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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소명)

9:9-13

 

흔히들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는 일반인들, 특히 지성인들 사이에서도 예수를 성인이라고 합니다.  그 분은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인품이 아주 좋은 분이라고 예수를 믿건 안 믿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발견하는 것은 그 분이 주변 사람들과 의외로 갈등을 많이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웬만큼 인격이 갖추어진 사람들은 가능한 대로 충돌을 피하고 원만하게 지내기 마련입니다. 부처님이나 공자님도 전반적으로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계속해서 유대의 어떤 집단들과 갈등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십자가 처형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세상과 불화했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9장에는 예수님과 불화했던 세 집단이 나옵니다.

1)     9:1-8: 율법학자들-그들은 중풍병자를 향해서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 잡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말입니다.

2)     9-13: 바리새인들- 그들은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밥을 드시는 예수님을 보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런 행위들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3)     14-17: 세례 요한의 제자들- 그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런 금욕적인 삶을 추구해야만 했는데, 예수님에게서는 그런 걸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그 당시 모든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눈총을 받은 셈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신학자들이고, 바리새인들은 전문적인 목회자들이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수도승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당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듯 당시의 유대의 대표적인 종교인들과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그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랐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 형식적으로, 전통적으로 굳어져 있던 신학자들, 목회자들, 구도자들과 신앙의 모든 태도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마태를 제자로 맡으시는 장면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로마 정부 밑에서 세금 징수의 임무를 띠고 자기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여 로마에 충성스럽게 바치는 직업이 세리입니다. 한마디로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입니다.
 
로마의 세법대로라면 세액의 1 5푼을 차지하도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2, 3, 5푼까지 높게 초과 부과하여 그 차액을 착복했습니다. 세리는 로마 권력의 막강한 비호 아래 불법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로부터 로마의 관리나 군인들 보다 더 나쁜 민족 반역자로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부자에게는 뇌물을 받고 세금을 감해 주었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추가해서 세금을 뜯어냄으로 더욱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로마의 식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어겠습니까? 나라를 잃고 억압받는 것도 서러운 일인데, 같은 동족인 세리가 고혈을 짜듯 많은 세금을 갈취해 가니 그 원성이 얼마나 자자했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세리는 회당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 당했고 법정의 증인이 될 자격도 상실했습니다.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세리는 기생, 이방인, 죄수들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 속에서 사람이 아닌 짐승 취급을 당했고 늘 외면당했습니다.

한국에 굉장히 부흥한 한 대형 교회의 중창단이 있는데 그 중창단은 그 교회에 위탁된 목사님 자제들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교회 목사님들이 우리 자식 좀 잘 훈련시켜 주십시오 하고 맡긴 자녀들이지요. 그래서 그들을 2년여 동안 합숙시키고 훈련시키고 날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하면서 신앙적으로 훈련시키고, 성적도 상위권에서 떨어지면 안되고, 또 음악적으로도 철저히 훈련시켜서 해외 공연도 보내고, 발표회도 시키는데 한 사람당 일년에 들어가는 비용이 1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부담해서 철저히 훈련된 찬양사역자를 배출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목사님들이 이 중창단에 자기 자녀를 보내기 위해서 얼마나 경쟁이 치열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중에 술 담배 다하고 학교는 잘 안 다니고 새벽예배나 철야예배는 드려본 적도 없는 그런 친구가 들어온다면 이 중창단 분위기가 어떨까요? 아마도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게 열심히 자기 자녀를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자기의 공생애를 함께 하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전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사역을 위임할 제자를 뽑는데 사람들로부터 취급 받지도 못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는 마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제자를 삼으시고 그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하며 바리새인들이 의아함 반, 조롱반, 비아냥 하듯이 다른 제자들에게 묻는 것이지요. 바리새인들이 누굽니까?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경건성은 자타가 다 인정합니다. 유대교의 전통은 바로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은 유대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러 정파 중에서 유대교의 정신을 가장 정확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그야말로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들에 의해서 오랜 동안 나라 없이 살아온 유대인들이 민족정신과 종교를 완전히 상실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고 병자에게 필요하다. 둘째,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셋째, 나는 선한 사람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씀은 지금 바리새인들 입장에서 보면 충격에 충격을 주는 말씀이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와 근거를 예수님이 해체해버렸으니까요. 그들의 목표는 의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것 하나만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초개처럼 버리고 의인이 되는 것에만 몰입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이 당연히 이런 의인들을 구원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의인이 아니라 이들이 상종하지 않으려 했던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일종의 폭탄선언입니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아주 당혹스럽게 들립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딜레마, 예수님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위해 모두 죄인임을 가정하고 인정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찬양을 부르며 예전에 지은, 혹은 지금도 가끔씩 짓고 있는 죄를 회개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죄인은 예전의 죄를 생각하며 뉘우치는 그런 죄인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혐오하는 파렴치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가능한 한 교양이 있고, 세련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는 상반되는 두 가지 인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죄인이라는 의식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인이라는 의식입니다. 추상적으로는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실제적으로는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자는 세리의 정체성이고, 후자는 바리새인의 정체성입니다. 이런 이중적 자기 인식으로 인해서 기독교인의 삶은 겉으로는 죄인이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바리새인의 잣대로 끊임없이 정죄하는 허위의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적어도 저 정도는 아니지, 저보다는 낫지 하는 비교의식, 상대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죄인으로 사는 게 좋다고 말씀한 게 아니라 그들을 부르러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세리와 죄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신 것도 아닙니다. 만약 모두 세리와 죄인이 된다면 그 사회는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바리새인처럼 모범적으로 살 수만 있다면 썩 괜찮을 사회가 될 겁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세리보다는 바리새인들이 개인이나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의 모범적인 삶이 아니라 그들의 의식, 그의 생각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신앙적 인식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기 의(), 또는 업적 의입니다. 자신이 이룬 업적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를 획득하겠다는 생각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생각으로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그런 의를 얻으려고 구도자적인 태도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 경건한 삶의 성과를 얻었으며, 그런 업적을 통해서 주변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마 오늘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신앙도 이와 다를 게 하나도 없을 겁니다. 유럽의 기독교는 모두 죽었다고 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꽤나 잘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철저한 자기 의입니다.  

(영국 형님의 교단에서 초청받아 간 한국 교회 목사님들...)

바리새인들의 자기 의가 왜 문제일까요? 그들은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의인과 죄인을 구분합니다. 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느냐, 왜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주장과 논리를 근본적으로 뒤집었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입니다. 죄인은 자기를 내세울 만한 것이 업었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달리 바리새인들은 내세울 게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중심으로는 자기가 이룬 업적에 매달릴 뿐입니다.  

지금 시대 교단적으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 동성애 문제: 한국교회- 무대책

얼마 전 홍석천- 동성애자들에 대한 설움, 이해…. 이것은 선천적인 것이다. 생물학적이고 유전자적인 기형이다. 자기 잘못이 아니다…. 실재로 동성애자의 뇌 구조는 정상인들보다 다르다

아주 급진적인 교단, 신학자- 과학의 발달로 동성애가 선천적인, 생물학적인 문제라고 밝혀졌기 때문에 구약 시대의 법을 적용해서는 안된다.

성경- 동성애를 분명히 죄로 여김. [ 1:24- 1:27]

(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1: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l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l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겨서

l  그 결과- 순리를 역리로 바꾸어 쓰게 함. ->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음욕의 결과

 

그런데 더 중요한 구절이 그 다음에 등장
[
1:28-32]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1: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동성연예도 분명히 죄의 결과이고 음욕의 결과이지만, 다시 말해 죄악된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들이지만 사형에 해당되는 더 큰 죄는 무엇인가? 오히려 앞에 자들은 살아가면서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사회나 가족으로부터 받았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더 큰 죄를 저지르는 자들.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

è  왜 이런 죄는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하는가? 남을 정죄하는 데만 앞장서고 싸우는가?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마태는 어떤 자였나? 부도덕하고 불의하며 돈을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지탄의 대상, 그러나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왔던 자. 그는 로마서에서 말한 대로 자기 이익을 위하여 불의를 일삼고, 탐욕이 가득했던 자, 돈을 위해서라면 무자비하고 무정한 자

그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따라 오너라…” 불러주셨다.

마태는 이 한번의 부르심으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됩니다. 이 한번의 부르심을 통해 마태는 초대 교회의 유일무이한 열두 사도가 되었고, 신약 성경의 첫번째 책인 마태복음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위인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자, 아브라함, 모세, 베드로,

그 하나님께서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았던 양치기 목동 다윗을 부르시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고, 가난하고 무식한 어부였던 베드로를 부르시어 초대 교회의 기둥으로 삼으셨으며, 예수님을 대적하던 사울을 부르시어 온 지중해 세계에 복음을 전파한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토록 강력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이토록 대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같은 부르심을 신적 부르심, Divine Calling 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소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는데,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위해서 자기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을 대신해서 번제를 집례했던 사울 왕이 그랬고,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그랬고, 모세가 애굽의 왕자였을 때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그때 모두 자기 열심이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렸고, 유대 청년 사울은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들였고, 모세는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해 애굽의 병사를 때려눕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자기 열심으로 했던 일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머무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떼 처럼 몰려듭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이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마태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중에 섞여 있지도 않았습니다. 세관에 앉아서 자신의 직업인 세리의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기 일에만 열중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무슨 특별한 일을 하거나, 금식 기도를 하며 준비했던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으로 계획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태는 아무런 기대나 준비나 특별함이 없이 날마다 앉아있던 세관에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앉아 있었습니다. 평범한 마태의 일상 한복판에 예수님이 찾아오셨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이 특별해졌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 가운데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그때부터 특별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온 것은 자기 발로 온 것 같지만 친구에게 이끌러 온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불러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시고 믿음을 주셨기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셨다는 이 소명의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불러 주신 소명의식을 깨닫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소명의식이 없는 사람은 예배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은 조건 따라, 환경 따라 자기의 감정 따라 치우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섬깁니다. 예배를 생명처럼 지킵니다. 봉사, 헌신, 충성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세리였던 마태가 제자로서 부름을 받는 장면.

마태 마태 복음의 저자.

예수의 생애를 죽 기록하다가 중간에 자신이 제자로 부름받은 얘기를 짧고 간략하게 간증. 이 글을 쓸 때의 그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마태의 이름

본문은 막2, 5장에서 똑같이 취급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마태를 레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몬은 베드로라고 개명해 주신 것처럼 레위에게 마태라는 이름을 주면서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레위는 제사장 지파 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의 준수자였고 수행자였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비추어서 볼 때 마태는 자기가 세리와 같이 죄인 중의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율법에 비추어 보아 자기는 사형에 처할 만한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자였음을 자기가 쓴 마태복음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세리 레위에게 예수님께서는 마태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했더니 예수님께서 은혜로 그를 택하시고 나를 따르라며 제자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마태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던 중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처럼 자비롭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소외를 당하고, 비루한 인간으로 취급을 받던 사람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로 부름받은 마태는 이전의 세리 직업을 정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제자가 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제자가 됩니다.

마태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마태에 관해서 기록되어 있는 곳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장면( 9:9, 2:14, 5:27) 12제자의 명단( 10:3, 3:18, 6:15, 1:13) 뿐입니다. 12제자 중에 마태 처럼 조용히, 언급되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라비아 이디오피아에 가서 선교했다. 돌아오는 길에 잡혀 T자형 십자가에 달려 칼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그는 최후까지 왕 되신 주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고 자신의 이름은 낮추고 감추면서 오직 예수님만 증거하는 진실하고 참된 제자였습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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