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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그릇과 깨끗한 그릇'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6.06.10 디모데후서 2장 14-26절 (금그릇이냐, 깨끗한 그릇이냐?)

 

디모데후서 2장 14-26절 (금그릇이냐, 깨끗한 그릇이냐?)


14절 -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업속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그들이 누구인가? 앞의 10절에 나오는 "그들"과 같다. 내가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그 그들은 누구인가? 바울의 삶과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자이다. 바울이 예수를 만났다는 사실, 그가 사도로 임명되어 교회를 세우는 사명을 받았다는 사실, 바울이 쓴 여러 글들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강조하는...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군사로 부름받은 자들이고 복음을 위해 고난도 달게 받을 것을 외치는 바울의 신앙, 결국 감옥에 갇혀 죽음을 앞둔 바울을 비난하며 그의 신앙과 삶을 송두리째 비난하는 그들....


달리 말하면 그들은 누구인가? 십자가와 부활 대신에 영광과 축복의 신앙으로만 받아들이려는 자들이다. 십자가는 예수가 졌으니 이제 우리는 고난 없는 영광만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종이나 군사가 아닌 자녀의 자격만을 외치는 자들이다. 지금도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 반대편에서 여전히 영광의 신앙, 성공의 신앙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신앙이 잘못인가?


아니다. 분명 신앙 안에는 축복이 있고 풍요로움이 있고, 영, 혼, 육의 온전한 구원이 있다. 

모든 신자가 한 가지 목적과 한 가지 모양의 신앙으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 어떤 자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지만 평생 고난의 삶을 살다가 간 사람들도 있다. 어떤 자들은 정말 별 고생 않고 축복을 맘껏 누리다가 사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에도 마찬가지다. 야곱과 다윗처럼 인간사 모든 고생을 다 해본 자들이 있는가하면 솔로몬처럼 타고난 축복을 누리고 간 사람들도 있다. 좌우로 나뉘듯이 축복의 신앙과 십자가의 신앙은 신앙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축복의 신앙에는 위험한 요소들이 많다. 

자칫 성공과 축복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유혹에 빠진다. 

고통 중에 죄악을 짓는 자들은 거의 없다. 죄는 늘 성공과 축복 속에서 유혹된다. 

가나안이 그랬고 다윗도, 솔로몬도 편안할 때에 범죄했다. 

예수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한다. 부를 쫓는 사람은 부를 위해 하나님을 버리는 경우가 많다. 역사가 증명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신앙인들도 구원의 기회가 있기에 다투지 말라고 한다. 성공의 신앙과 십자가의 신앙이 서로 다투는 것은 결국 주위에서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대신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으라'고 당부한다. 

영문을 의역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인정함을 받은 자로서 최선을 다해 너 자신을 보이라. 나타내라, 드리라.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 일꾼으로서 진리의 말씀을 적절하고 바르게 다루는 자가 되라." 

진리의 말씀을 바르고 적절하게 다루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네 편의대로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를 살피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 법- 자기 유익을 위해 이용하면 법의 태두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못된 짓을 할 수 있다. 말씀도 자기 이익을 위해 변명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말씀을 자기 이익을 위해 다루다가 아얘 이단으로 빠진 경우를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예를 들어 말한다. 이단은 시작은 같은데 끝이 다르다는 것이다.  

아얘 처음부터 다르면 그것은 사이비이거나 다른 종교인데 처음 시작은 같은데 끝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시작되었는데 어느덧 부활도 인정하지 않고 교회를 트집잡는 일만 저지른다. 그런데 그들의 말은 오히려 삽시간에 온 교회에 퍼진다. 바른 것은 잘 퍼지지 않는데 바르지 못한 교훈은 잘도 퍼져 나간다.  

처음에 경건하지 아니한 말로서 사람들을 현혹하다가 결국은 점점 더 경건치 아니한 길로 나아간다.  

바울은 그들의 활동을 "악성종양"에 비유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미 진리에서 떠났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한다고 선포한다.   

그들은 진리의 선에서 이미 떠난 것이다.  


그런데 19절에서 이단에 대한 위협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무엇이라 증거하나?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19절) 

무슨 말입니까? 이단들의 유혹과 흔듦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견고한 기초는 견고히 서있다. 인침으로 봉인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미 누가 그의 백성인지를 아신다 

또 무엇이라 말하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고백하는 자는 사악한 길에서 돌이킬 것이다. 

구원받을 자들을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그 유명한 깨끗한 그릇에 관한 이야기이다.  


큰 집에는 - 큰 집은 어디인가? 하나님이 주인 되신 집이다. 하늘나라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세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된 교회이다. 그릇이라고 표현된 이 단어는 articles, 즉 재료이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금과 은도 가득하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릇 중에는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다고 말씀한다. 귀하고 천하게의 뜻은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혹은 천한 목적을 위해서라는 의미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우리는 당연히 아, 금그릇, 은그릇은 귀하게 쓰이고 나무그릇, 질그릇은 천하게 쓰이겠구나 생각하겠지만 21절은 재료에 상관없이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되면 귀히 쓴느 그릇이 되어 거룩하며, 주인에게 유용하며 어느 좋은 목적을 위해서도 준비되어 지는 그릇이 된다고 말씀한다. 

이런 것에서라는 말은 바로 잎의 구절, 천한 용도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을 깨끗이 하면"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은 금 그릇, 은 그릇은 귀한 용도로 고상하게 쓰여지고,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은 하찮은 용도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금 그릇이나 은 그릇, 나무그릇이나 질그릇, 그 재료에 상관없이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 내가 내 재료가, 내 달란트가, 내 능력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능력 있고, 부유하고, 똑똑한 자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자를 쓰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의 방점은 오히려 하나님은 질그릇과도 같은 나무그릇과도 같은 자들을 귀하게 쓰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마음의 중심으로 믿는가? 교회에서 너무나도 많이 들었던 말씀이지만 진심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가?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외모로 사람을 택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느니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실 때에도 독사의 자식들아 하시면서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 11:39)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하는데 이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기가 왜 힘든가? 


사람들이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교회에서까지 바라고 행해왔던 교육은 언제나 “큰 그릇이 되게 하는 교육” “금 그릇이 되게 하기 위한 교육”이었기 떄문이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만큼 1등을 좋아하고 최고를 좋아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올림픽 나가서도 금메달 아니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최고가 되기 위해선 친구와도 경쟁해야 하고 늘 남을 넘어서도록 교육받아 왔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남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교육은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조차 상투적인 말이지 실재 삶의 현장에서는 언제나 금그릇 되라고 직간접적인 강요를 당해 왔다. 

몇달 전 서울대 대학생이 아무리 공부해도 금수저를 달고 태어난 자들을 이길 수 없다 며 비관하며 자살한 사건은 우리 나라의 현실을 보여 준다. 

 
그런데 성경은 금그릇이 되어도 천히 쓰임받는 자가 될 수 있고 나무그릇, 질그릇이 되어도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다고 증거한다. 

그릇이 좋다는 것은 능력이 많다는 것이다. 스펙이 좋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 재료가 좋다는 것이다. 금수저를 타고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라 할지라도 천한 목적을 위해 쓰임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디모데에게 바울은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말한다. 

왜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말하는가? 결국 정욕이, 욕심이, 탐욕이 깨끗함 보다는 높은 것, 즐거운 것, 화려한 것을 탐하기 때문이다. 

남과 이것이 옳다 하고 다루거나 논쟁하지 말고 묵묵히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따르라고 말한다. 그것이 고상한 삶이요, 주인에게 쓰임받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온유함으로 가르쳐서 마귀에 올무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앞에 사로 잡힌 자가 되어 그 뜻을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출애굽기에 보면 성막을 짓는 도구는 오직 조각목이었다. 조각목은 싯딤나무로 만들것으로 쪼개지기 쉽고 가시가 많은 나무이다. 

하나님은 이 조각목으로 성막을 짓게 하셨다. 


그런데 이 조각목을 가다듬어 금테를 두르고, 은을 둘러 쌓아 성전의 도구로 삼았다. 성령을 입히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치시어 사용하신 것이다. 

다윗은 질그릇이었지만 하나님께 귀히 쓰임받는 그릇이 되었다. 

사울은 금그릇이었지만 결국 천하게 쓰임받는, 아니 버림받는 존재가 되었다. 


금그릇이 될 것인가? 꺠끗한 그릇이 될 것인가? 


확실히 우리의 마음을 정해야 할 것이다. 주인에게 유용히 쓰이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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