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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예수, 쉼을 주시다. (마 11:28-29)

by 소리벼리 2022. 7. 24.

예수, 쉼을 주시다. (마 11:28-29) 

 

최근 유대교 출신의 기독교 개종자들에 의해서 바울이라든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연구가 새롭게 조명 

우리가 지나쳐버린 성서 안의 단어나 초대교회의 사회에 새롭게 연구가 되고 조명이 되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신약성경에 있어서의 "열심"이라는 단어 

 

[롬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갈 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이 때 쓰여진 "열심"이라는 단어 - 단지 사도바울이나 성도들의 개인적인 성격이라고 해석 

그런데 유대교에 정통한 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진 열심이라는 단어는 단지 개인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바리새파의 한 그룹의 특징을 나타내는 일종의 행동강령이었다. (툼 라이트와 같은 학자들...) 

 

  • 바리새파의 두 그룹 

 1) 힐렐: 온건파, 공생공존, 로마 및 이방인의 치리 인정. 가말리엘, 방임주의. 기독교 운동이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라면 반대하지  말고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2) 샴마이: 과격파, 열심당. 율법 자체가 이방인의 치리를 인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열심은 단지 기도나 경건에 대한 열심이 아니라 칼을 휘둘러서 드러내는 태도이다.  

이교도들을 단번에 패배시키거나 변절한 유대인들을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멸절시킬 혁명에 대한 열심 

몸에 로마인들이나 로마인들에게 협조하는 새리나 정치인들을 암살하기 위한 단도를 지니고 다닌 사람들, 

 그들의 목표는 이스라엘의 재건, 로마에서 파견된 헤롯이 차지하고 있는 성전을 탈환하는 것.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 때니이까?" 

 

 예수 열 두 제자들의 대다수도 이 열심당원으로 여겨짐. (열심당원 시몬, 우뢰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 형제, 예수님을 잡아가고자 했던 마고의 귀를 베었던 베드로, 그리고 가룟 유다 (영문 이름 Juda Iscariot- 사카리라는 단도의 의미- 열심당원을 상징) 

그들은 단지 갈릴리 출신의 촌사람 어부들이 아니라 로마의 압제하에 있는 나라를 위해 칼을 지니고 다녔던 목적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열심있는 행동파 사람들

 

그런데 예수는 이러한 열심당원들을, 또한 열심당원의 행동대원 격이었던 바울을 만나 그들의 열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그들의 관심은 항상 이스라엘의 재건, 성전의 탈환-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면서도 그들이 꿈꾸었던 완성된 세계) 

그런데 그 중심에서 십자가에 달려 너무도 무력하게 죽어간 예수.... 

 

이런 입장에서 마태복음 11장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 어떤 수고이고 어떤 짐인가? 

나라를 위한, 교회를 위한 열심, 때론 반대파를 숙청하고 목적에 맞지 않는 것들은 제거하는...

그런데 그렇기에는 너무나도 큰 벽. 로마라는 벽, 헤롯이라는 벽, 사람들의 민심을 얻지 못하는 ... 

 

마태복음 11장 - 요한-> 예수께로 관심이 옮겨 감. 

왜?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오실 그 이 - 메시야,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왕으로 오시는 이, 선지자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이끌 인도자. 리더. 

 

그들이 힘썼던 열심, 열정 - 외부를 바꾸기 위한 열심. 

나라를 바꾸고 성전의 주인을 바꾸고, 사람들의 의식을 개혁해서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열심..

 

그들에게 하신 말씀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무엇을 위한 수고인가? 당시 사회를 보면 나라를 위한 수고, 민족의 부흥을 위한 수고 

그것을 위해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통한 새로운 부흥, 민족의 부흥을 꿈 꾸었던 그런 수고와 짐. 

-> 어떻게 보면 애국심으로, 사회 운동으로 볼 수 있는 개인적 수고와 짐이 아닌 보다 넓은 목표가 있는 수고와 열심이다. 

 

2 나의 멍에를 메라 

멍에는 소나 나귀같은 동물에게 짐을 지거나 밭을 갈기 위해 메어 놓은 장치입니다. 그런데 그 멍에는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작동을 합니다. 주인이 뒤에서 움직여야 작동하는 것이 멍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멍에를 메라는 말씀은 주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멍에를 매는 것은 주인과 파트너가 되는 것입니다.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주님과 멍에를 메는 것은 주님의 통치를 받으며 주님이 가시는 대로 가고, 주님이 하시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 

 

악한 자의 멍에를 매면 나도 악한 자가 됩니다. 무지한 자의 멍에를 메면 일을 그르치게 되고, 오직 주님의 멍에를 맨 자만이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온유와 겸손 

이 말씀은 두가지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멍에를 주시는 분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주시는 멍에는 어려운 것이 아니고 쉽고 가볍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2-3) 

 

주님을 믿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는 환경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실제로 함께 멍에를 메고 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멍에를 메지 않고 내가 하려고 하면 그렇습니다. 일하는 것도 , 공부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 봉사하는 것도, 예배드리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양들 섬기는 일도, 제자양성 하는 것도, 세계선교 하는 일들을 내가 하려면 무거운 짐이 되지만 주님과 함께 하면 모든 것이 은혜가 되고 오히려 힘이 됩니다.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십니다. 바른 신앙생활은 쉽고 가벼운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것, 그것이 곧 우리에게 주어진 멍에라는 것입니다. 내게 배우라. 무엇을 배웁니까? 그 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멍에- 신앙인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하는 멍에- 그것이 뭐냐? 결국은 예수님의 성품, 온유와 겸손.

 

온유란 단지 착한 심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착한 심성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온유는 들판에서 내 맘껏 다니던 야생마가 주인에게 길들어지는 것이다. 

 

길들어진 야생마가 바로 온유함의 뜻이다. 무엇에 길들여져야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진 자가 온유한 자다. 

 

성경에서 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자라로 칭함을 받은 자가 누구인가?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

 

왜 그가 가장 온유한 자인가? 바로 말씀으로 훈련된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자기를 꺾고 말씀을 따르는 자요, 말씀 앞에 자신을 굴복하는 자이다. 

온유한 자의 반대를 성경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 또한 자기 의로 충만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한다.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누가 온유한 자인가?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귀를 기울이는 자, 바로 겸손한 자이다. 길들어지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자기를 내세우는 자는 

결코 길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겸손과 온유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삶으로 이 온유함과 겸손을 보여 주셨다.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겸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온유)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온유와 겸손의 정점이 바로 십자가이다. 

 

[왕상 19:9-10]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어느 때인가?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 선지자 앗세라 선지자를 죽이고 무언가 상황이, 나라가, 이스라엘이 변할 줄로 기대했다가 환경은 하나도 바뀌지 않고 오히려 이세벨이 위협하며 달려들자 굴 속에 들어가 있는 엘리야

 

열심이 유별하오니- 마치 제자들처럼, 바울처럼....

                 - 다른 사람의 존재는 보이지 않고 오직 굴 속에 숨겨져 있는 자신의 모습만.... 

                 

그 때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 

로뎀나무 가에서 그를 쉬게 한 후에

호렙산으로 인도해서 그곳에서 그와 교제하시는 장면. 

 

즉 말씀과 쉼이 있는 삶. 

 

창조) 혼돈과 공허->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 전의 세계)  그곳에 말씀이 임하여 빛이 있으라 하면서 창조의 사역.

창조의 사역은 곧 말씀의 사역-> 그 열매로, 결과로 얻어지는 것-> 보시기 좋았더라. 쉼과 안식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 여전히 끝없는 수고에도 불구하고 짐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무거워지고 있는 삶을 살진 않는가?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의 멍에를 메고 있는가? 주님이 당신을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내가 원하는 데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두 왕 (그들이 지금도 꿈꾸고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대상이 되는 두 왕) 

다윗과 솔로몬 

: 다윗하면 떠 오르는 구절 - 시편 23편 "여호와는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초장에 뉘이시고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가 목자된 삶 - 푸른초장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쉴 만한 물가 (은혜와 평강이 있는 나라) 

 

주님이 목자 되신 삶은 쉼이 있는 삶이다. 열매가 있는 삶이다. 그 열매는 외부환경과 상황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온유와 겸손의 열매이다. 

 

솔로몬 - 전도서 하면 떠오르는 구절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가 추구했던 삶 - 더 가지고, 더 배우고, 더 올라가고자 했던 왕

다윗보다 더 누리고 더 가졌던 왕- 그런데 그러한 삶의 끝에 그가 고백한 것 -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그리고 나서 결론적으로 잠언과 전도서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말 -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청년의 때, 네 인생의 곤고함이 임하기전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어떤 땅인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이다. 주님이 약속하시고 통치하시는 땅이다. 

그 땅에 사는 사람은 복되다. 주님이 경영하시는 땅이 바로 천국이다. 

 

무더운 여름의 계절 - 누구든지 참 쉼을 기대하고 산으로, 바다로, 해외로 쉼을 향해 떠나고자 한다. 

자신들의 삶의 열심에 대한 변화와 열매를 꿈꾼다. 

그런데 삶은 언제나 고되고 힘들다. 잠깐 쉬어도 또 피곤함이 몰려온다. 

 

우리말에 있어서 쉼은 숨에서 나온 말이다.

편히 숨 쉴 수 있는 것이 곧 쉼이다. 숨실 수 없게 만드는 삶이 고된 삶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숨은, 호흡은 곧 기도하는 삶이다. 그래서 쉼은 기도를 통해 다가온다. 그래서 옛부터 많은 기독자들은 참 쉼을 위해 기도했고, 인생이 혼돈하고 공허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 질서와 안식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했다. 

 

쉼이 없는 우리 삶 속에 참 쉼을 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여러분들의 삶에 참 호흡과 참 질서, 그리고 안식을 줄 수 있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