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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아침묵상 (마가복음 강해)

마가복음 4:35-41절 (제자들의 배에 임한 풍랑)

by 소리벼리 2021. 3. 21.

마가복음 4:35-41절 (제자들의 배에 임한 풍랑) 

 

  • 그 날 저물 때에...(35절)

그날은 어떤 날인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모여든 큰 무리들에게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 자라나는 씨, 겨자씨 등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여러 씨앗의 비밀을 통해 말씀하시던 그 날입니다. 

다른 어떤 날보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하늘의 비밀을 깨닫고, 믿음의 비밀을 깨닫고, 소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열매들이 자라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날입니다 .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동안 무리들을 돌보고 또한 예수님이 말씀을 듣고 이해하느라 수고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영혼은 어느 때보다도 은혜로, 믿음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도 저물어 밤이 오고 있습니다.  

이제 밤이 왔고 조금있으면 풍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루 종일 수고한 결과가 혼란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밤이 왔는데도 쉬질 않고 예수님께서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35절)하고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에 순종해서 예수님을 배에 태운 채로 건너편을 향하여 건너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무리에서 벗어나 또 다른 배를 타고 따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무리로 왔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 자기도 은혜를 받아서 예수님을 따라 배에 올라 예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금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것입니다. 

 

엘리사 시대의 선지생도의 아내의 이야기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겠다고 열심내던 남편이 갑자기 빚만 남기며 죽게 되는 상황이 올 때도 있습니다.  

노상 우상숭배하며 살아가던 아브라함이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신앙의 길로 들어섰는데 갑자기 기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자연은 자연의 법칙을 통해서 움직입니다. 자연의 법칙은 간단히 말하면 인과응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세계는 반드시 인과응보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당하는 욥을 보고 세친구들은 네가 무언가 잘못했으니 그렇다 하며 자연의 법칙을 가지고 그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욥의 고난은 인과응보의 섭리를 벗어나 있었습니다. 친구들의 말이 틀린 것이지요. 지혜자라 하는 솔로몬도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인간 군상들의 일을 보며 능히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전 8:14)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8:17)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신앙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야, 당신이 잘못 믿어서 그래...라고 하면서 마치 욥의 친구들 처럼 사람들의 모든 일 하나하나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적어도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 원인을 알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신앙의 밤이 왔을 때에, 풍랑이 왔을 때에, "왜? 하나님이 왜? 내가 왜?"에만 초점을 맞추면 계속해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인생의, 밤은, 풍랑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 풍랑을 맞고 어떻게 풍랑을 이기는가입니다. 어떻게 헤쳐 나갈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차게 되었더라 (37절) 

큰 광풍(Furious squall) - 어디에서인가 모르는 고난, 폭풍...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다스릴 수 없는 것, 우리의 통치 밖의 일이다. 

문제는 큰 광풍 자체에 있지 않다. 

광풍이 만들어 내는 파도가 우리에게 부딪히면, 곧 그 파도가 우리를 때리고, 평안을 잃게 하고, 우리의 심령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우리를 압도해버리는 것이다. 

파도가 배에 부딪치며 배를 물로 가득 채운다. 

마음을 채우고 심령을 채워서 우리 안의 모든 생각이 그것으로 가득차게 한다. 이것이 우리 마음을 낙망케 하고, 좌절케 하고, 절망케 하는 것이다. 

광풍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파도가 내 마음을 때릴 때 그것이 무서운 것이다. 

 

염려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근심걱정 없는 사람 누군가? 

그런데 그것을 풀 수 있는 자는 누군가? 오직 예수이다. 

풀수 없는 자에게 가서 아무리 넉두리 하고 푸념하고 해봤자 아무런 유익이 없다. 

그런데 근심 걱정 있을 때에 대부분은 혼자 끙끙 앓던가, 아니면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자에게 가서 푸념을 한다. 그래서 점점 더 물 가운데로 가득차게 된다. 

 

제자들은 어부였다. 그것도 갈릴리 출신 어부였다. 

바다와 배에 관한 일이라면 전문가들이었다. 

광풍이 불자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 때까지 그들은 예수님을 찾지 않았다. 

파도가 일어 배에 부딪칠 때도 그들은 예수님을 찾지 않았다. 

그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익숙하고도 전문적인 일들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 예수님을 찾았는가? 

배에 물이 가득차서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에서야 비로서 예수님을 깨웠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깨울 때까지 침묵하셨다. 제자들이 볼 때에 잠자고 계셨다. 

 

  •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38절) 

자기가 할 수 없을 때에야 비로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아 깨운다. 

그런데 제자들의 깨우는 말이 재미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왜 알아서 미리 미리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우리가 아는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대로 이것저것 다 하고 있는데 왜 거들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고 외침이 아닐까? 

두려운 일이 생길 때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에, 빌립보서기자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먈한다. 

그런데 우리는 염려하며, 근심하며,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아니면 힘에 부치는 그런 일들도 우리가 할 수 없어서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도 하나님께 아뢰거나 기도하지 않고 나중에 와서 하나님이 왜 이 지경까지 우리를 내버려 주시는가라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것은 원망의 소리다. 

우리가 주를 배에 싣고 이렇게 잘 모시고 다니는 데 왜 우리가 죽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우리도 주님을 그저 잘 모시고 다니면서 우리의 의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가? 내가 가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주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주님은 잠자코 계세요. 내가  다 알어서 할께요하지는 않는가? 

 

고물은 배 후미 선장이 배를 지휘하는 곳입니다. 

마치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인것처럼 예수님도 배의 선장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게를 베고 주무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스스로 배를 움직이며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물이 배에 가득차서 죽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서 예수님께 원망섞인 목소리로 주님을 깨우자, 비로서 주님이 깨십니다. 

다 늦은 것 같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늦은 것이 없지요. 

그리고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하십니다. 

광풍의 근원, 파도의 근원, 우리의 모든 염려의 근원에 대해 바로 진단하시면서 명령하시면서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바람에게, 바다에게 잠잠하고 고요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전문가, 배의 전문가였던 제자들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그들의 고통을 단지 말씀으로 잠잠케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비록 바람과 바다를 향했지만 제자들의 심령 속에는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잠잠하고 고요하라." 

"내가 옆에 있는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우냐? "

내가 옆에 있는데 왜 나를 제쳐두고 너희들끼리 힘을 쓰느냐? 

 

  •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는가?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40절) 

제자들이 지금 무서워하는 것은 파도였다. 폭풍이었다. 고난이었고, 고통이었고, 시험이었다.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갑자기 닥치는 파탄, 실직, 이혼, 암, 병.....

이런 것들은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인생의 광풍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그 광풍이 파도를 만들어 우리의 심령을 치고, 깨고 부스면 우리는 그런 것에 압도되어 믿음을 잃어버린다. 

예수님을 잃어버린다.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잃어버린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광풍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믿음이 있다는 것은 광풍에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다. 

광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잠잠할 수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십자가의 화형을 앞에 두고도, 사자들이 자기들을 삼켜버리려고 기다리고 있는 순교의 현장에서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고요하고 잠잠했다. 

 그것은 그들이 곧 자신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믿었기 때문이다. 

 

  •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41절) 

광풍을 무서워하던 제자들이 이제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예수님을 두려워한다. 

광풍을 무서워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 감히 "지금 뭐하고 있느냐?"고 불평하며 원망했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광풍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두려워한다.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 무서운 줄 알고 사는 사람은 결코 오만하지 않다. 교만하여 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 있는 자는 결국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묵상질문) 

1. 예수님을 배에 태우고 다니지만 혹시 주무시게 내 버려 두시지는 않는가? 광풍과 파도 앞에서 홀로 애쓰며, 그러면서도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2. 고난이 두려운가, 광풍이 두려운가? 실패가 두려운가? 아니면 정말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가? 

 

찬양)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