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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로마서 12장 1-2절)

by 소리벼리 2021. 10. 24.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람은 누구나가 잘 살고 싶습니다. 가치있게, 의미있게 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소망입니다. 문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싶어서 짓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나가 죄 짓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문제는 죄를 이길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심했다가 무너지고, 마음 먹었다가 유혹이 오면 흔들리고, 계획을 세웠다가도 당장 급한 것 때문에 번번히 계획을 수정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 세상은 이미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의 통치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가치관으로 번번히 우리 안의 고귀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만듭니다.

 

세상 쫓아 살아보면, 어느 순간 양심도 사라지고,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말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옵니다.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60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학살할 때 가장 장애가 된 것이 무엇인줄 압니까? 바로 독일군의 양심이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습니까? 그것도 포로로 잡혀온 힘없는, 저항 할 수 없는 그런 자들을 군인이지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유대인 학살을 위해서 교묘히 생각해 낸것이 유대인들을 사람아닌 짐승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수천명씩 흩어져 있는 수용소에 화장실을 없애버렸습니다. 공식적으로 수용소마다 포로가 쓸 수 있는 화장실을 하나씩만 만들어 놓고 나머지는 다 없앴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급하니까 아무대나 싸게 됩니다. 스스로 모욕감을 느끼면서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이제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그저 주면 먹고 시키면 일하다가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무감각해지게 됩니다.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 병사들이 유대인들은 사람이 아니다. 저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죽이는 데에 양심의 거리낌을 갖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빅터 프랑크라는 유대인 의사가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으면서 썼던 <죽음의 수용소>라는 글을 읽어보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의 간증을 들어보게 됩니다. 그 안에서 자기 가족들이 죽어나가면서도, 또 매일 같이 자기 동료들이 불려나가 죽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들은 하루에 물 한컵을 배급받았다고 합니다. 대부분 밥을 먹으면서 그 물을 다 먹어 버리는데, 조금 먹고 나머지는 헝겁 조가리에 물을 조금 묻혀서 이빨을 닦습니다. 또 남겨진 조금의 물로, 깨어진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합니다. 언제 죽을 지 모르지만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대개 수용소에서도 아픈 사람, 정신적으로 연약한 사람들을 먼저 골라내어 처단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간답게,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끊임없이 사람이 인간다움을 포기하도록, 성도가 성도다움을 포기하도록 공격하고 미혹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결국 자신을 비하하게 되고 죄책감에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올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을 존귀하게 여깁니다. 끊임없이 성도답게 살려고 합니다. 문제와 허물과 단점이 많아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로서 자기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며 자존감과 가능성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시작은 자기의 가치를 발견하게 합니다. 자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생각도 없고 노력도 없이 산다면 누가 나를 돕겠습니까? 자신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으면 계시도 없고, 자기가 자신을 믿어주지 않으면 남도 나를 믿어 줄 수 없습니다. 복된 삶을 살려면 자신의 인간다움과 성도다움을 회복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로마서는 16장으로 되어 있는데 1-11장까지는 주로 교리의 문제를 다루고 12-16장은 실천편입니다.

이것을 이어주는 것이 12장 처음 시작인 '그러므로'입니다. 값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구원 받은 자 답게, 믿는 사람답게 살라는 것이 12장부터의 내용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구약시대는 제사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죄지은 인간이 하나님앞에 사죄의 은총을 입기위하여 살아있는 흠없는 가축을 제물로 삼아 성소의 제사장 앞에 끌고옵니다. 그리고는 그 짐승에게 안수하여 자신의 죄를 전가하고 그리고는 짐승을 도살합니다. 죽어지는 짐승을 보고 죄인은 마음을 아파하며 자신의 죄를 참회를 합니다. 죄지은 자신을 대신하여 피를 흘리며 죽어지는 짐승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용서해주시도록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게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귀한 것을 자기 대신 죽게함으로써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살고자 다짐하고 재물을 통해 자기 죄를 사해주심을 감사하며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양, 송아지-> 결코 값싼 제물이 아니다. 자신의, 가족의 귀중한 재산-> ? 죄지은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생제물이다.) 그 제물을 드리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귀함을 유지하는 것.

그런데 이러한 제물을 바치는 제사의 오랜 반복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제사 곧 예배행위가 형식화되고 동물제사 만능주의적인 사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즉 동물 희생제사만 드리면 사회에 나가서 웬만큼 죄를 지어도 또 제물로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습관화된 제사의식에 점점 젖어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나 말라기같은 선지자들은 그런 제사의 무용론과 심지어는 재물 폐지론을 내세우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바치고 죄짓고 제물바치고 죄짓고 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제 나는 지겨우니까 제발 그런 희생제물을 그만 가지고 오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나의 죄의 죽음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새로운 생명, 새로운 시작을 재확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 죽어지는 시간이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은혜 안에서 생명을 다시 찾는 시간입니다. 생명의 약속을 재확인 받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군대- 점호 후에 10-30분간의 TV시청시간-> 내가 사는 집, 사회, 소속감, 내가 돌아갈 곳을 기억) - 예배는 내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회복하는 시간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린다

이제 송아지나 어린 양이 아닌 너희들의 몸의 제사를 드려라고 말씀하신다.

몸으로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 좀 겁이 나고 흠칫한 말 같기도 하지만 흔히 교회에서 쓰는 용어로 말하면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헌신'이라는 의미가 '몸을 드리다'의 의미 아닙니까?

바울은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라고 했지요. 명한다라고 하지 않고 권한다고 했습니다. 네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헌신은 전적으로 나의 의지로 자원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헌신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생각하면서 우리를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ex) 기부와 헌신 (산 제물)

닭과 돼지가 어느날 사이좋게 길을 가다가 "굶어 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닭이 제안합니다. 돼지야 돼지야, 우리가 저 사람들을 돕자. 우리가 "햄과 에그"를 저 사람들에게 주자.

얼마나 좋은 제안입니까? 그런데 돼지가 반대합니다. "싫어, 넌 기부만 하면 돼지만 난 내 몸을 다 내 주어야 돼."

뭡니까? 닭은 자기가 낳는 알만 낳아주면 되지만 돼지는 자기를 죽여야 햄을 내어 줄 수 있습니다. 적어도 돼지는 헌신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산 제물"로 드리라. 기부는 자기의 어떤 것을 드리는 것이지만 헌신은 자기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헌신은, 나를 드리는 삶은 나의 부분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기쁨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 내가 주님의 기쁨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상은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가는 패턴이 있습니다. 그 시대마다 그것이 유행처럼 크고 강한 흐름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행에 민감합니다. "남들처럼, 남들만큼..." "보통사람들..." 한 때 오래 유행했던 땅 투기 열풍, 과외과열, 얼짱 몸짱, 성형 바람, 다이어트, 조기유학 유행 등 이런 패턴을 따라 사람들은 휘말려갑니다. 이게 공중권세를 잠은 악마의 속임수입니다. 내 의지가 주도하결국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통제합니다. 그 속에 들어있는 욕망은 알고보면 다 자기 자랑거리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자식자랑 집자랑 직장자랑, 학벌자랑,,.외모자랑,,.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남들 다 하는 것, 나만 하지 않고 빠지면, 뒤떨어진 사람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끼어 들게 됩니다. 시대를 거스려 하나님 의 뜻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연어의 삶)

시대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왕따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 권력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산다는 것은 정말 고독하고 힘든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세대의 풍조 패턴은 거대하고 강한 흐름입니다.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간다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생명이 있을 때만 물고기가 역류하여 올라가듯이 우리도 이 세대를 본받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자들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3.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다윗은 범죄한 후 자신의 마음을 깊이 살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그런 끔찍한 죄를 범한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속에 정한 마음이 없노라고 고백을 합니다. 깨끗한 마음이 자신의 마음속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은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 자신을 바라보니 자신은 정말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비로소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주여 나에게 깨끗한 마음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은 창조입니다.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깨끗한 마음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창조해 주셔야 가질 수 있습니다. 악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자신의 마음이 정직한 영으로 새로 나기를 탄원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룩한 꿈과 환상을 줍니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 하는 자는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보게 되고, 자신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꿈을 생각합니다. 물질과 자원과 인맥은 부족해도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고 그 꿈을 실천하려는 용기와 의지가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지력, 재력, 학력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로마를 이기고, 바리새인들을 이기고, 이방인들을 이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꿈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최고의 선물은 비전이고 꿈이고 그것을 이루어가는 믿음입니다. 그 선물을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한계를 극복하며 사는 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새롭게 변화된 마음을 가지라: 자기의 모습을 보지 말고 하나님 주신 꿈과 비전을 보십시오.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목사로 인정되는 무디 목사님은 가난으로 말미암아 초등학교 4학년 중퇴를 하였지만 100만명을 전도하고 무디 성경학교를 세워 교장이 되어 학생들에게 참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부흥회때 "자기 몸을 바친다는 일화") 조건에 연연하지 않고 최상의 가치를 추구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삶의 스타일을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고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불리한 것이 유리한 것이 됩니다 믿음이란 불리함 속에서 유리함을 보는 것입니다. 절망의 눈으로 보면 길이 없는 것 같아도 희망의 눈으로 보면 반드시 극복의 길이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분별력: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뜻인가? 꿈과 환상에만 매달려 있으면 분별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자기 자신안에만 머물러 있어도 분별력을 가질 수 없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실 때에 어느 날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이 예수님을 데리고 가려고 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3:35) '누가 내 형제 자매 내모친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형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이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14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바울이 말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말씀을 몇 군데 더 말씀드리면,

18:14-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6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살전5:16-18-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고, 구원받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기도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3대 삶: 헌신, 변화, 분별력.

가장 성공적인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변화된 마음을 가지고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서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없고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아인시타인인이 말했지요. 우리 인간은 자기 능력의 5%도 발휘하지 못하고 죽는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약해서 조금만 역풍이 불어도 뒤로 물러서기 때문에 무력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과 뜻과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보십시오. 우리도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는 사람도 주님께 최고의 선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최고의 선물은 바로 자신입니다. 그처럼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복된 존재로 살아가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다름아니라 정말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면 자기가 벌수 있는 모든 것을 벌어서 써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늘 부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없는 가운데서도 나누며 섬길 때에 우리는 정말 풍요롭고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참 부요함은 가진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는가에서 옵니다.

자기 한계를 넘어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만 위하여 사는 사람들,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은 미혹되어 살아갑니다. 가치없는 일에 매여, 그것으로 인해 자기를 망가뜨리고 자기 능력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면 하나님이 우리의 본질을 아시고, 달란트를 아시고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가게 합니다.

 

세 가지 중심 단어

내 인생은 지금 무엇에게 나 자신을 헌신하고 있는가?

나는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변화하고 있는가?

나는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