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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마지막 만찬 시간에 (마 26:17-35)

by 소리벼리 2021. 4. 10.

마지막 만찬 시간에 (마 26:17-35) 

 

1. 종려주일 :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제자들과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함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환호성을 쳤던 이른바 왕으로서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왕의 입성을 기념하는 영광과 기쁨의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로 이어지는 슬픔의 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고난주간의 시작이 바로 이 종려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온 예루살렘이 들썩일 정도로 환호하고 기뻐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를 몰아내고 성전의 부패하고 썩은 종교 지도자들을 몰아내고 왕이 되실 줄로만 알았던 예수께서 오히려 그들에게 잡혀 심문받으시며 열세에 몰리자 하루 아침에 환호하는 군중에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를 외치는 사나운 군중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는 의미와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정결하게 한 주간을 시작하는 기쁨과 슬픔, 축제와 동시에 근신하고 절제하여야 하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 날입니다. 

 

마지막 고난의 일주일 - 가장 드라마틱한 일주일 

왕의 입성- 논쟁- 침묵 - 만찬- 체포- 고난- 죽음 - 부활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실패와 승리가 너무나 극적으로 반전에 반전을 이루는 시간...

 

우리는 내일부터 고난주간 묵상집을 통해 예수님의 종려주일 후 마지막 일주일의 여정을 살펴 볼 것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은 성금요일로 십자가상의 가상칠언을 묵상하며 함께 예배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주일날 - 우리는 3개월여간의 우리 케이티 집사님 댁에서의 개척예배와 개척하는 데에 있어서의 모든 준비과정을 걸쳐 본예배당으로 입성하게 되고, 4월 마지막 주에 창립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입성을 알리는 종려주일은 비록 빌린 예배당이지만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가 공식적인 예배당에 입성을 앞둔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뜻깊은 주일인 것 같습니다. 

 

2. 목요일 -  최후의 만찬 

내일부터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자세히 살펴보며 함께 묵상할 터이지만 오늘 본문은 그 일주일 중에서 목요일날 이루어지는 이른바 최후의 만찬의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루 전  수요일 - 침묵의 날 (그 분주한 여정 속에서 수요일날에는 아무런 행적을 남기시지 않는다. - 침묵의 날) 

하루 후 금요일 - 십자가의 고난, 죽음 

 

내일 있을 일을 미리 아시는 주님 - 마지막 시간을 누구와 보낼까? 가장 의미있는, 가장 사랑하는...제자들과 목요일 마지막 밤을 보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육신적 가족보다 제자들이 그분의 형제였던 것이고, 그들에게 최후까지도 남겨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3. 만찬을 맞이하는 제자들과 예수님 

  • 제자들 - 한 껏 들떠 있었습니다. 종려주일날 받았던 백성들의 환호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고 맞이할 유월절.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들뜸은 곧 평화와 안식이 아니라 주님이 왕이 되면 그 다음 자리는,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까 하는 경쟁과 시기와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맞이하는 만찬은 서로 주님께 인정받으려는 그런 자리인줄도 모르겠습니다. 
  • 예수님 -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맞이하는 마지막 식사자리가 평안할 리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고난보다 더 답답한 것은 자신이 앞으로 될 일을 제자들에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생각에 꽉 막혀 예수의 하는 일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고난을 당할 때에 제자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떠나갈 것이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마음과는 달리 한껏 들떠있으면서도 동시에 서로 갈등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만찬 자리에서 행하신 세 가지 것 

(1)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21절) 

한껏 들떠 있는 제자들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한 마디, 만찬 시간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너희 중에 하나는 가룟유다를 지칭할 것입니다.

왜 그가 예수님을 팝니까? 앞에 15-16절을 보면 단지 은 삼십냥을 위해 예수를 팝니다. 은삼삽은 노예 한 명의 몸값입니다. 

스승인 예수, 아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노예값에 팔아 넘기는 것입니다. 

 

언제나 마찬 가지 입니다. 대단한 목적을 위해서 신앙을 파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기 앞에 닥친 잠깐의 만족을 위해 신앙을 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앞에 놓인 잠깐의 쾌락을 위해, 혹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예수님과의 신뢰를 깨 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면서 구원코자 하는데 우리는 당장의 작은 어떤 것을 위해 예수님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왜 이 자리에서 하셨을까? 가룟유다가 배반할 것을 미리 예언하셨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가룟 유다를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였을까요? 만약 유다를 회개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모든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보다는 따로 불러서 "네 마음에 죄악을 다스려라"하는 방법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룟 유다에게만 한 말씀이 아닙니다. 뒷부분에도 나왔지만 가룟유다만 예수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지요. 

56절에 보니까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왜 그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도망합니까?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그토록 말씀하셨던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왜 유다에게만 나를 팔려는 마음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말아라. 너 그렇다가 큰일 난다.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설사 누가 그런 마음을 품었더라도 그렇하지 못하도록 서로 권면하고 잘못을 막아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뭡니까?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왜 그들이 몹시 근심하였을까? 자기들 안에서 언제든 주님이 자신이 생각한 메시야가 아니라면 떠날 마음을 해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 안 품었다면 근심할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한 명도 빠짐없이 근심하여 열 두명이 각각 "나는 아니지요?"하고 주님께 묻습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은 곧 교회 생활 입니다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태어난 것입니다. 

공동체 중 하나에 구멍이 뚫리면 결국 모두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이 위험하고 시험에 들었을 때에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곧 교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 앞에서 너희 중 하나가 날 팔리라 하고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이 자리에서 왜 예수님은 그토록 서로 사랑할 것을 말씀하십니까? 

신앙은 서로에게 관심 갖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지극히 작은 것을 소중히 하고 섬기고 보호하는 것이 구원받는 사람의 모습이고 양의 모습인 것입니다. 

 

(2) 내 살과 피를 먹으라 - 성찬과 세족식 

서로 주님을 바라보며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주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이제 은 삼십냥을 가지고 자기에게 입을 맞추며 로마 병정들에게 넘겨줄 유다

죽어도 배반하지 않는다고 했음에도 자기 살겠다고 부인하고 저주하는 베드로. 

로마 병정들의 위협 앞에서 다 뿔뿔히 도망칠 나머지 제자들....

한시간도 기도하지 못하고 피곤해하며 졸기만 하는 그런 제자들. 

 

제가 만일 예수라면 한 한시간동안은 혼을 내며 잔소리를 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말을 해서라도 그들이 예수님의 말을 잊어버리지 말고, 또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가르쳐주고 하지 말라고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아얘 포기하고 홀로 시간을 보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 편이 훨씬 편할는지 모릅니다. 

그들을 바라보면 바라 볼 수록 앞으로 그들이 행할 일들이 더욱 괴씸하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아리랑: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우리 민족의 한이 담긴 노래 

 

그런데 예수님 

(요한복음 13장 1절) 유월절 전날,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떄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내 살과 피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내 살과 피로 너희를 구원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그들의 발을 씼겼습니다. 

 

우리는 세족식을 경험했거나 들어봐서 알지만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긴 다는 것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는 것. 

이건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기가 막힌 일입니다. 전대미문이 사건입니다. 

그 어떤 역사적인 기록에서도 스승이 제자를,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의 발을 씻긴 예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런 일을 행하셨을까? 

어떻게 그 만찬, 최후의 만찬 시간에 그들의 발을 씻길 마음을 가지셨을까? 

 

첫째, 발을 씻기시는 예수의 마음은 격려, 수고했다.

미우나 고우나 3년간을 함께 했던 제자들을 손수 씻겨 주신 것입니다. 

발을 씻는 것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하는 것. 

공생애의 일과를 함꼐 했던 제자들의 수고와 피곤함을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발을 씻기시는 예수의 마음은 용서였을 것입니다. 

나같으면 쳐다보고만 있어도 화가 났을 그 순간에 주님은 용서함으로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과거의 모든 어리석음 뿐만 아니라 이제 다가올, 그들 마져도 너무나도 후회할 그런 모든 배반과 저주의 일들을 예수는 미리 용서 하신 것입니다. 

 

셋째, 발을 씻기시는 주님의 마음은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발을 씻기시면서 "내가 선생되어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라"(요 13:14) 라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잘하고 기특한 자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 곧 떠나가고 도망칠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 결국 끝까지 그들에게 예수의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방탕한 아들, 맨날 사고만 치는 그런 자녀를 끝까지 용서하고 믿어 줄 수 있는가? 

우리는 혼내고 잔소리하고, 꾸짖는데 익숙하지만 가장 엄한 회초리는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난 정말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도 얼마나 실수투성이인줄 모릅니다.  

은 삼십에 예수를 판 유다처럼 나도 시시 때때로 너무도 하찮은 일에 주님과의 약속을 깨고 내 맘대로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실패한 마음, 죄책감이 가득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려고 하면 염치가 없어서 기도조차 안나올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억지로 마음을 정하고 기도하면 제가 어떤 잘못을 해도 주님은 용서해 주십니다. 한 번도 용서하지 않으신 것이 없습니다. 

아니 용서라기 보다는 그냥 제 마음을 받아주시고 "승구야 난 너를 믿는다"하십니다. 

 

여러분, 난 회개기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안 받아 주셨다하시는 분 있으십니까? 

회개하는데 막 화내셨다 하는 분 있습니까? 

다 용서하셨지요? 

다 받아주셨지요? 

그리고 여전히 실수하고 넘어지는 우리지만 끝까지 믿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더러도 이렇게 격려하고, 용서하고, 믿어주며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심보가 참 못되서 혼을 내다 보면 잘못한 줄 알아도 인정하지 못하고 성질 부릴 때가 많습니다. 

잘못한 줄 몰라서 안고치는 것이 아니라 심보가 못나서 성질내고 않고치는 것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어다." 

호되게도 아니게 하나님의 가인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한낱 가인이 하나님이 따끔한 지적에 회개하지 않고 살인을 합니다.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가인에게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유다의 마음 속에 있는 죄를 지적하십니다. 

유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두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곧 넘어질 그들을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셨음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일 잘하고 인정받는 제자들을 위해서 살과 피를 내어주신 것이 아니라, 곧 넘어지고 배반하고, 떠나갈 자들을 위해 살과 피를 내어 주셨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신앙인 

"내가 이런 이런 일을 해서 주님이 나를 구원해주셨어..."

자기의 어리석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구원 받을 자격 있는 자가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면 주님이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자격 있는 사람만 구원하면 됩니다. 

그 한 사람이 없기에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격없는 우리앞에 주님이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의 가장 더러운 발을 씻겨 주십니다. 

발을 씻김으로 죄인인 우리에게 수고했다고 격려하시고,  주 앞에서 잘못한 것들을 용서하시고, 그리고 실수 투성이인 우리임에도 끝까지 믿음을 주셔서, 우리 또한 그렇게 살라고, 부족한 자들의 발을 씼겨주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수건을 두르시고 천지를 지으신 그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씼겨 주시면서 내가 너의 발을 씼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씼겨 주어라 하십니다. 

 

지난 3개월동안 함께 했던 가정 예배 

코로나로 모일 수 없는 중에도 우리는 모였고 예배드렸고, 또 조심스러웠지만 교제했다. 

기쁨도 있었지만 사로의 부족한 모습도, 어쩌면 실망스런 모습도 보았을 수 있다. 

이제 더 큰 예배당에 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지금까지 우리생각보다 항상 더 빠르게 더 많은 것들을 역사하신 하나님꼐서 어떤 일들을 예비하고 계실 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처럼 기쁨과 슬픔, 죽음과 부활, 실패와 승리가 롤러코스터처럼 왔다갔다 할 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 모였던 이 장소, 이곳에서 누렸던 기쁨, 그리고 사랑을 잊지 말자. 

그리고 부족하더라도 제자들을 끝까지 믿고 그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내 제자인 줄 알리라"하셨던 예수님의 새 언약처럼 처음 시작했던 우리 멤버들을 서로 아끼며 사랑하고 격려하며 서로의 발을 씼겨 줄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자. 

우리가 행복하면 앞으로 맞이하게 될 미래의 우리 교인들도 행복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서로 "나는 아니지요?"하는 마음으로 자신만을 챙긴다면 모두가 무너지는 둑이 될 것이다. 

예수의 살과 피의 능력으로 서로의 발을 씼기는 예수 공동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