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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세기 32:22-32

영화 Transformer – 자동차가 살아있는 로봇이 되어 지구를 구하는 이야기. 어렸을 때에 만화영화의 내용같은 이야기들. -> 아이들만 볼 지 알았는데 어른들이 더 좋아하는 영화,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 만화가 영화가 되었다. 어른들은 왜 이 영화에 열광했는가? 꿈으로만 꾸던 일들이 실재 영화가 되어 나타났다. 변화를 향한 갈망을 만족시켜 주었다. 사람은 항상 변화를 꿈꾼다. 변화하기 위해 세미나도 참석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다이어트를 하기도 하고 방송을 본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타나서 네가 바꾸기를 원하는 것 한 가지를 바꾸어 주겠다. 넌 무엇을 바꾸기를 원하느냐? 하면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단 한가지만 여러분이 바꾸고 싶은 것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시고 싶은가?  , , 직업, 교회 건물, 남편이나 아내?

실재로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된 사람들의 10년 뒤의 삶을 조사해 보니까 많은 변화가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집과 차를 바꾸거나 해외로 집을 옮겼고, 많은 퍼센티지의 사람들이 갑자기 돈이 생기니까 실재로 배우자를 바꾼 경우도 많이 있었다. 물론 전액 교회나 어려운 단체에 헌금을 낸 사람도 적은 숫자이지만 있었다. 세상의 복, 물질의 축복은 대개 우리의 외형을 바꾸어 준다. 직업을 바꾸어 주고, 옷 차림새를 바꾸어 주고,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 주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은 우리의 내면을 바꾸어 준다. 우리의 존재를 바꾸어 준다. 정욕과 죄로 가득 차 있거나 지배 받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열매이다. 그래서 신앙 안에 있는 사람, 말씀 안에 있는 사람은 변하는 사람이다. 내면이 변화하지 않는 다는 것은 곧 생명력이 없다는 것이고, 내가 썩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다듬어 가신다. 날마다 변화시킨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고 성화이고 성결이다. 내 뜻, 내 욕망을 위해 신앙 생활하는 모습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로 거듭나는 과정이 우리 인생 과정 가운데 있다.

오늘 이 시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변화 될 수 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변화되는지 신앙인의 변화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한다. 수천 년 전에 천사와 벌인 씨름이 오늘 당신이 변화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을 수 있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지금의 나를 향한 살아있는 말씀이고, 변화시키는 말씀이다.  이 씨름을 통해 성공을 희망하던 한 모사가 야곱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이 되고 그를 통해 나라가 세워지고, 그 민족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씌여 진다. 나 하나 밖에 모르던 야곱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의 통로, 구원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가 일정한 틀 안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할 수 있도록 우리를 훈련시키고 씨름해 주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이 장면에서는 변화에 필요한 네 가지 단계를 명확하게 보여 주는데 그것은 위기, 고독과 인내, 고백, 변화이다.

 

1)     위기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는 바로 그의 삶 때문이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기꾼, 약탈자의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의 모습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에게 이기기 위해 발뒤꿈치를 부여잡고 태어났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야심을 이루는 삶이었다. 그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빼앗아 버린다. 자기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 형제이지만 거래를 하는 것이다. 가족끼리의 사랑도 없다. 오직 자기 야심을 이루는 거래만 있을 뿐이다. 아버지도 속이고 축복을 받고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게 된다. 이것은 온전한 신앙인의 삶이 아니다. 신앙인은 도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군다나 진실이 밝혀져서 창피한 일을 만들지 않다. 오직 모사를 행하는 것은 악인이 하는 행위이다.  

시편의 서론 격인 1편에 악인을 무엇이라 합니까? 바로 꾀부리는 자를 악인이라 하는 것이다. 그 꾀부리는 자의 대표자가 바로 야곱이었다. 야곱은 악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조상 야곱의 삶이 이러했음을 말하며 때로는 그리스도인도 복을 얻기 위해 남도 속이고 때로 속인 것이 밝혀져서 도망하는 그러한 삶을 그럴 수도 있다하며 합리화하지만 이것은 마귀적인 발상이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 밝혀져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떳떳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곱의 이러한 삶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아직 거듭나지 못한 표면만 신앙인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만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 뜻대로 할 수 없는 초라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을 갔는데 속이는 삶을 살아왔던 야곱이 이제는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봉사했는데 라반의 속임수로 7년을 더 봉사해야 했던 것이다. 남을 속이면서 산 사람은 결국은 그 값을 이 땅에서도 받게 되어 있다.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다. 끝을 보면 드러난다.

이 때부터 야곱은 라반과 속고 속이는 반복적인 삶의 전쟁을 치룬다. 가축을 편법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자 급기야 라반은 야곱을 외면하게 되고 결국 야곱은 다시 라반의 집을 떠나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런데 자기 집에는 누가 있는가?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형 에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꾀를 부리는 삶의 모습이다. 가는 곳마다 적이 있다. 편히 쉴만한 곳이 별로 없다. 항상 적을 염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혹 우리의 삶의 모습은 아닙니까?

 

야곱은 자신의 그 사기꾼 같은 삶 때문에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다. 내가 더럽고 추하기 때문에 그대로는 더 이상 살수가 없어서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다. 우리도 자신이 더럽고 추하게 느껴 질 때가 있다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인간을 AS하는 매뉴얼-> 성경이다. 오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간을 치료하고 회복하고 변화시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삶 속에 위기, 문제, 짜증나는 상황 혹은 좌절을 겪게 하신다. 왜냐하면 현재 경험하는 고통이 변화에 대한 두려움보다 크지 않으면 우리는 좀처럼 변화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이어트, 담배, 맨날 끊는다고 하면서, 줄인다고 하면서 하지 못하는 이유그냥 지내는 것이 줄이고, 끊는 것보다 편하기 때문에  그런데 체중이나 식생활 때문에 몸에 심각한 문제가 있으면 그땐 억지로라도 하는 것이다.

 

2)     고독

둘째로 그는 홀로 남았기 때문에 씨름했다. 홀로 남겨지는 것은 삶의 극단에 와있다는 것이다. 절대 절명의 상황, 위기의 때이다. 왜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까? 머리를 굴렸기 때문이다. 머리를 굴려서 재산도 모으고 가정도 이루었지만 정작 살만해지니까 갈 때가 없는 것이다. 그냥 살자니 라반이 두렵고 집에 가자니 에서가 두렵다. 그렇다고 그 많은 식솔들을 데리고 제 3의 거처를 삼을 수도 없다. 그래도 악인일지언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어찌 이방인과 같이 살자고 떠날 수가 있는가?

그는 재산을 5등분해가지고 한 차례식 한 차례식 형 에서에게 보낸다. 왜 나누어 보내나? 여차 하면 도망하기 위해서이다. 또 선물도 한 꺼번에 받는 것보다 여러 차례 나누어 받으면 똑같이 받아도 기쁨은 배가 되는 것이다. 자신도 위하고 형 에서도 생각해서 그는 머리 굴림의 극치로 이렇게 형 에서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종들에게 이렇게 아뢴다.

“에서는 주인이고 야곱은 종이라 하라결국 재산도 이루고 명성도 이루었지만 결국은 사람 앞에 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녀와 아내까지도, 가족들까지도 이용해서 다 건너 보낸다.

무슨 소립니까? 대개 도망가더라도 자기 가족은 챙기는데 야곱은 아내와 자녀까지 건너 보내는 정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 홀로만 남게 됩니다. 가진 것을 다 보내고 이제 남은 것은 자기 몸뚱아리 하나이다. 그런데 그렇고도 자기 목숨에 대한 보장도 없다. 계속 두려움이 남는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의 꾀로 살아남으려 할 때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이 한낱 지푸라기같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머리를 쓰고 쓰다가 그래도 해결이 안되니까 이제 하나님과 씨름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야곱을 보면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먼저는 그가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 남았을 때에 그 때에라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렸다는 것이다. 사람은 참 이상해서 남은 것 없이 다 망했을 때에도 그래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의지할 데 없자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생각했다. 오직 그 분만이 자신을 구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그런데 이럴 때에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그 분은 우리와 씨름해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염치없어도 다시 부르기가 창피해도 그때에라도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신다.

 

3)     인내 끊질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제나 위기를 통해 우리에게 변하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주신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홀로 고백하게 한다. 그런데 변화에 대한 갈망이 있다 하더라도 그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시지는 않는다. 진정으로 변화를 원하는 모습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것들을 놓치는 경우는 너무 빨리 포기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고 또 쉽게 낙심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즉석에서 얻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음식부터 만남이나 성공 등도 즉석에서 얻기를 원한다. 그래서 한 번 기도하고 그 응답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어떤 결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으면 중단하고 과거의 나, 하나도 변화되지 않은 나로 돌아간다.

진정으로 우리가 변화를 원하더라도 그것이 단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고칠 때에도 삶의 과정을 통해서 쌓여왔던 습관이나 상처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하시고 다듬어 가신다. 심리학자들은 새로운 일이 습관이 되려면 적어도 6주 동안 매일 같이 반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을 읽는 것에 습관을 들이려면 최소 6주 동안 매일 같이 읽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려고 작정한다. 그런데 2-3일 읽고 며칠 동안 잊었다고 다시 읽기를 반복한다. 6주는 켜녕 2주도 지속적으로 매일같이 읽을 수가 없다.

우리가 야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는 결코 천사를 놓치 않았다는 것이다. 천사마저 떠나가면 더 이상 소망할 데가 없기 때문에 온몸이 져러오고 아파와도, 살사 죽는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인 천사를 놓지 않았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이 축복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금식하고 부르짖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면 내가 엉터리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만나서 씨름해 주신다는 것이. 이 과정을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참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 정말 가장 더러운 자로 나를 보고 그렇게 때문에 오직 하나님 외엔 소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씨름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내가 하나님을 찾도록 나를 막다른 곳으로 인도해서 하나님을 갈구하게끔 하는 것이지만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나의 연약함, 더러움을 인정할 때에 부르짖어 나를 고치게끔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매달리는 것이다.

4)     고백

천사가 야곱에게 묻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니이다.”

왜 그것을 물었을까? 그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사기꾼이라는 자기 이름을 말하게 함으로 자신의 성품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 그를 아프게 한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라반과 지겹도록 속고 속여야만 했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래서 천사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넌 어떤 존재냐? 너의 성품이 어떠냐?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사기꾼입니다하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야곱이라고 밝힌 것은 그의 성품에 존재하는 결함을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변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약점, , 연약함, 실수 등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의 문제에 손대주지 않는다.

è  AS: 내가 말한 고장난 부분만 고쳐주지 그 외의 것은 손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가 더 많다.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야. 내 환경 탓이야. 내 부모 때문이야.” 우리의 잘못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힘든 시대다. 

그 분은 왜 우리를 통해 그러한 고백을 듣기를 원하시나?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미 잘 알고 계신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일단 우리가 인정하면 더 훌륭하게 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모든 자원과 능력을 베푸신다.  

야곱은 여지껏 누구에게 진 적이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상 이겨왔던 것이 야곱이었다. 그렇게 형 에서도 이겼고 아버지 야곱에게도 이겨서 축복을 받았고 라반에게도 이겨서 두 아내과 재산을 모았았다. 그런데 이제 얍복강 아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기는 자인가, 지는 자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에 여러분들은 어느 것을 행하는가? 항상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지 않는가? 매일 매 순간마다 이긴 것은 언제나 내가 아니었는가? 마음으로는 진다고 고백하는데 언제나 행동으로 이긴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는가.

하나님께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철저히 순종한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지기 시작하자 하나님이 나를 비로소 만나 주신다.

5)     변화

야곱이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매달렸을 때에 야곱은 자신이 천사와 씨름한 그 곳을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지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는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을 인정하자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하신 일은 그의 새로운 이름, 즉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신 것이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하나님은 야곱의 가능성을 보셨다. 세상적으로 강한 남자가 되려고 애쓰는 야곱의 껍질 속을 꿰뚫어 보셨다. 하나님은 야곱의 모든 약점도 아셨지만 그 아래에 담겨있는 고귀한 성품도 아셨다. “야곱아, 이것은 진정한 네가 아니다. 너는 사실은 이스라엘이다. 너는 왕자다.” 하나님은 사기꾼 야곱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왕자의 모습을 보셨고 그를 통해 민족 전체가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얻게 하셨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진짜 나를 발견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다. 죄에 쪄들고, 변해버린 나다. 하나님이 날 만나 주시고, 고쳐 주실 때, 난 비로소 진짜 내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의미: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 지금까지의 거의 모든 주석에 기록된 해석

표면적으로는 맞다. 야곱은 항상 겨루어 이긴 자였다. 에서와도 그렇게 라반과도 그랬다. 하나님의 천사와도 당신이 날 축복하지 않으시면 보내지 않겠다고 하면서 엉겨 붙으면서 물러나지 않는다. 언제나 끈질기게 주도하고 늘어져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어내고야 말았던 것이 야곱.

25절에 보면 천사가 그를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고 기록합니다. 천사가, 하나님이 정말로 진 것입니까? 이것을 보면 얼마나 야곱이 주도적인 사람입니까? 얼마나 끈질긴 사람입니까?

결국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는 '야곱'이라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는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불러라. 왜냐하면 네가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28).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28절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너는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르지 말거라. 네가 지금까지는 '야곱'으로 살아서,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그들과 겨루어 이겼고 오늘은 하나님인 나와 겨루어서까지 이기고야 말았잖니.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렇게 살지 말거라. 이제는 '이스라엘'로 살거라.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너를 주도하고 하나님이 너를 다스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하나님이 너를 끈질기게 주도하시고 다스리기를..."

이스라엘의 의미: 히브리 원어 사전-> “이스라> '주도하다, 끈질기게 다투어서 이기다, 다스리다'를 뜻하는 <사라>3인칭 평서형 또는 기원형입니다. 그리고 <>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부르던 하나님의 이름이다.그러니까 둘을 합치면 평서형으로 보자면 '하나님이 주도하다, 하나님이 이기다, 다스리다'가 되고 기원형으로 보면 '하나님이 주도하시기를, 하나님이 이기시기를, 하나님이 다스리시기를'이 된다. 이것이 히브리사전이 내린 이스라엘의 정의이다.

둘째 하나님의 응답은 돈이 더 많아 진 것도, 건강이 더해 진 것도 아니라 환도뼈를 치심으로 야곱을 더 연약한 자로 만드셨다. 순간만 하나님 앞에 굴복해서 약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약하게 해서 계속적인 연약함으로 살게 하신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연약한 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된다. 교만하지 않고 패역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지하게 하는 통로가 된다. 우리가 기도 안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대개 우리가 의지할 것이 있어서 그렇지 않은가? 아마 야곱은 환도뼈가 상해서 평상을 절뚝발이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걸어다니면서 매일 순간마다 자신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다시금 의지했을 것이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육신의 병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임을 알고 내가 연약한 것이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는 통로로서 은혜로 받아들이지 않았나?

세 번째 하나님의 응답은 야곱의 삶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31절에 보면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비로소 어두운 밤이 지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지껏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야곱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자신의 꾀를 의지해 살던 악인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브니엘은 곧 하나님의 얼굴이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은 모든 것을 버렸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본질이 바뀌고 본질이 바뀌니까 환경도 바뀌었다. 자신을 죽이러 올 줄 알았던 형 에서가 자신을 반기러 오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야곱을 통해서 제사장 민족이 시작된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하나님 앞에 굴복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시며 그 가정,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것이다.

지금 - 다시 한 번 야곱의 기도를 생각할 때....나 자신을 바라보고 철저히 하나님 앞에 굴복할 때...

굴복하고자 하나 매 순간 굴복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시간...

여러분은 야곱처럼 다급하지 않은가? 아직 의지 할 때가 있고, 다급하지 않아서 야곱처럼 기도하지 않는가?그럼 야곱처럼 자식도, 아내도 다 필요ㅠ없어지고 정말 홀로 남았을 때에 야곱과 같은 기도를 드리시겠습니까? 

왜 기도 안하는가? 무엇을 의지하기 때문에...

지금도 날마다 하나님을 이겨가면서 하나님은 이기는데 정작 이기지만 매일 지는 것과 같은 패배자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은 자신이 엉터리라고 생각지 않는가? 사기꾼같다고 여기지 않는가? 남을 이기려고하다가, 지는 것 같을 때는 한 없이 초라하게 느끼고 원망함을 느끼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홀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씨름하다가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이 아프더라도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야곱을 통해서 날 바라보고 야곱과 같은 절박하고 결사적으로 매달리자. 나 자신을 위해..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야곱의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씨름하는 자를 찾으신다. 자신을 걸고 육탄으로 기도하는 자를 찾으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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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미경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09.19 23:14

    살아가면서 변하고싶을때가 많았지만....특히 하나님과 가까워지면서
    더더욱 변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벽이라도 부디칠땐 여지없이
    무너지고 낙심하는 제 습성이 나의 변화를 또 방해하고. 주저앉고 말아버립니다.
    하나님과 겨루던 그 무엇과 싸우던 이겨야되는데....끝까지 해봐야되는데
    중도에 주저앉지않으면 변할수 있을거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