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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생업이 같으므로 (사도행전 18장 1-4절)

by 소리벼리 2022. 8. 7.

생업이 같으므로 (사도행전 18장 1-4절) 

 

[행 18:1-행 18:4]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서신서에서 바울의 선교적 삶을 추적하다보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헌신된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 

 

성경에 대 여섯 차례 이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대개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아굴라 보다 먼저 나올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이름의 순서도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부부의 이름이 등장할 경우 남편의 이름을 먼저 쓰는 것이 상례이고 동등한 성별일 경우 주도자의 이름을 먼저 쓰는 것도 원칙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나바와 사울, 혹은 바나바와 바울의 이름의 순서를 보며 사역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살펴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예외적으로 많이 등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브리스길라가 주님 안에서 더 헌신된 자였다는 것을 말한다고도 하지만 그들의 이름이 순서를 번갈아 쓰고 있기는 하지만 항상 부부로서 같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데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들은 서로 협력하며 복음을 증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이들은 원래 로마에 살던 유대인이었습니다. 로마에는 이들처럼 유대인이지만 이주하여 타지에서 사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사는 공동체를 "디아스포라"라고 불렀습니다. 이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의 공동체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믿음이 어떻게 로마까지 퍼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오순절에 예루살렘 순례를 갔던 로마의 유대인 몇 사람이 성령 강림의 사건을 목격한 후 로마로 돌아가 그 믿음을 전파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행2:10).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마음이 열린 사람들이어서, 예수님이라는 분이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의 유대인들은 이 믿음 때문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유대파, 두 편으로 나뉘어 갈등을 빚게 됩니다. 주 후 49년경에 이 갈등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드디어 로마 정부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그 전부터 유대인들을 싫어하던 터라 자기들끼리 싸워서 문제를 만드는 것을 빌미로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이 때, 로마로부터 멀지 않은 고린도로 이주하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로 천막 공장을 내고 정착하였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던 터전인 세계에서 가장 중심지였던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쫓겨가야 했던 그들의 처지는 어쩌면 처량하고 캄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금 성실히 그들의 생업을 시작합니다. 그 곳에서도 그들은 장막제조업을 하며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절망 중에 뜻이 있고 희망이 있고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2절 끝에 보니 바울이 그들에게 갔다고 증거합니다. 바울을 만난 것은 그들 부부에게는 참으로 복된 일이었습니다. 고린도라는 낯선 도시에서 안정적인 생업을 꾸리고 있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던 바울에게도  그들은 바울의 선교 사역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을 통하여 말씀으로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이제 바울의 동업자가 아닌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을 통해서 예수 믿고 주업이 바뀌었습니다. 물질을 추구하는 대신에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터좋고 경제 중심지인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왔다는 것은 실망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에 와서 바울을 만남으로 이제 자신들의 생업의 목적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대신에 이웃의 생명을 구원하는 사역에 헌신하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에게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사도바울이 가는 곳에 언제나 함께 하며 동역하는 일을 감당합니다. 18절을 보면 수리아로 가니까 그들도 함께 떠납니다. 로마에서 고린도로 옮겨 온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바울이 다시 수리아로, 에베소로 가니까 바울과 함께 하기 위해서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1. 여기서 우리는 동역의 첫 번째 원리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도 복음서에 보면 함께 거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함께 거하며 삶을 나누는 것. 이것이 동역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교하고 구제한다고 하면서도 성도와 함께 삶을 나누는 것을 꺼려합니다. 자신을 숨기고 오직 행위로서 도와주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삶의 나눔이 없는 동역은 사랑이 없는 관계 입니다. 업무적인 나눔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동역은 삶을 함께 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2. 두 번째 그리스도인의 동역의 원리는 말씀에 붙잡힌 바 된 교제입니다. 아무리 함께 거하고 친밀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바 되지 않은 교제는 세상적인 교제 입니다. 능력이 없는 교제 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을 만났을 때에 바울은 말씀에 붙잡힌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5절에 보면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의 심정이 그대로 전달된 사람이 바로 브리스길라 부부였습니다. 그들은 1년 6개월 동안 바울에게 말씀으로 양육 받으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가슴에 가득 찼습니다. 모든 것을 복음중심, 그리스도 중심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3. 상호간의 말씀을 통한 양육과 교제 : 후에 이들은 안디옥에서 아볼로라고 하는 지도자를 만나게 됩니다. 아볼로는 24절에 보면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라고 했는데 알렉산드리아는 이 시대 가장 학문이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지식으로 보나 언변으로 보나 아볼로는 아굴라 부부와 상대도 되지 않는 대 학자였지만 브리스길라 부부는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그가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임을 알아채고 그를 집으로 초대해 성령에 대해, 그리고 복음에 대해 그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서로 리더와 성도의 구분 없이 사로 가르치는 자로서의 동역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만약 이 시대에 한 성도님이 목사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성령에 대해 가르친다면 과연 이를 받아들이는 목회자가 있을까? 

- 고전적 교육학: 스승이 제자에게- 일방적 교육

- 현대 교육학; 쌍방향 교육, 함께 배워나가는 것. 서로가 성숙과 온전함을 위해 교제하는 것 

 

성숙한 신자는 상대방이 어떠한 사람이라도 서로 가르치며 배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앙 안에서 학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얼마나 경험했나가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한 신학자가 영국 교회의 부흥이 언제부터 멈추었나를 연구하다 보니 뜻밖에도 목회자의 학벌이 갑자기 높아지면서 반대로 영국교회의 부흥이 주춤하고 멈추었다고 진단한 것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미국 교회에 있어서도, 한국 교회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단인 것 같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학문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험하고 말씀의 살아계심을 경험 한 것에 의해서 교회는, 신앙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많이 공부하고 연구해도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체험하지 않으면 성도들을 이끌 수 없습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도 평신도로서 감히 아볼로 같은 대 학자를 집에 모시고 가르치는 것도 놀라운 일이고 그것을 경청하고 잘 배워서 신앙의 깊이를 터득한 아볼로도 대단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말씀 안에서의 동역입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를 통해서 아볼로는 초대교회의 한 축을 형성하는 교회의 리더로서 성장합니다. 이런 교제, 이런 동역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이 말씀에 붙잡힌 자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동역의 관계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이들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전 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 그 집을 교회, 성도들이 모이는 처소로 내 놓았다. 온전한 헌신. 

-> 바울의 선교여행에서 탄생된 교회의 상당수 - 그의 동역자의 가정에서 이루어진 교회 (그들이 내어놓았던 가정이 곧 교회) 

(롬 16:3-4]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동역자란 헬라어로 "쉬네르구스"- "짐을 같이 지고, 매를 같이 맞는 자" 라는 뜻.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 외에도 바울이 그의 전 일생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일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 보이지 않는 곳에서, 떄마다 그와 함께 짐을 지고, 매를 같이 맞는 "쉬네르구스" -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1) 구약의 리더십 - 모세, 사사기, 선지자 - 한 사람의 인물을 통한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 - 한 개인의 영적 역량에 따라 국가의, 공동체의 운명이 좌우 

2) 신약의 리더십: 예수  너희가 주어라, 무리에게 초점이 아니라 제자들을, 사람을 키우는 리더십. 둘씩 짝지어 가르치고, 파송하고- 한 사람의 동역자를 만드는 리더십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지상명령을 통해 주님의 리더십의 핵심 - 온 천하에 다니며 제자를 삼아라 - 스승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바울 역시, 나머지 예수의 열 두 제자 역시 - 그들의 흔적을 쫓다보면 수 많은 무리들을 이끈 것이 아니라 보냄 받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를 남긴다. 

  그들의 목적이 교회 건물을 세우는 것 - 실패 : 성지순례를 다녀 온 분들은 알겠지만 그들이 세운 교회는 흔적만 남았다. 흔적도 남지 않는 곳이 많다. 

  그런데 그들이 세운 사람은 계속 불어나 지금까지도 계속 세워진다. 

  

3) 종교개혁의 정신: 1517년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라는 모토 아래에서 그 이전까지 성직자에게만 읽혀지던 성경을 일반 평신도에게 개방시키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소수의 성직자 외에는 오직 교황의 말에, 성직자들의 권면에 순종하는 것만이 천국을 가는 길로만 여겨졌는데, 종교개혁 이후로 개신교도, 또한 가톨릭마저도 성도 개인에 의해서 성경을 기초로 한 믿음이, 신앙의 길이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촉발제가 되었던 사건 : 성 베드로 성전을 짓기 위한 면죄부 판매: 헌금을 내면 죄를 사해주는 증서를 내어 주는 것 - 루터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신앙양심을 건드리게 되었다. 

개신교의 출현과 더불어 나오게 된 신앙구호가 만인 제사장설과 직업 소명설 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직자들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꼭 성직만이 하나님을 위한 직업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직업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나님의 왕같은 제사장으로 이 땅에 부름받은 자들이요, 그리스도인의 모든 직업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소명이다. 

 

그로부터 약 500여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씀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주부이던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건, 어떤 직장을 가지고 있던 그 직장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라는 것을 믿고 계십니까? 그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의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개신교가 다시 부패했던 가톨릭으로 되돌아가지 않는지 염려하고 있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통해 교회재정을 채우려는 의도를 감추고 죄를 면해 주는 증서를 내어주듯, 헌금 많이 내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된다면 머리되신 주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요, 성도 스스로의 신앙이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는 삶이 아닌 능력있는 목회자 한 사람에 의존하는 교회. 

 

목회자가 성도보다 너무 높게 있으면 성도가 자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의존하고 따르기는 하는데 매사 혼자 결정하지 못합니다. 목회자가 없으면 방심하고 넘어지고 시험에 걸려 넘어집니다. 함께 있으면 강한데 함께 하지 못하면 흔들리고 넘어지고 연약해 집니다. 성령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보다는 그 사이에 꼭 목사님이 있어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자 마자 두려움에 떨며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신앙적인 위안을 찾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 어떤 분들은 저보다 훨씬 오래 깊게 믿으신 분들도 있고, 세상적인 경험도, 신앙적인 연륜도 다 높으신 분들

여러분들에게 바른 말씀, 바른 신앙을 나누고 설교하기 위해 저 역시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저 여러분들이 저에게 배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저도 성도여러분을 통해 배우고 자라나가고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험한 인생 살아오신 그 성실함과 땀의 의미, 어르신들의 굳어져 버린 손과 절뚝 거리는 걸음걸이에 묻어나는 고통의 흔적들- 인생의 의미를 배웁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언제나 교회 중심, 신앙 중심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열심

내가 목사가 아니었다면 여러분들처럼 신앙생활 할 수 있었을까? 

깊은 교제 없었지만 매 주 나오시는 하집사님 매 주 기적이 일어나네요. 

 

동역자 - 쉬네르구스 :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동역자. 

 

말씀을 끝맺기 전에 다시 한번 본문으로 돌아가보고자 합니다. 이 구절- 성경을 읽다가 저의 눈을 멈추게 한 구절, 이 설교를 하게 한 motif 

18장 3절에 보면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생업이라는 것은 직업입니다. 설교 처음 시작에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로 받는 소명입니다. 목사만 소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직업이 그리스도인에게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아굴라 부부와 바울은 생업이 같았습니다. 다시 말해 소명이 같았습니다. 

그 생업은 문자적으로는 천막을 만드는 것- tent maker 였지만, 성경에서 tent는 장막, 성막의 의미, 바로 교회를 세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전도하며 가는 곳곳마다 교회를 세웠고 브리스길라 부부도 가는 곳마다 그들의 집을 예배의 처소로 내어 놓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생업이 같았다는 말씀은 그들이 교회를 세우기 위한 한 가지 소명을 가졌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교회 -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우리 몸이 곧 교회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성도들의 모임, 공동체가 곧 교회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 트레이시제일교회라는 장소가 모이는 교회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동역자 여러분들의 가정은 흩어지는 교회의 장을 제공하는 장소이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사람 좋아하고, 모이는 것 좋아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모여지길 원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일지라도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사람들이 모일 때- tent maker라는 이 말을 기억하면서 이 곳이 주님이 거하시는 교회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