큰 목적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작은 근심은 잃은 나귀였지만 그렇다가 자신이 길을 잃으면 더 큰 걱정이 될 것입니다. 그는 맹목적인 성실함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자였습니다. 


3) (삼상 9:6)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 사환의 이 말은 사무엘이 그 당시 일반 백성들에 의하여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분명혀 보여 줍니다. 이것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3:20) 라는 말씀이 실제적인 사실이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 이것은 참 선지자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객관적 증거였다(신 13:1-3; 18:21, 22). 

또한 이것은 3 : 8에서 본서 저자가 "여호와께서...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말한 바가 실제로 백성들에게 사실로서 인정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줍니다. 사환의 말은 그가 사무엘의 선지자됨을 온전히 믿었음을 보여주면서 신앙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문제들 까지도 선지자들에게 물어보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 뒤의 구절들을 통해서 사울은 선지자에게 드릴 예물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잘 훈련된 신앙인임을 보여줍니다. 준비된 예물은 돈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예가 몸에 마음을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울은 사환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듣고 따릅니다. 사환의 말을 듣고 인생을 바꾼 위인이 누구입니까? 나아만 장군이 있지요. 예수님도 작은 어린아이를 말씀하시면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마 18장 

천국에서 큰자 : 천국에서 누가 크나이까? (1절) 

3절: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마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잃은 양 비유... (12-14절) 


(삼상 9:2)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


그러면 이 말씀이 해석이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중 가장 큰 자였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외형이 큰 것이 아니라 작은 영혼에 집중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비의 잃은 나귀를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작은 사환의 말에 귀 기울여 그의 말을 따릅니다. 

작은 자를 귀히 여기는 마음, 바로 다윗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마음입니다. 


부끄럽지만 제 이야기를 좀 꺼내보려고 합니다. 

제가 목회자가 될 때에, 그리고 목회를 시작할 때에 어머니께서 가장 강조하시던 말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처믐 담임으로서 인사할 때 사명의 말로서 기억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그 한영혼에 대한 감격이 사라질 때가 있었습니다. 왜 열심히 하는데 사람이 안올까? 

내가 무엇이 부족하지? 


그런데 어느날 새벽예배를 드리는 데 그 한 영혼에 대한 감격이 폭포수같이 밀려 왔습니다. 

집사님 한 분 모시고 예배를 드릴 때가 많은데 그 영혼이 날 살리고 그 영혼을 위해 내 영혼이 쉬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며 나누고....

그것이 내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그 영혼이 정말 내가 말한 대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내가 경험하게 하시는구나...


대통령 선가가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정말 좋은 대통령이 위기에 빠진 나라를 잘 치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대통령이란 누구일까? 

가정을 잘 다스리고 (디모데후서 감독과 집사의 조건) 

한 개인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

한 개인의 생명을 위해 국가가 희생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을 꿈꾸어 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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