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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은혜

by 소리벼리 2022. 2. 20.

은혜는 모든 것을 바꿉니다. (고린도전서 15장 9-10절) 

 

설교자로서 제일 힘을 주는 말 - 성도들에게 은혜 받았다. 

또한 설교자로서 가장 무기력하게 만드는 말 - 은혜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전혀 은혜와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성경은 은혜로운 환경 가운데 살아가지만 전혀 은혜롭지 못한 사람들을 소개한다. 

(1)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으되 내 것이 다 네것이니..."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 아버지와 함께 거하고 떠난 적도 없고, 성실하고, 검소하게 살았는데.... 그에게 은혜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2) 은혜의 집이라고 불리우는 베데스다 연못에 모인 사람들, 38년된 병자.... 왜 매일같이 은혜의 집에 모였는데 그들에게 은혜의 빛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까?

(3)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 광야 40년 동안 늘 원망과 불평

 

이와는 달리 오늘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다시 한 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현제의 모습.... 

과연 예수 믿은 후에 사도 바울은 은혜를 많이 받았는가? 

다메섹 도성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 사도바울의 모습 

 

(빌립보서 3장 5-6절)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는 고린도교회를 세운 개척자였지만 지금 고린도교인들은 서로 분열되어 사도 바울을 업신여기고 있다. 그의 사도권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그가 말이 어눌한 것을 비아냥 거리고, 더 나아가 그가 생긴 것을 가지고도 트집을 잡는다. 

 

예수를 알기 전 자기 잘 난 맛에 살던 바울은 이전에 자기가 자랑하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눈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리고 지금 자기를 비웃고 조롱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말하며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은혜는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것을 아는 것이다. 은혜는 내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경험한 것의 결과이다.  

신앙생활에서 은혜는 받는 것이 아니라 받을 때에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을 깨닫는 마음이고 지금도 받고 있음을, 살아가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받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받았고 또 받고 있는 그 은혜의 내용을 15장 1절부터 설명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서 선 것이라"  (1절) 

 

은혜는 곧 복된 소식, 복음이다. 우리가 이미 받았고 또 지금도 그 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2절) 

 

반대로 헛되이 믿는다면 - 구원에서 멀어진다. 구원과는 성관이 없다. 이 구원은 장차 올 구원이기도 하지만 오늘 내게 임한 현제의 구원이기도 하다. 

-> 은혜는 내게 전해진 그 복음의 말을 지금 여기 나의 삶에서 굳게 지키고 참되게 믿는 것이다. 

 

그 복음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3~4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8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 사도될 자격도 없고, 예수의 생전에 예수를 따르지도 믿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예수를 핍박하던 나같은 자에게까지 나타나신 주... 

 

너무나도 평범하게 들어왔던 그 복음의 내용이 내 삶의 중심에 박히도록 들어올 때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말한다. 

정말로 만삭되어 난 자 같은 나, 아무런 믿음의 자격도 조건도 없는 내가 예수 안에서 천국의 시민권을 받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유대인들이 들으면 신성모독이라 여기고 깜짝 놀랄 그런 친밀한 관계...) 

 

  •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예수가 달린 십자가, 그냥 예수가 날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면 잘 안 다가온다. 그 십자가는 누가 달려야 할 십자가인가? 내가 달려 있어야 할 십자가. 

 

- 군대에서의 경험, 군대에서 사고가 나서 영창은 아니고 군기교육, 총과 모든 개인용품을 넣은 군장을 매고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연병장을 돌고 자녁 먹은 다음 저녁 7시부터 시작해서 하루 A4로 10장씩 번성문을 써야 잘 수 있었는데 ...도저히 쓸 것이 없어서 첫날은 새벽 2시가 되어서 잠자리....

그 다음날 또 아침에 일어나서 연병장을 도는데 벌써부터 반성문 걱정.. 

그 날도 새벽 2시 

그런데 그렇게 반성문을 쓰다보니까 내가 어릴적 부터 저질러왔던 모든 행동들에서부터, 마음 속에 품었던 생각들, 행동으로 저질르진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 풀어왔던 수 많은 폭력과 살인과 음행과.... 

그리고 겉은 바른 척 하지만 속으로 풀어왔던 그릇된 말들, 욕들.... 

2주동안 난 정말로 내가 큰 죄인이었구나. 내가 이런 벌을 받아도 쓰구나... 

 

- 언젠가 TV에서 정치범으로 몰려 30년 가까이 억울하게 감옥할이 하고 나온 사람들의 인터뷰

억울해서 언떻게 사셨습니까? 

처음엔 억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 내 죄값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젠 별로 억울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와지고 정말 내 자신 앞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면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 억울할 일이 없다. 

내가 받는 모든 고난 앞에서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된다. 

 

장애우를 둔 부모, 갑자기 암에 걸린 성인, 사업에 갑자기 실패한 가장....처음엔 왜 나한테 이런 일이....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

 

예수의 십자가 - 로마 시대의 사형 방법, 지금은 금지된, 사형 방법 중에서 가장 참혹한 

벌거벗겨져서 숨이 멎을 때까지 고통을 받으며 또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 사람들로부터, 군병들로부터 방아야 하는 조롱과 멸시... 

 

십자가 상의 강도 - 

(누가복음 23장 41-42)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 은혜는 내가 받을 상보다 조금 더 받는 그런 것이 은혜가 아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데 오히려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 은혜는 어느날 사두었던 복권이 당첨되는 정도의 행운이 아니다. 나는 산 적도 없는 천국의 시민권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어진 것이다. 
  • 기대치도 않았는데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그런 상이 아니다. 나는 죽을 병에 걸려서 죽음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오히려 너에겐 영생이 주어졌다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삶이 되돌아 오는 것이다. 

-> 은혜는 갚을 수 없는 것이다. 은혜는 헤아릴 수로 셀 수 없는 것이다. 은혜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표현되어지지 않는다) 

 

  • 그런데 그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하루 하루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의 삶에 역사하는 부활이다. 

- 고린도전서 15장은 흔히 부활장이라 일컫는다. 

고전 15장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 겉은 살았으나 죽은 자 같은 자. 영이 죽은 자, 범죄한 아담 

              그리스도안에서 육신적으로 죽은 자의 이중의 의미 

               

 그리스도의 부활: 죽은 자의 부활이다. 살아있으나 정작 죽은 자 같은 자들의 주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난다. 은혜가 오는 순간 죽음은 사라진다. 

 가장 절망적일 때 그의 은혜가 생각난다. 

 

 (신 8:2-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면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은혜는 주가 베푸신 역사가 내 일상의 삶 중에서 고백되어 지는 것이다. 내 입술로 경험되어 지는 것이다. 비로서 내 눈에 보이는 것이다. 

 힘들 줄만 알았던 내 인생의 한 복판에서 내 모든 삶을 붙잡고 인도하시며 지금도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이 보이는 것이다. 경험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은혜를 입지 못하는 자 
  1. 자기가 십자가에 달릴 만한 죄인임을 부정하는 자 

죄인, 새리, 창기- 자기가 죄인임을 누구보다 아는 자 

바리새인, 종교지도자들-> 자기는 상 받을 자라고 생각하는 자. 

 

2. 남의 은혜를 바라보고 자신의 은혜를 비교하는 자ㅡ, 은혜의 당사자가 아닌 구경꾼들은 은혜를 누릴 수 없다.  

탕자의 형

포도원에서 일찍 나와서 일한 자 

다윗을 시기하는 사울 

 

남의 은혜를 바라보면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부당하게 느껴진다. 자기가 받은 은혜가 받을 자격 없는 자가 받은 은혜임에도 그 은혜가 남에게 임하면 시기와 질투가 임한다.  

남의 은혜는 큰데 자기가 받은 은혜는 작아보인다. 그런데 은혜는 비교 할 수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3. 내 삶이 상황이 주님을 가릴 때에 은혜는 보이질 않는다. 

마 14: 24: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7절: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절: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30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 지라.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나 그렇게 상황에 눌려 수렁에 빠져 있는 베드로를, 다윗을, 수많은 주님의 백성들을 주님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을 붙잡아 일으키신다. 부활의 능력으로 마른 뼈에 생기가 돋게 하신다. 

 

우리는 주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다. 

은혜가 보이질 않는가? 느껴지지 않는가? 너무 바빠 은혜를 바라볼 시간이 없는가? 

너무 무기력하여, 떄로는 우울하여 은혜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는가? 사는 이유도, 열정도, 그저 하루 하루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가만히 십자가 위에 벌거벗은 채로 달려있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내 모습을 가져다 보아라. 

어울리지 않는가? 그 자리에 있을 만하지 않는가? 그 자리에 있어도 싸지 않은가? 

그런데 그 자리에는 내가 없고 언제나 주님이 있다. 

비교와 상황과 현실이라는 삶에 눌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나, 매일 같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내가 그 죽음의 장소 십자가를 바라볼 떄면 거기엔 언제나 내가 없고, 주님만 계시다. 

그 분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내가 죽었다고, 넌 죽지 않을 것이라고, 널 살릴 것이라고, 반드시 내가 널 살릴 것이라고 그렇게 또 날 위해 죽고 계신다. 

 

그 뿐만 아니라 저주의 상징인 그 십자가가 이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보물이 되게 하신다. 목거리마다 귀거리마다 가장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호품이 되게 한다. 버림받은 것 같은 나의 존재를 그렇게 보석같은 존개가 되게 한다. 

 

당연히 거기에 달려 있어야 할 내 모습은 십자가와 전혀 상관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투정을 부리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보고도 내가 널 위해 죽었으니, 너의 모든 것을 담당했으니 이제 그만 죽고 일어나라 하신다. 

내가 널 위해 죽었거늘 너 지금 무엇하고 있냐 말씀하신다. 

은헤는 내 모든 우울함을 사라지게 한다. 내 억울한 모든 삶을 무용지물이 되게 한다. 

은혜는 내가 값을 매겼던 모든 부조리와 불평등과 부폐를 전혀 나와 상관이 없게 만든다. 

난 은혜받는 자다. 은혜는 나를 숨쉬게 한다. 

나의 지금의 내가 되게 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그냥 나를 보시고 구해주기로 작정해서 아들을 보내 십자가를 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목회자로 산 다는 것) 모든 삶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자리. 중보기도를 하고, 가물에 매마른 땅에 단비를 주기 위해서 매일, 매주 하나님과 얍복강 가에서 씨름해야 하는...

그러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삶의 무게도, 자녀들과 가정....견뎌야 하는....그래서 실재로 교제를 하다 보면 설교 단상에서 숨이 턱 막히는 경험을 하는 목사님들

혼자 우울증에 빠져 있는 목사님들, 삶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무언가에게 중독되어 있는 목사님들...어렵게 자신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나도 그 분들 가운데 살아가면서 같이 울고, 같이 나의 작음을, 초라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때.... 그 무게를 가지고 다시 예배당에 나와 그냥 아는 찬양 한 곡씩....부르다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또 그 분이 날 보고 계신다. 

괜찮다고...너의 기도를 듣고 있다고, 한 걸음만 더 함께 나아가자고....

내 지난 인생, 성도들과 함께 걸어왔던 그 순간 순간들을 보여주신다. 

은혜는 언제나 내 삶의 무게를 이긴다. 은혜만 회복되면 삶은 무겁지 않다.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는 것이 무게가 아니라 즐거움이 된다. 

 

내게 경험된 그 은혜가 우리 성도 여러분께도 경험되어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