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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 11-24절'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5.11.12 내 아버지 집 (누가복음 15장 11-24절)

 

내 아버지 집 (누가복음 15장 11-24절) 


지난 시간에 큰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더니 어떤 분이 그럼 작은 아들은 뭐냐, 왜 큰 아들만 챙기냐 해서 오늘은 이 이야기의 중심 인물, 탕자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 15장 11절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 

학자들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고 '두 아들'은 크게 나누면 '유대인과 이방인', 혹은 이스라엘 안에서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 병자들, 문등병자들, 세리들같은   유대인들로부터 죄인이라 정죄당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도 말했지만, 그건 너무 좁은 해석이고 그 탕자는 하나님의 품을 떠났던 아담 이후의 모든 죄인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하면서 순간 순간 하나님의 품을 떠날 때가 많지요. 뱀의 유혹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되리라! 순종하지 말고 네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라!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왕이 되어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탕자인 셈입니다. 

 

둘째 아들은 뱀의 유혹에 빠진 아담처럼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마음껏 자유하고, 독립하고, 자주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아버지의 재산이 자기 것인양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여러분, 아버지 집을 떠나려고 하는 자에게 도대체 내게 돌아올 분깃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내게 돌아올 분깃을 요구하는 아들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언제 분깃을 요구합니까? 야곱이 라반과 갈라 설 때에 분깃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자가 평생 남편 뒷바라지 하고 살림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못살겠다고 갈라설 때에 분깃을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분깃은 갈라섬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제 너랑 안살테니 내 몫을 달라는 것입니다. 

근데 자녀가 이제 아버지를 떠날테니 내 몫을 주세요!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 이상 아버지랑 함께 살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불효인데 자기 몫을 달라고 합니다. 

아니 떠나는 자녀 키워주고 먹여주고 교육 시키고 다 한 것만 해도 억울해 죽겠는데 오히려 자기 분깃이라니요? 

이것이 바로 사탄의 유혹이지요.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리고 자유하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 자체를 속는 것으로, 마치 착취당하는 것으로, 억눌린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미 아버지를 떠나기로 마음 먹은 아들, 하나님께로부터 시선을 돌린 탕자에게 아버지는 그가 원한 대로 분깃을 주어 그를 보냅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쫓아냈다고 표현하고 탕자의 비유에서는 스스로 나가기를 원한 것인데 이것은 결국 똑같은 현상에 대한 관점의 차이이죠. 

이스라엘을 끝까지 출애굽하지 못하도록 막은 애굽의 바로의 강퍅한 마음을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걍퍅케 했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악한 생각을 넣어주시는 분입니까? 

아니요,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악한 마음을 가질 때에 그것을 내어버려두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자유의지를 거스를 수 없는 때문인지, 깨닫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더 넓은 심정인지 모르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려고 마음 먹었을 때에 아버지는 그 마음을 바로 치지 않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 반대로 행할 때에도 그것을 붙잡지 않습니다. 내버려 두십니다. 


아들은 먼나라로 떠납니다. 

'먼나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아버지로 부터 거리가 먼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의 거처는 언제 어디서나 먼 나라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하고, 바벨이라고도 하는 이 세상은 실로 하나님 편에서 먼 나라들입니다. 무신론의 나라, 유물론의 나라, 우상숭배의 나라,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실로 멀고 먼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집 교회가 바로 자기 옆에 있지만 사탄의 지배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하나님 떠난 인생(죄인)들은 실로 멀고도 먼 나라입니다. 암흑의 권세가 주장하는 이 세상 나라입니다. 


그 곳에서 아들은 '허랑 방탕'한 삶을 삽니다. 허랑 방탕하다는 것은 기준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통제 할 수 없고 정욕대로, 쾌락대로 살다가 자기를 망가뜨렸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자유에 대해서 나누었는데 자유는 방탕함이 아닙니다. 자유는 과정도 좋아야 하지만 결과도 좋아야 합니다.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유익한 것이 자유입니다. 그런데 방탕은, 방종은 결과가 참담합니다. 

뒷감당하지 못하는 자유는 방탕입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에 따라 자유와 방탕함이 나뉩니다. 


나중에 집에 있던 큰아들은 그 둘째의 허랑방탕을 설명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눅 15:30)이라고 그 동생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지위와 신분과 달란트들을 모조리 사탄에게 빼앗겨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 것이라고 믿어왔지만 그야말로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아버지께로 부터 받은 아버지의 것을 허랑방탕한 이 아들은 그야말로 그 '탕자'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의 분깃을 달라고 해서 그것을 받아가지고 나갔지만 성경을 아들의 재산이라고 하지 않고 끝까지 아버지의 재산, 아버지의 살림이라고 표현합니다.  


15:14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결국 허랑방탕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궁핍해지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보호하시고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으면 자연이 우리를 대적하고, 만물이 우리를 대적하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애국가 가사처럼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떠나면 그의 힘, 그의 보호, 그의 영향력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야말로, 육적, 심적, 영적 궁핍이 찾아옵니다. 

흉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다 떨어진 상태가 바로 흉년인 것이지요. 

나가서도 아들이 산 것은 무엇으로 산 것입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산 것입니다. 

아버지의 것으로 세상에 나가서 살다가 그것이 떨어지니까 흉년이 들고 흉년이 드니까 궁핍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의 것이 떨어지니 어떻게 삽니까? 

아버지만 없으면 독립해서 나도 떵떵거리며 더 재미있게, 자유하게, 더 풍족하게 살 것으로 알았는데 아버지의 것으로 살아가다가 그것이 떨어지니 이젠 살 길이 없습니다. 이젠 아버지 아닌 남에게 붙어 살아야 합니다. 


그는 할 수 없이 남에게 붙어살아야만 하는 기생(寄生)하는 인생의 걸음을 걷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서 홀로 살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알지도 못하는 세상 누군가에게 붙어서 사는 기생 인생이 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한 것 같지만 결국은 세상의 종노릇 하고 붙어사는 인생이 되지요.나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기대 사는 존재입니다. 결코 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에 기대어 사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대어서 사는가? 세상에 기대어 사는가? 

나는 나만 믿어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만 믿고 사는 사람들도 점집 찾아가고 굿하고 난리를 칩니다. 

사람에게 붙어사는 인생은 얼마나 초라합니까? 왜 초라합니까?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겉잡을 수 없고 수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희생해서 나를 사랑하는데 세상은 내가 죽어라 희생해야 하고 희생해도 그 댓가를 종잡을 수 없습니다. 

  

아들은 사람에게 붙어살다가 더 나아가 돼지에게 붙어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 하반절부터 16절에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인간도 아닌 짐승에게 붙어사는 인간....얼마나 불쌍하고 미련합니까? 

그는 아버지(하나님)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고', 결국 본능으로 가득찬 육체의 상징인 돼지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을 떠난 자의 현 모습입니다. 

하나님 안 믿어도 잘 먹고 잘 살던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속 사정을 보면 하나님의 기준을 떠난 자들의 삶은 결국은 허랑방탕하다 정욕과 본능만 가득찬 돼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전 베테랑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보시면 재벌2세라고 하는 자들의 삶이 나옵니다. 

다 가진 것 같지만 기준도 없고 질서도 없고 그야말로 혼돈 속의 삶입니다. 

마약과 술, 여자와 힘...


여러분, 금요일날 데모데전서를 통해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서 나누면서 빠지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아내의 남편이 될 것이며...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

그런데 우리나라 20대 기업 중에서 한 아내의 남편이 여러분, 다섯명도 안됩니다. 

다 첩들이고, 몇 번씩 결혼한 사람들이지요. 

가지지 못하고 못배운 사람이 그렇게 살면 손가락질 받을 것이지만 그들은 돈과 권력으로 그 손가락질을 피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그들의 삶을 보면 얼마나 황폐한 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집사의 자격도 안되는 사람들이 부지기 수입니다. 


가장 인생의 밑바닥에 가서야 비로서 탕자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키다'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 와서 보니'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집 안에 있을 때의 모습을 되돌아 보는 것입니다. 

인생의 끝에서 비로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자신을 보니까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참 자기를 보는 것, 자기의 상태,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것, 이것이 신앙의 시작점이고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회개하라 회개하면 천국이 보인다"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보이는 것이 아버지 집입니다. 

자기의 상태를 보니까 비로서 아버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아버지'란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20절에는 '아버지'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21절에는 또 다시 '아버지'란 말이 세 번 나옵니다. 22절에도 '아버지'란 말이 나옵니다. 자기를 깨닫고 회개하니까 이제 보이는 것은 아버지 뿐입니다. 

그렇게 떠나고 싶고 독립하고 싶었던 아버지가 깨닫고 보니, 돌이켜 보니, 회개하고 보니 이젠 아버지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곧 탕자의 소망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부요한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탕자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힘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의 모든 재활의 힘이요 용기요 소망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였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실로 위대한 회개와 재기와 재생의 힘이 아버지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어릴적부터 창세기를 설교하심나누면서 항상 했던 간증. 

LG 카셋트가 고장나면 어디가냐? 삼성제품이 고장나면 어딜가나? 

그렇다면 네가 고장나면 어딜가야겠냐? 날 만드신 분, 날 가장 잘 아는 분, 바로 아버지께로....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로 가득차자 아들은 생각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일어납니다. 행동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끝입니다. 

회개는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도 베드로도 똑같이 후회했지만 베드로는 행동으로 주님 앞에 나왔고 유다는 후회하고 죽었습니다. 

왜 우리 삶에 능력이 없는가? 

회개했다고 하지만 후회하고 주저앉기 때문입니다. 

후회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돌이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제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그 마음이 복잡하게 이를 데 없습니다. 

죄를 지은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께 면목이 없습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그 많던 재산 다 까먹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가니 그 앞에 설 자신이 없습니다. 

자기를 돌아보니 아버지의 기준에 한 없이 모자라는 것 -"아직도 거리가 먼데..." 이것이 회개한 자의 위치입니다. 

떠날 때는 어땠습니까? 자기 분깃을 요구합니다. 자기가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아버지가 당연히 주어야 된다고 자기 의, 자기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교만함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자기 의는 하나도 없습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회개한 자는 그래서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그런데 그런 거리가 먼 사람, 자격이 없는 사람, 염치가 없는 죄인을 아버지는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한 번도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 거리를 좁힐 수가 없지요. 

기독교는 아버지가 찾아오신 종교입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해서 빌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요. 

거리가 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너를 왕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창조했는데, 죄의 유혹에 넘어가 거지가 되어 나타난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요,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요, 다만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려오십니다.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자 달려와서 우리를 안고 입을 맞추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고 견딜수 없는 사랑으로 더럽고 악취가 나고, 그의 온 재산과 명예를 다 잃어버리고 온 나같은 죄인을 달려와서 안고 입을 맞추시는 분. 그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옷을 입히고: 신분 회복- 아버지의 아들로, 죄를 가리우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히듯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피로서 우리의 죄는 가리우고 아들로서의 신분을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가락지를 끼우고 - 새 언약을 맺으십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고, 내 안에 머물면, 나의 안에 거하면...하면서 다시 언약을 맺으십니다. 

신을 신기라- 참 자유를 주십니다. 이제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고 다니고 누릴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무 잘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려고 하는 것 자체가 교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돌렸던 시선을 그 분께 다시 돌리는 것입니다.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분이 부르시면 부족하지만 "네 제가 여기있습니다. 아버지 말씀하세요..."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예배요, 기도요 신앙생활입니다. 

기도 할 때 마다 제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언제나 부족한 저에 대한 부끄러움이고 회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제가 모자라다고 책망치 않으시고 대신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날마다 날 일으키십니다. 그렇게 날 안아주십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은 행복한 것입니다. 부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여전히 거리가 먼 우리를 기다리시며 우리가 그 분께로 시선을 향하기만 하면, 돌이키기만 하면 불쌍히 여기시고 달려오셔서 안아주십니다. 

아들의 옷을 입히시고 언약의 가락지를 끼우고 신앙 안에서 참 자유를 주십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