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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사람이 무엇이관대 (시편 8편 4-9절)

by 소리벼리 2022. 3. 26.

사람이 무엇이관대 (시편 8편 4-9절) 

 

한 대형 백화점에서 일하던 점원이 백화점의 물건을 슬쩍 하다가 걸려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자기를 쫓겨내는 백화점에 분노하며 쫓겨나는 날 엉뚱한 장난을 쳐 놓았습니다. 

백화점 안의 물건들의 가격표를 감쪽같이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아이들 장남감에 붙여 놓아야 할 가격표를 컴퓨터 코너에 가서  붙여 놓아 800백불 되는 컴퓨터가 30불, 40불되는 아이들 장남감 레고가 400백불에, 300불 되는 카메라는 8.99에 이런식으로 엉뚱한 가격표를 붙여 놓은 것입니다. 

문제는 다음날 백화점 문을 열었을 때, 이것을 알아채기까지 5시간이나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 다섯시간 동안 카운터의 점원들은 누구도 가격표를 의심하지 않고 계산을 했습니다. 자기는 그저 자기 일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알아차린 것은 고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싼 물건이 값싸게 되자 고객들은 장남감 가격이 되어버린 값비싼 물건들을 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장남감을 사기 위해 20불을 모아 레고를 사러 왔던 아이 하나가 그 레고 가격이 400불이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점원에게 말하게 되면서 백화점의 가격표가 이상하다는 것이 발견이 된 것입니다. 

 

가격표를 바꾸어 놓은 쫓겨난 점원의 범죄도 기가막힌 일이지만 그 가격을 의심하지 않고 5시간이나 판매했던 점원들, 잘못된 가격인 줄 알면서도 문건을 사간 몇 몇 고객들... 우리 주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린 이렇게 가격표가 뒤바뀐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인생의 가격표를 다 바꾸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몇해 전 탤런트 이순재씨가 인터뷰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순재 하면 모범적인 원로 배우이고, 배우라면 누구나가 존경하는 탤런트계의 존경받는 어른입니다. 

"자기의 출연료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수없이 많은 드라마며 영화를 나왔지만 자기 출연료를 이야기하면 다들 놀랜다. 우리 때는 배우가 출연료를 높게 받지 못했고 처름부터 그렇게 받다 보니 지금도 적게 받는 것을 당연히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나이 어린 가수들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면서 자기도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출연료를 받는다. 그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도록 하는 사회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지 못하고 자기보다 많이 버냐 적게 버냐로 평가해버린다."

 

단돈 몇백만원에 회사의 운명이 담긴 기술이 담긴 문서들을 해외로 팔아넘기는 사람들, 빚진 돈을 갚으라면서 사람의 장기마져도 판매하려는 사람들, 

우리 사회의 가격표는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의 가격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치대로 직장에서, 가정에서, 대우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한 일- 바뀌어진 가격표를 다시 붙여주신 것

잃어버린 사람의 가치-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사람들이 돌로 치라 했을 때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아무도 만지지 않는 나병환자를 어루만지시고, 38년이나 된 병자를 일으키시고, 죽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보며 눈물 흘리시며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고....

그 압권- 십자가 상의 강도

이전에도, 이후에도 효용성 면에 있어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그런데 그에게 천국을 보장하신다. 

 

그 분은 우리가 그저 사람이기에 사랑하신다. 외모를 중시하지도, 성과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

그저 주님 앞에 나오는 자라면 대환영이고 주님께 나오는 자에게 천국을 허락하신다. 

천국뿐만 아니다. 

 

예레미야 3장

3장의 시작은 신명기 24장의 율법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율법에는 남편으로부터 이혼장을 받아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사람이 다시 그 남편이 죽거나 헤어진다고 해서 전남편이 그 여자를 데려올 수가 없다. 그것은 땅을 더럽히는 가증한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하나님은 율법에 이렇게 쓰여있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네 남편이고 너희가 나에게로 돌아온다면 나는 너희를 축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말은 선포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오히려 하나님이 영적, 육적으로 간음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구하는 모습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렘 3:14-15) 

 

돌아만 오면 용서할 뿐만 아니라 모든 축복을 부어 줄 것을 약속하신다. 그리고 그 약속은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확인하신다. 
세상에서 허랑방탕하여 돌아올 낯을 일어버린 탕자가 눈에 보이자 아버지는 뛰어 오셔서 그를 반기실 뿐만 아니라 옷을 갈아입히고, 반지를 끼워준다. 새신을 신게 한다. 용서가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회복시키신다. 

 

시편 8편에서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한다. 그리고 하나님 만드신 해와 달과 별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그리고 나서 감탄하는 소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왜 만물보다 한없이 초라한 우리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고, 주의 손으로 만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나이까 하면서 의문을 제기한다.  

 

흔히들 예배드리며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고 존귀하게 하신다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사람이면서도 같은 사람을 비하하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지녔다. 

짐승보다 못한 사람, 개만도 못한 인간, 기생충같은 인간.... 

상종할 사람과 상종못할 사람을 나눈다.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못믿을 사람을 나눈다. 

친하고 싶은 사람과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나눈다. 

나에게 이익이 될 사람과 무익한 사람을 나눈다.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으로 짓고, 또한 그 분의 능력과 손길로 영화롭게 존귀하게 하신 사람을 우리가 스스로 가격을 매기고, 분리하고, 차별한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끼리 끼리 모이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점점 혼자가 된다. 

누구와도 어울리기 싫어진다. 

사람 만나기가 무서워진다. 

우리 또한 남에게 어떻게 평가 받을까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을 그렇게 평가하면서 결국 우리도 그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인간관계 자체를 두려워한다. 

앞으로는 더욱....더 더욱 그런 사회가 될 것이다. 

 

사탄이 이 땅에 들어와 저지를 범죄는 하나님 창조하신 동산의 모든 가격표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다스렸던 만물을 섬기게끔 우리를 속였다.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 어떻게 속인 것일까? 

우리에게 영원을 생각하는 마음을 의심하게 만든 것이다.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심어 준 것이다.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다고, 이 세상은 죽으면 끝이라고....그것이 사탄이 우리에게 준 폭탄이다. 

그 의심은 인간의 모든 가치체계를 왜곡시켰다. 

인간의 삶의 방향을 잃게 하고 목적지도 바꾸어 버렸다. 

 

죽으면 끝이니까 옳고 그름의 기준도 항상 현재이다. 

지금 재미있으면 선하고 지금 재미없으면 악이다. 지금 재미있기 위해 아내와 남편을 배반하고 아이들을 버려도 상관이 없다. 

지금을 즐기기 위해서 남이 어떻게 되는 것은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위해 재산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즐기기 위해서 모든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한가? 현재를 즐기니까 건강해졌는가? 

 

현재는 즐기면 즐길수록 만족이 없고 고통스럽다.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같은 즐거움에 만족이 없다. 더 큰 자극, 더 큰 환락, 더 큰 쾌락을 원하다가 스스로 멸망한다. 자기보다 더 즐거워 보이는 사람이 눈에 띄면 견딜 수 없다. 그리고 즐기면 즐길수록 나는 점점 황폐해져 간다. 

우리는 영원을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이지 금방 살다 사라질 존재가 아니다. 

마라톤을 뛰면서 100 미터 달리기 하듯 달리면 반환점에도 다다르지 못하게 된다. 

 

  •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나를, 사람을, 한 영혼의 가치를 그렇게 크게 생각해주는 분이 없다는 것. 어떤 종교나 철학사상, 세상의 문화를 보더라도 하나님보다 사람의 가치를 중하게 생각하는 곳이 없다. 

 

성경의 언어, 특별히 구약의 언어-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 늘 심판, 죽음, 징계를 경고하신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 대해서 분노하신다. 

우리는 이 언어를 대하면서 때로 왜 하나님은 자기만 믿으라고 할까? 왜 하나님은 우리를 풀어주지 않으실까? 

왜 저토록 무섭게 심판하실까? 왜 겁을 주실까 하면서 때로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본다. 

왜 하나님은 우라를 옴짝 달짝 못하게 하실까? 불편해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으면서 정말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가셨는가? 

내 삶을 옴짝 달짝 못하게 하셨는가? 

 

다른 사람은 내가 모르지만 나 자신을 바라보면 그분은 날 너무 내버려 두셨다. 

난 수십번, 수 백번 탕자가 되어서 뛰쳐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책망치 않고 반겨주셨다.

나를 책망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이다. 

왜? 나갈 때마다 난 세상으로부터, 상처입고, 내 가치를 잃어버렸고, 무시당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언어는 하나님을 떠날 때마다 겪어야 했던 탕자들의 언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술에서 나온 말씀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겪었던 체험의 언어이다. 

 

  •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 

1) 하나님이 보시는 나의 가치를 재발견 하는 것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전율이 인다.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감격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심을 믿지 못하고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바냐 선지자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동시대 사람-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결국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버린 유다 사람들을 보시면서도 하나님께서 장차 돌아올 백성들을 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범죄중인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에서도 그들의 미래를 보시면서 말씀하신다. 그 분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너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며 나로 인해 즐거이 부르시며 기뻐하신다" 

내가 누구이기에, 내가 무엇이관대 나로 인해 그렇게 기뻐하실까? 

 

속썩이는 남편, 속썪이는 아내, 속썪이는 자녀, 속썩이는 친구들이 있는가? 자신을 떠난 유다 백성을 보시면서 "돌아온 그들을 생각하시면서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노래를 함꼐 불러보라. 

그들의 미래가 이미 하나님의 노래 안에서, 당신의 삶에 들어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2) 사람의 가치를 회복하는 곳이 교회 공동체

그리고 그 가치를 회복한 주의 자녀들이 힘써 만들어 가는 곳- 교회 

사람의 가치를 회복시키는 곳 - 

세상은 사람을 외모로, 교육의 양으로, 직업으로, 성격으로, 연봉으로, 출신으로,,,할 수 있는 모든 기준을 가지고 나누고 평가하고, 평가절하하지만 

교회의 기준은 오직 하나 - 그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이므로, 하나님 안에 속한 자이므로....세상의 모든 가치를 초월해서 사람이기에 대우 받을 수 있는 곳이 되게 하는 곳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계명, 새 언약- 서로 사랑하라. 서로 발을 씻겨 주어라. 서로 용서하여라. 서로 섬겨라. 

그 한가지 목적은 잃어버린 가격표를 다시 붙여 주어라. 

 

어느 공동체든지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 - 나는 여기에 쓸모가 없는 존재인 것 같아요.

자녀가 가정에서 쓸모없음을 느낄 떄 - 가출한다. 

직장인이 직장에서 쓸모없음을 느낄 때 - 결국 사직서를 제출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쓸모없는 존재란 없다. 

성도의 가장 큰 쓸모는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늦동이 한나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 

무언가 일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받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꾼이 아닌 자녀로 불러주셨다. 

그 분이 가장 원하시는 것도 우리가 무언가 큰 일을 해서 십자가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사랑을 누리고 경험하며 하나님 안에서의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삶이 공허한가? 외로운가? 

내 존재가 쓸모없게 느껴질 때가 있는가? 

내 삶의 끝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움이 몰려오는가?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내가 우연히 저절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그 분이 그 분의 손길로 나를 만드신 것과 

나의 삶을 바라보시면서 때로는 걱정하고

떄로는 격려하며, 때로는 천사들을 보내고, 때로는 사람들을 통해, 때로는 때에 맞는 날씨와, 환경과, 물질까지도 부어주시면서 내가 기뻐했던 모든 순간을 바라보시면서 같이 즐거워하는 존재가 있었음을.

 

그리고 그 아버지는 

내 육신의 아버지와는 달리 늙지도 쇠하지도 죽지도 않고 나와 함꼐 영원이라는 삶을 함꼐 하실 분이라는.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를 그 분이 지금 마련해 두고 있음을 생각하면 

오늘 하루도 두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 보다 더 즐거운 내일을 기대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