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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하나님께서 쓰시는 교회된 성도 (딤후 2:20-21)

by 소리벼리 2021. 1. 22.

하나님께서 쓰시는 교회된 성도 (딤후 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 2:20-21) 

 

  • 새해 첫 주 - 개척예배에 주신 말씀 

무화과 나무와 성전 척결 - 교회가 맺어야 할 열매는 성령의 열매, 삶의 열매, 입술의 열매, 회개에 합당한 열매, 화평의 열매 

  • 지난 주 - 교회의 지체된 성도의 정체성 - 조각목 

가시많고 악마디 많고, 바짝말라 수분이 없는...

그런데 그 조각목의 껍질을 벗기고, 금테,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테로 우리를 싸매사 성전의 도구와 기둥이 되게 하시는 주님

껍질을 벗기고 믿음의 테를 두르자! 

 

  • 이번 주 - 하나님께서 쓰시는 성도와 교회 

교회와 목회의 나침반과도 같은 말씀 

 

미국에 오게 된 배경 

신학대학원 4학년 때 - 결혼과 진로와 사역에 대해서, 여러가지 고민을 하면서 잠못이루고 있을 때, 마지막 수업과목 <교회 개혁의 역사> 시간에 방문한 봉쇄 수도원 

 

평생을 수도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안에서 수도하는 수도사들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적게는 10년, 많게는 20-30년간 그 곳에서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기를 수련하는 사람들.  

 

외부에서 방문해도 한 두 사람만 면담이 가능하고 그 안에서의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처음 인상 - 감옥과도 같이 무서웠다. 그리고 평생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 길이라고 여겨졌다. 왜 개신교 전도사와 목사님들이 이 곳에 와야만 하는지....

 

23년을 외부 출입없이 그 곳에서 수련하고 있다는 한 평신도 수도사와의 면담 - 목회자라고 특별히 긴 시간을 내어 주셨다. 

"저희들이 이상해 보이지요? 저희들도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기 위해서 개신교 목사님들의 설교를 많이 듣고 접합니다탁월한 목사님들이 많고 설교를 통해 목사님들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지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물론 가톨릭 신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목사님들이 넘어지는 소리- 대개는 돈과, 권력, 그리고 여자문제로...) 

저희는 그것이 그 분들이 기도가 부족하거나 성경을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훈련, 일상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지 않나...저희들은 평생 이곳에 있으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이 길이 모두가 가야할 길이라고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교회가 성도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배라면, 그 배가 바다 위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잃어버린 길을 찾는 등대같은 존재....아, 저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있구나 하면서 바른 길을 찾는다면 평생의 수도생활에 가장 큰 면류관이라 생각합니다." 

 

잔잔한 대화를 들으면서 내가 지고 있었던 모든 짐들, 결혼과 사역과, 먹고 사는 일들이 그 앞에서 정말 스르르 녹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일상에 대한 훈련이라는 말, 등대 같은 삶이라는 말이 마음 속에 깊이 박히고, 신앙생활의 긴 여정동안 내가 걸어온 길과 걸어야 할 길을 기준하는 하나의 나침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오늘 말씀도 내 인생의 나침반 같은 성경 구절이다. 

 

1. 큰 집에는 

큰 집은 어디인가? 하나님이 주인 되신 집이다. 하늘나라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세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된 교회이다. 

"그릇"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articles, 즉 재료이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금과 은도 가득하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릇 중에는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다고 말씀한다. 귀하고 천하게의 뜻은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혹은 천한 목적을 위해서라는 의미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당연히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금그릇이나 은그릇은 존귀한, 아주 고상한 목적을 위해,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에나, 아주 특별한 날에만 쓸 테이고, 나무그릇이나 흙으로 만든 질그릇은 하찮은 목적을 위해서, 아무 때나 쓰는 그릇이 되겠구나…. 이것이 상식적인 생각이고 또한 현실적인 해석이다. 

 

2.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반전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21절) 

  • If a man cleanses himself from the latter, he will be instrument for noble purposesmade holy, useful to the Master and prepared to do any good work.
  • 만약 사람이 자기 자신을 깨끗이 하면 그는 거룩하게 되어 고상한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고, 주인에게 유용하며, 어떤 선한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준비된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은 금 그릇, 은 그릇은 귀한 용도로 고상하게 쓰여지고,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은 하찮은 용도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금 그릇이나 은 그릇, 나무그릇이나 질그릇, 그 재료에 상관없이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 내가 내 재료가, 내 달란트가, 내 능력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능력 있고, 부유하고, 똑똑한 자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자를 쓰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마음의 중심으로 믿는가? 교회에서 너무나도 많이 들었던 말씀이지만 진심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가?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외모로 사람을 택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느니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실 때에도 독사의 자식들아 하시면서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 11:39)라고 말씀하십니다. 

 

  • 성경에서는 일관적으로 이렇게 말하는데, 이 말씀을 내 삶 속에서도,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진정으로 받아들이기가 왜 힘든가? 

 

사람들이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교회에서까지 바라고 행해왔던 교육은 언제나 “큰 그릇이 되게 하는 교육” “금 그릇이 되게 하기 위한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만큼 1등을 좋아하고 최고를 좋아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올림픽 나가서도 금메달 아니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최고가 되기 위해선 친구와도 경쟁해야 하고, 늘 남을 넘어서도록 교육받아 왔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남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교육은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조차 상투적인 말이지 실재 삶의 현장에서는 언제나 금그릇 되라고 직간접적인 강요를 당해 왔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남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교육은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조차 상투적인 말이지 실재 삶의 현장에서는 언제나 금그릇 되라고 직간접적인 강요를 당해 왔다. 

몇달 전 서울대 대학생이 아무리 공부해도 금수저를 달고 태어난 자들을 이길 수 없다 며 비관하며 자살한 사건은 우리 나라의 현실을 보여 준다. 

 
그런데 성경은 금그릇이 되어도 천히 쓰임받는 자가 될 수 있고 나무그릇, 질그릇이 되어도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다고 증거한다. 그릇이 좋다는 것은 능력이 많다는 것이다. 스펙이 좋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 재료가 좋다는 것이다. 금수저를 타고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라 할지라도 천한 목적을 위해 쓰임받는다는 것이다. 

 

한국의 50대 재벌 중 정상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는 가정- 1/3도 안된다. 다 혼외 자식, 이혼과 재혼.

잘 배운 검사, 판사, 기업인, 정치인- 정말 그들이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받고 있는 것일까? 

 

바울, 예수, 12제자- 세상적으로 실패한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장 귀하게 보신다. 

 

물론 기독교는 복의 종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으로 창조하시고 부르셨다. 그런데 그 복은 성경에서,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부자가 되며, 세상적으로 성공한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보다는 애굽이, 바벨론이, 로마가 훨씬 복있는 민족이었을 것이다. 

 

시편에 보면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 1:1-2)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8복을 이야기하실 때에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 (마 5:1-10)이 복 있는 자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런데 시편의 복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러한 복을 하나님 말씀하신 복이라고 뚜렷이 증거하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예수 믿었더니 병이 나았더라, 가난에서 해방되었더라. 큰 차를 몰게 되었더라. 그건 그냥 부스러기처럼 따라오는 부록이지 중심이 아니다. 

예수는 그런 것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 그런 것을 축복이라고 하면 복음을 질 나쁘게, 값싸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세상의 기업가들이나 자본자들이 더 잘 베풀수 있는지 모른다. 

 

축복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찾고자 하는, 회복하고자 하는 열매이다.  

죄로 물든 나의 심령, 사탄 마귀가 지배하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삶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이 씻고 하늘나라의 심령을 가지고 사는 것, 그것이 축복입니다. 

 

세상적인 복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잘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간증할지는 몰라도 내가 예수 믿어서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 그 분을 닮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분을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이름을 팔고 예수를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닮고 예수를 따르는 자입니다.  

 

나폴레옹 예화) 네 이름을 바꾸던가, 네 삶을 바꾸어라. 

 

2. 두 번째의 반전은 20절의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의 이런 것에 대한 해석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 If a man cleanses himself from the latter, he will be instrument for noble purposes, made holy, useful to the Master and prepared to do any good work.”  

영어로 표현하면 “from the latter” 가 의미하는 것이 16절에서부터 19절에 나타나는 망령되고 헛된 것을 말하고, 경건하지 아니한 것에서부터 떠나라는 것인지, 아니면 바로 전 절에서 나타나는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을 말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대부분의 해석은 내용상으로 16절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 우세했습니다. 그런데 문법상으로 보면 이런 것, 영어로 from the latter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지시체를 받습니다. 그러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하면 네게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에서부터 자신을 깨끗이 하면 거룩하게 되고,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쓰임 받을 것이고, 어떤 선한 일에 대해서도 준비할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성막에서 하나님은 성막 안의 언약궤를 비롯한 중요 부분을 반드시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명하십니다. 이 조각목은 바로 연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가시 많고 상처많고 쓸모없는 나무가 조각목입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또한 우리는 흙으로 빚어서 만든 하나님의 작품이다. 우리가 모두 질그릇이요 나무그릇이다. 조각목도 질그릇의 특징은 무엇인가? 모두 깨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조각목을 성막의 도구로 쓰실 때 거기에 금을 입히고 금 테를 둘러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입히워 사용하시듯, 질그릇에 보배를 담그시듯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보혈로서 영광스럽게 사용하신다.   

 

예1) 다윗은 초라한 나무그릇, 질그릇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찬양하며 자신을 깨끗이 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금으로, 은으로 덧입게 하셔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 사울은 금그릇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자 그의 좋은 체격, 인물, 자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버림받아 저주받은 왕이 되었다. 

 

2012년 담임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한 안수집사님이 교회를 나가시면서 정목사는 목회 못할 사람이다. 사람 상대하려면 때도 묻고, 흙두덩이에도 뒹구를 수 있어야 하는데, 너무 순진해서 사람 상대할 줄 모르고 성경은 알지 몰라도 현실을 너무 모른다. 

 

그떄 그 말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성도가 늘지 않고 떠나가는 성도들이 생길 때마다 이 말이 귓가를 맴돌면서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는 기술을 익힐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도 흙두덩이에서 뒹군 흔적이라도 좀 보일 수 있을까? 내가 너무 순진한가? 어리석은가?  고통스럽게 이 말이 가슴을 후벼 팔 때가 있었다. 

 

제작년에 10여년 만에 한국에 들어가 대학 친구들(일반대 나온 친구들)을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이 말을 이야기 했더니, 때도 묻고 사람 잘 상대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너가 성도라면 흙투성이면서 사람만 잘 다루는 목사를 존경하겠냐? 하며 오히려 저에게 질문했다. 그 친구를 통해 흔들리는 내 방향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트레이시제일교회는 세상사람들이 보는 제일 number 1 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귀히 쓰임받을 수 있는 number 1 교회가 되길 원한다. 금그릇, 은그릇은 하찮은 일 시키면 자존심 상해하고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무슨 일이든 내가 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자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깨끗한 그릇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금그릇, 은그릇을 만드는 교회가 아니라 조각목과 질그릇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그릇 되어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일이 어떤 일이든 맘껏 쓸 수 있는 그런 교회와 성도가 되길 원한다. 그런 소망을 가진 자마다 함께 찬양하자.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