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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강 토머스 아켐프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과 인생의 여정의 단계 기도 

I. 데보티오 모데르나 (Devetio Modena)    

  1.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의 기원 및 동기   

  • 11세기 초까지 수도원이 엄청나게 타락하면서 새로운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프란시스칸 같은 탁발수도회였다. 수도원은 대체로 두가지로 나뉘어 지는데 재속 수도원과 폐쇄 수도원이다. 탁발 수도회 이전 수도회는 대개 폐쇄 수도원이고 탁발수도원은 재속 수도원으로서 세상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관여하는 것이다.  
  • 프란시스칸이나 도미니칸 같은 탁발 수도회는 중세 교회에 큰 도전을 주고 갱신 운동을 일으켰으나 대학의 시작 등 스콜라 주의가 발달되면서 수도회는 점차 교회에 봉사하고 교육을 강조하는 지성주의로 흐르게 되었다. 이러한 지성주의, 엄격한 예식주의 및 율법 주의에 맞서서 회개와 경건 생활을 강조하는 한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신경건 운동이라 부른다. 이 운동은 네덜란드인인 제랄드 그루테 ( Gerard Groote 1340-1384)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35세 때에 영적인 각성을 경험하고 은거하며 참회의 생활과 영적인 독서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게 되었다. 영적으로 나태하고 지적으로 무지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당시의 성직자들을 향하여 새로운 각성과 회개를 외치는 그의 사역은 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에게 자극을 주어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어 자발적으로 공동생활을 하며 사도적인 삶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번져나갔다. 

  1. 특징 

  • 이들은 소박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중세 수도원이 강조했던 수도 서약등을 하지는 않았고 탁발 수도회처럼 걸식을 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또한 지역의 교회와 단절하지 않고 지역 교회의 공적인 예배에 참여하며 고해 성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단순히 겸손과 사랑과 단순한 생활과 도덕적인 실천에 초점을 두었다. 
  • 그들의 영성생활의 주요한 원천은 성경을 읽고 그것을 묵상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라틴어가 유일한 종교적 언어였기 때문에 예배에 있어서 라틴어로만 성경을 읽고 미사를 집례했지만 신경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성경이나 예전책 혹은 경건 서적들을 평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지방어로 번역하는 일에 투신하여 라틴어를 모르는 비지식인들조차 성경과 경건 서적을 통하여 경건 생활에 참여하도록 격려했다. 
  • 그들은 경건에 유익이 되는 성경 구절이나 교부들의 가르침을 가지고 서로 토론을 하기도 하였으며 주일 오후에는 마을 주민들도 초대하여 그들의 토론에 참여케 하면서 경건생활의 보편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 이들은 공동체 의식을 특별히 강조하여 중요한 생활 방식으로서 자신의 허물을 기꺼이 다른 형제들에게 드러내어 고백하고, 이어서 주어진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삶의 훈련을 통하여 겸손과 순종의 덕을 쌓아갔다. 
  • 이들은 반지성주의 혹은 반 성직주의로 지적 형성 보다는 성경을 묵상하며 주로 도덕적인 진보에 관심을 두었으며 반대로 사변적인, 논리적인 유희를 거부하였다. 이들은 믿음에 관한 진리는 지적인 문제가 아닌 가슴으로 경험되는 감성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 담긴 감성적인 헌신은 이미 얻은 도덕적인 덕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들이 성경을 읽는 것은 자신의 영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 였는데 그 양식을 씹는 과정으로서 명상을 선택했다. 명상을 할 때에는 주로 역사적인 예수, 즉 고난 받으신 예수, 공생애적인 예수에 깊은 관심을 두고 그리스도를 향한 내면적인 헌신을 경험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목표였다.

  1. 그리스도를 본받아, 3대 베스트 셀러 - 성경, 천로역정, 그리스도를 본받아...

  • 데보티오 모데나 운동의 산물로서 오늘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The Immitation of Christ)"이다. 이 책은 신경건 운동의 형제 자매 공동체에서 행해진 가르침과 잠언들이 기초가 되어 경건생활을 조직화한 작품이다. 전체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 어떻게 그리스도를 본받는 길로 들어갈 수 있을까? 첫째, 영적 변화의 첫단계는 겸손을 통한 우리의 자기 중심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겸손은 인생이 우리의 필요와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향한 타고난 욕망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믿지만 아무리 우리의 욕망을 채워도 행복은 오지 않는다. 두번째 영적 변화를 위한 조언은 적극적으로 덕을 개발하라는 것이다. 세번째 조언은 내면의 평안 (히브리어 샬롬, 헬라어 에이레네)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이 평안은 욕망의 추구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 얻어진다. 네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자발적으로 반응하며 매일을 사는 것이다. 이 사랑은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난 아가페 사랑이다. 다섯번째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십자가와 대면하라는 것이다. 우리 자아와 세상에 대하여 죽으면 곧 어디서 출발하던 십자가와 대면하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피할 수 없다. 모든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가든, 우리가 짊어지기 때문에 십자가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십자가는 우리와 함께 한다. 어디로 향하든지, 위든, 아래이든, 안에서든, 밖에서든, 당신은 십자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삶이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실 때 가졌던 것과 동일한 마음을 우리의 삶에 구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삶에서 떠나 은혜의 지배를 받는 삶을 따르는 것이다.
  • 본성(NATURE)의 지배를 받는 삶과 은혜(GRACE)의 지배를 받는 삶

  1. 본성은 삶을 분주하게 하지만 은혜는 우리의 삶을 단순하게 한다. 
  2. 본성은 자기 중심적이지만 은혜는 하나님을 향한 삶이다.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이 중심에 있다
  3. 본성은 순종의 멍메를 피하려 하지만 은혜는 자기 중심성을 넘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향한다.  
  4. 본성은 자기 유익을 추구하지만 은혜는 자기 목적을 위해 성공하는 길을 따르지 않는다. 
  5. 본성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경의를 원하지만 은혜는 모든 존경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6. 본성은 수치와 경멸을 두려워하지만 은혜는 예수 이름으로 비난 받는 것을 기뻐한다. 
  7. 본성은 게으른 반면, 은혜는 해야 할 일을 기쁘게 찾는다
  8. 본성은 유행에 민감하고 물질적인 소득을 기뻐하고 상실에 낙담하지만 은혜는 영원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지나가는 것들에 메달리지 않는다. 
  9. 본성은 탐욕적이고 소유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은혜는 친절하고 나누고 작은 소유에도 만족한다. 
  10. 본성은 몸과 자아에게 몰두함으로 생겨나는 염려들에 초점을 맞추지만 은혜는 그것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길에 있는 것들로 향한다. 
  11. 본성은 감각을 만족시키는 위안을 찾아다니지만 은헤는 하나님 안에서 위안을 찾는다
  12. 본성은 이기적인 소득이 동기가 되지만 은혜는 하나님 외에 다른 보상을 구하지 않는다. 
  13. 본성은 적은 사람들과만 즐기기 원하지만 은혜는 모든 사람과 나누기를 원한다. 
  14. 본성은 부족한 것과 고통에 대해 쉽게 불평하지만 은혜는 의연하게 가난을 견딘다. 
  15. 본성은 자신을 만뭉에게 향하게 하지만 은혜는 만물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16. 본성은 비밀을 알고 싶어하고 내막을 알고 싶어하지만 은혜는 영혼에 유익한 것들만 취한다. 
  17. 본성은 작은 일에도 쉽게 불평하게 하지만 은혜는 모든 것을 의연하게 견디게 한다. 
  18. 본성은 사람들에게 나를 드러나기를 원하게 하지만 은혜는 헛된 괴시를 피하게 한다. 
  19. 본성은 감각에 몰두하게 하지만 은혜는 감각을 절제하는 훈련을 하게 한다. 
  20. 본성은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원하지만 은혜는 하나님만 알아주기를 원한다. 
  21. 본성은 죄의 다스림을 받지만 은혜는 은헤의 다스림을 받는다. 
  22. 본성은 내가 선악을 판단하려 하지만 은혜는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시기를 원한다. 
  23. 본성은 악에 굴복하지만 은혜는 덕의 빛을 발한다. 
  24. 본성은 자신의 에너지로 나아가는 반면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에너지에 의존한다. 
  25. 본성은 실패를 두려워하고 외면하지만 은혜는 겸손하게 단점들을 끌어안고 그것으로부터 배운다. 

  1. 개신교 신앙과의 관계 

  • 이들의 영적 순례는 영적인 회심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개신교의 회심처럼 순간적인 경험이 아니라 주님께로 향하는 의지적인 결단을 의미한다. 회심의 결단으로부터 지속적인 진보를 위한 영적인 훈련이 강조된다. 그들에게 영성 훈련은 곧 개인의 결단을 통해서 인간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훈련을 의미한다. 가장 가까운 목표는 겸손과 순종의 삶을 성취하는 것이다. 
  • 데보티오 모데나 운동이란 중세가 여러 가지 외적인 행위로 경건을 정의하려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경건은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한 운동이다. 
  • 이와 같은 경건 주의자들의 태도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에라스무스나 루터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II. 인생의 여정 단계 기도 (Stages of the Journey) 

  •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약속된 땅을 향해 가는 인생의 여정 안에 있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여정의 단계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험한 광야 가운데 머물고 있는지, 호렙 산에 머물고 있는지, 아니면 약속된 땅을 따라 위험하지만 희망 가득한 진격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여정의 어느 단계를 지나고 있는지 말씀을 따라 기도해 보는 것은 현재의 우리 삶을 진단하는데 있어서도,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현재를 넘어서기 위해서도 중요한 기도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히 시내산, 혹은 호렙산을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중요한 계시를 받은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계시를 받는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애굽도 아니고 약속된 땅도 아닌 광야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 중요하지 않은 여정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 산에 충분히 머물라"한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 목적: 우리의 신앙여정을 살펴보고 그 여정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어떻게 관계맺고 계신가를 기도를 통해서 깊이 묵상하고 성찰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 방법

  1. 신명기 1장 6-8절을 천천히 반복해서 읽으십시오. 

[신 1:6-신 1:8]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 애굽의 때: 당신의 인생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가장 험난하고 힘들었을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그때를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애굽의 삶과 연관시켜 보십시오. 당신의 애굽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의 인생에서 애굽의 단계에 해당되는 곳을 기억해 보십시오. 
  • 광야시기: 자, 이젠 애굽에서 탈출하여 뒤따른 삶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 시기에 당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랑하듯 혹시 방황하지는 않았습니까? 그 길에서 멈추어섰던 적은 없으셨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또한 불평하지는 않았습니까? 당신의 인생여정에서 광야같던 여정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연관하여 생각해 봅시다. 
  • 호렙 산에서: 당신의 인생여정에서 하나님의 임재 및 계시가 주어졌던 때가 있었습니까? 그 분의 임재 안에서 쉼을 쉬던 때가 있었습니까? 신앙의 여정 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인생 여정에서 호렙산에 해당 되던 때를 기억해 봅시다. 그 기억이 광야 같은 삶에서 어떤 소망을 주었습니까? 
  • 잠시 침묵 속에서 호렙산에서의 당신의 모습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 지시하고 계십니까? 그 음성을 듣는 당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 약속의 땅: 자, 이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당신에게 약속된 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향해 당신의 신앙여정이 향해가고 있습니까? 
  • 다시 현재의 당신의 위치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어떤 여정 가운데 당신은 머물고 있습니까? 어느 여정에서 당신의 인생이 가장 길게 머물렀습니까? 이 묵상이 당신에게 준 유익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어느 여정이 당신에게 가장 인상 깊게, 혹은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까? 
  • 하나님께 당신의 신앙여정의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리면서 기도를 끝맺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2.05 00:38

    좋은글 너무 감사드립니다.!!^^

  2. 향기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0.04.07 23:36

    너무 감사 합니다. 큰 도움 됩니다

  3. 향기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0.04.07 23:36

    너무 감사 합니다. 큰 도움 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 2:5-11)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열정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던 빌립보 교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만한 기쁨에 이르지 못한 이유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들은 열심이 있었지만 무슨 일을 할 때 마다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었습니다. 

자기를 남보다 높이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이 들의 공통점은 바로 교만함, 자기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교만함이 있으면 말씀을 알고, 열심을 내어도 참 평안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교회에, 가정에 다툼이 있고 불협화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사람이 정말 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난 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겸손하라고 자기를 비우라고 말을 하긴 하지만 정말로 사람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한 마음을 품는 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2절에서 말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는 것"이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 함께 나누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같은 부모에서 나온 형제라 할지라도 태어날 때 부터 성격이 다르고, 같은 가정에서 자라난 자들이라도 습관이 가지 각가 입니다. 하물며 인생의 경험이 각각 다르고, 신앙의 색깔이 각각 다른 지체들이 모인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서로가 서로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한마음으로 뜻을 합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 때가 그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서양 문화에 있어서 이 자기 중심성이 가장 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근대 정신의 출발이라고 하는 데카르트를 그 시작점으로 말들을 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철학적 명제는 "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입니다. 


그는 그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거짓이나, 꿈이나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정말로 진리가 무엇인가를 곰곰히 따져 묻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세상이나 사물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그는 부정하면서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 하다가 모든 것의 출발점을 "생각하고 있는 자기 자신'으로 결론지은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그림이나 문학에서도 자기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림에는 자신이 없어도 누구나에게나 보여지는 객관적인 풍경이, 사물이 중심이 된 그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문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데카르트 이후로 개인이 보는 관점이나 시각, 그리고 그림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개인의 관점이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이 자기 자신 "self" 이 되었습니다. 

그 중심 아래에서 서구의 개인주의가 탄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보다 훨씬 더 근원적으로 이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적에 부추긴 것이 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탄이 인간을 유혹한 마음은 다름아닌 인간 개인에게 하나님에게로부터 독립된 마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하나님과 같이 높이는 마음이었습니다. 


노아의 방주 이전에 바벨탑 사건은 이러한 인간의 이기심의 종착지를 다시 한 번 보여 줍니다. 

[창 11:3-창 11:4]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원어의 뜻을 조금더 빌자면 우리가 스스로 벽돌을 만들어 굳세게 만들자. 흙 대신에 역청을 발라 더 강하게 하자. 그 벽돌로 성읍과 탑을 세워 하늘에까지 올려 우리의 이름을 내어 흩어지지 말자! 


좀 더 의역을 하면 어떻습니까? 

우리 스스로의 성을 쌓아 하나님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살자. 흙으로 만든 인생에서 떠나 영원히 죽지 않을 문명을 세우자. 

우리의 성을 세워 하나님의 이름보다 우리 영광을 위해 살고 절대로 하나님에게 무릎꿇지 말자. 


바벨탑이 인류 문명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풀 수 없는 고대 문명의 비밀을 드러내는 구절일진 몰라도 신앙 안에서 이 사건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자기 영광을 위해 살려는 인간의 죄악되고 헛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인간들의 마음을 시편 1편에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하면서 복있는 자,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과 같이 사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이후로, 그리고 근대 이 후 더욱 급격히 사람들은 각자의 성을 건설하며 삽니다. 자기 이름을 내며 자기 영광을 위해 삽니다. 그런데 이 성은 견고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바벨탑처럼 흩어놓으면 부서질 성입니다. 


요즘 뉴스의 중심 - 홍만표 변호사 

검사장 이었던 그가 변호사가 되어서 모은 재산이 5년만에 오피스텔 130여채 100억대 빌딩. 

그가 사는 호화 아파트 - 한층 전체가 그를 위해... 또 다른 층 하나는 아내, 또 다른 층 하나는 처남 소유,..


그야말로 자신들의 왕국, 자기들의 성을 쌓아 살아가려고 했으나....그의 행적이 드러나게 하심...


자기 중심적인, 자기 성을 세우고, 그 안에서 자기를 높이는 이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바로 세상이 주는 마음,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가진 것 같지만 정말 가난한 것이요, 화려한 것 같지만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 마음을 극복할 수 있을까? 


다같이 빌립보서 2장 5절을 읽읍시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기 성 안에 갇혀 살지 못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닮으라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마음을 이길 수 있는 것, 오직 예수의 마음 밖에는 없습니다. 


그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겸손"은 당시 사회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겸손을 무능한 자들의 마음이나 굴욕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유가 없는 노예들이 가진 마음이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높아지고 출세하려면 겸손하면 안됩니다. 최대한 자기를 알리고 과장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겸손은 손해볼 마음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이 마음은 기독교가 강조하는 가장 큰 덕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겸손하면 손해보고 비굴해진다고 얘기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정말 높은 사람은 섬기는 자다. 낮아지는 자다. 겸손한 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의 모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겸손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예수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섬기는 곳입니다. 

겸손의 마음, 예수의 마음은 그저 개인의 기쁨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생명, 그리스도인의 근본에 관한 마음입니다. 교회가 왜 위기냐? 이 예수의 마음, 예수의 자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낮추고, 복종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자꾸만 높이고, 주장하고, 십자가를 외면하기 때문에 위기라는 것입니다. 


저의 마음에 몇주 동안 위기의식이 왔습니다. 아프고, 이사하고, 여행하고...빈자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허전합니다. 

왜 부흥이 안될까? 말로는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늘지 않는 숫자 때문에 조급함이 밀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조급함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막힌 데가 없는가? 내 영적인 관리를 잘 하고 있는가에 집중하면서 기도하며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허전해하지 말자. 하나님으로 인해 충만하자.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자. 

나 자신에게 갇히지도 말고, 남들의 말에 우왕좌왕 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말씀 가운데 맡은 바 사명에 집중하자. 


그리스도의 마음은 또 어떤 마음입니까? 

[빌 2:6-빌 2: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본체였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6절)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입니다. 충분한 자격이 있으셨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대접받지 않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칭찬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으신 분들입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교회를 섬겨온 것을 생각하면, 시간 드려서 몸 드려서 물질 드려서 정말 희생적으로 주님의 교회를 지켜 온 것을 생각하면, 여러분은 대접받고 인정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대접받는 자리에 앉지 않고 오히려 대접하는 자리로,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대접 받고자 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 다툼이나 허영입니다. 그러나 겸손할 때 사라지는 것 역시 다툼이나 허영입니다. 


그 다음, 바울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7절)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비어’라는 말씀이 바로 ‘자기중심성’을 뽑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자기중심성’을 뽑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지 않는 ‘겸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아니 하나님 자신이신데, 어떻게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 같이 지낼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종의 형체를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자기’를 비우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세상은 수준을 이야기 합니다. 수준이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려고 합니다. 수준이 맞지 않으면 피하고 외면하고 무시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서로가 수준을 낮추는 것입니다. 어느 수준이든지 어울릴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품이 바른 어른 - 어느 세대와도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대접받으려고만 하고 어린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못하면 그것은 수준이 높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지식한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나이가 들수록 외롭고 고독해집니다. 


교회의 수준은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필요하면 됩니다. 누구든지 와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수준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은 죽기까지 겸손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진 겸손한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겸손하려면 결국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완전히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도이고 부활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교인이 교인다워집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어떻게 사모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래야 합니다. 심장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대로 두고서, 거기에 성경지식이나 신앙의 형식이나 경험으로 적당히 포장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그게 더 큰 문제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마음은 바로 겸손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면 이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춰집니다. 바벨탑을 지으며 그렇게 드러내려 했던 그들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이름은 굳건한 성을 지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모든 입술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말씀에 굳건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방법이 아닌 정말 하나님의 방법대로 세워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방법은 십자가 외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마음입니다. 말씀에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그러한 우리 로고스 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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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성의 전당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2.11 05:10 신고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데카르트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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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