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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장 5-11절'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06.02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 2:5-11) (1)
  2. 2015.11.21 나의 기독론은 무엇인가? (빌립보서 2장 5-11절)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 2:5-11)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열정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던 빌립보 교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만한 기쁨에 이르지 못한 이유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들은 열심이 있었지만 무슨 일을 할 때 마다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었습니다. 

자기를 남보다 높이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이 들의 공통점은 바로 교만함, 자기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교만함이 있으면 말씀을 알고, 열심을 내어도 참 평안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교회에, 가정에 다툼이 있고 불협화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사람이 정말 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난 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겸손하라고 자기를 비우라고 말을 하긴 하지만 정말로 사람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한 마음을 품는 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2절에서 말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는 것"이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 함께 나누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같은 부모에서 나온 형제라 할지라도 태어날 때 부터 성격이 다르고, 같은 가정에서 자라난 자들이라도 습관이 가지 각가 입니다. 하물며 인생의 경험이 각각 다르고, 신앙의 색깔이 각각 다른 지체들이 모인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서로가 서로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한마음으로 뜻을 합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 때가 그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서양 문화에 있어서 이 자기 중심성이 가장 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근대 정신의 출발이라고 하는 데카르트를 그 시작점으로 말들을 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철학적 명제는 "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입니다. 


그는 그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거짓이나, 꿈이나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정말로 진리가 무엇인가를 곰곰히 따져 묻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세상이나 사물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그는 부정하면서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 하다가 모든 것의 출발점을 "생각하고 있는 자기 자신'으로 결론지은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그림이나 문학에서도 자기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림에는 자신이 없어도 누구나에게나 보여지는 객관적인 풍경이, 사물이 중심이 된 그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문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데카르트 이후로 개인이 보는 관점이나 시각, 그리고 그림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개인의 관점이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이 자기 자신 "self" 이 되었습니다. 

그 중심 아래에서 서구의 개인주의가 탄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보다 훨씬 더 근원적으로 이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적에 부추긴 것이 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탄이 인간을 유혹한 마음은 다름아닌 인간 개인에게 하나님에게로부터 독립된 마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하나님과 같이 높이는 마음이었습니다. 


노아의 방주 이전에 바벨탑 사건은 이러한 인간의 이기심의 종착지를 다시 한 번 보여 줍니다. 

[창 11:3-창 11:4]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원어의 뜻을 조금더 빌자면 우리가 스스로 벽돌을 만들어 굳세게 만들자. 흙 대신에 역청을 발라 더 강하게 하자. 그 벽돌로 성읍과 탑을 세워 하늘에까지 올려 우리의 이름을 내어 흩어지지 말자! 


좀 더 의역을 하면 어떻습니까? 

우리 스스로의 성을 쌓아 하나님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살자. 흙으로 만든 인생에서 떠나 영원히 죽지 않을 문명을 세우자. 

우리의 성을 세워 하나님의 이름보다 우리 영광을 위해 살고 절대로 하나님에게 무릎꿇지 말자. 


바벨탑이 인류 문명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풀 수 없는 고대 문명의 비밀을 드러내는 구절일진 몰라도 신앙 안에서 이 사건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자기 영광을 위해 살려는 인간의 죄악되고 헛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인간들의 마음을 시편 1편에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하면서 복있는 자,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과 같이 사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이후로, 그리고 근대 이 후 더욱 급격히 사람들은 각자의 성을 건설하며 삽니다. 자기 이름을 내며 자기 영광을 위해 삽니다. 그런데 이 성은 견고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바벨탑처럼 흩어놓으면 부서질 성입니다. 


요즘 뉴스의 중심 - 홍만표 변호사 

검사장 이었던 그가 변호사가 되어서 모은 재산이 5년만에 오피스텔 130여채 100억대 빌딩. 

그가 사는 호화 아파트 - 한층 전체가 그를 위해... 또 다른 층 하나는 아내, 또 다른 층 하나는 처남 소유,..


그야말로 자신들의 왕국, 자기들의 성을 쌓아 살아가려고 했으나....그의 행적이 드러나게 하심...


자기 중심적인, 자기 성을 세우고, 그 안에서 자기를 높이는 이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바로 세상이 주는 마음,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가진 것 같지만 정말 가난한 것이요, 화려한 것 같지만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 마음을 극복할 수 있을까? 


다같이 빌립보서 2장 5절을 읽읍시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기 성 안에 갇혀 살지 못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닮으라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마음을 이길 수 있는 것, 오직 예수의 마음 밖에는 없습니다. 


그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겸손"은 당시 사회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겸손을 무능한 자들의 마음이나 굴욕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유가 없는 노예들이 가진 마음이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높아지고 출세하려면 겸손하면 안됩니다. 최대한 자기를 알리고 과장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겸손은 손해볼 마음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이 마음은 기독교가 강조하는 가장 큰 덕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겸손하면 손해보고 비굴해진다고 얘기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정말 높은 사람은 섬기는 자다. 낮아지는 자다. 겸손한 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의 모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겸손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예수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섬기는 곳입니다. 

겸손의 마음, 예수의 마음은 그저 개인의 기쁨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생명, 그리스도인의 근본에 관한 마음입니다. 교회가 왜 위기냐? 이 예수의 마음, 예수의 자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낮추고, 복종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자꾸만 높이고, 주장하고, 십자가를 외면하기 때문에 위기라는 것입니다. 


저의 마음에 몇주 동안 위기의식이 왔습니다. 아프고, 이사하고, 여행하고...빈자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허전합니다. 

왜 부흥이 안될까? 말로는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늘지 않는 숫자 때문에 조급함이 밀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조급함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막힌 데가 없는가? 내 영적인 관리를 잘 하고 있는가에 집중하면서 기도하며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허전해하지 말자. 하나님으로 인해 충만하자.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자. 

나 자신에게 갇히지도 말고, 남들의 말에 우왕좌왕 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말씀 가운데 맡은 바 사명에 집중하자. 


그리스도의 마음은 또 어떤 마음입니까? 

[빌 2:6-빌 2: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본체였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6절)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입니다. 충분한 자격이 있으셨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대접받지 않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칭찬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으신 분들입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교회를 섬겨온 것을 생각하면, 시간 드려서 몸 드려서 물질 드려서 정말 희생적으로 주님의 교회를 지켜 온 것을 생각하면, 여러분은 대접받고 인정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대접받는 자리에 앉지 않고 오히려 대접하는 자리로,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대접 받고자 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 다툼이나 허영입니다. 그러나 겸손할 때 사라지는 것 역시 다툼이나 허영입니다. 


그 다음, 바울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7절)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비어’라는 말씀이 바로 ‘자기중심성’을 뽑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자기중심성’을 뽑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지 않는 ‘겸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아니 하나님 자신이신데, 어떻게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 같이 지낼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종의 형체를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자기’를 비우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세상은 수준을 이야기 합니다. 수준이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려고 합니다. 수준이 맞지 않으면 피하고 외면하고 무시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서로가 수준을 낮추는 것입니다. 어느 수준이든지 어울릴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품이 바른 어른 - 어느 세대와도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대접받으려고만 하고 어린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못하면 그것은 수준이 높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지식한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나이가 들수록 외롭고 고독해집니다. 


교회의 수준은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필요하면 됩니다. 누구든지 와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수준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은 죽기까지 겸손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진 겸손한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겸손하려면 결국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완전히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도이고 부활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교인이 교인다워집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어떻게 사모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래야 합니다. 심장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대로 두고서, 거기에 성경지식이나 신앙의 형식이나 경험으로 적당히 포장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그게 더 큰 문제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마음은 바로 겸손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면 이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춰집니다. 바벨탑을 지으며 그렇게 드러내려 했던 그들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이름은 굳건한 성을 지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모든 입술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말씀에 굳건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방법이 아닌 정말 하나님의 방법대로 세워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방법은 십자가 외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마음입니다. 말씀에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그러한 우리 로고스 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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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성의 전당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2.11 05:10 신고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데카르트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나의 기독론은 무엇인가? 

(빌립보서 2장 5-11절)


 (빌립보서 2:5-11)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을 지나실 때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어떤 이는 세례요한, 어떤이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하고 하니 또 다시 묻습니다.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절)이라고 예수를 나타냅니다.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이른바 교회의 중심 질문, 신학적 용어로 기독론입니다. 


예수는 한 분이시지만 그 분을 생각하는 모습은 형형색색입니다.

예수님을 두고 병든 사람은 의사로, 나라를 잃은 사람들은 정치적 메시아로, 억눌린 사람들은 혁명가로, 가난한 사람들은 기적의 사람으로 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피부 색깔도 자기들의 피부 색깔과 같이 봅니다. 예수님은 원래 피부가 우리와 같은 황색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백인으로, 흑인들은 예수님을 아얘 흑인으로, 우리 나라 김기욱 화백은 예수님을 큰 갓을 쓴 양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정확히 보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들의 편견, 사람들의 편견으로 예수님의 원래 모습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 2장 5-11절은 바울의 기독론으로 불리는 구절입니다. 바울이 경험한, 바울이 선포한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하여 신약성경을 통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바울의 기독론,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바울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6절)

 

이 구절이 왜 중요한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죄가 들어왔는가, 그 죄의 근원을 차단하는 데서부터 예수의 사역은 시작됩니다. 

광야에서 금식을 하며 사단의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시는 장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여 뱀의 유혹에 말려드는 아담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가 됩니다. 

세번의 사단의 시험은 결국 선악과로 말미암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도 한 것을 통하여 인간의 죄악의 통로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말미암는 죄의 통로를 말씀으로 인해 승리하는 예수의 사역을 보여 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씀은 아담을 유혹하며 "너희 눈이 밝어져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하는 뱀의 간사한 유혹을 생각나게 합니다. 

-> 뱀이 하와를 유혹할 적에 :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되리라.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가? NO) 

아담 이후로 사단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가져다 놓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 그것이 육신의 생각이고 죄된 생각이고 세상의 생각입니다. 


드라마같은 데서 많이 보는 장면, 가정이 있는 여인을 제비같은 남자가 유혹할 때 쓰는 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마음이 가는 대로 해!"

무슨 소리입니까? 가정 같은 거, 남편 같은 거 다른 관계, 사회, 윤리 그런거 생각하지 말고 본능, 감정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가정이 파괴되고 자식들의 인생이 망쳐지고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는 것입니다. 

뒷감당 안되는 일들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 이것이 사탄의 정체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그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고 삼위 일체 하나님이지만 하나님과 같이 되지 않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아니, 왜 하나님이 하나님 아닌 마음을 갖는가? 헤깔려 하지 마시고 그 의도, 왜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는가>? 이 죄에서부터 구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는 그 근본 마음의 시작, 마음의 동기에서부터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6절) 

-> 아담의 범죄함으로 온 인류에 죄와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에 불순종 한 것입니다. 불순종하면 죽는다고 했는데 그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참 하나님이 스스로 참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 인격-> 자기를 죽여 인류를 살리는 삶. 영성

-> 그 방법은 겸손과 섬김과 희생 

  • 탄생, 생애, 죽음: 하늘보좌를 버리고 말구유에 나심. 의지할 처소 없이 제자들과 가난한 자, 병든자, 귀신 들린 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찾아다니시면 사심.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심. 
  • 이 삶에 일관성있게 흐르는 삶의 태도: 자기 부인-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는 것. 자기를 아무 것도 아니라 만드는 것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 자기를 비울 수 있을까? 자기 존재의 가벼움을 견딜 수 있을까? 

     불교: 무아, 자기 비움, 해탈.... 깨달음을 통해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 가벼움을 참을 수 없어 합니까?  

     정말 무겁고 진중하고 넓은 사람은 무시당해도 괴념치 않습니다. 오히려 상처 많고, 열등감 많은 사람이 자존심 상하면 와르르 무너집니다. 

     자기 목적이 분명하고 자기 삶의 방향이 뚜렷한 사람은 남들이 뭐라 해도 묵묵히 나갑니다.

     신앙생활은 예수가 복 주어서 남들 위에 우뚝 서서 자랑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만 바라보고 묵묵히 걸어나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단어: 동양에서는 사람 인자는 "사이" -> 관계성을 중시, 누군가 있어서 받쳐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라틴어(유럽) :Humus, 흙, 먼지-> 덧없음. 허무, 솔로몬의 전도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로만 가득찬 개인주의의 종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 ish- 불덩이, 욕망-> 인간은 곧 욕망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을 끊임없이 바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홀로 살 수 없고 항상 무언가를 바라보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비우라는 것, 자기를 부정하라는 것, 무아, 해탈은 인간의 정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을 비우고, 욕망을 비우고... 우리 존재 자체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자기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불교의 기도의 목적: 비우라, 잊으라, 벗어나라... 무아, NOTHINGNESS.

     그런데 우리 기독교의 기도는 대상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5절) -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영어로 보면 너희의 삶의 태도가 예수의 삶의 태도와 같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를 비워 겸손하게, 섬기며, 희생하였듯이 너희도 적극적으로 그의 삶을 닮을 소망을 품고 주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남을 닮으려고 하기 보다는 싸워 이기려고 합니다. 왕, 장군, 정치가, 권력자들은 끊임없이 남을 정복하고 다스리면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항상 패배자가 있고, 갈등이 있고 전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남과 싸우지 말고 나와 싸우라고 합니다. 이 싸움은 남을 이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가 있는 곳은 평화롭고, 유익하며,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즐겁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와도 로마 군사들과도 싸우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지만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예수의 싸움은 십자가 상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는 삶이셨습니다.  

  •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8절) 

무엇에 복종하셨습니까? 아담은,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소견에, 자기 감정에, 자기 마음 가는대로 복종하지만 주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셨습니다.  

복종의 정확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적 사람의 정의가 욕망하는 것- 다른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이라면 다른 말로 이것은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에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결국 무언가에 복종하는 삶이라면 무엇에 복종하는가가 사람의 삶을 좌우합니다. 


한나 아른트 <<악의 평범성>>

아돌프 아히히만: 아우비츠 수용서의 홀로코스트 참사의 실무 책임자의 예루살렘에서의 재판 참관

많은 사람들은 그가 완전한 악인이며 극악무도한 살인자라고 생각하며 기대했는데 재판 과정에서 살펴본 그의 모습은 그가 나름대로 굉장히 도덕적인 삶을 살려고 애쓰고 신앙심까지 신실한 평범한 가장이며 중년 남성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써내려간 글.


그녀의 글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서 금서로 지정되기까지 했습니다. 아히히만이 재판 과정에서 계속적으로 한 말은 "저는 명령에 복종했을 뿐입니다"는 소리...

마치 예수님을 채찍질하는 로마의 군사들처럼... 

어떻게 지식인들이, 전문인들이 그렇게 참담히 비인간적으로 인간을 살해하고 시험하고 할 수 있을까? 나치라는 권위에 복종하면서 모든 분별력을 상실...난 복종할 뿐이다... 너무도 평범한 사람들이 바로 가장 큰 살인자였다는 사실...누구도 그런 악한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뱀이 유혹하여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선악과를 바라보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인간 안의 모든 종류의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 

        -> 그런데 그 욕망의 타겟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떼어 놓는 것.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금지 시키는 것

        ->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면 자유하게 될 줄 알았는데 결국 그 떼어놓음이 모든 인류의 죄와 사망을 가져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오직 복종의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 그 안에 참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탄은 이것이 어떻게 말이 되냐며 끊임없이 우리를 혼란 시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억압이고 부자유고 그리스도인은 억압과 부자유 속에서 산다고 유혹합니다. 

   - "죽기까지" 복종하였다. : 자기 스스로의 욕망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복종의 대상인 말씀만이 그 삶을 움직였습니다. 시간적으로, 질적으로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은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 어느 정도까지 순종하고 복종할 수 있어도,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은 자기를 온전히 내어놓는 것이고 그 결과가 곧 십자가입니다. 

 그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내가 그냥 고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함의 결과로서 오는 것입니다. 아무것이나 십자가가 아닙니다.  

   

  • 이스라엘의 대적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이들은 완전히 멸하라 하신 민족 - 아말렉 족속 

   [삼상 15:2-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 애굽에서 나올 때에- 세상에서 나올 때에 반드시 쳐야 할 것- 아말렉 그러나 사울왕은 아말렉을 물리친 다음에 볼품없는 것은 다 진멸했지만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어린양과 기름진 것은 남겨놓고 그것을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변명입니다.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이요,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입니다. 에서는 단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은 육신의 정욕의 사람이요, 그 후손이 아말렉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려고 하는 야곱의 후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싸움은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과 육적인 사람들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사울왕에게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아말렉을 치라"고 말씀하신 것은 눈으로 보이는 아말렉의 적도 있지만 속에 있는 육신의 정욕,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는 인간의 정욕을 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거기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버림을 당합니다. 

  •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높아진다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고지론과 미답지론에 대한 한국교회 신학적인 갈등

* 고지대론: 효과적인 복음전파와 크리스찬의 영향력을 위해서 높은 자리를 점령하라. 세상에서 성공하여 복음을 위해 사용하라. 요셉, 다니엘, 다윗, 솔로몬... 느혜미아, 에스더... 

* 미답지론: 크리스찬은 남이 하지 않는 것,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라! 바울, 예수, 열두제자.... 아브라함. 

-> 성경은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 어쩌면 신학적인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 일부러 높은 곳을 피하고 궂이 낮은 자리만을 추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정답은 자기가 그 길을 정하지 말고 말씀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높았던 요셉도 다윗도 다니엘도 느혜미아도 세상적인 영향력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 보니까 하나님이 그 자리에 앉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높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시면 교만하지 않고 감사하게 감당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높이지도 않는데 스스로 높이다 보니까 교만해지고 실수하고 타락하고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열 두 제자들도, 아브라함도 일부로 힘들 길, 어려운 길만 골라서 간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어찌보면 미련한 짓입니다. 

 신앙생활 한다면서 억지로 힘든 일만 골라 갈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말씀을 따라 가다 보니까 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나타나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물으신다면 여러분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복주시는 분? 

 여러분, 이 고백 뒤에는 항상 주인공이 '나'입니다. 아무리 그분을 높여도 내가 주인공이 되면 그 분은 결국 내 밑에 있는 심부름꾼 입니다. 

 베드로도, 요한도, 그리고 바울도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는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신 분,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라는 것, 진실한 고백 안에는 내가 없습니다. 나는 그저 주님 앞의 순종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진정한 내가 보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란 갇혀 있는 자신 밖으로 나오는 사람입니다. 자기만 알았던, 자기가 왕 되었던 삶에서 주를 바라보면서 밖으로 나오면 주님이 보이고 이웃이 보이고, 하나님 주신 모든 자연이 보이고, 세상도 보입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자기 안목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안에 있으면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가만히 안에 있어 세상의 것을 다 가져다 주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말씀 따라 주님 따라 내 밖으로 나오면 행복이 보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도, 왕이 되려고도 하지 말고, 말씀에 복종하면서, 스스로 자원하는 종이 되어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예수로만 사는 삶, 예수를 따르는 삶, 예수의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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