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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에 임한 구원'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0.03.28 내 집에 임한 구원 (행 16:25-34)

내 집에 임한 구원 (행 16:25-34)

 

요즘 새벽에 성도들과 함께 묵상하는 말씀 - 빌립보서

감옥 속에서 기쁨을 전하는 전도자- 바울

 

본의 아니게 코로나 바이러스로 말미암아 가택연금과도 같은 상황에 처한 성도들에게, 또한 저에게 도전과 위로가 되는 말씀.

불안이 게으름으로 가면 곧 무기

력새진다.

그러나 불안을 통해 신앙을 향하면 그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오늘 사도행전 16장은 바로 그 빌립보 교회의 배경이 되는 장

첫 날에 빌립보서 1장 서론을 이야기하면서 다룬 적이 있는 이야기.

 

우리가 읽은 24장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데서 부터 시작된다. 바울과 실라는 왜 감옥에 갇혔는가?

 

빌립보 지역에서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은 그 곳에서 점 치는 한 여종이 바울과 실라를 따라와서 "이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라고 며칠이고 소리치며 다님.

->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라고 외치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심히 괴로워 했을까?

그녀가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닌 진실이 아닌가?

오히려 귀신 들린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며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며 선전하는 것은 전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왜 심히 괴로워 했을까?

 

바울 뿐만 아니다. 예수님도 공생애의 때에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자가 다가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하는 소리를 듣고 그의 말에 상대하지 않고 곧 귀신을 나가게 합니다. 그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건 그 말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원하시는 고백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하는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그리스도, 즉 자신의 주로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구주가 되지 않을 때에는 그것은 화려한 미사여구요 공치사일 뿐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의 종이 세상의 이런 칭찬과 공치사에 취하게 되면 겉으로는 인정받는 것 같지만 아무런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여자가, 아무리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떠들고 다녀도 그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과 상관이 없다.

신앙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가 나의 구원자임을 받아들이고 그 분이 나의 주인이 되도록 내 맘과 영을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 며칠을 듣다가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 귀신을 여종에게서 쫓습니다.

그런데 또 귀신들린 자가 나오자 주인은 오히려 화를 내고 신고하여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갇히게 합니다. .

귀신을 쫓는데 왜 그들을 감옥에 갇히게 하는가? 그들은 구원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배요, 물질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귀신의 정체요, 또한 세상이다.

그들은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건, 바울이 하나님의 종이건 그것은 딴 세상의 이야기이지 자신들의 이익을 해하면 그들이 누구이건 대적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군대귀신 들린 자의 귀신을 쫓았을 적에 그 마을 사람들은 귀신 쫓은 자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귀신과 함꼐 멸망당한 돼지로 인해 예수를 몰아낸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언제나 자기 배를 채우는 것, 자기 만족을 채우는 것-> 그것이 예수를 내어 쫓고 바울을 감옥에 가둔다.

 

바울을 감옥에 보내는 자들의 고백은 복음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습이라 하며 복음을 거부합니다"

자기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자들 앞에서 복음은 받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못할 길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바울은 실패자요, 세상은 바울을 감옥데 가둔 실력자요, 승리자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능력은 바로 이 때 발휘 됩니다.

 

  • 그 감옥 속에서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많이 맞았고, 그들의 발은 차꼬에 체워졌고 간수들이 옥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듯 합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로는 자유를 제한 받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영을 제한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감옥 속에서도, 쇠사슬에 매인 채로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찬양은 죄수들의 영혼을 울리고, 감옥의 문을 열며 간수장들을 얼어붓게 합니다.

 

신앙은 감옥 속에 가두어 지지 않습니다. 폭풍이 와도 멈추지 않습니다. 영혼의 깊은 밤이 와도 기도는 계속되고 찬양은 밤을 통해 흘러나갑니다.

 

바울을 이겼던 세상이 한 순간에 패배자가 됩니다. 자기가 승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는 순간 그들이 택하는 것은 죽음 뿐입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망권세 입니다.

자기가 지탱하는, 자기를 지탱하는 것이 무너지자 간수가 택하는 것은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그 때 바울이 죽으려는 간수를 막아섭니다. "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

 

잘못된 신앙은 몸을 상하게 하고, 가정을 상하게 하고, 공동체를 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바른 신앙은 우리의 몸도, 마음도, 공동체도 가족도 온전케 합니다. 살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죽이는 것은 사탄이요, 이단입니다.

 

[행 16:29-30]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요청한 것

등불을 달라- 나를 좀 보게 해 달라. 내 눈을 뜨게 해 달라. 내 맘을 좀 열어달라.

엎드려- 그리고 그들 앞에 무릎꿇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난 이제 당신의 종입니다. 자신의 몸과 영혼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간절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그 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영혼의 고백을 합니다.

 

거기엔 자신의 성을 채우고자 하는 이기심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빼앗았다고 바울과 실라를 옥에 가두게 되는 다툼도, 허영도 없습니다.

오직 어떻게 해야 내가 삽니까? 살고자 하는 마음만 있습니다.

 

신앙은 고상한 것이 아닙니다. 교양있고, 격식을 갖추고...

진정한 신앙엔 외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에 주님 앞에 무릎꿇는 것- 그 때 구원이 임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31절)

 

우리는 지난 몇 주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전혀 새로운 경험들을 해 봅니다.

바이러스가 때때로 창궐할 때도 이토록 전세계 모두에게 임한 적이 있었는가?

 

그러면서 사회적 거리 두기, 자가 격리라는 말을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힘들었던 사람과의 관계가 이토록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그냥 지나쳤던 커피숍이니 식당 하나도 그토록 들어가고 싶을 수가 없습니다.

공원에 가서 산책도 하고 싶고, 아이들과 두려움 없이 뛰놀고 싶습니다.

 

그런데 못합니다. 왜? 바이러스가 너무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때 치료약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어떨까요?

그 약만 먹으면 바이러스가 와도 아무런 해가 되지 못하고, 금방 낫고 회복되는 약이 주어진다면 거리는 다시금 사람들로 넘쳐나고, 몰마다, 식당마다 다시금 일상의 생활로 돌아갈 것입니다.

 

[요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생명으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막혀 하나님과 상관없이 어둠이 된 세상, 어둠이 된 사람, 철저히 죄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 땅에 예수께서 빛으로,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합니다. 빛이 비취고, 생명이 비취는데도, 그 생명이 나에게 다가오고, 나를 살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어둠이 깨닫지 못합니다.

아니 그가 부활하고 승천하여도, 우리의 어둠이 사라지고, 사망이 떠나갔는데도 어둠에 익숙한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but,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주 예수를 믿으라- 장대 위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보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힘을 주신다. 너와 네 집에 구원이 임한다.

 

우리는 지금 전혀 새로운 신앙생활의 길로 접어 들고 있습니다.

더러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죽음이 뭘 두렵냐고... 어차피 죽을 인생, 예배 드리다가 죽으면 천국가니 얼마나 당당하냐고....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는 교회와 성도와 목사들을 믿음 없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만 살려고 예수 믿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교회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단 한 사람이라도 죽음이 전염된다면 그것은 교회의 사명이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도, 제도도, system도 아니고 예수를 주로 고백한 우리가 바로 교회요, 우리의 고백이 곧 예배입니다.

 

우리는 건물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지키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하고 생명을 전하기 위해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의 치료자입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도 구원을 이룹니다. 감옥 속의 죄인을 승리자로 만듭니다,

두려우십니까?

진지하게 물어봅시다.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나이까?"

 

그에게 임한 똑같은 말씀이 묻는 자에게 울려 퍼질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정이 구원을 얻으리라"

 

때로 집에 있으면서 내일 걱정이 됩니다.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돈이 떨어지면, 쌀이 떨어지면, 일상에서 해 보지 못한 걱정들이 우리 마음을 불안케 합니다.

그런데 그 불안함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들에 핀 백합화, 하늘을 나는 새 주가 책임지시듯 그 분은 그날 필요한 구원을 이루십니다.

내일 걱정 내일 하고 오늘은 주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구원을 누리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충만한 저와 우리 로고스 교회 모든 성도님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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