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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장 1-7절'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5.10.02 디모데전서 2장 1-7절: (믿음의 선한 싸움의 무기- 기도에 관하여)

 

디모데전서 2장 1-7절: (믿음의 선한 싸움의 무기- 기도에 관하여)


2장의 시작: 그러므로 (시작하는 접속사를 잘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가 받는 내용이 무엇인가? 

18절: 예언을 따라 (말씀을 따라) 선한 싸움을 싸워라

그것의 수단: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싸워라. 

그리고 믿음과 선한 양심- 불신과 악한 마음으로 인해 파선한 두 사람,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의 예를 보여 주었다. 


그러니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데 그것을 위한 첫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권면은 바로 기도이다. 

간구 (Request)

기도 (Prayer, hearing, two-sided dialogue) 

도고(intercession, 중보, 탄원) 

감사 (Thanks-giving) 

 

 


기도의 종류이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기도의 순서이기도 하다. 

교회, 특별히 개신교- 신앙생활의 두 축 - 기도와 말씀

기독교 전통, 기도와 말씀을 구분하지 않았다. 기도와 말씀을 하나로 여겼다. 

기도는 말씀을 새기고 고백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고 말씀은 기도를 통해서 또한 하나님께 받는 것이었다. 

말씀을 읽는 것이 곧 기도였고 말씀을 암송하여 구하는 것이 곧 기도였다. 


가톨릭에서 기도는 곧 의식, 예식이 되었고, 그것에 반대하여 모든 형식화된 기도를 철폐한 개신교인들의 기도는 자칫 중언부언이 되기 쉬었다. 기도의 형식화가 무서운 것은 기도에 마음을 담지 못하는 것이고 중언부언이 무서운 것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고 또한 자기 탄식,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현재의 교회, 기도를 강조는 하지만 그 안 깊숙히 스며있는 기도에 대한 불신이 있다. 

기도에 대한 연구,  특별히 한국 교회 기도에 대한 비판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부르짖는 기도, 간구하는 기도는 자기 욕망의 잘못된 표현이라는 생각이 간구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듣는 기도, 대화하는 기도를 말하면 말장난 같고, 익숙하지 않은 기도같고, 그렇게 기도에 불확실하니 중보에는 확신이 없고, 확신 없는 기도를 하다보니 열매가 없고 그 결과 감사도 없다. 그저 내용없는, 무의식적인 감사인사 정도만 그칠 뿐이다.  

언제까지 기도해야 할지, 내 기도가 합당한 기도인지, 중언부언은 아닌지, 형식적인지 아닌지, 자기 생각, 이성, 자아가 기도를 이길 때가 많다. 


말로는 기도의 중요성을 외치면서도 실재적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말로는 기도한다고 하지만 정작 기도해야지 하는 생각만 가득 차 있을 때가 많다. 

기도하기 위해 앉아 있지만 혼자 간구하는 단계에서 이것이 내 뜻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갈팡질팔하다가 끝내는 경우가 많다. 기도의 깊은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제가 영성을 공부하며 나 자신을 바라보며 또한 함께 공부하는 영성전공자들과 이야기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기도에 대한 공부는 죽어라하고 하지만 정작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새벽기도나 부르짖는 기도는 마치 샤머니즘의 잔재인양 불신하며 침묵기도나 다른 초기 기독교 교회의 기도는 익숙하지 않다. 그러니까 자꾸 이것 저것 시도만 하다가 기도의 깊은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합리화하기는 기도를 꼭 무릎꿇고 해야하나, 교회에서만 해야하나 길가다가, 편하게 어디서나 할 수 있지 않은가 말한다. 맞는 말 같지만 또한 들여다 보면 변명이다. 


예수님은 온전하신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늘 기도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불구하고 금식하셨다. 그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한적한 곳으로, 골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주기도문) 

그리고 귀신을 쫓다가 실패하고 창피를 당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막 9:29)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 "기도 외에는"의 헬라어 사본에는 기도와 금식외에는 이라는 해석이 덧붙여 있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때까지 기도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도 결국 기도하러 가는 중에 일어난 사건이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자 마자 행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기도였다. 


(행 9:11)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회심 후 그의 전 삶의 모델 같은 장면이었다. 그는 아라비아 3년, 고향 다소에서 10년, 깊은 기도생활이 있었다.

바로 전도여행다니지 않았다. 13년을 전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며 자신을 다스리고 준비했다. 


모세가 날마다 호렙산에 올라 40년동안 준비한 것, 요셉이 감옥에서 힘쓴 것.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잡혀갔음에도 일어설 수 있었던 것! 바로 기도였다. 


기도 외에는 믿음의 선한 싸움에 참여할 수도 이길 수도 없다. 


부르짖는 기도가 어리석은 기도처럼 들리는가? 고상한 기도는 듣는 기도고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것은 하급 기도인가? 

기도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진실한 고백이다. 

가난한 자는 구할 수 밖에 없다. 구하지 못하면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하지 않는 기도는 위선이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기에 구한다. 

요청한다. 더 다급하게, 간절하게, 가난한 자일 수록 더 크게 기도한다. 

하나님이 못듣기 때문에 크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간절하여 소리 지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서서히 나를 보게 하신다. 

너무 가난해서 문제 밖에 안보이던 내가 부르짖어 하나님을 바라보자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게 하신다. 

그래서 더 깊은 대화가 시작된다. 

내가 구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이 시작되고, 그 안에서 내 죄와, 내 허영심과, 욕망과, 조급함을 보게 하신다. 

그래서 간구는 곧 기도가 된다. 

대화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나의 변명과 회개, 수정된 요청을 드리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서 시작된 기도는 곧 중보로 이어진다. 내 문제가 더 이상 문제로서 여겨지지 않으면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혹은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식구들과 교인들을 위해서 나에게 임한 은혜가 그들에게도 임하기를 간구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의 기도는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짐과 같이 그들에게도 이루어지기를"의 중보와 확신의 기도가 된다. 

확신하기 때문에 모든 기도는 감사로서 끝난다. 


이런 과정 중에 사도바울은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말한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위정자가 아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로마와 결탁한 자들이다. 매국노이거나 로마인들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를 안믿을 뿐더러 교만하여서 오히려 믿는 자들을 핍박한다. 마귀의 또 다른 이름은 "공중과 권세 잡은 자"이다. 


그런데 왜 이들을 위해 중보하는가? 

1. 물론 그들에게도 구원에 이르는 길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사랑의 연습이요 실천이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3-4)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구원이 임하기를 원하신다.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원하신다. 포기하지 않기를 원하신다. 


2. 나의, 믿는 자들의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다. (2절 b) 

We may live peaceful and quiet lives in all godliness and holiness. 

peaceful (평안: 외적) - holiness (거룩, 단정: 내적):  

quiet (고요: 외적) - godiness (경건: 내적)  


왜 위정자들,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의 평안이 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평안은 불화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파도에 휩쌀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세상의, 환경의, 외적인 상황 때문에 내 삶의 평안이 깨어지지 않고 그럼으로 내 삶이 단정하게 되는 것. 검소하게,  질서있게, 순전하게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또한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킴으로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집중함으로 내 안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가득 찰 수 있도록 세상을 위해, 세상을 향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고요와 경건은 곧 하나님을 향한 삶을 나타낸 것이고 

평안과 단정은 세상 안에서의 우리의 삶, 질서있고 규모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기도이다. 

세상을 위한 중보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구원을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안의 질서와 하나님을 향한 삶을 갈망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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