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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츠프라 카치아(결벽증이 강하기로 유명한 식물) 라는 식물을 소개한 글로 설교를 시작할까 합니다.

괴상하고 복잡한 이름의 주인공은 아프리카 깊은 밀림에서 공기 중에 소량의 물과 햇빛으로만 사는 음지식물류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식물은 희한한 특성 때문에 사람의 영혼을 갖고 있다고까지 여겨진다고 합니다... 누군가.. 혹은 지나가는 야생동물들이 조금이라도 몸체를 건드리면.. 그날로부터 시름시름 앓아 결국엔 죽고 마는 것입니다. 마치 결벽증 강한 사람처럼 ... 식물을 수십년간 연구한 박사가 있었는데 박사는 오랜 연구 끝에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유츠프라 카치아가 누군가가 건드리면 점점 약해져서 죽지만 만일 전날 건드렸던 사람이 다음날도 다음 다음 날도 계속해서

드려주면 죽지 않고 계속 자란다는 것입니다.

 

한없이 결벽하다고 생각했던 식물은 사실은 한없이 고독한 식물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의 유츠프라 카치아 입니까? 혹은..... 누가 당신의 유츠프라 카치아 입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있다는것. 또는 누군가 나에게 지속적으로 애정과 관심을 주고 있다는 .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리기 전엔......

애정과 관심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오히려 우리는 관심과 애정을 부담스러워 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이 어느 사라졌을 그때서야 우리는 소중한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주위를 둘러 보십시요.

바쁘다는 핑계로, 해도 꺼라는 핑계로 당신의 유츠프라 카치아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밤에는 전화를 걸어주십시요. 안아 주십시요. 사랑한다고 말해주십시요.

당신의 유츠프라 카치아를 위하여 ....

 

(김하인 유츠프라 카치아중에서)

 

현대인의 고독, 관심.. 사랑에 대한 갈망을 나타낸 .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한 마디로 집약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죠. 이것을 예수님께서 더 강하게 압축시킨 말은 서로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서로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예가 우정, 친구의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좋은 친구로서 누구보다도 알려진 관계는 바로 다윗과 요나단입니다. 가스펠을 부르는 이름도 있고 교회 안에서 좋은 친구의 관계를 이야기 흔히 다윗과 요나단이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목동이었고, 장수였고, 또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친구 요나단 하면 사울의 아들이지만 다윗의 친구라는 직함 말고는 뚜렷이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은 다윗의 친구 요나단에게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살펴보면서 요나단이 어떤 친구였는지,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친구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막연히 가지고 있는 좋은 친구의 모습을 요나단을 통해서 살펴보아 우리가 또한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고 그런 좋은 친구를 만나기를 기도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처음 요나단이 다윗을 만나는 광경이 우리가 읽은 본문 삼상 18장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터에서 골리앗을 필두로 블레셋 병사들로부터 위기에 처했 있을 때에 다윗이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을 제압합니다. 그래서 사울 왕에게 불려나와 자기의 출신을 얘기하자 요나단은 다윗을 보며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그를 자기 생명과 같이사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되었다! 영어성경을 찾아보니 Jonathan became one in spirit with David, and he loved him as himself.

영이 하나가 되는 것, 영이 같다고 느끼는 것이 무엇일까요? 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성품이 영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보고 영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하나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서로 소통의 코드가 다릅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그랬습니다. 다윗을 질투하며 미워하는 적대자인 사울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와는 정반대로 다윗을 정말 좋아하고 사랑했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어떤 사람을 만나면 좋아지고, 어떤 사람을 만나면 싫어지는 것일까요? 우리는 때로 사고방식이 다르고, 삶의 패턴이 다르고, 가치관과 서로의 소통하는 코드가 달라서 불협화음을 일으킬 때가 종종 있습니다. 종종 이런 다툼과 갈등의 모습을 개와 고양이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왜 두 동물이 서로 만나면 으르렁 대는 것일까요? 그것은 소통의 신호와 코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올리고 흔듭니다. 그리고 앞다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기분이 나거나 두려울 때는 꼬리를 내립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정반대입니다.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낮춥니다. 그러나 화가 났을 때는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앞다리를 듭니다. 그래서 개가 고양이를 만났을 때 반갑다고 꼬리를 올리고 흔들면 고양이는나하고 한판 해보자는 거구나하고 겁을 잔뜩 집어먹습니다. 반대로 고양이가 개를 만나 반갑다고 꼬리를 낮추면 개는 그것을 보고한번 붙어보자는 것이구나 하면서으르렁거린다는 것입니다. 코드가 안 맞습니다. 우리도 이런 점들 때문에 사람들과 얼마나 많이 다투셨습니까? 사랑으로 만났던 남편과 아내도 어느 날 갑자기 그럽니다. 내 남편은 도무지 나를 모른다고 하고 내 아내는 먹통이 됐다고 하며 서로가 갈등과 외로움 속에 빠져들 때가 참 많습니다.

영이 같은 것보다 더 큰 소통의 코드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영이 다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 믿고 예배드리는 데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를 위하고 물질을 원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하나님 보고 자신에게 좀 맞추어 달라고 하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비우고, 오직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해도 다가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정말로 그랬습니다. 다윗을 질투하며 미워하는 적대자인 사울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와는 정반대로 다윗을 정말 좋아하고 사랑했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이었습니다. 다윗도 사울왕도 요나단도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신앙은 지금 다윗과 요나단과는 다릅니다. 다른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만한 영이고 자기 자리 만을 위하고 자기의 자리를 위협하는 자는 시기하고 어떻게든 죽이려고 하는 자입니다. 참 신앙인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18장부터 20장까지의 사건을 쭉 추적해보면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를 무려 6번씩이나 행하고 있습니다. 3번은 다윗이 앞에 있었을 때 창을 들고 다윗을 향해 던졌습니다. 다윗은 용케 그것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 미가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블레셋 군인들의 포피를 가져올 것을 요청하여 죽임을 당하도록 계획을 세웠습니다. 또 한 번은 암살단을 보내어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 되니까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해서 다윗을 추적하려 죽이려 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의 매력과 인기가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불 같은 질투와 증오심에 사로잡혀서 채색된 안경으로 다윗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 우리가 읽은 장면은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고 사울왕에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뢰는 장면입니다.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에 다윗이 나가서 용감히 그 거인을 무너뜨립니다. 자신도 용사였지만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때에 요나단은 다윗 안에서 움직이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요나단은 이러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마음속에 작정합니다. 요나단의 모습은 아주 대범합니다. 자기의 권위, 자기의 권력, 자기의 직위까지 모두 다윗에게 넘겨주고 있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사무엘상 18:4)

 

이것은 단순히 선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자로서의 겉옷입니다. 자신이 입고 있었던 품위와 권위의 옷을 다윗에게 벗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군복인 갑옷도 주었습니다.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칼과 활, 그리고 가슴에 매는 띠까지 다윗에게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권리와 소유권을 넘겨주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다윗 네가 나의 모든 책임과 권리를 행사하라는 왕의 자리를 양도하는 것입니다. 이 후부터 요나단은 철저히 다윗을 지키고 보호하고 또한 사랑합니다.

반면에 요나단은 다윗을 친구로 삼았기 때문에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마다 요나단이 그 앞에서 막았습니다. 너는 어찌해서 내 편이 아니고 다윗 편이냐고 아버지가 통탄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의 관계까지 단절되게 됩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을보았기 때문입니다. 습니다. 다윗의 모습 속에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윗의 모습 속에 이스라엘을 이끌 왕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왕의 권력까지도 다윗에게 양보했던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요나단의 모습 속에서 신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친구 된 모습을 예표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친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는 예수님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당시 요나단과 다윗이 친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나단은 왕자, 다윗은 무명의 목동 ->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친구가 생기지 않는다. 교만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우정의 시작은 상대방을 존경하는 데서 시작되는데 교만과 존경은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에게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항상 나를 가장 높은 위치에 두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한 친구를 사귈 없다. 객관적인 나의 기준보다 휠씬 높은 사람을 상대 때만 그를 존경하며 친해지고 싶은데 때는 이미 사람의 기준에 훨씬 미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과 내가 친구가 되긴 힘들다. 요나단은 다윗과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 자신의 왕자 신분을 낮추었고 동시에 다윗을 왕이 사람이라고 높였다.

 

( 15: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이 겸손 - 죄인인 우리를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시고 우리를 당신에게까지 높여서 친구가 되게 하심... 우정의 마음..

 

이것이 바로 친구가 되는 마음이다. 우리가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할 때에 우리는 결코 진실한 친구, 좋은 친구를 만날 없다. 우리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일 때에 우리에게 좋은 친구를 만날 있는 기회가 온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성경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또한 성경 안에서 영혼의 귀함을 깨달은 ,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가질 있는 생각이다.

 

그것에서 시작해서 시작된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고난을 함께 나누고 요나단이 다윗을 보살피면서 자라나게 된다. 처음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전적으로 요나단의 일방적인 호의였다.

(삼상 18:4)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나중에 가서는 왕의 자리가지도 내어 ..

 

[삼상 23:15-17]

다윗이 사울의 자기 생명을 찾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황무지 수풀에 있었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다음이 것을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인데도 오히려 다윗의 믿음이 식지 않도록 그를 격려하고 위로함.

여기서 우리는 사울과 요나단의 모습을 살펴 있어야 한다.

사울이 다윗을 그토록 죽이기를 원했나?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징벌 받고 있고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고 있음을, 하나님께서 자신은 벌하시고 다윗은 상주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세움을 받고 영광을 받다가 그것을 물려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좋은 모습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미 자신을 평가절하하고 나보다 뒤쳐져 있던 사람을 높게 평가 때에 그것을 겸손히 인정하며 자기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사울은 그런 모든 것을 견딜 없었다. 자기를 높여 주셨던 하나님이 자기보다 다윗을 높이고 자신을 책망하시는 것을 견딜 없었다. 사울에게는 칭찬받는, 영광 받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책망 받고 받는 것에는 성숙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 받고, 훈계 받는 것을 인정하고 익숙해지지 못한다면 신앙의 성숙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때로 사람들이 훈계하기 보다는 칭찬으로서 사람을 이끌라고 말한다. 대단히 효과 있고 설득력 있는 말이지만 그러나 위험한 말이다. 언제나 칭찬으로서 사람을 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전통적으로 주어진 교육의 방법은 훈계와 책망이었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고 잘못했을 때에 회개할 있었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있었다.

 

현대인은 가장 단점 중의 하나는, 신앙 생활의 가장 장벽 중의 하나는 혼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혼나는 훈련이 정말 되어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어머님은 칭찬에 대단히 인색하셨다. 대신 혼내고 책망하는 데는 대단히 노련했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항상 불만이었다. 칭찬 받으려고 집안 해놓고 했는데도 오히려 이거밖에 못했냐고 혼날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지금의 내가 것이, 내가 가정교육을 받은 것이 다른 어느 누구보다 못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누군가 나를 혼내면 자존심에 상처 입지 않고 혼날 있고 그리고 혼나면서 듣는 말을 곰곰이 생각할 있다.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지만 아직 까지는 남들보다 잘 혼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죽기까지 잘 혼나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나면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혼나는 자체에 분노한다. 그러면서 지가 뭔데, 자기는 잘났나 하면서 상대방을 헐뜯을 것을 찾아낸다. 그래서 학생이 선생을 고발하고 자식이 부모를 멸시하는 시대로 가는 것이다.

 

(삼상 23:17)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다음이 것을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이미 알았다. 하나님의 뜻은 왕권을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기우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뜻이 정해지면 그것이 내게 화가 되건 복이 되건 인정하고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는데 사울은 하나님께 더욱 범죄하여 주술과 이방신을 불러 따르고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이것은 다윗을 향한 분노에 앞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가인의 범죄도 마찬가지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는 분명히 다음 왕을 이어 것으로 여겨졌던 요나단 이었지만 요나단은 범죄하는 사울왕 곁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보았다. 그는 자기가 왕이 없고 자기의 친구 다윗이 왕이 것을 알았다. 만약 요나단의 마음 속에 사울과 같은 악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역시 사울왕 처럼 하나님께 분노하며 다윗을 저주하거나 그렇진 않더라도 다윗과의 관계를 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도 역시 하나님의 영, 신앙을 소유한 자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다. 내가 축복을 받아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책망 받고 징벌을 받더라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뜻에 따르는 것이 신앙이다. 만약 그가 계산에 밝아서 아비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다윗이 은총을 받는다 해서 아버지를 배반하고 다윗에게 줄타기하는 것이라면 그의 우정은 순수하지 못한 것이고 그의 신앙도 지혜롭기는 해도 그리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순수하게 다윗을 인정하고 그가 왕이 되도록 도와주면서 자신은 사울의 아들로서 아비와 같이 죽음을 당한다. 바라지 않고 사랑을 베풀고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다윗에게 말한다.  

[삼상 20:15-16]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인자를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무슨 말인가? 이제 난 죽고 넌 살아라. 그러나 나의 이 사랑을 기억하라.

다윗은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을 끝까지 죽이지 않고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이후에도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놀라운 은총을 베푼다.

 

(삼하 9:3)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삼하 9:7)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조부 사울의 밭을 네게 도로 주겠고 너는 항상 상에서 먹을지니라

 

절뚝발이- 죄인의 상징, 뱀이 너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것이요.

죄로 말미암은 육체적 결과

요나단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은총을 얻게

아담이 가졌던 축복을 그대로 물려받고 예수님과 같은 자녀의 자격을 가지게 ...

요나단의 희생적인 사랑, 자기를 버리고 다윗을 세우는 우정과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신앙을 통해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지 않고 자신의 인기에 흔들렸다면.

갈렙이 여호수아의 리더십에 제동을 걸었더라면
바나바가 바울의 사역을 방해했더라면

그들의 사역은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자격이 모자라서 무대 뒤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가장 값있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 무대 뒤를 책임지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대 뒤로 숨은 자를 반드시 계산하시고 축복하신다. 요나단은 지금까지 다윗 하면 함께 따라다니는 우정의 대명사가 된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사랑이 없느니라

세례요한-> 예수님을 남기고 친구->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친구로 남기고 하나님.

è  너희가 나보다 일도 하리라.

è  우리 또한 보다 일을 친구하나 두고 싶지 않은가? 혹은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고 사랑해줄 친구하나 있고 싶지 않은가? 그럼 내가 먼저 그런 친구가 되면 된다. 내가 나보다 나은, 큰일을 친구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으면 친구, 아니면 다른 친구가 그렇게 사랑해 것이다.

l  미국사회가 좋은 - 세대에 관련 없이 친구가 있다는 . 우리는 그렇게 없을까? 내가 바라는 목사- 친구가 되어주는 목사. ? 예수님이 친구로 부르셨으니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 15:15)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