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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복 5

마태복음 5 1-12

이제 팔복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각자의 사람들은 예수님께 오는 이유와 목적들이 다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병들 고치러, 어떤 사람들은 가난을 극복하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이 그저 좋아서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 목적을 가진 사람들을 주님은 더 깊은 교제, 더 깊은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산으로 그들을 데리고 올라가십니다.

산으로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위한 조건을 갖추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신에서 이삭을 받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그 믿음이 인정함을 받습니다. 노아는 산 위에서 구원의 방주를 짓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살다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명을 받습니다. 산으로 올라가는 것은 세상의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나와 단 둘이 교제하도록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잔뜩 가지고서는 산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빈 손, 빈 마음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임재와 대면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위해서 세상의 일을 잠시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 받습니다. 세상 것 다 하고, 세상것을 위해서 신앙 생활 하는 사람들은 세상것으로 인해 반드시 넘어집니다. 그러나 은혜 받기 위해 세상 것 잠시 내려 놓는 사람은 은혜도 받고 세상도 얻습니다. 온 우주 만물의 창조자, 주인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5 1절에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산으로 올라온 자들을 가리켜 예수님이 제자라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산으로 올라온 자들은 그 자체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세상의 만사를 제쳐두고 지금 예수님께로 올라온 자입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살 수가 없어서, 오직 예수님으로만 모든 삶에서 구원을 얻기에 지금 세상을 뒤로하고 예수님께로 나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 간절히 나온 자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압니다. 자신의 죄인됨과 연약함과, 내 힘으로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내 안의 사악한 죄성,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내 악한 감정, 내 행동, 내 생각, 말들그것이 주님과의 관계에 담을 쌓는다는 것을 알고, 그것 때문에 내가 말씀을 듣지 못함을 알고, 그것 때문에 내가 은혜 받지 못함을 압니다. 어떤 경우라도 내가 은혜 받지 못하고,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만물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한 것은 나의 죄, 나의 연약함, 나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께 나온 자들은 자신의 죄성,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남의 아픔이나 상처 때문에 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고 우는 사람입니다. 나의 허물과 욕망, 나의 더러움과 추함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자 입니다. 그래서 이 애통은 회개의 애통이고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위로를 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시고, 치유하시고,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애통함으로 자신을 비운 자들은 말씀으로 자신을 채워야 합니다. 온유는 말씀으로 자신을 길들이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 욕망, 자기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돌이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신앙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갖추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지 같은 왕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왕자로서 부르심은 받았는데, 오랜기간 동안 거지처럼 살아서 왕자의 매너, 왕자의, 품성, 왕자의 생각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법적인 자녀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자녀로서의 모습을 가다듬어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했을 때에 그들은 이미 법적으로 자유인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만나를 주심으로 그들을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연단하십니다. 그들을 말씀으로 길들이시는 것입니다. 그 후에야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 말씀으로 길들여진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곧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훈련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자기 의를 나타내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남들보다 말씀을 더 많이 알고, 남들보다 특출나게 신앙생활 했고, 남들보다 더 말씀을 지켰다고 말씀의 순종을 자꾸만 남과 비교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의만 드러내다가 하나님께 내침을 당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독사의 자식들아!”하며 자기가 노력했던 것의 하나도 칭찬듣지 못하고 꾸지람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남과 비교하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바로 보고 말씀을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정의가 자신의 삶에 드러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 안에 드러나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이 자신의 육신을 통해서 나오기를 갈망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갈망한 자는 배부를 것이라 말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말씀으로 채우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이 충만케 하겠다는 것입니다. 말씀 충만은 곧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결코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의 상태에서, 부족함에서, 연약함에서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왔는지 알기에 올바로 서지 못한 자들을 긍휼히 여깁니다. 긍휼은 받은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벌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오히려 따스한 손을 내미는 것이 긍휼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베푸는 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단순히 동정이나 불쌍한 느낌의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구체적인 행동이 긍휼입니다. 그래서 긍휼은 언제나 마음과 행동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이 하늘의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나의 모든 연약함과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금 하나님의 의로 채워주십니다.

그렇게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죄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모든 인간들 안에 스며있는 그 안의 보물, 그 안에 하나님이 심기운 값진 씨앗, 보화를 봅니다.

프란시스라는 유명한 성자가 날마다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후로 자기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누어 주고, 무너진 교회를 세우는데 열심이 특출한 자였습니다. 특히 그는 문등병자들을 잘 돌보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잘려고 하는데 밖에서 한 문등병자가 잘 곳이 없다고 하며 문들 두드립니다. 그를 데리고 들어와 따뜻한 음식을 먹이고 자신의 침대 밑에 자리를 내어주고 자라고 하는데 유난히 그 문등병자는 프란시스의 침대에서 자고 싶다고 이야기 합니다. 염치가 없어도 유분수지 얻어먹는 주제에 정말 염치도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문등병자들의 성자라 해도 침대까지 내어주는 것은 병에 걸릴 수 있는 위험이 그만큼 커지고 위험위험한 것이지요. 그래도 꽉 참고 그를 침대에서 재웁니다. 아침이 되니 언제 일어나서 나갔는지 그 문등병자는 온데간데 없습니다. 또 하루를 보내고 하나님께 또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다.” “내가 어제 너와 함께 머물지 않았느냐?”

헨리나우엔- 아담, 하버드 교수직을 내어 놓고 조그마한 정신 지체아 수용서에서 아담이라는 한 젊은이를 보살피면서 그 어느 곳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임재를 그 아담을 통해서 느꼈다고 기록하나님은 어느 때, 누군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방문하셨는데, 알지도 못하고 외면하고 모욕하면….

그러면서 지난 시간의 화평케 하는 자를 나누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은 팔복 중 일곱 번째의 복,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을 담고 있는 복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이루고 얻을 수 있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는 일은 평화를 만드는 자, 평화의 사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온전한 자녀, 온전한 천국의 왕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화평케 하는 것은 나 자신을 희생함으로, 포기함으로, 오직 순교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에 이룰 수가 있습니다. 분열은 왜 생기는가? 다툼이 왜 일어나는가? 내가 온전히 죽지 못해서 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결코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평화, 교회의 평화는 나를 희생함으로 얻는 유익이고 복입니다.

그래서 결국 결론으로 마지막 복으로 주신 말씀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하나님 뜻대로 사는데 왜 박해를 받나요? 하나님 뜻대로 살다가 박해를 받는데 그게 왜 복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본문에서도 신약 성경 곳곳에서도 하나님 뜻대로 살면 너희들이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2)

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성경은 온전한 신앙생활에는 곧 박해가 따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받는 박해인가? “나로 말미암아예수로 말미암아

어떤 박해? : 욕먹고, 핍박받고, 거짓으로 누명을 씌우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을 억압하는 나라는 중국을 포함하여 16개 나라입니다. 심각한 박해를 가하는 나라는 12위 라오스, 11위 에리트레아 10위 파키스탄, 9위 이라크, 8위 예멘, 7위 우즈베케스탄, 6.몰디브, 5.이란, 4.소말리아, 3.사우디아라비아, 2.아프가니스탄 1위가 북한입니다.

북한은 3년 연속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지하교회에서 숨어 신앙생활하는 사람들.. 평양 대 부흥 운동을 경험했던 세대들은 이젠 사라지고 그 후손들이거나 다른 지하 선교사들에 의해 신앙을 가진 사람들…. 주워 들은 이야기들을 통해 목숨을 걸고 지하에서 예배하는 사람들그런데 이제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이 점점 줄고 있다. 기독교인들마저 통일에 회의적이다. 그 곳에서 여젼히 북한에서의 신앙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목숨을 바쳐 기도하는 지하교회 성도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신앙인의 박해 중에 오로지 주님 때문에 받는 박해가 아닌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1)     자신의 죄와 허물, 실수, 지혜롭지 못해서 받는 박해.. –이건 자신의 죄값을 받는 것이지 신앙으로 인해 박해 받는 것이 아니다.

2)     자신의 성격, 고집, 잘못된 신앙관으로 받는 외면-

3)     자신의 신앙만 고집하다가 당하는 박해….

그리스도인의 박해는 세상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누구에게 가장 박해를 받느냐? 믿는 자들끼리 서로 박해한다? 이것은 박해가 아니지요. 이것은 정말 우리가 바로 서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가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끼리는 세상에서 핍박 받은 자들을 위로하고, 신앙으로 격려하여 다시금 신앙을 회복하여 세상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핍박 받은 자들이 새 힘을 얻고 돌아가는 곳이지 잘 믿지 못한다고, 바로 서지 못한다고 질책하고 꾸짓고, 잘못을 드러내고, 헐뜯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 긍휼히 여기고, 말씀으로 길들여지며 평화를 만들어가는 곳이 교회이지요.

 

요금 제가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서 여러 권면을 받습니다.

무엇보다 불세례 받고, 능력받고, 성령 충만 받으라는 소리를 들으면 불세례, 성령 세례의 모습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면 권능, 능력을 떠 올립니다. 병을 치료하는 능력, 귀신을 쫓는 능력, 방언을 주는 능력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 하면 떠 올리는 생각은 우리랑은 전혀 다른 신령한 사람, 초능력자 같은 능력자를 마음 속으로 그립니다.

실재로 많은 신학자들이 한국의 조용기 목사님 같은 능력 있는 목사님들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면 했던 말은 우선 그 앞에 서봐라. 병자가 낫고, 방언을 받으며, 불 같은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면 모든 신학, 도덕, 이론들이 다 필요 없고 오직 존경과 우러름만 남는다는 소릴 많이 했습니다.

물론 저는 방언도 하고 신유의 능력도 믿고, 통변도 믿고, 그리고 입신의 경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앙적으로 가장 소원하는 것은 그런 능력과 권능을 가지고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서 날마다 주님 없으면 못살기 때문에 기도로 아침을 시작하며 매일 같이 말씀 묵상하고 통독하는 것이고, 그 말씀이 내 성격도 고치고, 인품도 고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온전히 내 인격 가운데 드러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바라 보면서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그 사람이 그 성품을 찾고 개발하고 사용하도록 도와주고 기도하며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난 그것이 제자의 삶이라고 믿습니다.

신앙은 현실을 초월하지도 않고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고 현실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예배 시간에 집사님께서 하도 교회에 이단도 많고 잘못된 지도자도 많으니까 신앙생활하는 것도 이게 맞는 것인지 회의가 들 때가 있다고 하십니다.

올바른 신앙 생활은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내 삶도, 내 가정도, 교회도 온전케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결코 맹목적으로 가정을 희생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믿음을 보이면 하나님께서 가정을 지키신다고 하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면 나와 내 가정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신앙생활 하셔서 사회적으로, 물질적으로, 시간적으로 피해 많이 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시간에 다른 일 했으면 훨씬 더 유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 생활, 예배생활, 기도생활, 말씀 생활은 만복의 근원입니다. 모든 관계를 바로 잡아 주는 행복의 통로입니다. 결코 내 삶을 망치지 않습니다. 바로 가게 해줍니다. 온전한 자유를 누리게 해 줍니다. 진리를 알면 자유해 집니다. 세상 사람들이라면 포기했을 일도 인내할 수 있도록 이끌며 참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결국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나타나도록 우리를 단련시키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팔복의 말씀은 온전한 성도, 온전한 제자가 되기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천국의 통로이고 이 땅에서, 우리 로고스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매뉴얼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없으면 안됨을 알고 이 자리에 예배하러 나오신 분들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애통하며 회개했던 경험이 있던 분들입니다. 이제 이 교회가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도록 우리 스스로가 평화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 우리가 세상에서 당할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되 이 곳에서는 서로 붙들어주고, 용납해주고, 사랑하며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통치가 가득찬 로고스교회를 위해 의를 위하여 값지게 박해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해 받는 성도들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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