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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에 보면 나아만은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된 문장에서 보면 'Naaman was a great man'라고 합니다.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는 용장이었습니다. 그 나라의 왕도 그를 위하여 아무것도 아끼지 않고 그를 위했습니다. 세상의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저로 전에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고 하십니다. 영어로 표현된 것을 보면 through him the LORD had given victory to Aram.”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심으로 그가 전쟁에 나가 승리하도록 도와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아만은 세상적으로는 부귀 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Now Naaman was commander of the army of the king of Aram. He was a great man in the sight of his master and highly regarded, because through him the LORD had given victory to Aram.

말하자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문장을 들여다보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자의 한계 또한 보게 됩니다. 1절 시작을 보면 나아만을 단지 아람의 군대장관이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아람왕의 군대장관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우리가 미국의 국방장관을 표현 할 때, 미국 오바마의 국방장관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냥 미국의 국방장관, 한국의 국방장관이라는 말을 쓰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유독 나아만은 아람이라는 나라의 왕의 군대의 장군이었다. “A commander of the army of the king of Aram.” 이라고 하면서 어찌 보면 쓸데 없이 말을 덧붙입니다. 그리고 그냥 존귀한 자가 아니라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합니다.  Great man great man인데 ‘in the sight of his master,’ , 주인 앞에서 존귀한 자라는 것입니다. 왜 구태여 아람왕을 끼워 넣어서 표현을 했을까? 성경의 표현을 세심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올라갈 수 있는 위치는 항상 상대적입니다. 항상 누구 안에서, 혹은 누구 보다 높은 것이지요. 그리고 어떤 위치에 올라가도 그 위에 또 다른 존재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인정받느냐 하는가에 따라서 내 존귀함이 인정되는 것이지, 나 홀로 자격이 되었다고 내 가치가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나를 평가하는 평가가 주권자가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 가장 위엔 하나님의 평가가 뒤따릅니다.

그가 존귀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람왕의 인정이 있었어야 하는데 아람왕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아만 장군 앞에 서 있는 두 존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지금 아람왕으로부터는 인정받아 존귀한 자로 여겨지고 있지요. 그 이유는 아람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거래에 의해서 그는 지금 아람왕으로부터 존귀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존귀함은 지속적인 존귀함이 아닙니다. 자기가 왕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에만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영광입니다. 아람왕에게 필요가 없어지면 단번에 잃어버릴 수 있는 영광이지요. 그런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함을 얻었느냐? 그 말은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그를 통해서 아람을 구하게 하셨지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함을 받았다거나 어떤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아람왕으로부터는 존귀함을 받고 대접을 받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는 동떨어진 삶,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을 다음구절에서 보게 됩니다.

저는 큰 용사나 나병환자더라 -> He was a valiant soldier, but he had leprosy. *2

세상적으로 그는 왕의 인정을 받은 용감한 장수였지만 그러나그는 나병환자, 문등병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현 상황은 무엇입니까? 세상으로부터는 인정받아 떵떵거리며 살아가지만 그 떵떵거림은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는 저주를 받은 문등병자라는 것입니다. 문등병은 알려지기만 하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집안에까지도 수치가 되는 고약한 질병이었습니다. 아무리 권세가 뛰어나고 세상의 모든 부귀 영화를 누리는 나아만일지라도 문둥병이라는 불행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비록 용사요, 왕에게 존귀함을 받는 탁월한 지위와 명예가 있다 할지라도 그는 그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면 남에게 혐오감을 주는 대상이었고, 그래서 그것이 밝혀지면 결국 혼자만의 고통과 외로움을 감내해야 하는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국가의 제 2인자인 군대 장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전쟁 포로나 노예보다도 더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문둥병자였습니다. 왜 그의 존재 앞에 자꾸만 아람왕이 등장하느냐? 아람왕은 그의 약점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용맹스럽고, 그가 아무리 많은 업적을 쌓아서 백성들의 신망을 받아도 그의 약점을 왕이 세상에 알리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세상으로부터 추방되어야만 하는, 그래서 항상 왕에게 비위를 맞추고, 왕의 눈에 인정을 받아야 하는 신세에 놓인 인생. 그것이 나아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잘 보인다고 언제까지나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문등병은 점점 더 퍼질 것이고 더 이상은 왕이 가려줄 수 없는 암울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겉은 화려하고 대단했으나 속은 썩어 죽음을 기다려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부러울 것 없는 사람도 그것이 있어도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는 허다합니다. 아마도 나아만은 당대의 최고의 의술을 가진 의원들을 불러 끊임없이 치료받으려 애썼을 것입니다. 효험이 있다는 민간요법도 다 동원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다들 안타까워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나아만의 모습을 보며 그의 모습이 결국은 나의 모습이구나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겉으로는 화려하고 그럴듯합니다. 남들도 인정하고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이 잘 살았다고 자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은 어떻습니까? 자기만 아는 속, 자기의 진짜 실체도 괜찮습니까?

혹시 나아만처럼 남들이 모르는 아픔과 고통이 있지 않습니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약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남편문제로, 어떤 분은 자식문제로 힘들어 합니다. 그렇다고 남들에게 들어내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그런 자신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존재인지. 그래서 스스로에게 절망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까?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신의 솔직한 모습, 진짜 자기가 처한 위험을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미련한지, 그리고 나병처럼 자신에 치명적 문제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꾸미고, ~인척하고, 그저 남들 앞에 눈치보며 왕의 눈 앞에 인정받듯이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해결책은 없습니다.

차라리 아프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아프면 속히 병원 가서 치료받기에 낫게 됩니다. 그런데 나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살점이 떨어져 나아가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병입니다. 자신이 썩어도 자신을 살피지 못하면 아무 고통없이 그냥 죽어가는 것이 문등병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나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살피고 자신의 병,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살피고 인정하는 것. 자신의 실체, 자신의 병든 모습을 깨닫는 것.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야 치료의 길이 열립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뭔가요?

어떻게 오셨나요? 어디가 아프신가요? 묻습니다. 그러면 다 말해야 합니다. 감추어서는 안됩니다. 여성들도 산부인과 질병도 다 말해야 합니다. 창피하다고 숨기고 감추면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와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그저 자신은 말하지 않고, ‘하나님 다 아시지요. 알아서 하세요….’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자기는 안 고쳐주고 은혜 주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혼자 다 알아서 해주시면 기도는 왜 하게 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저도 말씀을 보다가 순간순간 저의 모습을 보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목사의 자격이 있는가?” “내가 이래서 사역을 할 수 있냐?” “내가 이런 형편없는 존재인가?” 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위로해 주십니다. 치료해 주십니다.

사도바울도 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백합니다.

(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3~24)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실체를 자신이 드러내야 합니다. 여러분의 실체를 보셨습니까? 죄인이고 추악한 존재이며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할 존재인 자신을 보셨습니까?

그 실체를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십시오. 그러면 치료의 길이 열립니다.

감추면 안 됩니다. 속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는 감출 수도 없고 속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셔도 우리가 드러내야만 역사하십니다. 어느 작은 일도 우리의 인정,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모든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내고 회개하며 도움을 요청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꼿꼿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자신의 연약함, 질병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면 낮아집니다. 더 이상 위선적으로 자신을 꾸미지 않고 들을 귀가 열립니다.

3절을 보면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이게 누구의 소리입니까? 자기 집에서 수종 드는 노예 계집종입니다. 아마도 집에서 수종들다가, 혹은 빨래를 하다가 주인이 나병을 걸린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주인의 고통을 알았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이름도 없는 소녀 하나가 전한 이야기를 아람의 영웅 나아만이 새겨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나아만은 자신의 실체 앞에서 낮아진 것입니다. 자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은 낮아집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교만하고 거만한 것입니다.

나아만의 입장에서 보세요. 당시 쟁쟁한 왕의 주치의들이 치료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여자 아이의 소리가 들렸겠습니까? 그러나 절망에 빠진 어느 날 그 아이의 소리가 비로소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나아갈 적에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음성이, 평소에는 무시하고, 외면하고, 상종조차 않던 것으로부터의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계집종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그의 속에서 요동이 쳤고, 희망을 주었고, 그리고 그 소망대로 그는 움직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음성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온 우주에 가득합니다. 우리 마음에도 가득합니다. 지금 이 시간도 여러분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잘 들리지 않을까요? 세상 생각과 내 마음의 소리가 가득하면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들을 수 있는 마음과 여유가 없으니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경험이 나를 꽉 붙잡고 있으니 주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 놓으셔야 합니다.

“나병은 불치병이야, 나병은 저주받은 병이야이것이 우리를 꽉 붙잡으면 주의 음성이 안들입니다. 그런 편견과 고정관념이 강하기에 하나님 음성과 하나님의 소원이 내게 들릴 턱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보세요. 말씀을 묵상하세요. 그리고 겸손히 기도하면서 마음을 비우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 예배시간에 세상 것을 내려놓으세요. 자식 걱정 내려놓으세요. 사업 걱정도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세요. 그리고 음성이 들리거든 그대로 순종하세요.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 인생을 바꾸어놓는 음성입니다.

우리가 수 만 마디 말을 가지고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 열납되는 기도는 극히 소숩니다. 대다수가 우리의 정욕대로, 욕심대로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은 한 마디 말로 천지를 창조합니다. 그 한마디 말씀이 내게 들려질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라는 존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일개 계집소녀의 말을 듣고 엘리사에게 갑니다. 중간에 아람왕도 있고, 이스라엘의 왕도 있지만 그는 지금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가야 치료받을 수 있느냐? 어디에 있어야 은혜받을 수 있는가? 어느 곳이 날 구원할 수 있느냐? 그 믿음이 들어오면 중간에 어떤 또 다른 통로, 계획, 유혹이 있어도 머무르지 않고 그 곳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람왕도 통과하고 이스라엘 왕도 통과해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갑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자기 생각과는 다른 대접을 합니다. 문도 안 열어보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종을 시켜 명령합니다.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그러자 나아만이 열을 받았습니다. 화가 나서 머리 뚜껑이 열렸습니다.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자기 딴에는 예를 갖추어 방문했습니다. 한 나라의 군대장군인데 일개 선지자에게 갖가지 예물을 가지고 큰 무리와 함께 그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고 종을 보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 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엘리사는 그의 여전히 스며있는 교만을 보았습니다. 그는 처음에 나병 앞에서 자기실체를 보았기에 낮아졌습니다. 그런데 왕의 추천서를 갖고 이스라엘 나라 왕에게 찾아 왔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벌벌 떱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교만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대국의 장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엘리사 집 앞에 도착하면 얼른 뛰어나와 엎드려 자기를 정중히 맞아들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손을 흔들어 기도해 줄줄 알았습니다.

“내 생각에는.” 신앙 생활에서 내 생각에는은 순종의 반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나를 망하게 하는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내 생각에는하는 생각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교만의 표현입니다. 내 생각을 가지고서는 온전히 순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못합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아야만 비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그 교만을 보았습니다.

자기를 찾아온 나아만이지만 나아만을 고쳐주실 분은 자기가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엘리사가 치료해 주는 줄 알고 찾아와서 합당한 대우를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사람 앞에 서지 말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오늘 이 예배도 목사 앞에서, 또는 성도 앞에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저는 권위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권위로서 사람들을 대하기가 정말 싫습니다. 한국교회의 타락의 한 중요한 원인이 잘못된, 혹은 과장된 목사의 권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예수님께 배운 리더십은 그래서 친구로서의 리더십이고 섬기는 리더십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을 가지고 설 때에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서는 것입니다. 더 이상 정승구라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을 가지고 서는 것입니다.  제 개인이 무시를 당하고 허물 없이 생각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지고 서는, 제가 전해야 하는 말씀이 무시를 당하고, 그 말씀을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의 말로 취급을 할 때에는 어떻게 할 줄을 모릅니다. 제 목회 철학이 잘못되었나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속에서 정승구라는 모습을 지워야만 합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나아만을 무시함으로서 그에게 질문합니다. 네 병을 고치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느냐?  네가 하나님 앞에서 네 병을 고치기 위한 겸손이 있느냐? 그 분이 어떤 말씀을 하시던 네가 순종하느냐?  명심하세요. 요단강 물이 치유한 것이 아닙니다. 겸손과 순종이 그의 나병을 치유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겸손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그래도 명령하면 순종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순종을 못합니다. 왜죠? 내 형편, 내 생각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못하나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불신앙이고 하나는 교만입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나아만은 흥분하여 돌아간다고 난리를 칩니다. 그런데 그의 부하 중에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작은 계집종을 통해서 나아만을 인도하더니 지금은 지혜로운 부하를 통해서 나아만에게 말합니다. 더 큰일을 하라 해도 할 텐데 일곱 번 씻으라는 말이 뭐 어렵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미련하면 옆에 지혜로운 사람이 있으면 살게 됩니다. 남편이 미련하면 아내라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 혼자는 잘 안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늘 나를 점검해주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아만이 훌륭한 것은 그런 사람을 옆에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었을 때에 자신의 뜻을 굽히고 그 말에 순종할 수 있는 겸손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혼자 해서는 안됩니다. 공동체 속에서 늘 서로 도우며 교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의 종이 옆에서 조언을 하고 우리의 생각을 고쳐주게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옆에서 우리의 생각을 고쳐먹도록 지도해 줍니다. 그때 생각을 바꾸고 받아들이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화가 났을 때 남의 말 듣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그 순간 그 말이 옳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적이 찾아온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어린 포로소녀 한 아이의 말도 듣더니 이제 자기 아랫사람의 말도 듣습니다. 희한하게 나아만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왕도 아니고 권위 있는 자도 아닌 계집종, 그리고 자기 수하의 부하입니다. 그런데 나아만이 그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순종했습니다.

자기 맘에 안들과 기분도 안 좋고 처방도 달갑지도 않았으나 그는 요단강으로 갑니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 앞에서 자기 옷을 다 벗습니다. 그동안 철저히 숨겨왔던 자기의 벗은 모습, 문등병을 모든 사람 앞에 내어 놓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명한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잠갔습니다. 7번 씻고 나왔습니다. 7번은 완전 숫자입니다. 온전히, 끝까지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는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때론 아픈 말을 해줄 사람이 있습니까? 그저 듣기 좋도록 아첨하는 말에 속지 마시기를 기도합니다. 듣기 싫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고하면 아멘 하고 듣기를 기도합니다. 그런 사람이 내게 기적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복을 누린 결정적 전환점은 자신이 가장 화나 있고, 자신의 뜻이 선지자의 뜻과 가장 맞지 않을 때에 자기에게 충고하는 부하의 말을 받아들일 때입니다. 그냥 되지 않습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 우리에겐 때로 말 못할 상처도 있고 말 못할 나만의 약점도 있습니다. 다 목사에게 이야기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낱낱이 고해야 합니다. 먼저는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자신의 영혼은 썩어져 가는데 겉모습에만 치중해 살아가는 것은 영적인 문등병을 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 했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어떤 경로를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는지 그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통로를 통해서 나아만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계집종, 수하의 부하, 엘리사.

가장 큰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는 목사의 설교입니다. 설교를 귀담아 들으셔야 합니다. 목사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달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아만은 군대 장관이었지만 자신의 문등병을 자각했습니다. 작은 소녀의 소리를 구원의 소리로 받아 들고 이스라엘로 엘리사 앞에 나옵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엘리사에게 화가 났지만 부하의 소리를 듣고 꾹 참고 순종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였고 들려진 말씀에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로고스 교회의 목사로서 난 우리 교회의 병을 하나님께 아뢰고 드러내고, 치료받아야 할 의무가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나 자신의 허물을 내어놓고 하나님 앞에 고쳐달라고 기도합니다. 혹시라도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려질까봐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해달라고 날마다 나 자신의 허물을 하나님 앞에 드러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로고스 교회의 지체인 동시에 주인입니다.

2012년은 우리의 상처가 드러낸 해입니다. 그 상처 때문에 아팠고, 지금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상처는 누구 한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의인 한 사람만 있어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공동체를 살립니다. 결국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서지 못했기에 나도 상처 입은 사람 중에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상처 안에는 나의 상처, 나의 문등병도 숨겨져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가 아니라 바로 교회의 상처 안에 있는 나 자신의 허물, 나 자신의 상처를 하나님 앞에 아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소리는 내 상처 때문에 내가 너무 아파요. 내 상처 때문에 가족을 아프게 했습니다. 내 상처 때문에 교회를 아프게 했습니다라는 고백이고 회개입니다. 내가 회복되면 교회가 회복됩니다. 2012년 교회의 표어는 회복시키는 교회, 빛을 발하는 성도였습니다.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상처에서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발견하고 고하고 말씀을 들어야 하고 순종함으로 치유받아야 합니다. 내 뜻과 달라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순복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제 2012년이 한달 남았습니다. 12월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달입니다. 그 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 상처를 치료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상처를 그 분 앞에 내어 놓을 적에 그 분의 탄생을 우리에게 복음의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한 달 남은 2012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상처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아뢰고 치유 받아 2103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로고스 교회,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