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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아침묵상 (마가복음 강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가복음 6:30-44)

by 소리벼리 2021. 3. 21.

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가복음 6:30-44) 

 

  • 앗수르에 의해, 바벨론으로, 그리고 페르시아로, 그리고 이젠 로마의 식민지로, 반세기 이상을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함이었습니다. 긴 식민지의 삶 속에서 그들의 희망은 오직 메시야가 와서 그들을 독립시키고 회복시키는 것, 아니 그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극소수의 배부른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목자 없는 양같이, 돼지 쥐염열매를 먹고 사는 탕자와 같이, 너무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거리의 대부분의 사람들, 전체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은 하루 하루의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벅찬 그야말로 극빈자들이 넘쳐나는 곳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전합니다. 

 

  •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등장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그들의 갈증을 채우는 샘물이었습니다. 역사의 오랜 어둠을 통해 가난과 질병이 가득찬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희망을 주었고, 실재로 그가 만지는 병자들은 나음을 입었습니다.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들으러, 그의 만지심을 바라면서 몰려들었습니다. 

 

  • 이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정만 5천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왔습니다. 소망을 찾으러 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살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만사를 재쳐두고, 어쩌면 재쳐둘 만사도 없었기에,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없었기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도 모릅니다. 

 

  • 예수님또한 그들을 불쌍히 보시면서 날이 저물때까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전하는 자도, 말씀을 듣는 자도 내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아니 뭐 달리 변화를 기대할 것 없는 내일이라는 시간보다 지금 듣는 이 말씀이 더 가치있고 단맛이었고 잠시나마 내일의 걱정을 잊고 살 수 있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지고 어두우면 몰려드는 것은 걱정입니다. 이제 내일을 걱정해야 합니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옵니다. 밤이 오니 말씀의 즐거움도 꿈처럼 깨고 걱정과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변화된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더 어두워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더 늦기 전에 촌과 마을로 가서 무언가를 사먹게 하소서..." 

 

  • 장소는 빈들이고 때는 저물어 가는 황혼입니다. 먹을 꺼리를 구할 때도 없고 살 때도 없습니다. 마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빨리 마을로 보내자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마을로 간다해도 과연 음식을 구하거나 사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들 대부분은 음식을 사먹을 돈이 있을 턱이 없는 자들입니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어쩌면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수없이 다루어져 왔던 말씀이지만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은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이 구절입니다. 

 

  • 제자들에게 떨어진 주님의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그들이 줄 수 있는 형편인가? 

지금 보다 훨씬 어려울 때의 상황. 잘 사는 어부가 아니라 하루 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어부... 

그나마 어부의 직업도 그만두고 지금은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와 함께 다니면서 누군가 예수님 때문에 음식을 대접을 하면 덩달아 먹고, 예수님의 이름을 팔면서 음식을 구하러 다녔던 사람들. 배고픈 그들에게 안식일이라는 율법도 무용지물

 

그리고 지금 당장의 형편은 어떠한가? 31절에 보니까 그들 역시 지금 굶주려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 둘씩 둘씩 보내어 전도도 하고 돌아왔던 그들이다. 심신이 피로하고 배고프고, 지금 급한 것은 다른 무리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쉬어야 하고 먹어야 되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들보고 한 두 명도 신경쓰는 것이 어려운데 5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결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5천명을 먹이신 것은 결국 주님이 하셨다.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통해 주님이 축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제자들이 겪어야 했던 심적, 육적 어려움을 잘 들여다 보지 못한다. 

그저 어린 아이보다 못한 어리석은 제자들로서 그들을 평가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자로서 이 자리에 함께 한다면 이 상황에서 믿음을 나타낼 자신이 있는가? 주님이 저들을 먹이라고 할 때에 심신도 지쳐있고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믿음 가지고 5천명에게 다가갈 자가 있는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단지 자신의 능력을 생색내고자 하신 말씀일까? 하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 아이 앞에서 저들의 무능을 드려내려고 하신 것일까? 

그 말씀에 진심을 없었을까? 그저 빈말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일까? 

정말 그들이 저들을 먹일 것에 대한 기대나 소망은 없었을까?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 프란치스코 교황- 지금 시대에 있어서 신앙인이 가장 경계하고 싸워야 할 것은 자기만 잘 살고자 하는 물질주의 문명. 

신자유주의 경고의 메시지 

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기대- "부유한 자를 더 배부르게 하면 결국 가난한 자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 부자의 주머니는 결국 열리지 않는다. 그들은 또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다. 

 

  • 우리나라의 경제정책- 부자 감세... 자유경제의 원칙을 고수한다. 

부자가 잘 살면 그 효과가 중산층 빈곤층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교황이 말했듯이 그리고 유럽의 경제 정책이 표방하듯이 부유층의 주머니는 가난한 자들에게 열려 있지 못한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어떻게든 세금이라든가, 기부문화를 통해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른바 수정 자본주의이다. 그것이 그나마 다 같이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이다. 가난한 자들은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고 부유한 자들은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얼마 간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의 방법은 이런 제도적인 개혁을 넘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파격적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너희가 저희를 먹이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부유한 자들을 보고 좀 저들을 도와달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 

제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너희들끼리 해결하라고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제자들에게 저들을 먹이라고 한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는가?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번 물으신 다음에 하신 말씀.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부자라서?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자냐? 

"나를 사랑한다고 하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요한복음에 요한 서신에 나와 있는 말씀.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곧 먹이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로 저들을 먹이는 것이 사랑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먹이고 씻기는 것으로 그 분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배반하고 떠나간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회복시키실 때에 한 일도 불을 피워 그들에게 고기를 먹이신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한마디로 죄인을 그 분의 살과 피로 먹이시는 것이다. 

 

  •  한국의 천주교- 학문으로, 선진 문명으로 (조선 중기부터...) 신진 엘리트 계급에 의해 소개...실패- 천주 실의....실학

                    100년 후의 기독교 - 가난한 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학문이 아닌 예수그리스도가 전파... 

                    복음은 복음으로 연다.  

                    

예수 그리스도- 지배자를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소외된 자, 가난한 자를 통해 퍼져나갔다. 

75세나 된 무자한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조상을 세웠고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를 쓰셨다. 

왜?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세상의 모든 권세....     

 

  •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들을 먹이라"한 대상은 단순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었다! 

 

왜? 이미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귀신을 쫓고 복음을 전파한, 복음을 경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이미 예수의 권세가 있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그들은 이미 먹이는 자다. 나누어 주는 자가 된다. 

부유한 자가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 없어서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가난한 자가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천국을 소유한다. 

예수로만 채울 수 있는 자가 근심하지 않고 자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나눌 수 없는가? 왜 먹이질 못하는가?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결국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간절히 교회의 사명, 비전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주신 말씀이 "너희가 먹이라"라는 이 말씀이다. 

지금까지 제가 목회한 3년동안 우리는 광야를 지내왔고, 없는 중에 우리를 먹이신 하나님의 기적을 체혐했고, 그분의 사랑을 받았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랑을 체험한 우리에게 너희가 저들을 먹이라 하신다. 

아직까지 "누굴 먹여야 할지, 무엇을 먹여야 할지" 모른다. 단지 기도로 준비한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과 함께 그 마음을 품었으면 좋겠다. 

 

우리보다 낫다 할지라고 먹이고 품을 수 있는 성도, 내가 비록 더 힘들고 더 어려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여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제자이고 사도이다. 

 

그 마음만 품으면 예수께서 하신다. 그 마음을 품으면 우리 가정의 어려운 자를 내가 먹을 것이고, 우리 주위의 어려운 자들을 우리가 먹일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떼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먹게 하셨다. 그것이 성찬이다. 

 

 

묵상질문) 

1.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한 구절을 깊이 묵상해보자. 내가 누구를 먹일 수 있을까? 주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사랑은 무엇일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