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속히 내려오라 (눅 19:1-10절)

by 소리벼리 2022. 2. 26.

속히 내려오라  (눅 19:1-10절)

 

 

삭개오의 이야기 

삭개오 - 비유가 아닌 실재사건으로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탕자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더불어 깊은 교훈을 담고 있는 이야기 

 

1. 배경 - 18장의 다섯가지 비유

1) 1절: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 7절: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간절히 부르짖는 자) 

2) 9절: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바리새인) 에게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한 자 - 겸손은 자기 존재를 아는 자)  

바리새인 - 난 저들과 다릅니다. 서서 따로 기도하는 자,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 

세리 -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18:14)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3) 15절: 어린아기 -제자들이 꾸짖거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연약하고 부족한 자) 

4) 18절: 어떤 관리 (다른 복음서에서는 부자 청년)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0절: 계명을 지키는 자 (그런데 그 계명에서 1-5계명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계명을 들지 않고 6-10계명인 사람들 사이에서의 계명...

내가 다 지켰나이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그가 큰 부자이므로 심히 근심하더라. 

고린도 전서 13장 3절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없는 의는 외식이요, 교만함이요, 죄이다.

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 구걸하는 맹인 거지 -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2. 삭개오의 이야기

18장의 모든 비유에 해답으로 제시한 사람이 바로 삭개오이다! 

1절- 여리고라는 장소적 배경 

2절 - 삭개오 (의로운 자, 순결한 자라는 뜻 ), 세리장 (죄인 vs 18장에 나타난 겸손한 자) 부자(사랑이 없는 자, 천국과는 먼자) 

3절 - 키가 작은 자 (보통키가 작지 않고는 이런 표현 쓰지 않는다), 사회적, 경제적 성공과 더불어 쌓여있는 내면의 깊은 열등감, 수치심

         우리나라에서도 특별히 키 작은 아이들이 겪는 고충 - 땅꼬마, 난쟁이, 반토막.... 의로운 자라고 이름 붙여준 그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자가 되었을 때에 쌓인 내면의 상처 - 키가 작다.  

         또 한편으로는 앞의 장 18장 15절에 나오는 "어린아기와 같은 자"의 양면적 표현         

 

죄인과 의인이 혼합되어 있는 자.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자,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동과 그의 선택이 흥미 진진해진다. 

 

1) 여리고성 - 여호수아때, 철의 요새 

              - 가나안 입성의 관문, 홍해-광야-가나안의 여정에서 가나안의 관문

              - 구원을 넘어서 성화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가장 큰 장벽 - 철저히 숨겨지고 닫혀진 나의 자아의 성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장면 - 여호수아 6장   

              어떻게? 침묵과 순종  마지막 7일째 - 양각나팔불고 소리치며 - 예배하며 

              다시는 여리고성을 짓지 말라...하지만 바알과 앗세라를 국교화시키려 했던 아합왕 때 여리고성 다시 지음...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지고 우상숭배하게 되면 짓게 되는 성 - 여리고성, 굳게 닫힌 내 자아의 성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 역시 여리고라는 배경을 두고 쓰고 있다. 자아, 자기 의로 가득찬 사람들의 성. 

              

2)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4절) -> 예전에 뽕나무로 번역되던 나무 - 돌무화과 나무 

그의 간절함과 열심이 드러나는 구절. 그는 자신의 장애에 주저앉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앞에서고 앞에서도 안되니까 올라갔다. 

올라감이 없으면 그 은혜가 무언지 깨닫지 못한다. 올라가 본 자 만이 의로움이 무엇인지, 율법이 무엇인지, 죄가 얼마나 무엇인지 깨닫는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깨닫지 못한다. 구약이 없으면 신약의 은혜를 알지 못한다. 세례요한이 없으면 주의 사역이 시작하지 못한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

올라감의 신앙이란 의로움을 향한 몸부림, 하나님을 향한 갈망, 죄를 이기려는 싸움이다. 

의로운 자가 되라고 삭개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사람들의 손가락질 받는 자리에 살면서 이젠 변화하고 싶다고 하나님을 향해 부르짓는 시간 

혈루증 앓던 여인이 군중들의 무리를 뚫고 예수님 옷가에 손을 대는 행동하는 신앙

호렙산에서 40일 40야를 금식하며 하나님을 대면하는 기간이요, 동시에 광야에서 사탄을 맞닥뜨려 전쟁을 치루는 기간이다.

올라감의 신앙이란 하늘을 향하여 갈급해하고 부르짖고, 갈망하는 신앙이요, 내 내면의 열등감과 영혼의 공허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이다. 

 

삭개오에 대한 많은 설교들이 이 나무에 올라가는 그의 열심, 그의 간절함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있어서 파격적인 변화는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3)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5절) 

주님을 보기 위해, 주님 눈에 띄기 위해 올라간 삭개오에게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 하신다. 그냥 내려오라는 것이 아니라 속히 내려오라는 것이다. 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삭개오에게 무엇이라 말했겠는가? 

나무 위로 올라간 아이같은 자에게 "조심히 내려오라. 천천히 내려오라," 이것이 상식이지 않은가? 

그런데 성경의 구절이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면 거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 속히 내려오라는 주님의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사람들의 기뻐하며 소란스러워할 떄 "즉시 재촉하" 물건너편으로 제자들을 가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다.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고 하신다. 왜? 

그 위에 머물러 있으면 갈급함이 곧 교만함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 서 있으면 남들이 다 낮아 보이고, 주님 마져도 내려다 보기 때문이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 밑에 있다. 남는 것은 자기의 의로움 뿐이다. 

신앙의 열심과 교만함은 순간이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부르짖는 과부의 기도는 갈급함이고 열심있는 신앙이지만 부르짖는 것 자체가 자기 의가 되어 "남들은 왜 부르짖지 않지? 기도는 부르짖어야 하는 거야.."하고 생각하는 순간 간절함은 남을 판단하고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교만함이 된다. 어떤 의로운 행동이라도 자기 만족과 남들을 향한 판단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 열심은 곧 교만함이 된다. 

 

부자 청년이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따라 계명을 지키는 것은 훌륭한 것이다. 칭찬받을 일이다. 

그런데도 그는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 평안이 없다. 자기를 채우는 데는 자신있다. 

올라가는 데는 자신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자신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것 다 나누어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에는 근심하여 주님을 떠난다. 자기의 것을 나누어주고 주님과 함께 하지 할 때는 나서지 못한다. 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채우는 열심, 칭찬받는 열심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자기를 비우는 열심, 주님만 나타내도록 사는 삶에는 익숙하지도 소망하지도 않았다.  

 

자기를 높이며 기도했던 바리새인은 거절을 당하고 자기를 낮추는 세리에게 주님은 이가 의롭다 했다. 의롭다고 인정받은 세리는 자기 집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세리를 보며 주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신다. 

 

내려와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여 하겠다는 것은 부자 청년에게 하신 요청과 같은 말씀이다. 

네 교만함에서 내려오면, 너를 채우고 높이고 돋보이게 하고 인정받으려 하는 것에서 내려와서 나와 함께 거하자 

이 요청 안에는 부자청년에게 하신 네가 그동안 쌓아놓은 너의 방법, 너의 소유를 다 나누어주고 나와 함께 하자하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삭개오는 이 말씀을 듣고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6절) 주님을 영접한다,

그리고 주님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가 빼앗은 자에게 돌려준다. 

부자청년에게 요구했던 것을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내려놓고 주님을 따른다. 

 

신앙은 올라감과 내려옴의 신앙의 반복이다. 

올라가는 열심이 없으면 주님을 보지 못한다. 무리를 헤쳐 그 분을 만져야 한다. 

나무에라도 올라가 그 분을 보아야 한다. 

항상 앞서서 먼저하던 베드로가 거리를 두고 주님을 멀리서 따를 때에 세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며 저주하는 떨어진 신자가 된다. 

올라가는 신앙은 신앙의 얕은 물 가에서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이다. 

 

그런데 그 열심이 나를 망가뜨리게 해선 안된다. 

그 열심이 어느덧 자기 만족이 되고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자기를 높이는 수단이 되면 그 신앙은 이미 바라새인 신앙이 되는 것이다. 

 

올라감이 있으면 내려옴이 있어야 한다. 

아니 내려 올 때에 진정한 은혜를 발견한다. 

올라가는 신앙이 주님을 보기 위한 신앙이라면 내려오는 신앙은 주님과 함께 거하기 위한 신앙이다. 

예전에 맹인목사였던 안요한 목사님이 쓴 간증과도 같은 신앙의 책 - 낮은 데로 임하소서 

제 인생 가장 첫 번째로 읽었던 신앙서적이다. 

 

의를 넘어선 십자가의 은혜, 자기 의가 아닌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구원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오신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도 남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아니 난 남들보다 더 큰 죄인임을 마음 중심으로 고백하고 주님께 가식적인 겸손함이 아닌 자기 존재 중심의 겸손함으로 어린아이처럼 주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3. 결론 - 적용 

1) 목사의 사역 - 함께 할 수 없는 둘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 

                   - 그 안의 성령을 발견하고 신뢰하여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감당하게 하는 것 

                   - 목회는 성도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목회는 올라가 있는 성도를 내려오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내려와야 주님이 머물고 성도들과 함께 어울리고 공동체가 된다. 내려오지 못하면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 

                   

2) 그 사역을 위해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 

내가 미국에서 기독교 영성을 공부했던 (GTU)라고 하는 학교 

개신교 네개 교단과 가톨릭 4개의 수도 단체가 각각의 학교를 가지고 있으면서 연합하여 구성된 학교. 모든 교파의 학교와 학생과 교수를 만나고 보고 체험할 수 있었던 곳. 

세계에서 이렇게 체험할 수 있는 학교가 또 있을까? 

 

  • 기독교 영성 - 하나님을 체험하는 방법과 사람, 역사를 배우는 것. 

 

성도들의 지평을 넓히는 것, 분별력 있게 하는 것 

넓은 그리스도의 모습, 넓은 기독교의 역사를 체험케 하는 것. 

나는 집안이 모두 성결교 가족이고 성결교 목회자이고 또한 성결교 신학과 교리가 자랑스럽지만 우리 교인이 성결교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트레이시제일교회 교인으로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설교를 듣던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된 말씀을 분별하며 스스로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본받고 예수를 닮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나의 신학과 영성을 능가해서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분별하고 열매맺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내 사람, 내 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교회.... 

 

  • 한 신앙서적을 통해 접하게 된 예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명 설교가 찰스 스펄전과 조셉파커 목사 

두 설교가의 설교를 듣기 위해 미국에서부터 영국까지 찾아간 목사 

 피터 파커가 시무하는 City Temple교회 - 이천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있고 아름다운 예배당 

 열성적인 설교- 예배가 끝나면서 하나같이 "What a great Preacher!" 

 

찰스 스펄전 - 설교를 듣고 나오는데 교회 건물도 성도들도 다 잊게만들고 설교에 빠져듦. 

나오면서 사람들이 하는 소리 

"What a great Jesus Christ!"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들어오며 자랐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름을 남기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남기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