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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예수, 빛이 세상에 오다 (요 1:9-14)

by 소리벼리 2022. 1. 9.

예수, 빛이 세상에 오다 (요 1:9-14) 

 

[요 1:9-14]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마태: 아브라함과 다윗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아브라함에서부터

누가: 그 족보를 아담으로까지 거슬러 감

요한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창세기와 비교해서 시작 

창세기의 태초 - 모든 것의 시작 

요한복음의 태초 - 시작이 없는 영원한 근원. 

 

말씀이 있었다. - 하나님은 영이다. 영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인간에게 감각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에게 감각되는 표현 방법- 말씀, 말씀으로 들려지는, 말씀으로 경험되는,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와 뜻이 뜻이 표현되는 방법 - 말씀 - 하나님의 자기 표현은 말씀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곧 예수이다.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존재는 오직 예수를 통해 펼쳐진다. 영이신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예수를 통해 이루어가신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은 표현되지 않는다

성탄 이전에 그 예수는 말씀으로 나타나셨고 그리고 성탄은 통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 거했다는 것은 임마누엘 -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표현이다.  

 

성탄은 말씀이신 예수가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이다. 

 

[요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 예수가 인간에게 임한 결과가 생명과 빛으로 표현되어 진다. 

 

말씀이 임하기 전 세상 

  • [창 1:2-3]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혼돈- 무질서 /공허 - 없음 (공존할 수 없는 두 단어: 혼돈- 엉망진창, 많이 가진 것 같은데 하나도 없는 것 Vs 아무 것도 없는 것)   

흑암의 깊음- 블랙홀 - 무엇이든지 그 안으로 들어가면 Kaos와 Nothing이 되어 버리는 것 - 하나님의 영, 말씀이 존재하지 않는 모든 곳의 현상이다.  

 

빛이 있으라- 무질서한 삶에 질서가 잡힌다. 무의미한 삶에 의미가 생긴다.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삶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가지를 내듯이 열매를 낸다. 

이것이 빛과 생명으로 표현된다. 

 

  • (요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런데 혼돈과 공허에 익숙해져 있는 삶은 이 말씀, 이 말씀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고통이다. 

창조- 빛과 어둠을, 하늘과 땅을, 땅과 바다를 나누고, 그 곳에 거하게 하는 것 - 그 결과 주어지는 것 - 안식, 샬롬!  

엉망진창으로 살던 인생은 질서를 반가와하지 않는다. 

노숙자에게 깨끗한 집을 주어도 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빛이 와도 어둠은 반기지 않는다. 왜? 어둠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무질서에 익숙한 인생은 질서를 반기지 않는다. 질서에는 규칙이 필요하고, 규칙에는 의무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 질서를 통해서 참자유가 주어지는데 혼돈과 공허에 익숙한 인생은 질서 없는 자유, 혼돈이 자유인 줄 안다. 

 

질서와 안정, 의미있는 삶은 빛이라는 말씀이 내게 와서 역사하여 얻는 결과이지만 그 과정은 고통이고 갈등의 연속이다.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이 혼돈과 공허의 삶- 있어도 내 것이 아니고 일해도 자기에게 남는 것이 없다. 

그런데 그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40여년의 시간이 걸린다. 40이라는 숫자는 육신의 한계의 시간이다. 

내가 죽는 시간이다. 

어둠에 빛이 비추기가 그렇게 어렵다. 어둠이 빛을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어렵다. 

 

혼돈과 공허로 가득찬 삶에 예수가, 말씀이, 빛으로서 왔는데 어둠이 반기지 않는다. 오히려 빛을 몰아내고 죽이려 한다. 

  • 성탄이 되어 예수가 오셨는데 교회 안의 제사장들이 동방박사의 전해주는 소식에도 무감각하다. 
  • 열처녀 처럼 신랑이 오신다는 소리, 메시야가 오신다는 소리를 들으면 뛰어 나가 맞이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 삶이 달라질까, 자기 위치가 변할까 두려워하며 그를 죽이는데 앞장을 선다. 
  •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방문을 걸어잠그고 두려움 가운데 살고 있다. 
  • 예수는 부활해서 하늘엔 난리가 나고 오히려 로마의 정부와 속물이 된 제사장들은 난리가 소동이 났는데 제자들은 하루 하루의 삶을 위해 물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다시 물고기 낚는 어부가 되고자 한다. 

하늘엔 난리가 나고 잔치가 이루어 지는데 세상에 빠져 있는 자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났는지 무감각하다. 

 

이러한 안타까움이 9-11절까지 계속 나열된다. 

[요 1:9-11]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의 말씀, 예수의 생명, 예수의 빛으로 지음받고 그로 말미암아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 다시금 혼돈과 공허 속에,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질서와 안식을, 열매와 생명을 주려는 예수를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접지 아니한다. 

영접지 아니한다는 표현은 다른 말로 하면 거절했다는 것이다. 걷어 찼다는 것이다. 필요없다고 내팽겨쳤다는 것이다. 

왜?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오늘의 삶,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자기만 있었기 때문

생명이 뭔지도 빛이 뭔지도, 열매가 뭔지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중에....

 

  •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런데 예수를 영접하는 자,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 이것이 당연한데도 당연치 못한 시대에 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오직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의 자녀는 독생자 예수다. 예수처럼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와 같은 권세를 주셨다. 권리를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 삼아 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셨다. 

 

  • 요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란 무엇일까?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자녀로서 누리고 싶은 권세는 무엇인가? 

세상의 어떤 권세보다 높은 권세. 권위..

다시 마태복음 20장 -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께 구하고자 한 하나는 주의 우편에,하나는 좌편에 앉게하고 싶은 그 권세의 자리. 

(마 20:22)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 권세의 자리가 무엇인지, 그 잔이 무엇인지 주님이 보여주신 그 권세, 그 잔의 정체

 

  •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권세, 정체- 십자가 지는 권세, 예수 따르는 삶, 예수 닮는 삶

 

요 21:15-23절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치라. 

- 목자로서의 사명을 주시는 장면- 사람낚는 어부의 완성. 

 

그런데 이 장면에서 인상적인 장면 

[요 21:18-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네가 하고 싶은 데로, 네 열심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삶으로 가라. 

 

결론 

  • 성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험되는 말씀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 
  • 그 말씀이 하는 일은 혼돈과 공허로 점철된 우리 삶을 질서와 의미의 세계로 이끄는 삶이다. 그리고 그것의 성취가 안식이다. 
  • 그런데 혼돈과 공허에 익숙한 인생은 그 말씀의 역사가 고통스럽다. 그래서 어둠은 빛을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 한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혼돈과 공허가 창조의 질서와 평강의 상태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는 고통의 연단이 필요하다. 
  • 때론 혼돈과 공허로 뭉쳐있던 것들이 나뉘어져야 할 때도 있다. 그리고 나뉘어진 세계에 다시 위치 시키신다. 
  • 그러나 그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진다
  • 그 권세는 세상적으로 보면 십자가 지는 고통의 삶이고, 낮아지는 삶이고, 때론 핍박받고 외면받는 삶일지 모르지만 그 삶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 주님을 닮는다. 내가 선택하고 구하는 삶이 아닌 남이 내게 띠 띠우고 때론 원하지 않는 장소에 있게 하신다. 그런데 내가 원하지 않는 그 곳에 다름 아닌 주님이 계신다면 그곳이 곧 하늘 나라이다. 

 

  • 우리는 지금 다시 혼돈과 공허의 상태로 성탄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 곳에 빛이 임하면 곧 혼돈과 공허는 끝이 난다. 질서와 안정이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창조이다. 
  • 혼돈과 공허가 질서를 갖으려면 부득이하게 고통의 시간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가 깨어지고 수술되는 시간, 광야 40년, 그리고 여리고를 깨뜨려야 한다. 
  • 3년동안 열심히 주를 따랐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지금껏 네 맘대로 갔다. 이제부터는 내가 널 사용할 것이라는 것이다. 모세에게처럼, 여호수아에게 처럼... 우린 주님 앞에서 열심히 했는데 주님은 여전히 네 맘대로 살았다고 하실 때가 있다. 마지막까지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주님께 진실해야 할 이유이다. 
  • 힘들지만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빛을 사모하자.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어둠을 주님의 빛 안에 내어 놓자. 그리고 우리에게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질서, 평안, 기쁨을 구하자. 이것이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맞이하는 성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