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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장 13-17절'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6.06.18 디모데후서 3장 13-17절 하나님의 말씀 - 확실한 스승

디모데후서 3장 13-17절  하나님의 말씀 - 확실한 우리의 터전

 

 디모데후서 3장은 말세의 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세의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로부터 모든 고통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바울은 "무릇 그리소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세상,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으로 집약된 이 세상에서 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자는 박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울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 역시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 15:20)
 
 여러분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기우뚱 하십니까?
 정말 예수 잘 믿으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합니까?
 오히려 거꾸로 예수 잘 믿으면 어떤 핍박으로부터 건지시며 우리를 안전히 보호하시고 머리되게 하시고, 빛나게 하신다고 교회에서 배우고 자라오지 않으셨습니까?
 예수 믿으면 핍박받을 것이라고 들어오셨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그리고 그 분이 승천하시고 기독교가 313년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 기독교는 참담한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당해야 했습니다. 사회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예수 믿으면 의료보험도 못받고, social 혜택도 못받는 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힘이 없었고, 기독교를 대적하는 이방 종교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은 박해 받는 것과 동일시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기독교가 로마를 점령하고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박해를 받았는데 거꾸로 예수 안 믿으면 불이익을 보게 된 세상이 온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강요가 되고 성직자들은 기득권이 되고 교회는 나날이 하늘 꼭대기같이 높아지며 종탑을 높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권력을 가지고 부유해지는 것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요?
 
 십자가와 부활은 그저 상징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사회 안에서 온갖 혜택을 보면서 오히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원성의 대상, 부패의 대상, 증오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사막으로 떠나 수도하는 사막 수도자들이 생겨났고, 수도원들이 생겨나면서 나름대로 정화 운동을 펼치려 하지만 그것 역시 시간이 흘러가면서 똑같은 타락의 싸이클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장 부유하고 교회 예술 문화가 세계를 주름잡던 중세를 일반 역사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가들 조차도 "중세의 암흑기"로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썩어 버린 기독교, 그것이 박해를 떠난, 고난을 떠난 기독교의 쓴 열매였습니다.
 
 이같은 역사의 순환은 지금 한국교회가 맞고 있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공직 사회에 들어가면 국회에도, 청화대에도, 왠만한 대기업에도 신우회가 있고, 함께 예배도 드리지만 박해를 견디는 순수한 예배가 아닌, 힘을 얻기 위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화려한 친목모임으로 전락해 버린 사례가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신앙의 첫 세대때는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까?
 제사 문제라든지, 양반 문화로 인해 기독교는 상놈의 종교요, 불효의 종교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박해와 탄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희 부모 때만 하더라도 예수 믿는 다는 이유로 시집에서 쫓겨나고 구박받는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박해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예수 믿는 다는 이유로 누구고 대놓고 박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심보가 얼마나 이상한지 예수 믿지 말라고 할 때는 총칼을 들이대도 예수 놓지 않고 믿는데
 이젠 예수 속편히 믿으라고 하는데도 사람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이젠 편히 믿을 수 있는데도 바쁘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지금의 시대에는 맞지 않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은 여전히 악한 질서가 큰 세력을 떨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 딤후 3:13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악에 휩쓸리지 않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세상은 여전히 그러한 자들을 핍박합니다.
 기독교인은 고리타분하며 재미도 없고, 융통성 없다고 한껏 뭐라하다가 그렇다가 그들의 말에 휩쓸리어 어울리면
 이번에는  날라리 신자다,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또 다시 비아냥 거립니다.
 
 신실해도 욕먹고 안신실해도 욕먹습니다.
 
 지금은 정체성 혼동의 시대입니다.
 이제는 내가 남자 여자로 태어났어도 잘못 태어나진 았았나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게끔 만듭니다.
 자신의 자아 실현을 위해 늙어서도 가정을 버리고 자신을 삶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도대체 뭐가 옳은지, 무엇이 진리인지, 자꾸만 헤깔리는 시대입니다.
 
 신랑감 일순위로 여겨지던 연예인이 하루 아침에 마약 상습을 투어자니 도박 중독자니, 성폭력자이니 하면서 등장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판단해야 할 지 모릅니다.
 
 이러한 시대에 제시하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4절을 좀더 쉽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야. 너는 네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을 계속하고 그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말고 확신해라. 왜냐하면 네가 바로 이러한 것을 나를 바라보고 배우지 아니했냐?
 
 그러니까 말씀을 확신하는데 그 말씀을 가르쳐준 나의 삶과 나의 행위...그야말로 10절에 말한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참음과 사랑과 인내"를 보고 확신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빌립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 14:11b)
 
 우리는 자랄 때에 부모로 부터 "나를 닮으라.."하는 말보다 닮지 마라...이렇게 살지 마라는 말을 더 많이 듣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참 교육은 가르치는 자를 닮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의 삶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의 정당성은 무엇을 통해 얻느냐? 내가 그대로 산 것을 통해 보여지고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바울은 그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을 삶을 통해 디모데에게 그대로 전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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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울은 자기 보다 더 좋은 스승을 디모데에게 소개합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 자체가 너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요,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15절부터 말씀을 보면 성경을 하나의 인격체로 묘사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큰 도움을 준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 

성경은 지식을 담은 책이 아닙니다.
정보를 담은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 입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현존이고 임재이고, 지금 역사하시는 살아있는 그 분의 말입니다,

참고서
"교과서를 풀이해 놓은 책, 완전정복...이것만 몇번 보면 완전이 내가 정복할 수 있는 책."
성경은 내가 수천번을 읽고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스승에게 사사를 배워도 내가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책.

성경은 지금 내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
지금 나의 중심으로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이 살아있는 그 분의 말씀으로서 성경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시편 1편에서 다윗은 복있는 사람은...하면서 악인과 구별하면서 결국 복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고백합니다.
묵상은 공부가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의 말씀을 듣듯, 학생이 스승의 말을 듣듯,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음미하고 내 삶에 들어오도록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을 주듯 그 안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는 것...
그 때에 성경은 나를 온전케 하고, 나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도록 나를 인도하고, 나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도록 능력을 줄 뿐만 아니라 날마다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가진 가장 확실한 스승, 그것은 결국 성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성경 자체를 자기의 스승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 결국 우상입니다. 황금 송아지입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아니한 예배는 그 자체로서 가인의 제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지성이면 감천, 어떻게 하든 내 마음을 받아주시겠지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리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강조하셨습니다.

말씀은 물론 좋은 목자에게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저 말씀 자체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말씀을 잘 듣고 배우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삶이 익숙해 지는 것입니다. 말씀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확실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비로서 참 스승에게로 디모데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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