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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 (요한복음 1:43-44)'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5.06.05 빌립 (요한복음 1:43-44)

 

빌립 

 요1:43-44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1. 빌립 (Philip) 

안드레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과 한 동네 사람. 벳세다 출신입니다. 그 외에 바돌로메라 하는 나다나엘도 한동네 사람이요, 친구입니다. 그런데 빌립이라는 이름을 통해 다른 제자들과 다른 그만의 독특한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빌립’이라는 말은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에 계속적으로 영향력을 끼쳤던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이름이 빌립입니다. 헬라식 이름인 것을 보면 그의 부친은 헬라파 유대인이었거나 아니면 그 당시 외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유태인들은 절대로 이방 족속의 이름을 자기 자녀들의 이름으로 채택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빌립이 자라난 가정적인 배경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가정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띤 가정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온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들인 가정이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학문적이나 문화적으로 상당히 개화한 가정이었을 것입니다. 

2. 본문을 통한 인물 연구 

  이런 헬라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빌립은 상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킬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빌립을 시험코자 하신 말씀입니다. 너의 사고방식으로는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냐를 묻는 것입니다. 그 때 빌립은 잠시 생각하더니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고 했습니다(요6:5-7). 여러분은 여자와 아이까지 합쳐서 약 일만 오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먹어야 할 떡의 양과 가격을 쉽게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이 대답은 빌립이 얼마나 분석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신중함은 인내하고 기다리고 조급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신중함은 조급하고, 우유부단하며, 계산적이고 안전함만을 추구합니다. 빌립은 수천 명을 먹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며 떡을 살 수 있는 돈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의 기질은 기적을 배척합니다. 그는 너무도 계산적이기 때문에 계산을 벗어난 것에 있어서 담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시험코자" -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서 빌립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였을까? - 바로 "네가 가진 믿음의 근거가 무엇인가?"  

빌립의 믿음의 근거가 상식과 계산이었음을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바구니에 음식을 가진 아이을 데리고 옆에서 있는 안드레를 쳐다 보셨습니다. 빌립이 비젼을 갖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안드레는 속시원하게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6:9)고 여쭈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는 안되는 것 같지만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하며 주님께 문제를 의탁한 것입니다. 안드레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께서는 아이가 가진 것으로 무리들을 모두 배부르게 먹이고도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채우는 기적을 성취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다행스럽게도 빌립은 자기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빌립은 자신의 믿음이 깊지 못함을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나는 알아야 한다. 바람을 재우고 병을 고치며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는 무리들을 먹일 수 있다. 나는 왜 「주여, 무리들을 먹이는 일은 당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아닙니다.」라는 말씀드리지 못했을까? 나는 왜 믿음이 없을까? 라고 빌립은 혼자 말했을 것입니다. 그 날 빌립은 자신이 얼마나 속되고 융퉁성이 없는가에 대하여 얼마쯤 깨달았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면 작은 것을 통하여도 큰 것이 이루어짐을 경험했습니다. 교회는 주제넘고 경솔하게 예산의 집행을 좌절시키려는 기도로부터 보호되기 위하여 신중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다 큰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믿음이 강한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 근거는 자기 신념, 확신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이 명하실 때"입니다. 
계산적이며 보수적인 머리가 반드시 냉정한 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기계적으로 철저히 따지는 것이 불신앙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논리적인 생각을 가진 빌립은 무리를 충분히 먹이기를 원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빌립은 불가능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으로는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바꾸어야 했던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이르고 애굽의 군대가 양쪽으로 포위하여 뒤쫓을 때 모든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시고 이들이 무사히 빠져 나가도록 하셨다(출 14:8-31). 옥에 갇힌 베드로의 처형이 이튿날 아침으로 계획되어 있을 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 끝장인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사슬을 풀고 옥문을 열어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다(행 12:1-10).우리에게 모든 일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신다.

  그는 또 얼마나 신중했는지 모릅니다. 

  요12:20-23에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자 했습니다. 왜 헬라 사람들이 하필이면 빌립을 찾아왔을까라는 의문이 그의 문화적 배경을 통해 풀립니다. 제자들 중 헬라문화에 익숙하고 친숙한 빌립을 찾아온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 헬라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시간이 있으시다면 뵙게 해 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헬라인이면 이방인인데 이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또 혹시 책망 받을 일인지 도무지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제자들 중 가장 연장자이자 도움이 될 성 싶은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결국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께 가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안드레는 이런 저런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는 단순한 사람입니다. 빌립과 안드레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빌립의 성경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 성경에 나옵니다. 빌립은 분석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에 쉽게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신앙(믿음)은 분석을 넘어서는 영적 개념입니다. 분석적인 사람은 쉽게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빌립도 도무지 영적 감각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하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요14:8-9). 지적이고 분석적인 능력을 탁월하지만 항상 진리를 형이하학적으로만 분석하다 보니 영적인 관점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현대의 빌립 

 빌립은 오늘날 우리 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만 예수 믿겠다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성경말씀도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야 믿겠다고 합니다. 

 정말 이런 사람들은 믿음을 갖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사려고 하는 품목을 기록한 종이를 들고 짐차를 밀면서 선반에서 물건을 내릴 때마다 물건값을 적어 놓으며 카운터에 가서 자기의 계산과 맞추어 본 다음에 지불할 것이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에는 항상 신속하게 일한다. 논리가 정연하고 계산에 밝으며, 거의 기계적인 만큼 정확한 이 사람은 항상 전통을 존중하며, 근본원리를 탐구하고 수치를 맞추어 본다. 이러한 사람이 기대는 것은 상식적인 믿음과 과학적인 믿음이다.   

 <예수님의 부르심>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빌립을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를 어떻게 제자로 삼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각 제자마다 부르시는 방법이 달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안드레가 예수님을 좇아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돌이켜 보시면서, “네가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안드레가 진리를 찾는 사람인 줄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충만한 답을 줄 수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보자마자 이름부터 바꾸어 주셨습니다. “내가 네게 새 이름을 주겠다. 앞으로 네 이름을 게바, 혹은 베드로라 하리라.” 이 이름은 반석이란 뜻입니다. 이 이름은 베드로처럼 잘 변하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입니다. 베드로처럼 감정에 따라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도 시몬 자신도 이처럼 쉽게 변하는 자신의 성격에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책망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고민을 꿰뚫어 보시고 그런 사람도 변화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반하여 그를 따랐습니다. 자신의 고민을 한마디로 지적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빌립을 부르실 대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빌립을 부르실 때 처음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요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나를 좇으라”는 단 한마디였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느낌을 줍니까? 단도직입적인 상당히 강경한 어조의 말투입니다. 이것은 다정한 대화를 하려는 자세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을 전도할 때에는 잘 준비된 설득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때로는 강제성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빌립의 중심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앞뒤 잴 시간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한번에 확 끌어당겨야 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단순함에 빌립은 의외로 쉽게 끌려왔습니다. 

 신중한 사람의 단점-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쉽게 결정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곁에 단호히 결정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쉽게 따릅니다. 그래서 대통령 될 사람과 참모될 사람이 처음부터 나뉜다는 것입니다. 참모들은 이런 저런 일들을 연구하고 정리해서 보고를 합니다. 이 정책을 했을 경우 장점은 무엇이고 단점은 무엇이고, 그런데 스스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일 수록 장단점을 잘 알기에 오히려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단호히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전도하려고 하면 너무 앞뒤를 계산하고 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 논쟁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시간 낭비입니다. 논쟁으로는 결코 설득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변론을 통해 선교하고자 했던 아덴에서 그는 철저하게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 이후  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외에 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된 지역입니다. 

  논쟁에는 끝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단호하고 강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말고 마고 몰아치듯 하는 것이 오히려 통할 때가 있습니다. 

 <확신하면 행동하는 삶> 

  이런 사람은 한번 확신(결심)하기가 어렵지 한번 확신(결심)하면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한번 깨달아 옳다고 확신하면 금방 행동으로 옮기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만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이신 것을 확신하고는 친구 나다나엘(바돌로매)에게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전했습니다. 

  이 말의 표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예수님을 따를 때 무턱대고 따른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자세히 듣고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을 근거로 철저한 분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확신을 얻은 것입니다. 확신을 얻은 다음에서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나다나엘도 빌립과 같은 류입니다. 빌립은 확신에 차서 달리 설명하지 않고 “와 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빌립은 자기가 전도 받은 그대로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요1:43-46). 

  분석적인 사람이 한번 확신을 얻게 되면 “와 보라”고 한마디로 말하지만, 그 말 안에 진실의 힘이 실립니다

  <빌립의 장점> 

  분석적이고 계산적인 성향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단점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장점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단점으로 나타나면 비 신앙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점으로 활용하면 확신한 바를 더욱 효과있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빌립은 분석적인데다가 잘 활용할 때는 전도에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예> 사도 바울도 굉장히 지적이며 논리적인 사람 - 그러나 하나님에게 붙잡히자 누구보다도 더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기록했습니다. 

  <빌립의 순교> 

  사도 빌립은 성령을 체험한 이후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전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골로새 등지에서 사역을 했으며, 갈라디아 지방까지 올라가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여러 문헌에 보면 사도 빌립은 ‘히에라폴리스’라는 지역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반대 세력에게 붙잡혀 몰매를 맞고 십자가에 달려 순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중하고 계산적인 빌립이 복음을 전하다가 죽은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는 복음을 전하면 반대하는 자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죽을 것을 알지 못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자신의 최후를 예측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이름을 전하다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기에 자신의 사역을 포기하지 않고 죽기까지 복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전의 계산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목숨을 건 헌신자요 복음 증거자였습니다. 이것이 주님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복해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이 쓰시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성품(성격)이 있든지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붙잡히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만나면 단점은 최소화 되고 장점은 극대화 됩니다. 우유부단한 사람도 열정이 있어집니다. 계산적인 사람이 헌신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오직 주님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맡기십시오. 그가 변화시켜 가치있게 사용할 것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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