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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마가복음 8장 22-26절 무엇이 보이느냐?

by 소리벼리 2022. 8. 14.

마가복음 8장 22-26절 무엇이 보이느냐? 

 

1. 배경 

1) 마가복음 8장 - 

마가복음 - 전체 16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심에 서 있는 장

한 신학자가 성경 한 권이 다 타서 없어지더라도 로마서 8장 한 장만 남겨진다면 그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면서 로마서 8장의 가치를 치하했다면 저는 마가복음 8장은 첫 복음서라고 여겨지는 마가복음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다. 

 

2) 마가복음에서 8장이 중요한 이유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주는 그리스도이니이다 

(공생애 전반기- 예수님이 누구인가? - 가르침과 기적) 

후반기 - 예수님이 하실 일 - 십자가와 부활) - 완전히 달라지는 예수님의 사역의 모습 

 

이 베드로의 고백을 전후로 마가복음 8장 전체가 하나의 스토리를 이루고 있다. 

 

3) 그리고 그 가장 마지막 기적으로 보여주시는 사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 맹인을 고치시는 사건   

 

4) 이 사건을 통해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대상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줄곳 함께 한 자들은 바로 제자들.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상은 다른 누구보다고 이 제자들에게 있었다. (First Reader)  - 그리고 예수님의 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12제자 뿐만 아니라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을 따르는 현대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에게 그 가르침을 주시고자 한다. (Second Reader/ Ultimate Reader)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을 꺠닫게 하는 데에 있었다. 

깨달음이 대상은 크게 두 가지 였다. 

하나는 예수님은 과연 누구인가? 

또 하나는 제자인 나는 누구인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였다. 

 

2. 본문 

1) 칠병이어의 기적 (1-8절) 

마가복음 8장은 이른바 칠병이어의 기적이라 불리는 사천명을 먹이시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셨던 예수님은 이방인의 장소에서 또 다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일곱개를 가지고 4천명의 사람들을 먹이신다. 

 

단지 장소만 이스라엘 땅에서 이방인의 땅으로, 더 적은 사람이 모여있는데, 저들을 먹이라는 질문에 제자들은 자신들은 전혀 못한다고 한다. 오병이어 - 어린아이의 작은 헌신을 통해 주님이 축사해 주시는 사건 

동역의 원리 -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기드온에게....명령 - 난 못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내 말에 순종하면....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들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능력, 내가 가진 것만을 보면서 못한다고 한다. 

믿음은 내 가진 것이 아닌 내 순종을 통해 축사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다. 

 

그런데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와 함께 있는 분이 누구인지, 예수와 함께 하는 자신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2) 사천명을 먹이신 사건 뒤에 바로 이어지는 바리새인들의 요구 - 표적을 보여 달라 한다. (11-12절) 

도대체 언제까지 표적을 보여줘야 저들은 믿을까? 

눈앞에 표적이 계속된다면 정말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까? 

예수님은 표적을 바라는 바리새인들을 바라보면서 깊이 탄식한다. 

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다름아닌 눈에 보이는 표적, 끊임없이 보여주기만을 간구하는 제자들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기적- 바리새인과의 논쟁 - 그리고 배 안에서 제자들과의 대화- 그리고 한 유대인의 치유... 

이런 싸이클의 대상은 제자들이다. 여기서 비교의 대상은 바리새인들의 신앙과 제자들이지만 결국 이들의 신앙은 다르지 않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리새인들과 다른, 전통이나 헛된 외식에 빠지지 않는 신앙이 되기를 원하신다.  

 

3) 제자들과의 대화 (13-21절) 다시 주님과 배를 탔다. 

그들이 함께 있는 분은 며칠 쌔 오쳔명을, 사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부족하다. 

현실의 어려움은 오직 주님과 함께 있는 배 안에서도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한다

 

문제는 또 떡의 문제이다. 

은혜는 받았는데 여전히 배가 고프다. 현실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떡 가져오기를 잊었다고 했다. 무슨 떡인가? 

4천명을 먹이고 남은 광주리가 일곱이라 했다. 이 일곱광주리는 모든 교회를 먹이고도 남을 양식이다. 하늘의 만나이다. 

그런데 떡이 하나 밖에 없다. (14절) 

 

하나의 떡은 무엇일까? 다시 물어볼까? 

배에 단 하나 남은 떡은 누구일까? 

일곱 광주리의 떡을 다 잃어버려도 된다. 

남은 하나의 떡만 있으면 언제라도 또 채워질 수 있다. 그 분은 오쳔명을 먹이고도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광주리를 이방인의 무리 4천명을 먹이시고도 일곱교회를 상징하는 7개의 광주리를 위해 떡을 남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과 함께 있으면 언제라도 공급받을 수 있다

 

4) 단지 그들은  두가지만 조심하면 된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15절) 

 

- 바리새인의 누룩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있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을 통해 자신들이 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 믿음이 최고라고, 자기가 했던 신앙생활이 맞다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누가 와서 자기를 맘껏 칭찬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 깊은 마음 속엔 무엇이 있는가? 내가 남들보다 낫고, 내가 남들보다 의롭고, 내가 남들보다 높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칭찬하지 않고 꾸짖으신다. 그냥 꾸짖는 정도가 아니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 하면서 그들을 독사의 자식, 사탄의 자식이라 저주하신다" 너무나도 끔찍한 그들의 실상을 드러내신다. 

 

헤롯의 누룩은 무엇인가? (허영심, 허세) 

하나님 없는 세상의 가치관이다. 세례요한이 의로운 줄 알면서도 사람들의 이목때문에 목을 베어버린 헤롯, 예수가 무죄인줄 알면서도 백성들의 눈치를 보며 십자가를 지게 했던 빌라도와 같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지만 결국 의롭지도, 정직함도 없이 자기 주관대로도 아닌 남들 눈치만 보면서 살아가는 세상이다. 

 

바리새인들의 이런 교만의 누룩, 헤롯의 이런 세상적인 정욕의 누룩.... 이것만 주의하면 떡은 단지 하나면 족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먹이신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 

마가복음 8장 18절)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맹인의 정체 - 바로 제자들 

 

5) 맹인을 고치심 

 -벳세다:  house of fisher man (어부들의 집) -> 어부는 누구일까 누가 어부인가? 바로 제자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상 - 제자들

 

육적 소경에서 sight를 주고 (육적 시력) 

영적 소경에게 주시는 것 insigt (영적 시력) 

 

백내장 간증) 

2018년 - 자고 일어나서 안경을 꼈는데 사방이 뿌옇게 보였다. 안경을 안낀 줄 알고 안경을 찾다가 눈을 만져보니 안경이 씌워져 있었다. 

그 때 부터 한국에 가서 수술 받기 까지 한 8개월간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고, 컴퓨터에서 설교를 작성할 수도 없었다. 

알다시피 - 설교원고 (원고 없이는 설교하지 못한다) - 

나중에 수술을 받고 나서 내 안과의사가 말하는 것이 의학적으로 맹인의 시력이었다. 

그래도 운전을 하고 거의 매일 교회를 왔다갔다 했다. 

 

(그 때의 기도 - 다시 잘 보인다면 정성껏 말씀을 읽을 것이다. 다른 신앙 서적도 정성껏 귀한 줄 알고 읽을 것이다) 

그런데 성도들의 입장에서 그 때의 설교 - 

빠르지 않고 한 말 한 말 속에서 완전히 소화된 말씀. 두렵고 떨림으로 전하는 말씀, 내 속에서 우러나는 설교

마음에서 이미 완성된 설교, 성령을 의지하는 설교 

 

육적 시력은 거의 사라졌지만 영적 시력 (Insight)가 열리는 시기 - 그 떄의 간절함 

- 사람이 참 완악해서 지금 시력을 찾았는데 그  때의 그 마음이 식지 않았는가?  

 

 

23절)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예수님의 질문 : 무엇이 보이느냐? 본질적인 질문. 매서운 질문  - 무엇을 보면서 사는가? 

맹인의 대답 :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 보는 것이냐, 보지 못하는 것이냐? 

 다시 안수 하신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이 사건은 마가복음에만 나온 내용으로 다른 병자를 고치시는 이적과는 좀 특이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에 걸쳐 안수하시며 맹인의 상태를 물으신 것이지요. 왜 특별히 이 맹인에게는 "두 번의 안수를 하시며 고치셨을까?"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안수 하시고 예수님이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니 소경이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안수가 완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직 소경의 보는 눈이 온전히 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한 이해 속에서 살아갑니다. 내가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하고 권사이고, 장로이고, 목사이여도 난 여전히 완전히 보지 못하는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두 번째의 안수가 (제 2 의 은혜) 필요합니다. 

불완전한 자의 눈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합니다. 나무와 같은 물질, 대상으로 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람을 보는 시각과 같습니다. 나에게 유익한가? 그렇지 않은가? 나를 위하는 자인가? 적인가?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고귀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 중심적으로 사물로서 사람을 바라봅니다. 

사람을 숫자로 보는 것 - 유익으로 보는 것, 나 자신 마저도 

내가 필요한 사람인가? 내가 이 집에 필요한 사람인가? 내가 이 교회에 필요한 사람인가? 

주님께 내가 필요한 사람인가?

난 목사이지만 내가 주님께 필요한 사람인가?라고 물으면 언제나 자신이 없다. 

주님이 내게 필요한 분이시다. 

주님이 내게 필요해서 난 주님을 의지하고

이 교회가 내 신앙과 영적 여정에 필요해서 주님은 내게 교회의 사역자로 부르셨고 

성도님들이 내게 필요해서 여러분들과 같은 귀한 성도님들을 만나게 하신 것이다. 

 

여러분들에게는 꼭 내가 아니어도, 주님께는 꼭 내가 아니어도, 내가 아니면 돌맹이 하나를 통해서도 주님의 일을 맡기실 수 있지만 나의 구원에, 나의 성숙에, 나의 신앙에 주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내게 다가오신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값어치 없는 연약한 나를, 연약한 우리를 자녀라고,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생업이 같은 동역자로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이다. 

 

주 번째 안수하시니 모든 것을 밝히 보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외모가 어쩄든, 학식이 어쨌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이 형상이 있는 사람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진정 사람으로 보는가? 

제 아내를 소개 시켜준 목사님의 말 - 첫인상 

image로 기억하는 우리 

우상은 다름아닌 image를 만들지 말라. 그것이 사람이든, 형상이든 심지어 하나님이든 그것의 이미지에 갇혀서 바라보지 말라. 

 

한솔이 원서- 내가 내 아들을 과연 알고 있었는가? 

내 아내를 알고 있는가? 

세상 경험 많이 한 사람들 - 딱 보면 알지....어떻게 한 인간을 딱 보고 알 수 있는가? 자기 경험, 자기 이미지에 갇혀서 바라보는 것. 

 

진정한 모습을 보고 싶다. 죄로 인해 왜곡되고 변형되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녹아 있는 그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 

그 사람의 모습을 밝히 보는 것 - 

 

성경 한 번 안 읽고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수 없듯이 

그 사람의 진 면목을 우리는 모르고 산다. 마치 나무처럼, 사물처럼 사람들을 바라본다. 

 

주님은 제자들의 눈을 고치신다. 보게 하신다. 우리도 보게하실 줄로 믿는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누구라고 보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누구라고 보느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내 모습도, 우리 교회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나를 어떻게 보느냐? 너는 이 트레이시제일교회를 어떻게 보느냐?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우리교회 성도, 우리교회 목사가 아닌 내가 만난, 내가 보는 그 중심에 어떤 모습이 있는가? 단 하나의 떡 주님의 모습이 그 곳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