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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0.07.25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 욥기 40장1-14절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 욥기 40장1-14절 

 

1-2장에 등장하셨던 하나님께서 긴 침묵을 깨고 드디어 욥 앞에 나타나심 

 

[욥 38: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하나님의 임재, 폭풍우, 지진, 구름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 - 드러내심과 동시에 숨기시는 하나님

들을 귀 있는 자들만 들을 수 있는 존재 

 

책망하시는 하나님 

[욥 38: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욥과 욥의 세 친구 - 욥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욥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잘못했는지....

 

[욥 38: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그리고선 퍼붓는 질문 (38-41장까지...

 

  • 하나님의 질문

1-광대한 세계 

[욥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 38:8-11]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 과학 - 우주에 관심 - 그러나 아직 까지 물이 발견된 행성이 없다. 물이 있으면 곧 생명체가 있을 텐데....

그런데 그 물이 파도가 침에도 불구하고 떨어지지 않는 정확한 힘 

- 귀 속의 나팔관이 조금만 흔들려도 어지러워 살 수 없는 인간 

그런데 이 큰 지구가 하루에 한바퀴를 도는 데도 전혀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는 인간

그런데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 - 우주에 큰 폭발이 일어나서 저절로 생명체가 생겨났다. 

진화를 통해서 인간이 태어났다. 

그런데 그것은 의심없이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못하는 인간 

그 과학자들을 데려다가 하나님이 욥에게 처럼 질문하면 그들은 얼마나 대답할 수 있을까? 

 

2. 동물들의 세계 (욥 38: 39- 39: 30절)

열 마리 동물들의 생태에 대한 질문 (사자, 까마귀, 산염소, 들사슴, 들나귀, 들소, 타조, 말, 매, 독수리)  

너 이런 것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있는냐?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짐승-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돌보시는지....

인간이 돌보는 것 - 비만, 성인병, 인간의 질병이 그대로....그들의 질병이 인간에게 오는 것 - 바이러스 

인간이 그들에게 질병을 주니 결국 그들의 질병이 우리에게로... 

 

문집사님이 화분을 잘 가꾸어 주시다가 코로나 때문에 발길이 뜸해지자 가장 먼저 티나는 것 - 화초 

그런데 들에 피는, 자연 속에서 피는 모든 식물들 - 말라 죽는 식물들이 없다. 그들이 심기워진 땅에서 동일하게 내려지는 비를 통해서, 햇빛을 통해서도 자라난다. 어쩔땐 장마가 오고, 어쩔 땐 가뭄이 와도 잠깐 죽는 것 같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또 피어난다. 하나님은 만물을 그렇게 정확히 다스리신다. 

 

나 중심적으로 세상을 보면 보고싶은 것만 보기 때문에 신비함이 없다. 깨달음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 만물을 보면 만사가 다 신비다. 

 

3-욥에게 대해 질문하심

[욥 40: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 40: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

[욥 40:12]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욥 40: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4-혼돈의 괴물을 통제할수 있느냐? (41장) 

베헤못- 어마어마한 큰 하마 리워야단 - 큰 악어과의 짐승 -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짐승 

그 백해무익하고 무시무시한 짐승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 하나님의 철저한 통치와 돌보심 아래에 있다. 

 

1-2장에 등장하는 하나님

  • 악을 허용하시는 하나님 - 불편하다. 어찌 사탄이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가? 그런데 성경에서도 사탄을 참소하는 자- 참소라는 것은 검사처럼 고발하는 자. 

그러면서 사탄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 욥을 넘어뜨린다. 집과 재산, 자녀와 아내, 그리고 자신의 건강까지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세 친구가 욥을 위로하러 온다. 그들 역시 불신자가 아니라 욥만큼은 아닐지라도 나름 하나님을 신실히 믿는 자들이다. 

나름대로 욥 앞에서 긴 침묵으로 함께 하다가 이윽고 시간이 지나자 한 사람씩 고난의 원인을 캐기 시작한다. 

무슨 잘못을 지었길래...

회개하지 아니한 것이 있는가? 

한 사람 한 사람 말을 들어보면 우리의 신앙과 다르지 않다. 고난을 통해 죄를 회개하게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둅의 마음도 요동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이 끊이질 않는다. 

 

여기에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신학적 오류가 있다. 

인과응보 

내가 하나님 앞에 잘 했으니까 복받았었고

지금은 내가 하나님 앞에 무언가 막힘이 있으니까 징벌을 받고...

 

어느샌가 모르게 또 빠져 버리는 함정이다. 

어쩔땐 그러한 사고가 우리의 삶을 바른 쪽으로 움직이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떨 땐 헤어나오기 힘든 절망을 주기도 하고 그러한 생각이 남에게 향할 때 우리는 정죄하고 판단하고 그 사람을 죽인다. 

신실한 신앙인들이었던 욥의 세 친구들처럼 말이다. 

 

고난 중에 우리 자신을 살피는 것은 좋은 습관일 수 있지만 반드시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하지는 않는다. 

은혜라는 것, 십자가라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인과 응보를 깨뜨려 버리고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출애굽기에는 이 십자가 사건을 장대 위의 놋뱀의 사건으로 미리 보여준다.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던 백성들이 모세가 장대위에 단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살게 되었다. 

 

신약의 언어로 표현하면 예수를 바라보기만 하면,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 사건의 핵심은 절대로 우리 힘으로 살 수 없던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일방적인 방법으로, 그 분이 스스로 죄값을 치루면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교회현장에서는 그 은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장대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하면서 더 잘 보는 법, 더 빨리 보는 법...등 은혜를 얻기 위한 여러 방법들을 이야기하기 바쁘다."   

 

그래서 모든 질문을 퍼부으면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하신다. 

[욥 40:14]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인과응보대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오른손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분이 행하시는 일도, 그분의 은혜도 다 알 수 없다. 

어떤 목사도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자는 사이비요 이단이다. 우리는 그 분을 알려고 하지만 언제나 우리가 아는 것 너머에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행동하신다.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폭풍속에서 소나기같은 질문을 통해서 그 분의 신비를 보게 하신다. 

그 분은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그분의 말 앞에 엎드릴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 질문을 받은 후에야 비로서 욥은 고백한다. 

 

[욥 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홀로 사시는 한 성도분께서 이메일을 통해 코로나 19로 말미암은 정신적인 고통을 토로하셨다. 

혼자 살아가면서 일주일에 한 번 이지만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성도들과 교제하고 그러는 것이 마음의 안정도 되고 믿음을 통해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었었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면서 처음에는 나름 안간힘을 써가며 성경도 읽고, 설교도 찾아 들으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 하였는데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그런 안간힘도 점점 지치고 무기력해져 가면서, 나와 같은 신앙인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믿는 자들을 시험하실 수가 있을까 원망스럽기도 하고, 분가한 자녀 집에 가려고 해도 눈치가 보이고,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도, 밖에 나가서 돌아다닐 수도 없어,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 이렇다가 죽으면 하나님을 나를 반겨주실까, 외면하지는 않으실까 하는 두려움이 든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믿는 자들을 회개 시키기 위해서 코로나를 주셧다고 생각하고 여러 사람을 격려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러하 성도들 다 떠나겠다,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더니 내가 딱 그꼴이다하면서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아마도 많은 성도 여러분도 조금씩 느껴보지 않았을까 하는 코로나 정국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고통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모든 일들에 답이 주어지진 않지만 오늘 욥기의 말씀을 통해서 

그 모든 고통 너머에서도 여전히 이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감히 말씀 드린다. 

 

예전 내 어린 학창시절때 가장 좋아했던 시 서정윤 홀로서기

"둘이 만나 사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시간들이 스스로 선 줄 알았던 자들에게는 한 없는 겸손함을 

그리고 서지 못한 자들에게는 골방에서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진실한 만남을 위한 하나님의 프로포즈가 아닐까....  

 

두 번째 눈 수술 

보이지 않게 되서야 비로서 보는 것의 소중함을 안다. 보일 떄에 말씀도 책도 더 앍어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그런 생활에 순응하게 된다. 

읽는 것 대신에 들으면서도 살 수 있구나. 대충 보면서도 살 수 있구나...

 

그렇게 되면 책을 읽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애굽- 못살겠다. 

광야 - 못살겠다. 애굽이 편해 보인다. 

가나안 뜽을 들어가려니 이젠 광야가 더 익숙하다. 난 가나안 안 들어가고 광야에 남을래.....

그들은 결국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한다.  

 

모든 고난이 마찬가지다 

코로나 - 예배의 소중함. 교제의 소중함. 공동체의 소중함 

그런데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오히려 모이는 것이 귀찮아지고 오히려 교회라는 공간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그렇게까지 되면 결국 잃어버린 신앙이 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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