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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제목 : 그리스도인의 복 3

본문 : 마태복음 5 1-12

팔복의 세 번째 시간입니다. 팔복은 이 땅의 복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위한 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함을 얻은 우리는 그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삶을 보면 너무나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다고는 하는데 정말 그리스도인이 맞는가 싶게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순간마다,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 하고 말씀 없인 한 시도 못산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평생 성경 한 번 읽지 않고도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매일 같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 투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팔복의 말씀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본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천국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연습입니다. 천국의 삶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을 통해서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해 주시는 약속은 너희가 이제 천국을 소유한 자다. 이미 천국을 얻은 자다. 벌써 천국에서 사는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능함과 무가치함, 자신의 허물과 욕망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말씀 안에서 여전히 바로 서지 못하고 온전히 믿음 가운데 행하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통회하고 자복하고, 자신을 위해 우는 자가 애통하는 자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서 자신이 불쌍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알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여전히 죄의 흔적 가운데 사는 자신을 이기지 못해서 울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애통하는 자만이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가다듬고, 자신을 말씀에 맞추어서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바로 말씀으로 길들여진 사람입니다. 날마다 말씀 안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고치고, 회개하고, 순종하면서 말씀이신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자가 온유한 자입니다. 온유한 자는 성령의 성품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거칠고 제멋대로였던 자신의 천성을 버리고 성령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대표적인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에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성숙한 신앙의 확장에 대해 말씀하시며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언급하십니다. 신앙은 나 혼자 잘 믿고 나 혼자 잘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을 인간을 통해서 번영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나부터 새로워지고 교회, 이웃 그리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라는 말은 바르다, 정의롭다의 말인데 특별히 성경에서 뜻하는 의는 관계가 바르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의 정치와 신앙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은 성전과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는 성전 역시 율법에 의해 세워지고 운영되는 것이기에 결국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곧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수호하는 일에 그 무엇보다도 열과 성을 다 했습니다.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였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적인 은혜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언약의 관계였습니다. 언약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신앙이나 도덕성 때문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주권으로 맺어진 것입니다. (행위 이전에 관계가 중심)

그러나 점차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였던 유대인들이 율법의 관계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요 신앙인의 의로움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에서 하나님은 사라지고 율법이 최고의 가치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외적인 행위가 강조되었고,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자기 스스로를 정의롭고 의롭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라지고 오직 행위만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64 6절을 통해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부정하기만 한 우리는 아무리 우리의 의를 드러낸다 해도 다 더러운 옷 같을 뿐입니다. 그래서 언제가는 시들어 없어지는 잎사귀와 같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 정의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인간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의 굶주린 사람들, 그들이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6:33에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의에 먼저 주리고 목마른 사람, 그들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의가 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줄 알아야 그 의를 구하기 위해 주리고 목말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때를 씁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산은 오직 부모님 사후에만 물려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모님 살아 생전에 유산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탕자는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불효 중의 불효요,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처사였습니다. 아버지를 부정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면 탕자가 그 유산으로 좋은 일을 하면서 착하게 살았습니까? (아버지와의 관계는 필요 없고 당신 가지신 복만을 주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든 탕자는 세상으로 나가 허랑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죠. 그 결과가 어떤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모두 탕진하고 굶어죽을 지경이 되고 나서야 탕자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종이 되기 위해서 돌아옵니다. 15 19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그러나 아버지는 동네 어귀에 들어선 아들에게 맨발로 달려나갑니다. 그를 끌어안고 입맞추며내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며 큰 잔치를 엽니다. 아들은 집을 나갈 때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았고 집에 돌아올 때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여겼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의 아버지로 계셨고, 끝까지 아들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올 적에 그 행위를 보지 않고 탕자여도 자기의 죄를 깨닫고 오는 자를 하나님께서 아들로 맞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 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유명한 로마서 1:17에서 이같이 외쳤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하는 것은 복음을 믿고, 복음의 은혜에 감사하고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앞에 내가 내세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을 구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기에 급급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훗날 사도 바울이 되는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최고의 율법학자였던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최고의 학문과 지성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은 당시 가장 강력한 정치력을 가진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유대인들 가운데 신분상승을 의미하는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이렇듯 사울은, 가문으로 보나, 학문으로 보다 그리고 정치력으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최고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이같은 청년 사울의 자부심이 얼마나 컸겠으며, 또 그의 삶은 얼마나 자기 자랑과 교만이 팽배했겠는지 우리는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기의 의가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자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230킬로나 떨어진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잔멸하기 위해 길을 갈 때에도, 사울은 스스로의 자부심과 자기의 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메섹에 도착할 즈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했던 그 길에서 사울은 하나님의 의가 담긴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울은 이름을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바울의 뜻이멈추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사울은멈춘 사람바울이 되었습니다.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던 사울이, 자기 의를 멈추고, 자기 자랑을 멈추고 자기 교만을 멈추는 바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바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사울은 압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랑과 자기 의로는 털끝 만큼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기에, 자기 의를 멈춘 사람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대신 평생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리고 목말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복음이 있고 그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의는 먼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바로 세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의 허물이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이웃과 세상과도 바른 관계를 맺도록 요청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신앙을 바로 세우고, 동시에 이 땅에 도덕과 윤리를 바로 세우면서,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을 때 이웃도 세상도 바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이야기들을 하다보면 목사건 성도님들이건 처음엔 하나님의 역사를 자랑하다가 결국은 자기 자랑, 자기 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끝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 주셔서 내가 얼마나 많이 바쳤는데요, 내가 얼마나 헌금을 많이 했는데요, 내가 얼마나 충성했는데요…. 결국은 내가 무엇했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고 그 자기 의 때문에 성도들끼리 분쟁을 일으키고, 시기를 일으키고, 다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만 나타낼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는 것입니다.

온유는 말씀으로 자신을 길들이는 것입니다. 의에 주린다는 것은 그 말씀을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메이듯이 갈급하게, 갈망하며 찾아 다니는 것입니다. 말씀은 곧 영의 양식입니다. 말씀에 갈급하면 말씀으로 우리 영을 채웁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내 영을 채우니까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삶이고,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5번째 복,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7)

세상은 받을만한 사람에게만 베풀고 있습니다. 은혜도 그렇고 상도 그렇고 축하도 그렇고 받을만한 사람에게만 베풉니다. 상을 받을만한 사람, 축하를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고, 은혜도 받을만한 수고와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사랑도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만 베풀게 됩니다.

그러나 긍휼은 이와 다릅니다. 긍휼은 받은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벌을 받아야 사람에게 오히려 따스한 손을 내미는 것이 긍휼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베푸는 것이 긍휼입니다. 그저 사랑하고픈 마음으로 베풀기만 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Ex) 한솔이가 요리하다가 뻔한 사건. -> 안아주니까 오히려 펑펑 울며 잘못했다고 하면서 기도함.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46-47에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가족에게 문안하는 것은 긍휼이 없이도 가능합니다. 이미 사랑을 받고 문안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죄인 취급을 하던 세리를 사랑하고, 짐승 취급을 하던 이방인을 문안하기 위해서는 긍휼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렇듯 긍휼은 자격을 묻지 않습니다. 긍휼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도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에는 조건도 없지만 대가도 없습니다.

긍휼은 단순히 동정이나 불쌍한 느낌의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구체적인 행동이 긍휼입니다. 그래서 긍휼은 언제나 마음과 행동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의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십니다.

세상이 긍휼을 베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긍휼에는 대가가 없기 때문입니. 아무리 긍휼을 베풀어봐야 내게 이득이 되는 대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긍휼을 베풀지 않습니다.

또한 긍휼은 타인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자기가 상처받고 자신이 아파하는 것처럼 동일시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남의 고통과 불행을 못본 척 할 수가 없는 것이 긍휼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쉽게 외면합니다. 나 혼자 살기에도 바쁘다고 생각하며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합니다. 원수 지간일 경우 타인의 고통과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긍휼이 그다지 인기가 없습니다. 오히려 타인의 약점이나 아픔을 이용해 자기 욕망을 채우는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세상은 미움의 대상이나 대적자들에게 복수하기를 즐겨합니다. 되로 받으면 말로 주려고 앙심을 품습니다.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으셨겠습니까?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긍휼이 불붙듯 일어나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8: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여전히 불의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것,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이 없었던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나 있었겠습니까? 주님이 긍휼을 베풀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이처럼 귀한 예배의 자리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들 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긍휼 때문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선 긍휼은 동정이나 불쌍히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볼 때 불쌍히 여기거나 동정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진다고 해서 반드시 그들을 돕지는 않습니다. 그저 마음 뿐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때우는 것, 그것은 동정일 뿐 긍휼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자기 의를 드러내고 자기 이름을 위해 구제하고 돕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는 타인을 위한 사랑이나 이해가 없이, 그저 자기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남에게 선행을 베푸는 경우입니다. 즉 마음에는 없는 구제와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선일 뿐 긍휼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그럴싸 해보이지만 실상은 긍휼에서 시작된 선행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그토록 혐오하셨던 이유도 바로 그들의 긍휼이 없는 위선 때문이었습니다. 본심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자기 명예를 위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식적인 행위를 일삼는 바리새인들을 몹시도 싫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도 없는 선행이나 구제는 긍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긍휼에 대해 정리를 해보면, 긍휼은 단순히 동정이나 불쌍한 느낌의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말 긍휼로 번역된 헬라어엘레에오는 마음으로 느끼는 자비, 용서, 친철, 은혜의 구체적인 행동을 뜻합니다. 즉 마음과 행위가 동반된 것이 긍휼입니다.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직접 병문안을 가거나 아니면 전화를 걸어 위로의 말을 전해 주고, 가슴이 답답한 일을 당한 사람의 이야기를 시간을 내어서 들어준다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구체적인 행동이 긍휼입니다. 그래서 긍휼은 언제나 마음과 행동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설파하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던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참된 긍휼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안 인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때 율법사가 이같이 답했습니다. (누가복음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우리말자비로 번역된 단어가엘레오스긍휼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을 베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에게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다윗입니다. 다윗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둘람 굴에서의 다윗.

[삼상 22:1-2] 그러므로 다윗이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자가 사백 가량이었더라

다윗에게 긍휼이 없었던들,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광야에서 400명을 거둘 수가 있었겠습니까? 압제 받은 , 빚을 , 원통한 , 억울한 자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한들, 어디 자랑거리나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다윗은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을 책임졌습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긍휼을 베풀었던 400명을, 하나님은 다윗의 용감한 군사로 만드셨고, 400명의 손으로 다윗의 생명을 지켜주셨고, 400명을 통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다윗의 거처를 광야의 동굴에서 이스라엘의 왕궁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사랑은 참된 사랑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랑의 출발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긍휼은 말로만 하는 것이거나 마음으로만 품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로 돕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발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십시다. 우리 성도끼리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세상에서 억눌린자 원통한 억울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십시다.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우리의 몸으로 긍휼을 나타내십시다.

그때,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긍휼의 사람이 것이요 우리 교회는 아둘람의 동굴처럼, 긍휼의 처소가 것이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것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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