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92019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  
  •  
  •  

제목 : 그리스도인의 복 2

본문 : 마태복음 5 1-12

구약시대 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구절 신명기 28

è  땅의 복, 자녀의 복, 물질의 복, 번영의 복

그 복의 시작은 아브라함을 부름에서 시작/ 아브라함: 우상을 섬기던 자, 하나님을 모르던 자.

è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리라.

è  떠나서, 나의 땅으로 가라. 너를 하나님이 예비한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복을 얻게 하고 그 복의 기원으로 삼겠다.

l  구약의 역사: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의 우상에서부터 떠나서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것. 우상을 왜 믿느냐? 땅의 복을 달라고그런데 그 땅의 복도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누구냐? 애굽이냐, 가나안이냐? 바알이냐 하나님이냐의 싸움.

신약시대 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구절 마태복음 5장 팔복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얻은 것 - 영생, 천국

천국이 주어진 우리에게 장수하고, 배부르게 살고, 땅의 소산이 많고, 그러한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마태복음 5-7장의 산상 수훈은 무엇인가? 천국의 복음.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예수의 가르침.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인 팔복-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8가지 통로, . 하늘 나라의 통로,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8가지 단계의 통로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오는 수많은 무리들 중에서 산에 오르는 자, 예수와 함께 산에 오르는 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바로 산상수훈이고 그 중의 핵심이 팔복의 말씀이다.

: 노아가 사람들의 온갖 조롱을 받으며 온 평생 힘을 모아 방주를 만든 곳. 모세가 자기 자신이 완전히 낮아져서 자신의 모든 욕심, ,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교제 했던 호렙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시내산. 그곳으로 무리들을 이끌고 가신다. 그 곳은 어떤 곳? 땅의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만 있는 곳.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무리, 여러 목적을 가지고 다가오는 수많은 무리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때 무리들 중 일부가 예수님을 따라 그 가파르고 험난한 산을 함께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자기 이익이나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쫓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편안한 들판에도 미련이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허물과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혀 무가치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의 능력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설 수 없는 불쌍하고도 불쌍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던 그들은 예수님을 쫓아 예수님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제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향해심령이 가난한 너희들이 복이 있다. 천국이 너희들의 것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다시 입을 열어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우리말 “애통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펜테오”는, 가슴이 찢어지도록 처절하게 우는 것입니다. 통곡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슬퍼서 가슴을 치며 소리내에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온 자들 중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따로 있고, 또 애통하는 무리들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곧 애통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그들, 전혀 무가치한 그들, 심령이 텅 비어버린 그들이 바로 애통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애통은 누구를 위한 애통이겠습니까? 바로 나를 위한 애통입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며 우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도 불쌍해서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때문에 슬피 우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과 거짓과 이기심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배신과 불신을 통회하며 우는 것입니다. 질병과 실패와 좌절로 인해 그저 가슴이 찢어지도록 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애통하는 자입니다. 내 안에게는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절망 밖에 없어서, 그저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자가 애통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 애통은, 회개의 애통이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애통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는 자, 그들이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위로는 우리의 상상과 이성과 지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하늘의 위로, 천상의 위로, 온 우주만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것입니다.

ex) 요셉의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요셉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형들은 그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원수같은 존재였습니다. 형들에게 버림을 받은지 20년이 지난 어느날,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은 극심한 흉년으로 곡식을 꾸러 온 형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렸던 그 원수와도 같은 형들은 마침내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 형들을 보고서 한 일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창세기 45:1-2의 증언입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은 형들이 찾아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가운데 곡식을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형제의 정을 억제하기 못하고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얼마나 크게 울었던지 애굽 사람에게도 들렸고 바로의 궁중에도 들릴 정도로 방성대곡을 했습니다. 자기를 버렸던 형들을 보고,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은 방성대곡하는 것 애통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요셉의 애통은, 먼저는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형들에게는 동생이면서도 교만했었고, 아버지의 편애를 자랑하면서 형들의 시기심을 유발했던 자신의 이기적인 옛 모습에 대한 애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수와도 같았던 형들을 용서하는 사랑의 애통이었습니다.

용서는 내가 아파야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내가 아픔의 눈물, 애통의 눈물을 흘려야지만 진정으로 남을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못이 박히시는 고통, 보혈을 흘리시는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내가 아파야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형들을 만난 요셉은 회개와 용서의 애통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è  초대교회 교인들의 기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먼저 용서하는 연습.. 용서는 아프지만 그 용서를 통해서 나의 죄가 사해진다. -> 그런데 왜 용서하지 못하는가?

우리도 울어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울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릴 눈물이 너무도 메말라버렸습니다. 영혼은 갈급해 하면서도 울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애통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날마나 불행하다고만 여깁니다. 사는 게 힘들다고 한숨만 내쉽니다. 힘들어 죽겠다고 탄식만 합니다. 병들어 아프다고 걱정과 염려만 쌓아갑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신앙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허물과 욕망이 내 안에 가득한데도 도무지 반성할 줄도 모르고 회개할 줄도 모르고, 뻔뻔하기만 해서 하나님 앞에서 왜 울어야 되는지 그 이유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혼이 병들었습니까? 인생이 답답하십니까? 질병 때문에 고통 당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깊이 통회하고 우십시오. 절망과 좌절 속에서 탄식만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 하십시오. 여러분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그렇게 울어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 눈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하늘의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체 온유한 자가 누구이기에 복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온유한 사람을 온순하고 부드러운 천성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매사에 화를 내지 않고 큰 소리 치지 않고 공격적이지도 않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받아들이는 사람을 향해 온유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리키는 온유한 사람은 천성이 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말온유한으로 번역된 헬라어프라우스길 들여진 온유함, 가르침을 통해 변화된 온유함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천성적으로 부드러운 성품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은 후에 성령으로 길들여진 성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된 성품, 믿음으로 성숙해진 온유한 성품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온유함은 하나님에게 속한 온유함이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온유함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온유함입니다.

마치 거친 야생마가 주인에게 길들여진 후에 철저하게 주인에게 속하여 주인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거친 야생마와도 같았습니다.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성이 조용하든 시끄럽든, 또 우리의 성향이 부드럽든 거칠든, 우리의 행동이 온순하든 난폭하든 그것에 상관없이,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 속에 있을 때에는 주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거친 야생마였습니다. 오직 천성의 성품을 가지고 있을 뿐 성령으로 변화된 성품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온유함에 관한 말씀은 수십 번 나오지만, 온유하다고 불린 사람은 딱 두 사람 뿐입니다. 바로 모세와 예수님, 둘 뿐입니다. 예수님이야 성자 하나님이시기에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성경에 나오는 사람 중에 온유하다고 불린 사람은 모세가 유일합니다. 민수기 12:3의 말씀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하나님은 모세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온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천성은 결코 온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로의 궁에서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에, 자기 동족이 애굽의 군사에게 핍박을 당하자,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군사를 쳐 죽였던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인을 저지르고는 비겁하게 도망을 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이나 숨어지냈습니다. 그리고 80세가 된 어느날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5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신을 벗는다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에 종은 신발을 신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인이나 신발을 신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종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더 이상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없는 거친 야생마처럼 제 마음대로 날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자신의 거친 천성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변화된 성품으로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온유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29에서 스스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은 내가 온유하니, 내게서 온유함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 베 푸신 성품들은 한결같이 온유하셨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 사회적으로 소외된 세리와 병든 자들, 죄인 취급을 받던 창기와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한없이 부드러우셨고 풍성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실 정도로 친절하셨고, 사회적으로 약자에 대해서는 놀라우실만큼 부드러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언제나 부드럽고 유순하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2:13-15의 증언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모세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단순히 성품이 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나 화를 내거나 분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자존심이 상했다고 해서, 경쟁에서 뒤졌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분노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이 무시당할 때, 하나님의 뜻이 손상될 때, 하나님의 집이 더렵혀질 때 분노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거룩한 분노라고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거룩한 분노를 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상처를 입었을 때, 하나님의 뜻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성령으로 길들여진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친절한 사랑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룩한 분노를 토해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 때부터 교회는 참 복음을 쫓는 사람과 상인들, 신앙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과의 전쟁이 늘 있어왔습니다.

 

중세의 신학자 중에 에크하르트 하는 사람은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1 12절에 대한 설교에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던 이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모두 상인들(businessmen)입니다. 심각한 죄를 짓지 않으려 주의하고, 좋은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선한 일들을 합니다. 곧 금식과 철야와 기도, 그리고 다른 무슨 선한 일들이 있으면 그것들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 보답으로 뭔가를 되돌려 주시도록 그렇게 합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쁘게 하시려고 뭔가를 해 주시기를 바래서 그 일들을 합니다. 이것은 순수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것에 대한 답례로 무언가를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주님과 상업적인 거래를 하기를 원합니다.

그에 따르면 성전 안의 장사꾼들은 악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좋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들이란 적당한 수준의 종교적,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면서 살지만 온전히 주님만을 사랑하는 헌신된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이들은 심각하게 악한 죄를 짓지 않는 주의력이 있으며, 선한 행동들을 할 줄 아는 양식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좋은 삶'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자기 사랑의 표현이다. 주님으로부터 무언가를 대가로 얻기를 바라서 드리는 일종의 ‘뇌물’이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이들은 예배자가 아니라 주님과 “상업적인 거래”를 하려고 드는 “상인”이라고 말한다.

유진 피터슨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영성 저술가는 미국교회가 회중을 소비자 집단으로 만들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교회에서 화려한 무대나 연출된 예배를 통해서 성도를 소비자로 생각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파는 거래의 장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성의 문제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간 자기 희생과 부인의 길의 정반대로 걸어가게 합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없으면 언제든지 옮기는 소비자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7-80년대의 한국 교회의 급속한 성장에는 강단에서 대량 생산해 낸 ‘축복’이라는 상품이 인기리에 판매된 데에 한 원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소비주의 영성에서 교회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일어나는 장소가 아니라 시장과 같이 흥정을 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연합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기도자의 만족을 목표로 하는 ‘굿 딜’을 위한 거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신앙을 이제는 벗어던지고 정말 복음을 따르는 건전하고 온전한 신앙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한번 둘러봅시다. 우리는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고분고분하고 있습니까? 나의 욕망과 이기심에는 아무런 저항 없이 한없이 고분고분하고, 세상과 하나님께 양다리를 걸치고 우유부단하게 살아가고, 교회가 상처입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질 때도 그저 조용히 바라만 볼 뿐 침묵하지는 않았습니까?

반대로, 내 작은 자존심에 생채기가 좀 났다고 해서 벌컥 화를 내고, 내가 손해 좀 봤다고 해서 내 의견과 다르다고 해서 분노하고,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무례히 행했던 적은 없습니까? 이같은 모습은 결코 온유한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온유한 사람이 되십시다. 약한 자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분노할 수 있는 온유한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천성대로 제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길들여지고, 성령의 성품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약한 자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겸손한 친절을 베풀고 사랑하고 위로하고 끌어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욕망이나 자존심 때문에 성내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거룩한 분노를 발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