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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저주시'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4.04.11 시편 109편 (다윗의 저주시) (4)

 

시편 109편


창세기 3장 15절에서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 가장 먼저 한 것은 옷을 지어 입는 것이었습니다. 옷을 입지 않고서는 부끄러워 서로를 바라볼 수도,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이후, 사람이 하나님을 상대할 때에도, 그리고 사람들 끼리 상대할 때에도 민낯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가려야 합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내 죄를 가려야 하고, 옷으로 피부를 가려야 하고, 천으로 얼굴을 가려야 하고, 화장으로 민낯을 가립니다. 맨 모습으로 나서지 못합니다. 그것이 죄악의 결과입니다. 


20세기를 변화시킨 가장 위대한 사람들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정신 분석학의 프로이트는 사람의 본질은 결국 본능, 이드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교육이나 교양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포장하지만 깊은 곳에는 결국 식욕, 성욕, 탐욕같은 본능이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리고 있는 것을 다 걷어내면 남아 있는 것은 결국 욕심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내 안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인간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어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 모습, 자기의 민낯, 자기의 본능을 우리는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가릴 때가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가리는데 익숙합니다. 


시편 109편은 시편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편입니다. 이른바 "저주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다른 시편의 내용이나 표현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이것을 지었을리가 없다고도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 글이 왜 시편에, 성경에 올라와 있는지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의 복음과는 확연히 다른 반 복음적인 요서를 담고 있다고 경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적인 기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즉 성가대와 함께 했던 회중노래로서 지어진 시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함께 불러왔던 노래라는 것입니다. 실재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새 사도도 세울 때에 이 본문을 인용합니다. 


(행 1: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 사실로 보면 유대인들과 기독교 공동체 대부분이 이미 이 시편의 내용을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하면 누구입니까? 성서상의 인물 중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어쩌면 인간들 중에서 가장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인물도 다윗의 칭송보다 더 많은 칭송을 듣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를 핍박하는 사울을 끝까지 사랑했던 자로서 유명합니다. 자신을 배반한 자기의 친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두고 통곡하며 애도했던 사랑의 화신으로 유명합니다. 한 일개 졸병 시므온이 자기를 욕하는 것을 듣고, 신하들이 저를 죽이려고 할 때에도 그를 환대하며 하나님께 맡기었던 철저한 신앙의 소유자로서 유명합니다. 마치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매한 인격을 가진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다윗의 시를 보면 그의 인격에 의심을 품게 됩니다.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저질의 저주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평범한 신앙인들이 듣기에도 너무나 유치한 말로서 주님께 고자질 하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기분을 가지게 됩니다. (6절~15절) 

이 시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사울왕인지, 시므온인지, 아니면 어떤 무리들인지, 다윗은 이 시의 대상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지금 다윗이 이 누군가로부터 심히 괴로움을 당하고 있고, 혹은 이 누군가가 한 사람이 아니라 무리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괴로움 중에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내 하나님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 여기까지는 다윗이 지금 굉장히 억울한 일을 당했나 보다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잘못이 하나도 없는데 그 누군가가 지금 까닭없이 나를 공격한다는 소리입니다. 


그 이후의 기도는 이제 차마 다윗의 기도라고는 믿기 힘든 저질적인 내용이고 저주의 내용으로 가득찬 내용입니다. 입데 담기 모하지만 그래도 성경에 올라 있는 말씀이니까 제가 한 번 읽어 드리지요. 


[시 109:6-8]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그도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직분있는 사람이었다. 

9절부터는 어 막 나간다. 

9-15절 

자, 4절에서 다윗은 분명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다윗이 그를, 혹은 그들을 사랑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여기에 나온 다윗의 대적자가, 핍박자가 다윗에게 어떤 말로 핍박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이어 나온 다윗의 말도 그에게 질성 싶지 않습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보면 정말로 초등학생이 싸우면서 자기 부모에게 고자질하는 듯한 유치한 모습마저 발견 합니다. 자기는 무조건 잘했고 상대방은 무조건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7절에 보면 “그의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8절 “ 그 년수를 단축시키시고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고..

9절 가면 점점 가관이 아닙니다. 

“그 자녀는 고아가 되게 하시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는 유리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아예 신앙인의 자비와 사랑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습니다. 4절에서 말한 나는 사랑하나 라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만듭니다. 오히려 다윗을 핍박한 자보다 더 나쁜 저주자가 다윗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어찌보면 욕설과 저주가 가득한 장면을 우리는 다름아닌 다윗의 시에서 보게 됩니다. 

그냥 소리 내어 읽다보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며 계속 읽기가 거북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개인적인 내용을 하나님께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성가대와 함께 부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인도자가 앞에서 부르면 회중들이 따라 불렀다는 소리입니다. 따라 부르면서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을 경험했을까요? 


아까 서두에서 우리는 우리의 민낯을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들 앞에 가리는 데에 익숙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가리지 않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북한 기도가 있을까요? 

물론 다윗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셨는지, 응답하셨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도 들으셨다는 것이고 다윗은 이런 기도 한 것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향해서 공동체적으로 이런 기도를 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꾸만 자기 검열을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지,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실꺼야. 

죽도록 미운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그 사람이 비록 이러이러 하지만 난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같은 완전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도라도 들어 주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고상하게 기도한다고 해도, 화장을 이쁘게 했다고 해도 우리의 본질이 바뀌진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고상하게 기도하면서 저질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차라리 저질스럽게 기도하면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만지심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모습이고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이 저질스런 기도를 합창하면서 자신들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합창하면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했습니다. 

어떨 때에는 정말로 그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기도도 너무 고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고상한 척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제사장들은 예수님 앞에서 위선자, 누룩이라는 혹독한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미워하는 데에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꼭 정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에는 두 사람의 서로 저주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그 미움을 사람들에게 푸는 사람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을 미워하게끔 하면서 자신은 의로운 양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그러한 미움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저주를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직접 저주하면 사단이 납니다. 부작용이 심합니다. 뒷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아뢰면 그 분이 우리를 만지십니다. 때로는 기도하는 그 대상을 심판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도하는 나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만지시고 위로하신 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전 시편 109편을 보면 불편합니다. 

이 기도가 불편한 것은 어쩌면 내 안에 여전히 숨기고 꾸미는 외식이 남아 있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척 하는 위선이 남아 있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다윗은 인간관계에서 빈틈이 없던 자였습니다. 사울과의 관계에서도, 압살롬과의 관계에서도, 그를 저주했던 시므이와의 관계에서도 다윗은 언제나 인격적인 승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모든 감정을 가지고 자신이 필터링 하고 검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대로 가져 가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민낯을 가져 가십시오. 

그리고 그 분께 아뢰어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하십시오. 

하나님은 어두운 이 땅에 내려와서 우리와 함꼐 하시듯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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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10.21 07:31

    잘읽고 갑니다^^

  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10.21 07:31

    잘읽고 갑니다^^

  3. 좋은말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02.03 19:54

    아멘아멘..감사합니다 블로그에퍼가겠습니다~

  4. 좋은말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02.03 19:54

    아멘아멘..감사합니다 블로그에퍼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