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52019  이전 다음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사랑, 부활의 완성 (요한복음 21장 1-14절) 


부활! 

부활은 단지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지 사흘 되는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나오는 장면, 그것도 놀라둔 장면이지만 성경은 그것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활(resurrection)이 아니고 단지 소생(resuscitation)입니다. 소생은 단지 부활의 표징, 부활의 그림자입니다. 부활이란 다시 살아나는 것 훨씬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선포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가 다시 살아난 그 날, 그 새벽, 이 세상이 뒤집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던 세상, 죽음이 왕노릇 하던 세상, 죽음이 생명을 삼키던 세상에서 생명이 왕노릇하고 빛이 어둠을 이기고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이 도래했음을 믿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한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부활에 대한 반응

1. 그런데 그 부활의 소식을 가장 초조하게 기다렸던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종교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 (마 27:62-64)...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속이던 자가 말한 것을 두려워하여 지금 병사들을 보내어 사흘 동안이나 무덤을 지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속이는 자이고 누가 진실한 자인지를 보여주는 대목) 

그리고 나서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주일날 새벽에 부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인들이 와서 빈무덤을 보고 놀라는데 여인들과 함께 무덤이 열리는 것을 본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입니다. 

  • (마 28:4)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들은 지금 로마의 군사들이지요. 그러니 이 부활사건, 자기들이 지키던 시체가 없어졌으면 누구에게 보고를 해야 하면 로마로부터 파송받은 총독 빌라도에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보초를 잘못선 벌로 사형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 (마 28:12-15)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했다는 것은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공식적인 회의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는 신앙인들이었다면 병사들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가 정말 부활 했다면 그를 찾아나서서 회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가 메시야인가 확인해 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소식은 회개나 신앙을 그들에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변함이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가 부활했냐가 아니라 동료 유대인들에게 그 소식이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며 그들 자신의 영향력과 힘과 부가 심각하게 소멸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회의를 열어 내린 결과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첫째,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어 (뇌물을 준 것이지요) 

둘째, 그들로 하여금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하라. (거짓말을 시킵니다) 

셋째,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사형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해 주겠다...) 


2. 더 어처구니가 없는 부활에 대한 반응은 다름아닌 제자들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그 소식을 열한 사도와 다른 이들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의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막 16: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이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를 만난 뒤 바로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그런데 이 때에도 역시 

(막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지금 예루살렘 있는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과 빌라도를 비롯한 정치가들은 예수의 부활 소식을 가리기 위해 여러 조작질을 가하고 있는데 오히려 제자들은 함께 신앙생활 했던 여러 증인들이 부활 소식을 전하는 데도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떨 때 보면 정말 신앙생활을 믿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닐 안믿을랴구 안믿을랴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기도 밤낮 해도 결국은 자기 감정대로, 주님이라고 하면서도 순종없이... 신뢰함없이. 믿음없이... 


그렇게 문을 꼭꼭 닫고 부활의 소식을 믿지 않으려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다가오십니다. 


말씀으로-> 증언으로-> 직접 찾아오셔서 


부활 후 제자들을 만나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말씀은 “샬롬!”, 우리말로 하면 “안녕!”하는 인사의 말씀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가 하는 인사, 송구영신예배가 끝나고 하는 인사, 새배하러 가서 어른들께, 혹은 새배하는 자들에게 인사하는 말! 새해 (하나님의) 복 많이 받으세요!! 하듯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의 달력은 1월 1일을 새해로 하지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한 교회력은 오랫동안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제 8일은 예수님으로 인한 새로운 역사, 새로운 창조가 시작됨을 알리는 중요한 성경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날, 새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3.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다시 고기 잡으러 가는 제자들...

아니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힘없이, 기쁨없이, 평안 없이 그저 고기 잡으러 가고 있는 것일까요? 일상의 어려움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 

능력의 하나님을 경험하며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삼일 만에 마라의 쓴 물 앞에서 불평하듯이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일상에 남겨져서 힘없이 고기 잡으러 나온다. 주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자기에게 남겨진, 자기 홀로 감당해야 할 세상을 본 것이다. 주님이 부활하시건 말건, 세상이 바뀌건 말건, 자기에게만 관심있는 자는 세상이 바뀌었는지, 전혀 상관이 없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이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하는 이유를 보게 됩니다.  1) 가장 근본적인 이유야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사정이 있습니다.  2)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에 드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3) 가정사가 복잡해서 드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4) 기독교에 대한 불신,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불신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5) 게을러서 들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신다는 겁니다.  너무 좋으신 분입니다.  실패해서 좌절하고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뭐라고요.  “고기를 많이 잡았냐고요. 가정은 평안하냐. 직장생활은 한만 하냐. 사업은 잘 되냐. 너, 괜찮니? 아프진 않니? 살만하니?”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끝임 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무슨 말입니까? 다시 세상으로 나가서 일해보았는데 열매가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내가 지시한 곳에 그물을 다시 던져보렴. 다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준 계명대로 순종해보렴…하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이시다.” 


육지에 올라서 하신 일은 더욱 제자들을, 그리고 읽는 우리들마저도 감동시킵니다. 

믿음 없는 그들을 혼내시거나, 설교를 하신다거나, 무엇을 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손수 떡을 가져다 주시고 물고기를 가져다가 그들을 먹이십니다. 


왜 실수 했냐고?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왜 나를 배반했냐고? 왜 또 세상으로 갔느냐고 탓하시지 않고 네가 배고파서 그렇다. 네가 피곤해서 그렇다. 네가 힘들어서 그렇지...


그 십자가의 고통과 엘리엘레 라마 사박다니, 하는 영적인 고통과 심장이 파열되는 사랑의 고통을 뚫고 사망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그동안 예수 없이 그들의 삶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얼마나 힘들었냐? 배고프지? 그 동안 고생했어…”하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너무 너무 포근합니다. 너무 너무 좋습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우리는 탓하는데 익숙합니다. 난 힘든데 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넌 왜 네 생각만 하고 내 생각은 해 주지도 않니? 


그런데 주님은, 주님의 부활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배고프지? 힘들지?"하는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장면, 시몬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그 질문은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아니 또 실패해도 내가 널 사랑한다. 네 사랑은 실패해도 난 널 끝까지 사랑한다....내가 널 사랑한다.....는 세번의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부활의 완성은 또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사랑, 그 위대한 계명

고린도전서 11장 1-13절 


우츠프라카치아

아프리카의 깊은 밀림에는 '우츄프라카치아'라는 이름의 식물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식물은 한 가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생물체가 조금이라도 자기의 몸체를 건드리면 그날로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엔 죽고 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식물을 가리켜서 아주 지나치게 결벽증이 심한 식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식물을 연구하던 과학자에 의해서 새롭고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우츄프라카치아는 어제 건드렸던 그 생물체가 내일도 모레도 계속해서 건드려주면 죽지 않고 계속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깊은 밀림에서 공기 중에 있는 소량의 물과 햇빛으로만 사는 음지식물과의 하나인 우츄프라카치아, 지나친 결벽증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던 이 식물은 오히려 한없이 고독한 식물이었던 것입니다.


고슴도치과의 호저: 호저의 딜레마, 혼자 지내는 것이 외로워 다른 호저에게 다가가면 다른 호저의 가시털이 자꾸 자신을 찌른다. 그래서 며칠동안 혼자 지내게 되고 그러면 또 너무 외로워 다른 호저를 찾고 또 가시에 찔리고는 다시 혼자가 된다. 평생 이것을 반복하는 동물.... 

현대인의 모습을 잘 표현하지 않나....


우리나라는 현재 OECD국가 중 자살율 1위이며  1년에 1만 5천명이 넘는 사람이, 하루 평균 40명, 30분에 한 명씩 자살하고 있습니다. 우울증, 불면증, 정신분열증...애정결핍의 시대...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에게 상처받기 싫어하는 시대... 

어느 드라마나 노래를 들어도 다 사랑타령이지만 채울 길이 없는 사랑... 

왜 그렇습니까? 바로 사람들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랑을 찾을 길이 없고, 홀로 서려고, 다른 곳에서 그 사랑을 채우려고 하지만 다른 것으로는 그 사랑을 채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사랑이다. 그리고 성경에 그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부분은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3장이다. 너무 유명해서 가요로도 만들어져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마져도 이 노래는 부르곤 한다. 그런데 이 사랑의 의미를 알려면 이것이 쓰여진 맥락과 상황을 알아야 한다. 그냥 유행가처럼 외우라고 씌여진 말씀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서 씌여진 말씀이기 때문이다. 


고린도는 헬라(그리스)의 중요도시였습니다. 항구도시였습니다. 

지중해에 있는 항구도시였으므로 해상무역을 활발히 하였고 해외에 수출을 하기 위해서 많은 제조공장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번 도시였습니다. 고린도는 이렇게 돈이 많은 도시였기 때문에 각종행사를 많이 열었습니다. 그리고 건물도 많이 지었습니다. 

2년에 한 번씩 국제적인 운동경기를 벌였습니다. 올림픽에 버금가는 규모의 운동경기를 격년제로 고린도에서 개최하였습니다.

또 많은 건축물들도 지었습니다. 여러 신들을 위한 신전들을 지었습니다. 포세이돈 신전이나 멜리케리테스, 아프로디테 등의 신전이 그 지역에 있었습니다. 건축물도 아주 정교하게 잘 지었습니다. 그래서 잘 지은 건축물을 고린도식이라고 하였다.


넓은 광장도 만들었습니다. 그 광장에서는 늘 회집과 토론 등이 활발하였습니다. 광장을 포름, 광장에서 하는 토론을 아고라라고 하는데요, 광장에서 토론을 하기 때문에 포름, 아고라 라고 합니다. 

또 그곳은 학문이 발전한 곳이었습니다. 돈이 많으니 오늘날의 대학에 해당하는 아카데미를 세웠고요, 유명한 학자들을 데려가다 가르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철학과 수사학 웅변학 변증학 등의 학문이 발전했습니다.


이곳에 교회를 처음 세운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제2차 선교 여행 중에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를 방문하였고 그곳에 18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행 18:11). 바울은 이곳에서 자신과 같이 장막 만드는 직업을 가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고 하는 부부를 만나 동업을 하면서 열심히 전도하였고, 그 결과 디도 유스도와 회당장 그리스보 가족을 그리스께 인도하면서 고린도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행 18:1- 11). 1년 6개월 후에 총독이 바뀌자 유대인들의 고소에 의해 법정에 서고 그들의 핍박을 피해 안디옥으로 가서 또 교회를 세우게 된다. 

 

바울 서신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는 모든것에 열심인 교회였습니다. 바울과 더불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평신도가 주축이 된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떠나고 난 후 그들 평신도들이 성령을 받아 교회의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경제적인 힘도 있었고 학식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에 열심이어서 각종 은사가 어느 교회보다 뚜렷하고 활발하게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리한 조건과 상황이 오히려 교회를 분열의 길로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외적으로 가장 큰 분쟁은 성도들간에 파가 나뉘는 것입니다. 고전 1장에 보면 그들은 서로 나는 바울파다, 아볼로 파다, 베드로파다, 그리스도파다라고 하며 분열하고 분쟁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간의 갈등 안에는 그들과 바울의 관계, 성도들과 지도자와의 관계를 살펴보지 않으 수 없습니다. 

교회가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아서면서부터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과 바울과의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첫번째는 그의 사도직에 관한 문제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바울 사도의 사도직을 중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칭사도로 제멋대로 일을 하는 사람이고 12제자도 아니라고 하는 이 문제는 바울을 오래토록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사도권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베드로와 같은 12제자들의 권위를 들어 바울을 경시했습니다. 

두번째는 사도바울의 외모에 대한 문제입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고후 10:7)"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못생긴 사람에게도 성령이 있을수 있느냐고까지 바울을 모욕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성령이 있다는 증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지만 그의 몸에 있는 질병을 가지고도 공격이 들어왔습니다. 그의 몸에 있는 사탄의 가시가 보는 사람에게도 시험으로 다가왔다는 것이지요. 

또한 그의 말주변이 없음을 가지고 흠을 잡기 시작합니다. 그의 말에는 박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눌하다는 것이지요.  말에는 졸하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는 바울자신도 언변이 없는 것에 솔직히 시인을 하면서 나는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독신생활을 하는 것을 가지고도 시비를 걸기 시작합니다. 사람구실 못한다는 것이지요. 

고린도 전후서에 보면 이런 사람들의 지적에 바울은 어쩔 땐 차분하게 어쩔땐 감정이 격하게도 자신의 진실함을 알려주려고 애씁니다. 

바울의 외모를 가지고 자꾸 무시하니까 고린도후서 10, 11장에 넘어가면 자신에 대한 변론을 하는데 지금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고 화가 났기 때문에 기탄없이 할 말을 해야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11:5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11: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11:7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11:18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11:22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 자신의 은사를 나타냄. 

12: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 육체의 가시를 변호 


바울이 떠나간 후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고린도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행 18:24; 19:1). 그는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행 18:24 표준 새번역)습니다. 아볼로는 그의 웅변과 학식으로 바울의 시원치 않은 설교에 갈증을 느끼고 있던 고린도교인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아볼로의 설교가 끝나면 가슴이 다 후련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성서 연구가들은 사도권, 은사, 바울에 대한 비교...) 사람들에게 심한 공격을 받고 나서 바울에게로 피신오게 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지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어서 한편으로 그들의 신앙을 붙잡아 주고 아볼로를 위로하고 격려하여 다시 고린도 교회로 보내려고 하지만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전 16: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그래서 지금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데 바울이 생각하니까 디모데를 보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디모데가 그 곳에서 잘 견딜수 있을까 걱정하는 것이지요. 

[고전 16:10-11]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그들은 사로 자기들의 취향과 신앙의 연륜에 따라 스스로를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예수파라고 나뉘어서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어느 지도자도 그 가운데서 거하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목회자 없이, 자기들끼리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내어서 은사를 나타내지만 전혀 합쳐지지 못하고 분열을 계속하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들에게 열심이 없어서 분열이 나타났을까? 지식이 없어서인가? 그들의 삶이 힘들어서인가? 

그 해답으로, 그 진단으로 바울이 제시하는 것이 바로 사랑장 고린도 전서 13장입니다. 

13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12장 마지막절에서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는 말로 사랑의 중요성, 사랑이 가장 중요한 은사임을 보여줍니다. 

잘 아는 구절이니까 하나하나 설명을 구태여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마는 제가 읽으면서 가장 의문으로 유심히 볼 수 밖에 없는 구절은 바로 3절입니다.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처음에 읽을 때에는 "아, 구제를 하더라도 사랑없이 자기를 과시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위선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구나. 열정을 다해 헌신을 해도 중심이 바르지 못하면, 그 안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을수도 있겠구나.." 

뭐 이런 저런 주석을 찾아봐도 이런 해석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습니다. 

그런데 몇 번 더 읽어보니까 걸리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냥 내게 있는 것으로 구제하고가 아니라 내게 있는 모든 것입니다. 내 몸을 그냥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불사르게 내어 주는 것입니다. 위선으로 자기 것의 얼마정도는 구제하고 헌신 할 수 있지요. 내 몸의 일부분을 가지고 남에게 잘 보이듯 헌신 할 수 있지만 내몸을 불사른다는 것은 순교한다는 것입니다. 순교의 정신으로 헌신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위선으로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겠습니까?"하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라.."그러니까 청년이 뭐라하냐면 "제가 어려서부터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뭐라 하십니까? 

"네가 가진 것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날 따르라"하시죠. 그러니까 청년이 근심하여 돌아갔더라하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다 줄 수 있는 것.... 이건 위선으로 못하는 것입니다. 열정으로 봉사할 수 있지요. 그런데 순교의 마음으로 자기를 다 내어주는 것.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없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지난 주 새벽예배에 이 말씀을 전한 후에도 이 구절이 떠나질 않습니다. 하나님 나도 내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바치고, 주를 위해 죽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 기도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신앙인의 한결같은 소망이고 목표아닙니까? 

그런데 그렇다 할지라도 사랑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어느 누구가 사랑없이 그런 것들을 행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도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을 다시 보여 주십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계신 예수님.... 

그분이 고통을 흘리면 내려다보는 십자가 아래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군중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먹이셨을 때에 메시아가 나타났다고 소리쳤던 그 군중들은 지금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라"하며 성나게 외치고 있습니다. 

제자들.... 삼 년 동안 하루도 버려둠 없이 함께 하시면서 자신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여 가르치시고, 친히 기적을 보여 주시며, 그 뿐 아니라 그들에게 권세와 능력을 부어 주셨던 제자들....숨어 있거나 도망하거나...따라 왔어도 먼 발치서 감히 자신을 쳐다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중 하나는 자신을 은 30전에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 주었고 또 다른 제자는 3번이나 자신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여인들... 자신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자리를 지켰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는 것밖에 없습니다.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무력합니다. 

로마 병정들... 빌라도...바리새인들.... 대 제사장들....


어느 누구도 예수의 편에 서지 못하고 예수의 십자가의 공범들입니다. 핍박자이고 십자가에 못을 단 자이고, 배신자들아닙니까? 


그 광경 중에 예수께서 묻습니다. 저들 앞에서 십자가를 질 때에 내 마음에 무슨 생각이 있었을까?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세요.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을 위해서 다 참으셨지 않습니까?" 


"아니다. 난 저들을 정말 사랑했다. 난 저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 것이다...." 

너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넌 무슨 생각을 하니? 


"예수님을 위해서 참게 해주세요. 예수님 사랑하니까 제가 참을께요...." 


"난 네가 그들을 정말 사랑하기를 원한다." 

"난 참을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 없는 거 같아요." 


"난 네가 저들을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구나...저들은 사랑에 굶주려 있단다..." 

"저들은 사랑이 없어서... 그래서 다 그런거다.." 


"난 예수님만 사랑하고 싶어요. 예수님만 사랑하는게 행복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난 나 자체가 사랑이다. 나에게 사랑을 입은 너는 나가서 나의 사랑을 나누어 주려무나. 나 때문에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저들을 사랑해라." 

"진정으로 저들을 사랑하면 사랑이 저들을 만져 줄 것이다. 그 사랑 안에 내가 거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난 나에게 사랑이 참 없구나...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