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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고난, 세례 (마태복음 14장 24-32절) 


오늘 본문 바로 전의 사건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이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가 이제 온 이스라엘에 소문이 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 많은 사람들을 예수께 모여들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흥분하였고 들떠있었으며, 사기가 충천했다. 큰 비의 은혜를 경험한 바로 그런 때였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들떠 있는 제자들을 "즉시 채시고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마 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마치 가만 놔두면 큰 일 난다는 듯이 들떠 있는 제자들을 즉시 재촉하여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왜 그렇게 급히 재촉하셨을까? 

무언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만과 게으름과 방심과 죄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 틈을 타고 사탄이 역사하기 째문이다. 

지금 까지는 그들은 항상 예수와 함께 거닐었다. 

예수와 함꼐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다. 그 분만 바라보고 있으면 만사 오케이였다. 

적어도 그들에게 예수만 함꼐 있으면, 하는 믿음은 있었다. 


그런데 오병이어 기적 이후 예수는 홀로 남고 제자들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게 하신다. 

실제 신앙인의 삶에 있어서 예수가 우리를 홀로 남겨 두게 하실 때가 있는가? 

물론 그렇게 느낄 때가 있다. 그렇게 가깝게 느껴졌던 주의 임재가 어느 순간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막막한 때가 있다. 

다윗도 그러한 심정을 시편에서 수없이 부르짖으며 자기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외친다. 


심자가 요한과 같은 영성가들은 이러한 때, 하나님의 임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러한 때를 "영혼의 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 많은 경우 예수가 우리를 홀로 보내는 것보다는 우리가 예수 없이 홀로 떠날 때가 부지기수다. 

오병이어와 같은 큰 이적을 경험한 후에 대개의 신앙인들이 마치 그것이 자기 능력인양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에서 스스로 이젠 됐다고 생각하는 영적 나태함이 일어날 때가 많다. 

 

 물을 건너는데 예수가 없다. 결과는 폭풍우다. 


(마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그렇기 떄문에 이 구절은 이중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산은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장소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불러 하늘의 복음을 들려주시는 장소이다. 

그런데 여전히 예수는 그 산에 계신데 제자들은 예수를 홀로 남기고 지금 바다를 건너고 있다. 

주님께서 그들을 보내신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은혜에 도취되어 예수없이 먼길을 온 것이라고, 예수를 홀로 남겨두고, 이제 자기 스스로 해 보겠다고 볼 수도 있다. 

어쩄든 결과는 예수는 홀로 남고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바다를 건넌다. 


(마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없이 너무 먼길을 나와 버렸다. 꺠어있지 않은 자는 언제든지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 

너무 바빠서건, 너무 아파서건, 예수 없이 너무 먼 길을 떠난 자의 결과는 고난이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와의 거리가 멀어지자 허랑방탕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마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밤 사경은 새벽 네시쯤 되는 아주 깊은 밤 새벽이 오기 전의 시간입니다.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둠이 가득찬 시간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어둠을 방치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고난의 중심에서 그 위를 걸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밤새 폭풍우 속에서 제자리를 맴도는 그들에게 예수가 나타나신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말한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  성경에서 물을 건너는 것은 곧 구원의 모델로서 그려져 왔다. 


1.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그 전형적인 모습이다. 

엵지 재앙을 통해 바로의 항복을 받아내고 애굽을 떠나는데 마음이 바뀐 바로가 뒤에서 쫓아오고 앞은 홍해가 가로막고 있다. 


[출 14:13-출 14:14]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 두려워말고 -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두려워하지 않은 유일한 방법- 기도의 언어로 바꾸는 것이다)

  • 가만히 서서 - 꺠어 있으라. 조급하지 말고 서둘지 말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를 바라라 
  • [고전 10:2-3]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홍해를 건너는 사건 - 세례, 혹은 중생의 사건, 세상 (애굽)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말씀)으로 살아가는 여정으로 들어오는 삶. - 중생의 세례는 일생에 유일한 사건. 

그 방법-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 -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런데 그 후에도 강을 건너는 사건은 계속된다. 


2. 여호수아 

  • [수 3:3-수 3:5]

(수 3:3)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수 3: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수 3: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 언약궤를 따르라. 거리를 유지하라 (이천규빛: 약 1km) : 이전에 가보지 못한 너희의 행할 길을 알게 하리라. 

거리를 유지하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앞서지도 뒷서지도 말고 말씀을 앞에 두고 바라보며 나아가라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고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라. 멈추라 하면 멈추겠나이다' 하는 것이다. 

말씀은 항상 현재형으로 받는 것이다. 

거리를 유지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 너희가 지나보지 못한 길을 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과소평가 한다. 미리 하나님의 뜻을 이럴꺼야 하고 단정해 버린다. 

그러나 그 분의 말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기대를 넘어선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말씀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주관하기 때문이다. 

  • 출애굽을 죄에서 구원받는 여정이라고 생각하며, 요단강 도하는 삶에서 여호와의 선택받은 자로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이라 생각해 보자. 


3. 엘리사 

  • [왕하 2:13-4]

(왕하 2: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왕하 2: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 겉옷- 성령으로 옷 입는 것- 성령의 내주는 아홉가지 열매, 전신갑주는 성령의 외적 능력.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일생에 한 번 경험하는 중생의 세례를 말한다면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은 성령 세례, 성령 충만의 사건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다시금 주어지는 제 2의 은총이다. 



 4. 다시 베드로로 

 지금 베드로가 직면하고 있는 폭풍우는 어떤 물인가? 

 죄인인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물이다. 사망의 물이다. 

 애굽과 광야 사이를 가로막은 물, 홍해이다. 세상과 하나님의 땅을 가로막은 물이다. 바로 세례이다. 

 광야와 약속의 땅 가나안 사이를 가로막은 물, 요단강이다. 바로 말씀의 물, 은혜의 물, 성령의 물이다. 엘리사가 가죽옷을 헤치며 걸었던 그 물, 성령의 능력이다. 

 그 물을 지금 예수를 바라보고 건너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마 14:30)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우리 힘으로 갈 수 없는 물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널 수 있는 물이다. 

그리고 다시 예수와 함께 배에 오른다. 

(마 14: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첫번째 베드로에 배에 오르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바람을 그치게 한다. 


신앙 생활은 결국 내 배에 예수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그 분을 내 배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 물, 고난, 세례 

물은 성경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베드로가 만난 폭풍우, 바울이 만난 유리굴라와 같은 인생의 큰 고통이요 시험이요 고난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죽고 예수로만 사는 세례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 둘은 별개가 아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고난이 곧 세례이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의지하던 교만함에서 돌이켜서 고난 가운데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함을 깨닫게 된다. 

다시금 재가 죽고 예수만을 바라 보게 된다. 

고난을 통해 한없이 낮아지며 고난을 통해서 전적으로주님을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C.S. 루이스가 표현한 것처럼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향해 외치는 확성기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면서 누가 이기나 돌아오는 것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폭풍우를 뚫고 고난 당하는 베드로를 향해 물 위로 걸어오시듯이 고통 당하는 우리를 향해 먼저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물을 건너는 사건은 중생에서 성화로 성화에서 성령의 충만으로, 그리고 물을 두려워 하지 않고 물 위로 묵묵히 건너는 상황에 얽매이지 않는 신앙으로 발전한다. 신앙의 성숙,단계를 표현한다. 

모세도 건너고, 여호수아도, 엘리사도 건너지만 예수의 제자 베드로는 실패한다. 마치 베드로가 실패한 그 자리에 우리를 초청하는 것 같다. 

주님을 볼 것인가? 주위를 볼 것인가? 


<군대에게서의 간증>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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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나 교회 (계시록 2:9-10) [ 2:9- 2:10]

 'I know your tribulation and your poverty (but you are rich), and the blasphemy by those who say they are Jews and are not, but are a synagogue of Satan. 'Do not fear what you are about to suffer. Behold, the devil is about to cast some of you into prison, that you may be tested, and you will have tribulation ten days. Be faithful until death, and I will give you the crown of life.

에베소 교회의 표지- 사랑, 첫사랑을 회복하라.

서머나 교회의 표제- 고난

사랑과 고난은 같이 간다. 진실한 사랑은 고통과 함께 온다.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의 저작 배경, 영화 <Shadow Land>

옥스포드 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평생 독신으로 책을 쓰며 살았던 루이스. 반지의 제왕을 지은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쓰자 루이스가 쓴 글이 나니아 연대기.” 두 교수 모두 기독교의 진리를 어떻게 쉽게, 여러 사람이 읽게 할 수 있을까?

그는 고통에 관한 글을 많이 썼고 고통에 관한 수업도 유명했다.

그 수업가운데 유명한 구절을 몇 가지 들면 고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조각가가 인간형상으로 깎아 내리는 돌덩어리 입니다. 끌로 때리면 너무 아프지만 고통을 우리를 완벽하게 합니다.” “고통은 귀머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이제는 아이방에서 나와 타인과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한 여인을 만나기까지 고통은 그의 가장 중요한 강의의 주제였다. 그러나 삶은 아니었다.

그가 노후에 편지교류를 통해 교류한 조이 그래샴이라는 미국의 여류시인과 서신왕래를 하게 됨. 나중에그녀가 이혼을 하고 영국에 와서 그녀의 영주권을 위해서 서류상의 형식적인 계약결혼을 하게 됨.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골수암에 걸림.

그녀가 죽어가고 있고 얼마 후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루이스는 이전의 모든 고통에 대한 정의를 새로 다시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누구를 사랑하면 그 고통을대신해주고 싶다. 하나님도 더 하실 것이다.

그녀의 병이 진전되었을 때에 둘이 여행을 가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다가 대화하는 내용.

조이: 딴 곳에 가긴 싫어. 그냥 지금 여기서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일이 생기는 것도 싫고, 모퉁이 지나면 또 다른 언덕이 나타날 것도 싫어요.” “그 때 겪게 될 고통은 지금 누리는 행복의 일부분이야.”

그녀가 죽고 나서 그녀를 회상하면서 그는 고백한다.

난 인생에서 두 번의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한 번은 소년으로서, 한 번은 남자로서. 처음엔 안전한 길을 선택했고, 나중엔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했다.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은 그 때 누렸던 행복의 일부분이다.”

사랑과 고통처럼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는 당대의 도시 중에서 제일을 다투는 유명한 라이벌 도시였다. 천해의 항구로 아시아의 자존심이라 불렀으며 소아시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러나 기독교 인들에게 그 곳은 고통의 도시였다. 그래서 이 교회에 주는 편지의 내용은 고난이다.

과거에 당했고, 현재 당하고 있는 환난에 대한 설명, 그리고 장차 다가올 더 심한 시련에 대한 경고. 그리고 끝까지 견디라는 격려가 이 편지의 전부이다. 서머나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고, 그들은 어떤 일을 당할 지 아무도 모르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살았다.

에베소에 아데미 신전이 있었다면 서머나에는 로마를 인격화한 신인 여신 데아 로마가 있었고, 이 때문에 서머나는 로마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도시로 명성을 얻었다. 제국과 황제, 즉 로마와 케사르에 대한 숭배와 충성은 이 도시의 가장 강력한 특징이었고, 특권을 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만이 우상 숭배의 이유로 케사르를 주로 부르지 않았고 신전에서 예배하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애국심이 없는 민족의 반역자였다.

가장 그들은 박해하도록 모략했던 자들은 다름 아닌 유대인들. -> 자신들은 공식적으로 제사의 의무를 면제 받았는데, 그들 자신에 대한 눈총을 그리스도인들을 중상모략하여 당국과 대중의 비위를 맞추었다. 사도행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을 끝까지 추적하여 죽이려고 하는 자들은 다름아닌 유대인들. 사도행전의 끝은 그러한 유대인들을 눈멀고 귀먹었다고 한탄하며 끝을 맺는다.

서머나 교회 교인들이 받았던 고난

1.     궁핍

-       내가 네 궁핍을 안다. (9): 가장 번창한 도시에서 가장 소외되고 핍박받았던 자들이 그리스도인들. 유대인들과 이교도들이 상종하지 않으려 했던 자들. 빈곤- 초대교회, 중세시대 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따르고자 했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방법.

2.     비방 내가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9)

-       유대인들: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악한 소문을 퍼뜨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핍박을 당하게 함. 그리스도인이 모인 회당을 사탄의 회당이라고 했다.

è  궁핍과 비방: 그들이 이미 견디고 있던 환란.

è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2:10)

1.     감옥: “마귀가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10)

-       바울 이래로 초기 교회 사도와 성도들은 수 많은 감옥에 갇혀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로 인해 로마의 감옥들은 찬송과 기도로 거룩하여졌고 그리스도의 임재로 밝아졌다.

2.     죽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10) 나를 위해 죽을 각오로 충성하라. -> 폴리캅이라는 초기 교회 가장 유명한 주교가 이 곳에서 순교. 사도 요한이 직접 임명한 서머나의 주교.

-       자기를 추적해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음식과 물을 대접한 뒤, 잠시 물러나 기도할 시간을 청하고 두 시간 가량 기도했다. 총독에게 끌려가서 케사르에게 제사를 드리고 맹세하라. 그러면 살려주겠다. 그리스도를 욕하라!”고 강요했지만 거부

-       내가 지난 86년간 그 분을 섬겼거늘 그분은 내게 잘못하신 일이 하나도 없소. 그런데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이요.”란 말을 마치고 화형에 처함.

-       화형장에서의 마지막 기도: “하나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여, 전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저를 그리스도의 잔에 동참하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셔서 순교자들의 대열에 두시니 감사합니다.”

l  그리스도인과 박해

-       산상수훈의 마지막 복: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가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5:11-12)

-       사도 바울: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2)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29) -> 사랑과 고난이 단짝이듯 믿음과 고난도 단짝이다.

-       본훼퍼: 고난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달 수 있는 배지다.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수는 없는 법이다.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

l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죽도록 충성하라.

-       충성하라 ( Be Sincere, Be faithful!!) 그리스어로 충성하라는 말은 믿음을 굳게 하라는 말이다. 믿음이 충만하게 하라!.

-       두려움과 믿음은 정반대. 공존할 수 없다.

( 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 5:36)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충성은 곧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가?

그 분은 처음이며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그 분은 그 분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환난 중에도 우리를 지키시며 마지막 날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실 분이다.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우리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그 분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에게 마음의 평정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말은 무엇인가?

죽음을 맞이하도록 우리가 믿음을 지킬 때에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이다.

폴 틸리히 벼랑 끝 신앙.

사람들은 벼랑 끝에 몰리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신앙인도 떨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절규한다. 그런데 그 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떨어져 보라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붙잡고 있는 선에서 떨어져 내리면 하나님이 받아 주신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선 그어놓고 내가 믿고 싶은 만큼만 믿겠다며 두 눈 감으면 그 것은 벼랑 끝에 선 신앙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내 몰았지만 실상 벼랑끝으로 내 몰린 것은 자신들이지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은 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서라도 나를 의지 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그 믿음을 드렸을 때에 비로서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여호와 이레 주께서 예비하신다는 말씀이다.

막다른 홍해에 발을 디딜 때에 비로서 홍해가 갈라진다. 그 말씀은 어린 양이고 어린 양은 곧 예수 그리스도. 내가 막다른 골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지할 때, 하나님의 예비하심. 그리스도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l  내가 네 환란을 안다. (2:9)

-       힘들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내 마음을 이해하는 분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마음을 털어놓을 분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님은 교회의 고난과 교회된 성도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아신다. 그 분은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의 고난이 아무리 깊고 커도 그 분은 다 아시고 또한 돌보아 주신다.

l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이다. (9)

-       그 분의 가치관은 보이는 물질적 세계가 아닌 우리의 영적인 세계를 보신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시고 모든 일에 풍족하다고 하신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다고 하신다.

-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9) 라고 하신다.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들을 가리켜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허용하시지 않는 한 어떤 고난도 우리를 삼킬 수 없다. 그 분은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난과 미래에 당할 환난도 아신다. 그러나 고난은 제한된 고난이고 지나갈 고난이고 약속이 보장된 고난이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10)

사탄이 어떤 고난을 가져와도 예수님은 더 넓은 날개 가운데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고난의 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시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보시는 순간, 모든 고난을 몰고오는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시고 우리에게 예비된 축복을 주신다.

 

마귀는 신자들을 밀까부듯 무너뜨리려고 고난을 가지고 우리에게 덤빈다. 때로 하나님도 그런 사탄을 용납하시고 허용하실 때가 있다. 기도에 깨어있지 않을 때, 성도에게 이런 고난이 온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하나님이 사탄의 공격을 허용하시는 의도는 우리 인간의 이해로 어려운 것이지만 그 중 한가지 말씀에 분명히 나와 있는 이유는 우리를 연단케 하시기 위해서다. 시험은 정금같이 단련된 믿음을 우리에게 준다.

 

l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이기는 자에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10-11)

-       그 분께서 주시는 구원은 영원한 것이고 영원히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고, 다시는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것이다.

-       에베소교회에게 주신 약속: 생명나무-잃어버렸던 생명의 나무를 공급.

-       서머나 교회: 생명의 관- 경주의 결승점. 승자에게 주시는 화관.

l  진실하면 고난을 받는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지키자. 믿음이 충만한 것이 곧 충성이다. Faithful. 죽기까지 믿음을 지키면 그가 우리를 보호하시고 벼랑 끝에서 예비한 복을 주신다. 그리고 이긴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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