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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의 기적

: 17 : 11 - 19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등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병고침을 받고도 예수님께 다시 와서 감사를 표현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러 온 사마리아 인으로 인해서 감격해 하셨습니다. 동시에 문등병을 고치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다른 아홉 명에 대해서 섭섭해 하셨습니다. (17- 18)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감사의 기적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 안에 참 감사하는 모습이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감사는 성숙한 사람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미숙한 사람과 성숙한 사람의 차이는 보는 차이에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것에 집중하고 받은 것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받은 것을 잘 누리는 것입니다. 또한 받은 것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숙한 사람은 받은 것 보다는 받지 못한 것에 집중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 보다는 남이 가진 것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원망합니다. 불평합니다. 그래서 받은 것도 누리지 못합니다. 개발하지 못하고 받은 것 마저 잃어버리는 것이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2. 감사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받았어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것을 받았어도 깨달은 사람은 감사합니다. 감사는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깊이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닥쳐진 시련을 보고도 감사하라고까지 말합니다. 고통에도, 아픔에도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 뒤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이 고통 중에도 시련 중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시각- 시련과 고난은 상처를 준다. 아이에게 시련을 주지 않으려 키운다.

믿음의 시각- 시련은 우리를 강하게 한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이다.

 

3. 믿음이 없는 사람은 조금만 고난이 와도 하나님이 없다하고 원망하며 절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는 또한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성령충만한 사람의 모습을 그릴 때 감사를 가장 핵심에 두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합니다. 환경이 어떠하든 성령 충만한 사람은 환경을 초월해서 동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날 구원해주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감사합니다.

4. 항상 감사하는 사람은 자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족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부자입니다. 부요함이란 두 가지 측면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부요를 늘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욕망을 줄이는 것입니다. 욕망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큰 것이 왔을 때에도 감사할 수 있고 작으나 크나 감사할 수 있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큰 것이 와도 기뻐할 줄 모릅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언제나 모자라기만 합니다. 욕망이란 항상 욕심가운데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언제나 풍부해도 더 얻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욕망은 언제나 무엇인가에 (욕을 해대면서 바라는 것)이고 희망과 소망은 (희희락락하며 미소지으면서)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욕망이 아닌 희망과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감사하는 자들을 좋아하십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환경에 초월하신 분도 감사하지 아니한 아홉 명의 문등병자에게 서운함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감사한 사마리아 문등병자에겐 더 큰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감사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더 큰 기적을 베풀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 현대인: 감사를 잃어버린 시대- 부모님 세대: 긴 고생 끝에 힘겹게 삶을 살아 터전을 이룩한 세대

-> 자식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이 목적. 내 고생을 너희에겐 안 시킬 것이다-> 혼자 고생하며 자식들은 고생시키지 않으려항상 더 못해줘서 미안해하는 분들..

그런데 그 결과 자식 세대 감사를 잃어버림. 부모의 고생을 당연히더 안해주면 원망하고 불평.

그러다가 그 길을 갈 수 없으니 자식 안 낳는 시대.. 기형적인 시대

è  결국은 부모의 교육적인 전략이 잘못된 것이다. 사랑은 깊은데 그 사랑의 표현이 잘못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신앙생활에도 깊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에 너무 당연하게 생각함. 죽음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영생을 주셨는데도 여전히 불평하고 더 안 준다고 원망. -> 그런 태도가 깊이 베어져 있다. 

è  예전 사회: 잘 못살았어도 부모, 선생, 임금은 항상 존경하고 감사하도록감사하는 훈련을 통해.

그런데 이젠 오직 돈으로 존경을 사려고 함, 버림받지 않으려고 물질을 움켜쥐고 있음.

미국: 감사가 생활화. Thanks you 문화, 아니라고 할 때도 NO Thank you!!

 

감사도 배워야 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드린 감사는 어떤 감사였습니까? 무엇 때문에 감사했고 어떻게 감사했습니까? 사마리아 문등병자의 감사를 통해 이 시간 감사를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마리아인은 누구입니까?

첫째, 사마리안 인은 가장 소외된 자입니다. .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상처입고 소외된 사람들을 더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지금 지나가신 곳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한 촌입니다. 이곳은 독특한 장소입니다. 사마리아에도 소속되지 않고 갈릴리에도 소속되지 않은 소외된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보다 더 싫어한 것이 바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지만 앗수르에 멸망당하면서 이방이들이 들어와 피가 섞이고 말았습니다. 그 후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안 인들은 이방인들보다도 더 경멸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남쪽 유다에서 갈릴리로 갈 때나 혹은 올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먼 요단 강 건너편으로 돌아서 왕래했습니다. 그 지역을 지나는 것조차 싫어했던 것입니다.

둘째, 사마리아인은 문등병자였습니다. 문등병자들이 사는 곳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곳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부정하게 여기면서 다른 사람들을 어쩌다가 다른 사람이 가까이 오거나 혹은 지나갈 때에는 스스로 “부정하다, 부정하다”하고 소리를 질러야 했습니다. 문등병자들의 아픔은 몸의 병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아픔 속에는 짖눌린 소외감에 있습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변두리에 사는 것이 바로 문등병자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더욱 소외된 것이 바로 이 사마리아 문등병자였습니다. 열 명의 문등병자들 가운데 아홉 명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열 명의 문등병자들은 갈릴리에 속할 수도 없고 사마리아에 속할 수도 없는 소외된 한 촌에서 살았는데 사마리아 문등병자는 그 들 중에서조차 왕따를 당해야 했습니다. 문등병자로 살아가는 것도 서러운데 다른 문등병자들로부터도 소외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과 예수님이 만나서 기적을 맛보고 또한 축복을 내리시고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문등병자들의 가장 큰 고통은 바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고통을 아는 신경이 마비된 것입니다. 뜨거운 난로에 손을 넣어도 아픔을 모릅니다. 그런데 살갗은 타고 썩어 들어갑니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문드려져도 본인을 모릅니다. 그래서 문등병 치료의 권위자인 폴 브랜드 박사는 “고통을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우리 몸이 조금이라도 아픈 줄 아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위험할 때 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고통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위험한 곳을 피하고 죄를 멀리하고 나 자신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이와모도라는 분의 간증은 감각이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이와모토씨는 교회의 집사셨는데 문등병으로 신경이 마비되어 눈까지 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의 몸에서 감각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혀끝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훈련시켜서 혀끝으로 몰록불록한 점자 성경을 핥아서 신구약 성경을 다 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성경을 핥아 읽으면서도 그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에 성경이 일용할 양식이 되는 줄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문등병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소경을 눈 뜨게 하신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절망 중에 소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기대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바로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열 명 모두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뜻밖의 장소에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장소에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곳에서 성장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을 촌동네라고 하고 비웃으면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라고까지 말했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 나사렛에서 성장하셨습니다. 당신의 지금 환경은 어떻습니까? 피하고 싶고 이사하고 싶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진 않습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바로 그 곳을 찾아오십니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가입니다. 교회 좋은 터로 옮기면 부흥한다. 이런 안 보이는 곳을 찾아오는 분이 예수님이고 이런 곳까지 찾아오는 신자가 진짜 신자다. 터가 좋아 들어오는 신자 여럿 보다 은혜 있는 교회 찾아오는 믿음 있는 신자 한 명이 더 귀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환경을 찾아 떠나고 조건을 따라 이동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어디에나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간구하며 머물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임재입니다. 예수님을 모셨다면 여러분은 정말로 부요한 사람입니다. 사는 환경이 어떻든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가장 큰 은혜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자기를 지나치시는 예수님을 보고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기적은 간절한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열 명의 문등병자는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에 큰 소리로 간구했습니다.

“멀리 서서 소리 높여 가로되”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성경에 보면 부르짖는 기도가 수없이 나옵니다. 같은 기도라 할지라도 부르짖는 기도는 강렬한 기도입니다. 좋은 기회는 인생에서 아주 많이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기회가 찾아올 때 우리가 할 일은 간절히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회는 대부분 위기와 함께 옵니다. 고난과 함께 옵니다. 기회를 포장한 보자기가 바로 고난이고 시련입니다. 그런 까닭에 영적인 사람은 고난이나 시련 중에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러나 육적인 사람은 고난이나 시련이 오면 절망하고 원망하고 넘어집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3: 3)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길 원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특별히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였습니다. 시편에는 그가 얼마나 자주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내가 환란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18: 6)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30 : 2)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142: 1-2)

 

영성을 공부하며 침묵기도, 묵상기도 등 서양의 깊은 전통을 가진 기도...

그러나 급할 때 내가 하는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 주로 밤에 혼자 있을 때 하는 기도.

난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부르짖는 기도에도 그리고 조용히 드리는 묵상기도나 침묵기도에도 모두 익숙하고 훈련된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특히 공부좀 하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다고 하는 분들 중에 하나님이 꼭 큰 소리로 내어야지 알아 듣냐 하면서 통성기도나 부르짖는 기도를 저속하게 취급합니다. 그러나 가장 존경받은 이스라엘의 왕이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가 저속한 것이 아닙니다. 저속한 것은 자기 멋대로 자기 신앙을 주장하는 것이 저속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못 알아 들어서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만큼 간절히 찾기에 부르짖는 것입니다. 열 명의 문등병자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큰 소리로 부르짖은 것은 정말 잘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간절히 구할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그들의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차이가 응답받은 후에 나타납니다.

열 명의 문등병자는 물론 치료 받은 후에 모두가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단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15)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어떻게 감사하고 어떻게 경배했냐하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고쳐달라고 부르짖을 때도 큰 소리로 부르짖었는데 그는 고침을 받고 감사를 드릴 때에도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꼭 배워야 할 놀라운 태도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 있을 때에 큰 소리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니 큰 소리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환란에서 구원받고 난 후에 큰소리로 감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은 강청하는 기도의 소리와 감사하는 기도의 소리가 같았습니다. 큰소리로 기도하고 큰 소리로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표현하는 것입니다. 받은 것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고침 받은 아홉 명의 문등병자도 다 같이 감사하는 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할 줄 몰랐습니다. 가끔 우리는 예수님이 느끼셨던 것처럼 섭섭한 느낌을 갖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해서 기도하고 양육하고, 보살피며 베푸는데 감사를 표현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섭섭함을 느낍니다. 평신도보다는 집사가 느끼고 집사보다는 권사가, 장로가, 그들보다는 목회자들이 이러한 섭섭함을 더 느낍니다. 조그마한 감사의 표현이라도 해 주면 고마울 텐데 정나미 없이 쑥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속상해집니다. 예전에는 사람의 눈 바라며 기도해주고 섬기나 했는데 사람들의 사이에서 그런 섭섭함이 오래 지속됨을 보게 됩니다.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감사하지 아니한 아홉명에게 그들은 어디 갔냐고 섭섭해 하십니다. 우리 인생은 대개 사소한 것 때문에 섭섭하기도 했다고 감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큰소리로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의 은혜를 관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똑같이 큰 소리의 감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잘 유지하고 더 발전시키는 길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와 큰소리로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에게 더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육신적인 치료 뿐만 아니라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기적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큰 소리로 감사하는 것은 더 큰 기적으로 향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더 큰 것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본질은 간구하는 사람은 많아도 감사하는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많아도 기적으로 인해 감사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많아도 그 은혜로 인해 감사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때문에 이 사마리아인의 감사에 감격해 하십니다. 기대했던 유대인 아홉은 오지 않고 기대치 못했던 사마리아인의 감사에 감격해 하십니다.

성경을 통해서도 우리의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도 깨닫게 되는 것은 때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도 숨은 제자들이 찾아와 감사합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숨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시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가장 고독했던 시기에 예수님을 위로하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옥합을 깨뜨린 여인,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은 일곱귀신 들리고 간음현장에서 붙잡혔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위해 귀한 옥합을 깨뜨렸을 때에 함께 기뻐해야 할 제자들은 오히려 분노했습니다. 그렇게 감사에 분노했던 제자들은 후에 십자가 앞에서 다 주님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기대할 것 없던 초라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십자가 현장에서도 그녀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아침에 무덤에 갔다가 제일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인처럼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도 속히 집에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던 길을 돌아와서 주님께 나왔습니다. 희생 없이 참된 감사가 없습니다. 그는 입술로 감사했고 정성으로 감사했고 막달라 마리아는 물질로서 감사했습니다. 참된 감사는 이렇게 표현되는 감사입니다. 표현 된 감사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면 천국을 주신다.

“또한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된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50: 23)

우리가 감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사마리아사람은 병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 아홉의 열매는 병을 고친 것이었지만 사마리아인의 열매는 주님을 주님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입니다.

열 명의 문등병자들이 처음 예수님께 왔을 때에 “예수 선생님이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들 가운데 아홉은 고침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1714절에서 열 명의 문등병자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홉 명의 문등병자들은 제사장에게 갔을 텐데 사마리아인은 문등병이 나은 것을 보고 성전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다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참 성전이고 대제사장이신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감사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문등병자처럼 살아간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처절한 환경에 쳐했다고 작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시간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기적을 경험하십시오. 그리고 부르짖어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와 더 큰 기적을 우리 교회 위에 부어주실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감사의 언어로 표현하시고 마리아처럼 물질로 표현하시고 예배로 표현하십시오. 감사는 또 다른 기적을 낳습니다. 감사를 통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함을 누리는 우리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의 최고봉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의 열가지 감사

 

첫번째 감사: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두번째 감사: 하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주께 감사합니다.

세번째 감사: 삼남 삼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드립니다.

네번째 감사: 또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든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라니요. 감사합니다.

다섯번째 감사: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하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든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라니요. 감사합니다.

여섯번째 감사: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일곱번째 감사: 나의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번째 감사: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이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번째 감사: 이 같은 역경 속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열번째 감사: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도 다음 주 추수감사예배를 열 가지 감사의 제목을 가지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